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같은 날에는 군복을 입어야 했다. 엄마들은 언제나 군복이 빳빳하고 말끔하기를 바랐다. 그는 군복 재킷과 바지, 셔츠와 모자까지 모두 깨끗하고 빳빳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검은 군화는 어두운 거울처럼 빛났다. 과일 샐러드처럼 알록달록한 리본과 메달들은 조르르 열을 지어 단정하게 달려 있었다. 그 열에는 빈자리가 있었는데, 거기 달렸던 퍼플 하트 훈장‘을 떼어다가 아버지에게 달아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도 다리를 약간 절지만, 상태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마법의 약을 먹었으니까. 될 수 있는 한 그 생각은 안 하고 살았다. 흉터는 동양풍 용 문신을 새겨 전부 덮었다. 용의 꼬리가 감겨 있는 발목은 아직도 걸을 때면 시리얼처럼 바삭거리며 부서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는 말은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별거 아닌 일이니까. 우리또래는 저마다 비밀이 있는 법 아니던가. 비밀이랄 게 없는 옛날사람들이 정말 안타까울 뿐이다. 알고 보면 노인에게도 비밀이있을지 모르지. 그에게는 아이도 있었다. 히오와 마이라였다. 자식들에게 약한 소리를 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 P29

대단하신 엄마, 엄마는 슬리퍼를 들고서 법과 질서를 정했다. 그놈의 슬리퍼. 히스패닉계 애들은 모두 슬리퍼를 무서워했다. 수백만 명의 멕시코 엄마들은 성질이 나면 퉁방울 같은 눈을 부라리며 애들이 비명을 지르도록 팬다. 한쪽 팔로 애들을 잡고서다른 팔로는 볼기짝을 갈겨대는 것이다. 이럴 때마다 애들은 어떻게든 도망치려 하지만 엄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빙글빙글 맴돌며 춤을 추는 꼴이 된다. 엄마들은 볼기짝을 갈겨댈때마다 설교하듯 격식 있는 존댓말을 내뱉었다. "그대는 여기 대장이 누군지 알게 될 거예요!" 노부인들에게 볼기를 맞으면 모두 "그대"란 존댓말을 듣게 된다. 그러다 불쌍한 애들이 탈출이라도하면, 엄마들은 유도 미사일을 쏘듯 슬리퍼를 던져서 애 뒤통수를 정확히 맞히는 것이다.
"훈련소 조교보다 더 심하고말고."
그는 옛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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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부가 러시아의 몽골 병합 요구를 거절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쑨원을 몹시 쓸모 있다고 여긴 모스크바는 그와 손을 잡기로 결정했다. 수도 베이징에서 외교 임무에 성공하지 못한 요페는 상하이로 가서 쑨원과의 거래를 성사시켰고, 1923년 1월 26일 이를 공표했다.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을 비롯한 소비에트 지도자들이 요페의 보고서를 두고 토론을 벌였다. 요페는 상관들에게 쑨원이 "우리 사람"(원문 강조)이라고 말했다. "이 정도면 200만 루블 금화 값어치가 있지 않습니까?"
소비에트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회의를 통해서 쑨원에게 매년 200만 루블 금화를 지급하는 안건을 통과시켰다. 쑨원으로서는 1917년 독일로부터 받은 지원금에 이어 두 번째로 받은 거액의 해외 후원금이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일시적인 후원이 아니었다. 소련은 앞으로 계속해서 쑨원을 전방위적으로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확실히 보장된 막대한 수입을 등에 업은 쑨원은 광저우를 탐내던 인근 여러 성의 지도자들을 설득하여 광저우로 쳐들어가게 했다. 광저우를 산산조각 낼지도 모르는 전쟁을 할 마음은 없던 천중밍은 사임한 후에 도시를 떠났다. 2월이 되자 미래의 국부는 의기양양하게 광저우로 돌아와서 또다시 별도의 정부를 세웠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의 앞날이 어느 때보다도 밝아 보였다.
스탈린의 지명으로 미하일 보로딘이 쑨원의 정치 고문에 임명되었다.  - P147

 각 성의 지도자들의 세력이 강해지고 자신감도 커짐에 따라서, 그들 가운데 몇몇은 주변 세력과의 분쟁에 무력을 동원하기도 했다. 베이징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전쟁을 일으킨 자들도 있었다. 이후 이들에게는 ‘군벌(軍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쑨원은 군대를 보유하고 광저우를 점령한 상태였음에도 군벌로 분류되지 않았다. 모든 군벌들은 선거로 선출된 베이징 정부를 인정했다.
신문 기사에서는 군벌들 간의 갈등을 상세히 보도했다. 기사만 보면 온나라가 극심한 혼란에 빠진 듯했다. 그러나 사실 다툼은 잦지 않았고 규모도 작았으며, 충돌이 발생했다고 해도 며칠을 넘기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군벌들이 싸우는 방식은 서양인들의 눈에 자못 무성의해 보였다. 회색 군복을 입은 군인들은 대열을 맞추어 전장에 와서 조금 기다리다가, 이내 아무렇게나 총을 몇 발 쏘았다. 이따금 대포가 큰 소리를 내며 발사되었지만 표적을 맞추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사상자도 적었다. 일부 부대에서는 관을 나르는 일꾼을 고용했는데, 이는 전사하더라도 제대로 된 절차에 따라서 묻어주겠다며 병사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용도였다(중국인들에게는 극히 중요한 문제였다), 병사들은 조그마한 찻주전자와 기름을 먹인 종이우산 등 갖가지 생활용품을 들고 왔고, 비가 한 방울이라도 내릴 것같으면 교전을 멈추고 재빨리 우산을 폈다. 전장은 금세 알록달록한 버섯으로 뒤덮인 들판으로 변했다. 이들이 바로 나중에 소련식 훈련을 받은 쑨원의 정예 부대와 대적하게 되는 병사들이었다. - P150

소련의 뜻에 따라서 보로딘은 쑨원에게 몇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광저우를 떠나기 전에 "제국주의(즉 서구 열강)를 타도하자!" 등의 구호가 담긴 성명서를 발표할 것, 그리고 가는 곳마다, 특히 수도 베이징에서 공개적으로 서구 열강을 비난할 것 등이었다. 쑨원이 소련의 후원을 받고 있음을드러내라는 뜻이었다.
쑨원은 정해진 기일에 맞추어 요구받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는 소련의 공산주의의 구호들을 주워섬기면서 보로딘과 함께 11월 13일에 광저우를 떠나 17일에 상하이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 그곳에서 기차를 타고 40시간을 달려 북중국의 주요 항구이자 상업 중심지인 톈진에 당도했다. 수도 베이징이 지척이었다. 하지만 쑨원은 여기에서 멈추었고, 곧장 베이징으로 가는 대신 일본으로 떠나 13일간 머물렀다.
베이징으로 향하는 내내 쑨원은 이해득실을 따져보았다. 보로딘은 그에게 ‘반제국주의‘ 논조를 철저히 고수하라고 요구했다. 쑨원 자신은 그동안 서구 열강을 유독 강하게 비난해왔고, 특히 상하이에서는 (자신이 상하이에 있을 때면 늘 외국 법의 보호를 받기 위해서 조계지에서 머무르고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집권과 동시에 조계지들을 폐지하겠다고 위협했다. 가는 곳마다 소련식 집회의 인파가 외세를 몰아내자는 구호를 외치며 그를 맞이했다. 그가 서구 열강 전부를 적으로 돌리고 오직 소련에만 의지하는 처지가 되어가고 있음은 누가 보아도 명백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은 대중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국민당 당원의 대다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쑨원이 소련 측 사람으로 비친다면 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국민당 당원들도 그를 멀리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계속 보로딘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가는 (소련의 돈을 받는 기독 장군 펑위샹이 아무리열심히 그를 지지한다고 해도) 대총통직을 거머쥘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가까스로 대총통이 되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리에서 쫓겨날지도 몰랐다. 그러나 보로딘의 요구를 거스르는 일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소련 측에서 자금을 지원하고 그의 군대를 무장시켜 지휘까지 하고 있었다.
쑨원은 꼼짝없이 빚을 진 신세였다. 그에게 남은 유일한 대안은 또다른 강력한 후원자를 찾는 것이었다. 쑨원은 다시 한번 일본을 떠올렸다. - P154

쑨원은 볼셰비키가 아니었다.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사후에도 소련이 필요했을 뿐이다. 오직 그들만이 쑨원이 원하는 방식으로 그를 불멸의 존재로 만들어줄 수 있었다. 소련은 쑨원의 정당인 국민당에 권력을 쥐어줄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쑨원 개인을 숭배하는 풍조를 만들 수 있는지 당원들에게 가르칠 것이었다. 쑨원은 일찍이 칭링을 통해서 국민당에자신의 의사를 전했다. "나의 벗 레닌의 본보기를 따라서 내 시신을 방부처리하여 레닌이 안치된 것과 같은 관에 넣어주기를 바란다."
레닌은 쑨원보다 1년 앞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서 특별제작된 유리관에 안치되었다. 몇 주일 만에 수십만 명의 인파가 줄지어 레에게 경의를 표했다고 했다. 개인숭배 풍조가 소련을 휩쓸었고, 레닌은신적인 존재로 격상되었다. 레닌을 그린 초상화와 포스터, 흉상은 사무실에서 교실, 거리에서 공원에 이르는 모든 공적인 장소에서 반드시 구비해야 하는 물품이 되었고, 시종일관 레닌이 전지전능한 구원자라는 신호를주입했다.
쑨원은 이것이 바로 자신이 원하는 사후 모습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가 사망한 뒤에 소련 측은 정말로 그를 위해서 레닌과 같은 유리관을 만들어주었다. 유일한 흠은 그 관에 사용 불가 판단이 내려졌다는 점이었다. 관을 감싼 유리 덮개는 여름철 난징의 열기에 부적합했다. 쑨원의 시신이 레닌처럼 전시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쑨원의 다른 희망 사항들은 충실하게 성취되었다. 국민당은 즉각 레닌식 개인숭배 사업을 시작했다. ‘중국의 국부‘라는 칭호가 처음으로사용되었다. 이후 몇 년간, 특히 국민당이 중국을 장악한 뒤에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쑨원의 이름을 내세워야 했던 1928년에 쑨원 숭배는 전대미문의 수준에 도달했다. 그의 모습을 본뜬 조각상이 시내에 세워졌고, 그가 한 말이라면 아무리 진부해도 경전의 말씀처럼 여겨졌다. 쑨원에 대한 불경한 발언은 한마디도 허락되지 않았다. 소련의 가르침을 받은 국민당의 선전 공작원들은 쑨원을 ‘중화민족의 해방자‘, ‘중국의 5,000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심지어는 ‘모든 억압받는 민족의 구원자‘라고 칭했다. 훗날 마오쩌둥은 자기 자신에 대한 개인숭배 풍조를 조장할 때에 이말들을 그대로 차용했다. - P163

쑨원 숭배의 가장 큰 상징물은 그의 무덤인 중산릉(中山陵)이었다(중산은 쑨원이 일본에 체류하던 시기부터 즐겨 쓴 별명이다/옮긴이), 죽기 전에 쑨원은 자신이 묻힐 장소를 지정해두었다. "난징의 쯔진 산이어야 한다. 임시정부가 탄생한 곳이 난징이기 때문이다." 난징 임시 정부는 쑨원이 40일이나마 ‘임시 대총통‘의 지위를 누린 유일한 정부였다. 쯔진 산은 마지막 한족 왕조인 명조를 건국한 황제 주원장이 묻힌 곳이기도 했다. 주원장에게 경쟁심을 가지고 있던 쑨원은 자신의 무덤을 주원장 옆에 쓰되 그보다 훨씬 더 크고 웅장하게 만들라고, 그리고 "누구도 더 높은 곳에 무덤을 만들지 못할 위치에 두라고 단단히 일렀다.
주원장의 묘는 면적이 170만 제곱미터로, 중국 황제의 무덤으로서는 가장 큰 규모에 속한다. 국민당이 조성한 쑨원의 묘는 그보다 90미터 더 높으며, 계단이 392개이고, 면적이 3,000만 제곱미터가 넘어 쯔진 산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주변의 마을들이 철거되었고, 주민 수천 명이 집과 땅을 정부에 팔도록 강요받았다. 주민들은 절박한 마음으로 탄원했다. 그들은 "보금자리를 잃고 오갈 데 없이 길바닥을 전전해야 했다. 차라리 집과 함께 묻히겠다며 자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묘지를 확장한다는 공고는 계속 이어졌고, 그때마다 "집을 잃게 된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부모를 잃은 것처럼 극도의 공황에 빠졌다. 천지신명께 비는 것 말고 그들이 의지할 곳은 없었다." 탄원을 올린 이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불행이 천하위공(天下爲公) 정신에 모순된다고 항의했다. 오늘날까지도 쑨원의 좌우명으로 알려진 그 말은 "하늘 아래 모든 것은 백성들을 위한 것이다"라는 뜻이었다. 국민당 관료들은 단지 이렇게 대꾸했다. 국부를 위해서 "당신들은 가진 것 전부를 희생함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야한다."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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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엔젤의 마지막 토요일

빅 엔젤은 어머니의 장례식에 지각했다.
그는 침대에서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발에 침대 시트가 이리저리 감겨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깨닫자 옆구리에서 땀이송송 솟았다. 해가 중천이었다. 가늘게 뜬 눈꺼풀 사이로 빛이 환했다. 온 세상이 분홍빛으로 타오르고 있다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먼저 가 있을 것이다. 안 돼. 이러지 마. 오늘은 안 된다고. 그는 일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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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링은 쑨원의 개인적인 행실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행보에도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아이링과 쿵샹시 모두 쑨원이 위안스카이에 맞서서 일으킨 전쟁에 심한 거부감을 느꼈다. 쑨원이 쑹자오런의 암살을 빌미로 전쟁을 일으키자, 쑹자오런을 열렬히 따랐던 쿵샹시는 쑨원에게 위안스카이가 암살의 배후라는 증거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쑨원은 심증만 있을 뿐물증은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쿵샹시는 넌더리가 났다. 훗날 구술한 바에 따르면, 그는 쑨원이 벌인 일이 중국보다는 일본의 이익에 부합한다고생각했다. 몇몇 "일본 단체들은 중국에 분란을 일으키기 위해서 쑨원 박사를 돕고자 했소. 황도파 청년 장교들은 중국을 정복하고 싶어했지. 그들은 중국을 분열시킬 목적으로 쑨원 박사를 지원하려고 했다오...나는 일본이 쑨원 박사를 이용하고 있다고 느꼈소." 쿵샹시는 쑨원에게 "일본인들에게 이용당할 위험"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경고했고",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나는 중국의 분열을 막고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위안스카이와 쑨원 박사가 협력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소." 쿵샹시는 쑨원의 독단적인 태도도 싫어했다. 전쟁에 패배해서 일본으로 돌아온 뒤에 쑨원은 자신이 일으킨 전쟁을 지원하는 데에 소극적이었다는 이유로 국민당을 없애고 중화혁명당(中華革命黨)이라는 새로운 정당을 조직하려고 했다. 그러면서 새 정당의 당원들에게는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겠다고 맹세하라고 요구했다. 쿵샹시는 경악했고, 쑨원 무리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한 친구는 이렇게 적었다. 쿵샹시는 "절대로 혁명 세력과 어울리지 않았다. 몇번의 제의가 있었는데도 말이다." 사실 쿵샹시는 혁명 세력을 "경멸했고", "[위안스카이] 정권을 충실히 지지했다. 그 결과 중국인 학생들 사이에서 평판이 나빠지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쿵샹시와 같은 생각이었던 아이링은 슬그머니. 그러나 확실하게 쑨원과 멀어졌다. - P112

1915년 여름, 상하이로 돌아간 칭링은 쑨원과 결혼하겠다며 부모에게 허락을 구했다. 쑹씨 부부는 아연실색하며 절대 안 된다고 반대했다. 반대하는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엄청난 나이 차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쑨원은 마흔여덟인 반면에 칭링은 고작 스물을 갓 넘긴 나이였다. 칭링 또래의 건실한 기독교인 청년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그중 영씨니 단씨니 하는 몇몇은 쑹씨 자택에도 자주 드나들었다. 많고 많은 신랑감들 중에서 왜 하필 쑨원이란 말인가? 쑨원의 아내가 도쿄에서 교통사고로 크게 다쳤을 때, 그곳에 갈 필요가 없다고 차갑게 대꾸한 쑨원의 모습을 쑹자수가 잊었을 리 없었다. 쑨원은 열정적인 혁명가일지는 몰라도 좋은 남편감은 아니었다. 그러나 쑹자수가 가장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은 쑨원에게 이미 아내와 자식들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쑨원이 아내와 이혼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그가 "어려운 시절을 함께한 데다가 칭링보다 나이가 많은 아이들을 키운 조강지처마저 저버릴 인물"이라는 방증일 터였다. 반면 그가 이혼하지 않는다면 칭링은 본처가 아닌 첩실이 되는 셈이었고, 이는 그녀 자신과 가족에게 수치스러운 일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교리를 위반하는 행위였다. 이전에 쑨원에게 보낸 편지(칭링이 쑨원의 애를 태운답시고 위안스카이의 후궁이 되겠다고 한 말을 해명하느라 보낸 것이었다)에서 쑹자수는 이렇게 단언했다. "우리는 기독교 집안이라네. 우리 딸들 중 누구라도 남의 첩실이 되는 일은 없을 걸세. 딸을 데려가겠다는 사람이 왕이든, 황제든, 세상에서 가장 큰 나라의 대통령이든 말이야." 쑹자수는 딸 칭링도 "첩살이하는 여자하고는 말도 섞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칭링은 설령 가족의 친구일지라도 누군가의 ‘첩‘에게는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큰언니 아이링도 칭링의 결혼을 말리다가 칭링의 화를 돋우었다. 서로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맞서다가 칭링이 실신하는 일도 있었다. 칭링은 위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옮겨졌고, 가족은 그녀의 방문에 자물쇠를 달았다. 이후 수주일이 지나도록 힘겨운 줄다리기는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칭링이 상하이에서 가족들을 설득하느라 고전하는 동안, 쑨원의 아내는 이혼 문제를 상의하자는 남편의 초대에 응하여 9월 일본에 도착했다. 오랜 세월 가족을 부양해온 쑨원의 형 쑨메이가 그해 초 예순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터라 루무전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쑨메이는 루무전과 그녀의 아이들을 진심으로 걱정해주던 사람이었다. 그런 소중한 사람을 잃은 충격에 비하면 애초부터 가정에 충실하지 않았던 쑨원의 이혼 요구는 별것도 아니었다. 루무전은 그후 마카오의 집으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40여년을 더 살았다. 루무전과 쑨원이 다시 만나는 일은 없었다. - P118

쑹자수가 일본 정부까지 찾아가서 쑨원을 비난했다는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큰 충격에 휩싸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때 그는 쑨원이 결코 "친구를 기만하지 않을" "고결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이제 그 믿음은 그의 우상에 의해서 처절히 짓밟혔다. 쑹자수는 오랜 선교사 친구인 빌 버크에게 털어놓았다. "빌, 내 평생 이렇게 상처받은 적이 없네." 쑹자수는 죽을때까지 쑨원을 용서하지 않았다. 아이링 부부가 지켜본 바에 따르면, 쑹자수는 쑨원과 "완전히 갈라섰다.•••••• 옛 친구는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 P121

쑨원은 뤼위안훙 정권을 겨냥한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그에게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1917년초. 미국은 독일과 외교를 단절하고는 중국에도 똑같이 할 것을 요구했다.
오랜 기간 중국의 우방이었던 미국은 연합국 편에 가담하면 이득이 더 많을 것이라고 중국을 설득했다. 이 문제를 두고 국회에서는 몇 주일 동안이나 공방이 이어졌다. 연합군 측과 독일의 장관들이 방청석에서 추이를 지켜보았다. 3월 10일 중화민국 국회는 독일과의 외교관계를 끊는 안건을통과시켰다. 독일에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당시 독일은 단교 논의를 무산시키기 위해서 의원들에게 치열한 로비를 벌였는데, 그중에서도 가장선봉에 서서 연합군 측에 가담하자고 주장했던 전직 군인이자 현 국무총리 돤치루이에게 특히 공을 들였다. 독일은 돤치루이에게 사적으로 100만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위안스카이의 총애를 받았던 돤치루이는 그가 황위에 대한 꿈을 접게 만드는 데에도 중요한역할을 했다).
독일의 목표는 돤치루이를 제거하고 단교 결정을 뒤집는 것이었다. 독일은 쑨원의 연락책 차오야보를 통해서 쑨원과 비밀리에 접선했다. 상하이 주재 독일 총영사 헤르 크니핑은 쑨원이 적극적으로 협력 의사를 밝히면서 "200만 달러를 요구했다"고 베를린에 알렸다. 독일 총리가 이를 최종승인함으로써 쑨원은 150만 달러어치의 멕시코 은화(당시 중국에서 통용되던 통화 중 하나였다)를 손에 넣었다." 쑨원이 외국으로부터 처음 받은거액의 후원금이었다. - P129

쑨원은 즉각 베이징 정부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자신의 무기를 가지고 입대한 병사들에게는 매달 15위안, 그렇지 않은 병사들에게는 매달10위안이 지급되었다. 독일로부터 받은 돈은 금세 바닥이 났다. 대원수 쑨원은 세금을 거둘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광저우 시 정부는 돈을 넘기라는그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쑨원은 또다시 막말을 쏟아붓더니 시청사를 포격하라고 해군에 명령했다. 해군이 거절하자, 쑨원은 배에 올라서직접 대포를 발사했다. 쑨원의 행동은 청비광의 분노를 샀고, 둘의 사이는멀어졌다. 머지않아 쑨원의 옛 친구였던 그는 부둣가 어딘가에서 총을 맞고 죽었다. 이 사건을 포함하여 여러 암살 사건에 깊숙이 간여했던 쑨원의한 심복의 말에 따르면, 쑨원의 비서 주즈신이 이 일을 맡아서 처리했다고한다. 훗날 쑨원은 청비광의 죽음이 "명령 불복에 따라서 처형된 것"이라고 표현했다.
의원들은 이처럼 강압적인 ‘독재‘에 겁을 먹었다. 쑨원과 엮인 것을 후회하던 그들은 그를 쫓아낼 방법을 찾았다. 선거를 통해서 대원수 직위를 폐지하고 쑨원을 포함하여 7명으로 구성된 집단 지도 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그들은 쑨원이 지도권을 다른 사람과 나누려고 하지 않으리라고 계산했다. 예상대로 쑨원은 즉시 사임하고 1918년 5월 21일 광저우를 떠났다. 그가 대원수직에 있었던 시간은 채 1년이 되지 않았다. - P131

대총통 쉬스창은 광저우 정부에 평화와 통일을 제안했고, 사람들이 이에 호응하면서 주요직책을 맡았던 많은 이들이 광저우를 떠났다. 쑨원은 광저우로 돌아와서 대총통 쉬스창으로 표적을 변경하여 전쟁을 이어갈 계획을 짰다. 그는 권력이란 오직 총구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1919년 민족주의를표방한 5-4 학생 운동이 일어났을 때(중국 역사상 획기적인 사건이라고평가받는다), 몇몇 젊은이들이 쑨원을 찾아와서 조언을 구했다. 쑨원은 그들의 운동에는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단지 이렇게 말했다. "베이징정부를 처리하는 데 총 500자루를 주겠네. 자네들 생각은 어떤가?" 그는 독일에 3개의 사절단을 파견하여 중국에 쳐들어와서 베이징을 공격하라며 독일군을 설득했다. 독일인들은 쑨원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는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를 통해서 일본 쪽에도 도움을 요청했다. 베이징 정부와 싸우는 자신을 지원해주면, 일본에게 만주와 몽골을 넘기겠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그의 간청을 무시했다. - P135

 문제는 성을 통치할 권한이 없는 일개 장교인 그의 말을 아무도 듣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천중밍은 쑨원을 떠올렸고, 쑨원의 이름을 빌려서 자신의 목표를 이룰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기회를 포착한 쑨원은 천중밍으로 하여금 광저우를 장악하게 했고, 자신은 1920년 11월에 광저우에 도착했다. 천중밍은 곧 쑨원을 끌어들인 것을 후회했다. 쑨원의 목표는 천중밍 자신의 목표와는 정반대였다. 쑨원은 광저우를 기지로 삼아서 전쟁을 벌이고, 중국 전역을 지배하고자 했다. 곧바로 치열한 기싸움이 이어졌지만, 이방면에서 장교 천중밍은 쑨원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쑨원은 곧바로 베이징과 대적할 또다른 정부를 설립했다. 그리고 고작 대원수밖에 되지 못했던 1917년과 달리 이번에는 스스로를 "중화민국 대총통"이라고 선언했다. 1921년 4월 7일의 일이었다. 그렇게 국부 쑨원은 중국을 반으로 갈라놓았고, 적법하게 선출되었으며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은 정부에서 이탈하여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했다. 다른 어떤 성에서도 벌어지지 않은 일이었다. - P136

1 922년 5월, 쑨원은 대총통 쉬스창을 몰아내기 위한 북벌을 개시했다. 쉬스창이 선출되었을 당시 전체 22개 성 가운데 5개 성이 선거에 참여하지않았다는 것이 그의 명분이었다. 전쟁을 다시 치르고 싶지 않았던 쉬스창은 쑨원과 자신이 동반 사퇴하고 새로 전국 선거를 시행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여 중요한 외교 안건 하나를 마무리한 직후 사표를 제출했다. 당시 산둥 성의 일부 지역을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 일본이 점령하고 있었다. 중국은 1919년 열린 전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이 지역을 되찾아오는 데에 실패했고, 이 때문에 같은 해에 민족주의 경향의 5-4학생 운동이 촉발된 바 있었다. 쉬스창 정권은 노련한 교섭으로 일본을 압박해서 1922년 영토를 성공적으로 반환받았다. 6월 2일 조약 비준서에 서명을 마친 대총통 쉬스창은 그날 아침부로 사직서를 제출했고, 오후에는 수도를 떠났다(이 외교상의 승리는 그동안 역사책에서 의도적으로 지워져왔다).
쉬스창이 그토록 쉽게 대총통직을 포기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쑨원은 경솔하게도 그와 함께 사퇴하겠다고 이미 공표한 상태였다. 그에게 약속을 지키고 전쟁을 멈추기를 요구하는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쑨원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듯이 굴었다. 오랫동안 평화를 갈망해온 장교천중밍과 그의 군대는 넌더리가 나서, 더 이상 쑨원 편에서 싸우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고는 언론에 공식적으로 사퇴를 발표하라고 쑨원에게 요구했다. 6월 12일 쑨원은 기자회견을 열고 천중밍의 군대에 대해서 여느 때처럼 신랄한 비난을 늘어놓았다. 그는 위협하는 어조로 이렇게 선포했다.
"사람들이 말하길 쑨원은 ‘대포‘(大砲: 허풍을 심하게 치는 사람)라고 하던데, 이번에야말로 진짜 대포가 뭔지 한번 보여주겠소. 8인치 대포로 독가스를 살포할 거란 말이오... 그러면 천중밍이 거느린 60여 개의 대대는 세 시간 안에 가루가 될 거요.  - P137

6월 16일 자정에서 한 시간쯤 지났을 때, 천중밍의 군대가 새벽녘에 총통부를 공격할 것이라는 경고가 날아들었다. 쑨원은 이곳을 탈출해야겠다고 결정했다. 그는 하얀 여름용 면옷을 걸치고 선글라스를 쓴 뒤 1급 비밀 서류만 지닌 채 평상복을 입은 경호원 몇 명과 함께 관저를 떠났다. 언덕을 내려오면 바로 광저우의 대로변이었다. 그곳에서 쑨원 일행은 인력거를 잡아타고 근처 항구로 갔고, 다시 모터보트를 빌려 쑨원에게 충성하는 포함砲艦)으로 이동했다. 기껏해야 한 시간 반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 내에, 쑨원은 안전해졌다. 아내는 데려오지 않은 채였다.
날이 샐 무렵, 대총통이 이미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천중밍의 군대가 관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칭링이 아직 총통부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50명 남짓한 쑨원의 경호원들은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 격렬히 맞서 싸웠다.

쑨원이 떠나기 전 칭링은 자신이 남아서 그가 탈출하지 않은 것처럼 위장하겠다고 자원했다. 칭링이 사건 직후 상하이의 한 신문에 기고한 바에 따르면, "여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그이에게 불편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 당장은 나를 두고 가라고 그이를 설득했다." 다른 자리에서 털어놓기로는 남편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고도 했다. "중국에 나는 없어도 괜찮지만, 당신이 없으면 안 돼요." 사랑의 힘으로 그녀는 남편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 P138

칭링은 도망치는 와중에 아이를 유산했다. 그리고 다시는 임신할 수 없을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칭링은 충격으로 무너져내렸다. 그녀는 아이를 간절히 원했다. 이때의 고통은 칭링의 인생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후 가까운 친구들은 아이를 낳는 이야기만 나오면 칭링이 "상처받은" 표정으로 "화제를 돌리려고" 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녀의 반응은 "거의 병적인 수준"이었다.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은 훗날 그녀의 행동을 뿌리째 좌우하게 되었다. 유산 직후에 그녀는 충격을 받은 나머지 자신이 겪은 일의 기록에서 유산 이야기를 빼버렸다. 고통이 아직도 너무나 생생했다. 여동생 메이링의 친구 에마 밀스는 칭링의 괴로운 마음을 알아챘다. 당시 상하이에 머물렀던 그녀는 칭링이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농촌아낙네와 같은 옷을 입고 상하이에 내리는 모습을 지켜본 뒤에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조그맣고, 가냘프고, 몹시 창백했다. 살면서 그토록 쓸쓸한 형상을 본 적이 없었다." (밀스는 저녁 식사 때까지 함께했고, 칭링의 옷을 몇벌 짓기 위해서 들른 재단사와 메이링이 상의하는 것을 거들었다.
결국은 칭링도 남편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를 깨달았다. 그녀는 거의 죽다 살아났고, 아이를 유산했으며,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쑨원이 자기 자신의 탈출을 감추기 위해서 그녀를 이용했다는것까지는 칭링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적의 공격을 유도하기 위해서그녀를 죽을지도 모르는 자리에 밀어넣은 것은 도가 지나친 일이었다. 어떤 여자라도 이런 짓을 당했다면 사랑이 식었을 것이다. 쑨원을 향한 칭링의 사랑 또한 이 시련을 견디지 못했다. 훗날 칭링의 친구인 미국인 기자 에드거 스노가 그녀에게 쑨원과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되었냐고 물었을때, 스노가 녹음한 그녀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난 사랑에 빠진 게 아니었어요." 칭링은 천천히 말했다. "먼 발치에서 영웅을 숭배한 거였죠. 그를위해 일하겠노라고 도망친 건 소녀들이 하는 낭만적인 발상이었고요..
나는 중국을 구원하고 싶었고 쑨원 박사는 그걸 해낼 수 있는 분이었으니, 그를 돕고 싶었던 겁니다." - P142

사랑이 남뿍 담긴 그녀의 편지들이 전하는 이야기는 그녀의 대답과 사뭇 다르다. 칭링은 분명 사랑에 빠졌었다. 다만 온 마음을 바쳤던 사랑이이제 죽고 없을 뿐이었다. 콩깍지가 벗겨지면서 칭링은 남편의 추악한 면을 보게 되었다. 그는 그녀 자신보다 더 좋은 사람도, 더 고결한 사람도 아니었고, 그녀의 희생을 누릴 자격도 없었다. 쑨원을 향한 칭링의 열정은 사라졌고, 무관심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를 떠날 마음은 없었지만, 그와 ‘거래‘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칭링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정확히 파악했다. 바로 남편의 정치적 동반자로서 공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남편과 손님들이 토론을 벌이는 동안 뒤편에서 타자나 치는 비서 노릇은 더이상 원하지 않았다. 앞으로는 그녀도 토론에 참여할 것이었다. 그리고 공식 석상에서 남편과 나란히 설 것이었다. 과거에도 이런 요구를 했지만, 지도자의 아내가 모습을 드러내는 데에 대중들이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기각당했다. 그러나 이제 칭링은 원하는 바를 얻어내기로 작정했다. 그녀가 상하이 신문에 자신의 탈출기를 기고한 것은 아마 쑨원과 그의 동료들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보여주고, 자신이 이 정도는 요구할 자격이 있다는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한편 쑨원은 광저우에 화력을 쏟아붓고서도 그곳을 되찾지 못했다. 그는 8월에 상하이에서 아내와 다시 만났고,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 P143

이때부터 칭링은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대중 앞에 나타났고, 독자적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그녀의 활동을 기점으로 지도자의 배우자가 공인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녀는 9월 15일 미국의 친구 앨리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큰 부탁 하나 해도 될까?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의 명함이 좀 필요해. 지금 당장 티파니나 각인 잘하는 가게에 200장을 주문해줄 수 있겠니? 깔끔하면서도 멋진 디자인으로 골라주면 좋겠어. 명함에 이름은 그냥 쑨원 부인(Mrs SUN YAT-SEN)으로 해주고."
나중에는 ‘부인‘이라고만 칭하는 것이 국부의 배우자에게는 부족하다고 여겨져서 프랑스식 존칭인 ‘마담‘이 이를 대체했다. 그리하여 칭링은 마담쑨원(Mme Sun Yat-sen)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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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의 유지를 받들어, 같은 생각은 해본 적 없었고 애당초 유지라는 게 있지도 않았으며방역업을 시작한 뒤로 삶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 아닌 현재멈춤형이었다. 그녀는 앞날에 대해 어떤 기대도 소망도 없었으며 그저 살아 있기 때문에, 오늘도 눈을 떴기 때문에 연장을 잡았다. 그것으로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확인하지않았고, 자신의 행동에 논거를 깔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살아남으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일찍 죽기 위해 몸을 아무렇게나 던지지도 않았다. 오로지 맥박이 멈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움직이는 것은 훌륭하게 부속이 조합된 기계의 속성이었다. 류를 가끔 떠올렸고 그가 생전에 주의를 준 사항들에 자주 이끌렸지만, 제 몸처럼 부리던 연장으로 인해 손바닥에 잡힌 굳은살과도 같은 감각 외에는, 류를 생각하면서 온몸이 뻐근하게 달뜨고 아파오는 일이 더 이상 없었다. 그녀는, 나이 들어가고 있었다. - P264

"그런데 말입니다."
뭔가 망설이는 듯한 강박사의 목소리가 그녀의 뒷덜미를잡아당긴다.
"그렇다고 해서 후회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 말은 그녀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자신이 돌아버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 같은 중얼거림에 가깝지만, 그녀는 지금 그 떨떠름한 한마디로 무저갱에서 건져진 것 같다.
"압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 이것이어서, 고개를 돌리고걷기 전 흘끗 본 얼굴이 증오보다는 처절한 슬픔이 고조된간절함으로 빚어져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적어도 그 표점을 다르게 그려줄 가능성이 남아 있으니. - P282

나가기 전에는 언제나처럼 잊지 않고 프로젝트 창의 잠금장치가 걸려 있지 않은지 확인하며, 현관을 닫고 그녀는 생각한다. 이번 일만 끝나고 날씨가 풀리는대로 녀석에게 산책을 좀 더 자주 시켜줄 것이다. 보통의 노부인과 하나도 다를 바 없이 목줄에 개를 끌고 다니고, 조금만 가면 사람이 개를 끄는지 개가 사람을 끄는지 모를 만큼 빨라지는 걸음을 바삐 쫓아가며, 역시 개를 산책시키는 다른 이들과 눈인사도 나눌 것이다. 동네의 다른 개들도 만나게 해주고, 서로 눈 마주치게 놔두어 탐색의 시간을 줄 것이다. 어쩌면 다른 개 주인들은 혈통이나 천것을 운운하며 꺼릴지도 모르지. 분명한 것은 일상생활에 불과한 이런 평범한 약속을 운명처럼 걸어두어야 할 만큼 투우는 쉽지 않은 상대다. - P286

"아버지는 어떠신가요?"
조각이 묻는 것은 눈앞의 40대 한 씨가 아닌 아버지 한씨, 그러니까 원년 멤버의 파트너였던 사람을 가리키는데,
대장암으로 치료를 받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치료란 그야말로 상징적, 형식적으로서 외아들의 면피에 불과하다. 아버지 한 씨는 이미 일흔넷으로, 운동을 계속해온 조각과는 달리 몸이 총체적으로 부실하며 수술 과정을 견뎌낸 것만으로도 경이로운 일이다. 평균수명이 아흔이든 백이든 그것이 노구 자체의 건강을 재는 척도는 되지 못한다. 평균수명이 높아진 것은 다만 죽음이 급습하는 시기를 과학과 의학이 지연시켰기 때문이고 그것은 효율이나 질을 완전 충족시키지 못한 채 생명 연장의 꿈에서 ‘연장‘에 포인트를 맞춘 것으로서 평균수명 100세 시대의 노인이란 어디까지나, 소원을 빌적에 ‘젊은 모습으로 예쁘게‘라는 옵션을 잊어 주름 잡힌 얼굴과 휜 허리로 구차한 영생을 잇게 된 예언 무녀의 운명에 불과하다. - P287

 그러나 그쪽은 당연히 일찍 도착했으리라는 생각에 그녀는 프로젝트 창고리를 풀고 가방과 각종 연장 장착을 마친 뒤 밥그릇은 안다미로 채워놓고 아직 잠들어 있는 무용의 머리를 쓸어내린다.
"다녀온다. 잘자고 집 잘 봐라."
그 순간 손에 닿는 한기에 그녀는 소스라친다.
털에는 윤기가 없다. 후각이 잘 듣지 않아 모르고 지나칠뻔했는데 두어 번 코를 킁킁대니 이상한 냄새가 난다. 모로누운 무용의 엉덩이 아래로 묽고 검푸른 똥이 퍼져 있다. 그녀는 잠든 무용의 목에 손가락을 대고 깊이 파고들어보다가, 무용 앞에 퍼더버리고 앉아 한참을 그 자세로 손가락만대고 있다. 슬며시 흔들어보는 무용의 몸은 무겁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하나의 존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혼이라는 게 빠져나갔는데도 육신이 더 무거워진다는 것은.
그녀는 몸을 부스스 일으켜 풀어둔 프로젝트 창 고리를 다시 잠근 다음 집을 나선다. - P292

그녀는 점점 무거워져 화물칸에 적재하지 못한 짐짝 같은 자신의 몸이 이순간만큼은 순전히, 투우가 아이에게 다가가는 시간을 늦추기 위해 존재한다고 느낀다. 그리고 아직 시간을 충분히 벌지 못했다고 생각할 즈음 그녀의 늑골 아래를 투우의 칼이 깊게 베고 지나간다.
"무슨 생각을 멍청하게 하고 있어."
투우는 슬슬 부아가 끓기 시작하는데 그 이유는 조각의눈에서 이기겠다는 생각 없이 가능한 한 시간을 끌겠다는의도를 엿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그는 모욕감과 함께 돌연 마음이 고요와 공허로 가득해지며 그 무게만큼 자신의 내부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소리를 듣는다.
따라서 그는 온몸의 감각을 두드리는 실망감과 분노의 리듬을 유지한 채 그녀의 숨통을 끊고 아이의 목을 베기로 작정한다. 군데군데 자잘한 상처로 과다 출혈 끝에 사망이라니 그것만큼 그녀에게 시시한 마지막은 없을 것이다. - P321

스쳐지나가는 것들이 헤드에 아무렇게나 손가락을 걸고 잡아 뽑은 녹화 테이프 같지만 그중 의식이 닻을 내리고 정박할 수있는 장면은 하나뿐이다.
"갈 때가 되면 떠오른다고."
투우가 두어 번 턱을 까불다 피식 웃자 입안에 고여 있던피가 흘러나온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당신은 아직 갈 때가 안 됐다는 거네." 희미해지던 양치식물의 냄새가 사라지고 그녀는 투우의 눈을 감긴 다음, 역시 무심코 중얼거린다.
"이제 알약, 삼킬 줄 아니." - P326

"기본 케어를 하는데 알고 보니 그 손님 왼손이 없었다고요, 왼손이 열 손가락 아니고 다섯 손가락. 그래서 마치고 가실 적에 5만원으로 깎아드렸어요. 그게 정말 잘못한건가요? 한손 없는 손님이 그래도 있는 손이나마 꾸며보겠다고왔는데, 그걸 손가락 수대로 계산해서 반값 처리한 제가 정말 숍의 질을 깎아먹은 거냐고요."
그러면서 말끝에 막내는 다시 훌쩍이기 시작했는데, 그울음은 본질적으론 자신을 질책하는 선배들에게 억울함을호소하기 위해서인 것 같았고 거기에 처음 맞이한 손님이한 손이 없었다는 데 대한 당혹감이나 두려움이 살짝 곁들여졌을 뿐인 듯했지만, 어쩐지 그 순간 원장은 이 아이의 눈물이 아마도 다시 올 일은 없을 노부인에 대한 동정 때문이라 믿고 싶어졌으며, 원칙대로라면 손님 손을 처음 잡을 적에 두 손을 먼저 쇼 글라스에 올려놓고 확인하지 않은 데 대해 한마디 해야겠으나,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난 듯싶었던 이 막내의 유일한 장점이 타인의 불행에 대해 공감하는 능력이라면 데리고 있으면서 쓸 만하게 키워보아도 되겠다고, 애써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잘했다." - P339

시니어패스를 단말기에 대다가, 편의점에서 지갑을 뒤지고 지폐를 내밀다가, 그런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속에서 누군가들은 스쳐 지나가듯이 이 손톱을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손톱을 보고 바로 이어서 손톱 주인의 얼굴을 올려다보자마자 눈을 휘둥그레 뜰지도 모르지. 도저히 당신과 같은 나이의 사람에게 어울리는 장식이 아니라는 편견을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다만 침묵하거나 헛기침하며흘끔거리겠지. 그러나 이 순간 그녀는 깨지고 상하고 뒤틀린 자신의 손톱 위에 얹어놓은 이 작품이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며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올린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그래서 아직은 류, 당신에게 갈 시간이 오지 않은 모양이야. -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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