배신감.
그것은 타인에게 별 기대가 없는 내가 평소에 좀처럼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웃긴 일이었다. 재희는 그저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했을 뿐이었다. 이전까지 나는 내 정체성이 밝혀지는 데 별 거리낌이 없는 편이었다. 술만 들어가면 길바닥에서 남자와 키스를 하는 주제에 소문이 나지 않기를 바라는 게 웃긴다고 생각했다. 다만 나의 비밀이 재희와 그 남자의 관계를 위한 도구로 쓰였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누구든 떠들어대도 괜찮지만, 그 누구가 재희라는 것이 도저히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다른 모든 사람이 나에 대해 얘기해도 재희만은 입을 다물었어야했다.
재희니까. - P52

그렇게 한참 동안 의미 없는 메시지를 주고받다보면 갑자기 바람빠진 풍선처럼 모든 게 다 부질없어지곤 했는데, 그가 나에게 (어떤 의미에서든)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단지 벽에 대고서라도 무슨 얘기든 털어놓고 싶을 만큼 외로운사람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그런 외로운 마음의 온도를, 냄새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때의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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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파리의 경우 두 유전자풀 간에 느슨한 평형 loose equilibrium 이 존재하는 듯하다. 선택이 잡종을 솎아냄에 따라 외부 유전자는 사라지지만,
두 종을 격리하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의 어딘가에서 드문 커플들이 만나 짝짓기를 함으로써 좀 더 많은 외부 유전자들이 다시 침입한다. 르원틴과 버치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웠다. "초파리의 급속한 적응을이끌어내고, 전혀 새로운 물리적 · 적응적 지형으로 영역을 넓히도록 허용한 원동력은 바로 유전자침입 introgression이다."
이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르원틴과 버치는 실험실에서 한 가지 실험을 수행했다. 그들은 두 종의 초파리를 채집하여 실험실에서 교배한후, 춥거나 (20℃) 따뜻하거나(250) 뜨거운 (31.5℃) 배양기에 넣었다.
르원틴과 버치는 두 집단을 각각의 온도에서 2년 동안 진화하게 했다. 그 결과 새로운 집단이 진화한 것을 목격했는데, 새로운 종은 격리된 각각의 종보다 적합성이 뛰어난 결합품종combined strain 이었다. 급격하고 현저한 유전적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르원틴과 버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설사 본래의 잡종형성hybridization이 불리하더라도, 다른 종의 유전자가 유입됨으로써 적응적진화의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 단, 이러한 현상이 자연계에서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 P332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새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잡종형성은 극히 드물다고 생각되었다. 1965년 20세기 최고의 조류학자이자 진화학자 중한 명인 에른스트 마이어 Ernst Mayr는 이렇게 썼다. "무작위로 채집한 내표본들을 조사한 결과를 바탕으로 나는 6만 마리 중 한 마리의 야생 새가 잡종일 것이라 추정한다." 마이어의 추정은 오래되고 잘 정립된 종에 대해서는 옳을지 모른다. 하지만 젊은 계통들 사이에서는 이종교배가 더 흔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젊은 계통 사이에서 다윈이 말한 종의 제조공장manufactory of species이 아직 가동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리고그 과정은 진화에 중요한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 그랜트 부부는 이렇게 썼다. "잡종형성은 유전자변이는 물론 새로운 유전자조합을 만듦으로써 빠르고 중대한 진화적 변화가 일어나는 데 유리한 유전적 조건을창조한다."
- P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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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3층 에메랄드홀에 들어섰다. 하객이 400명이라고했다. 체감상으로는 그것보다 훨씬 더 돼 보였다. 나는 단상 근처의 지정석에 앉아 테이블을 둘러보았다. 불문과 동기들이 저마다 다른 속도로 늙은 얼굴을 하고서  앉아있었다. 근데 도대체 몇명이야. 재희가 그간 동아리 술자리며 학과 홈커밍데이 같은 데에 불러주는 대로 넙죽넙죽갔던 결과가 이것이로군. 이럴 때 보면 재희의 친화력은 징그러울 지경이었다. 나는 최소 5년에서 심하게는 10년만에 만난 동기들과 안부 비슷한 걸 나누었다. "너 작가됐다며, 축하해." "연락 좀 하고 살아라."  -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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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을 저술한 다윈만큼 이 문제를 설득력 있게 언급한 사람은 없었다. 다윈은 이렇게 썼다. "눈은 매우 정교한 장치로 다양한거리에 초점을 맞추고, 빛의 양을 조절하고, 구면과 색수차를 보정할수 있다. 이처럼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장치가 자연선택을 통해 형성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솔직히 내가 봐도 터무니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가 제시한 계통수를 전체적으로 들여다보면 (기본적인 광센서에 불과한, 신경 없는 색소세포 군집으로 이루어진) 홑눈simple eye에서부터 (망원경보다 더 인상적인 작업을 수행하는) 경이로운 인간의 눈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점진적 변화radiation를 찾아볼 수 있다."
‘독수리나 인간의 눈에 내장된 모든 정교한 장치는 지질학적 시간을 거치면서 점진적·단계적으로 일어난 진화의 결과이며, 각 단계는직전 단계보다 좀 더 선명한 시야를 제공한다‘라는 게 다윈의 생각이다. "우리는 각각의 신버전 장치에 백만을 곱해야 한다.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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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인상적인 문장으로 시작한다.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모두 제각각의 이유로 불행하다." 다시 말하자면, 행복한 가정에는 별 특징이 없다는 것이다. 부모는 돈을 벌어 자식들을 키우고 자식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뭐 그렇다. 만약 ‘행복한 가정 대회‘ 같은 게 열린다면, 그것처럼 따분한 일이 없을 것이다. 있을 것 대충 다 있고,
남 하는 거 다 하고 그러면서도 서로 불만도 없고, 애들한테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뭘 그런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듯, 자기 부모라고 대답하는 그런 가정. 그런 집은 차도 어쩐지 레저용 사륜구동일 것 같고 일요일이면 교회며 절이며 가족들이 오손도손 다녀올 것 같고 저녁이면 단란하게 일일 연속극을 보거나 가까운 식당에서 외식을 할 것 같다.
반면 불행의 이유는 정말 다양하다. 돈이 없어서, 성적으로 만족스럽지 않아서, 아이들이 공부를 못해서, 성격이 모나서, 누군가가 바람을 피워서, 시부모가 사사건건 끼어들어서, 정치적 견해가 달라서, 빚보증을 잘못 서서, 형광등을 못 갈아 끼워서, 잠잘 때 이를 갈아서…. 그밖에도 수많은 이유로 불행할 것이다. 그러나 행복은 거기에서 끝이지만 수만 가지의 불행은 『안나 카레니나』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대작을 만든다.
- P152

그러나 우주에는 지구와 안드로메다 성운만 있는 건 아니다. 그 사이에도 그 너머에도 수많은 별자리와 행성과 소혹성들이 나름의 빛을 발하고 있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선 엔진과 연료가 필요하다.
독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독서에도 일정한 훈련과 의식적인 노력이 분명히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노력은 분명한 대가를 받는다. 소설은 춤과 같아서 처음에도 즐겁지만 배우면 배울수록 더 큰 즐거움을 준다. 아는 작가가 많아지고 출판사나 번역자에 따라 책을 고르는요령들을 터득해감에 따라 취향은 분명해지고 만족감도 커진다. 처음에는 도대체 무슨 책을 사야 할지 알 수 없던 대형 서점이 자기 방 서재처럼 친숙해지는 순간이 온다. 동시에 소설을 읽는 목적도 달라진다. 감정이입을 통한 즉자적 수준의 감동보다는 텍스트 자체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형태로 바뀐다. 대중가요의 가사가 다 내 얘기 같다고 느껴질 때 흘리는 눈물도 소중하지만 음악 자체의 아름다움을 희롱할 수 있을 때, 나는 그가 진정으로 음악을 사랑하는 단계로,
그 음악을 통해 자신을 성장시키는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믿는다. 소설에서는 왜 그럴 수 없단 말인가. 소설 역시, 그래 이건 내 얘기야,
라는 단계에서, 이건 내 얘기가 아니지만 새롭고 탁월해, 라는 단계로 전이할 수 있다. 그 단계의 즐거움이 이전 단계의 즐거움에 비해월등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대단히 독특한 기쁨이라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P244

작가나 철학자와 같은 활자시대 스타들의 자서전은 점점 출간이 뜸해지고 있는 반면 디자이너나 사진가, 화가와 같은 이미지 시대의 스타들의 인생은 더 자주 전기문학의 소재로 등장할 것이다. 정치가와 부자들, 혁명가와 지식인들이 분점하던 전기의 카르텔은 조금씩 깨지고 있다. 이미지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더니, 그 예언은 어느새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 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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