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감.
그것은 타인에게 별 기대가 없는 내가 평소에 좀처럼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웃긴 일이었다. 재희는 그저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했을 뿐이었다. 이전까지 나는 내 정체성이 밝혀지는 데 별 거리낌이 없는 편이었다. 술만 들어가면 길바닥에서 남자와 키스를 하는 주제에 소문이 나지 않기를 바라는 게 웃긴다고 생각했다. 다만 나의 비밀이 재희와 그 남자의 관계를 위한 도구로 쓰였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누구든 떠들어대도 괜찮지만, 그 누구가 재희라는 것이 도저히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다른 모든 사람이 나에 대해 얘기해도 재희만은 입을 다물었어야했다.
재희니까. - P52
그렇게 한참 동안 의미 없는 메시지를 주고받다보면 갑자기 바람빠진 풍선처럼 모든 게 다 부질없어지곤 했는데, 그가 나에게 (어떤 의미에서든)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단지 벽에 대고서라도 무슨 얘기든 털어놓고 싶을 만큼 외로운사람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그런 외로운 마음의 온도를, 냄새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때의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 P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