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부가 러시아의 몽골 병합 요구를 거절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쑨원을 몹시 쓸모 있다고 여긴 모스크바는 그와 손을 잡기로 결정했다. 수도 베이징에서 외교 임무에 성공하지 못한 요페는 상하이로 가서 쑨원과의 거래를 성사시켰고, 1923년 1월 26일 이를 공표했다.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을 비롯한 소비에트 지도자들이 요페의 보고서를 두고 토론을 벌였다. 요페는 상관들에게 쑨원이 "우리 사람"(원문 강조)이라고 말했다. "이 정도면 200만 루블 금화 값어치가 있지 않습니까?" 소비에트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회의를 통해서 쑨원에게 매년 200만 루블 금화를 지급하는 안건을 통과시켰다. 쑨원으로서는 1917년 독일로부터 받은 지원금에 이어 두 번째로 받은 거액의 해외 후원금이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일시적인 후원이 아니었다. 소련은 앞으로 계속해서 쑨원을 전방위적으로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확실히 보장된 막대한 수입을 등에 업은 쑨원은 광저우를 탐내던 인근 여러 성의 지도자들을 설득하여 광저우로 쳐들어가게 했다. 광저우를 산산조각 낼지도 모르는 전쟁을 할 마음은 없던 천중밍은 사임한 후에 도시를 떠났다. 2월이 되자 미래의 국부는 의기양양하게 광저우로 돌아와서 또다시 별도의 정부를 세웠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의 앞날이 어느 때보다도 밝아 보였다. 스탈린의 지명으로 미하일 보로딘이 쑨원의 정치 고문에 임명되었다. - P147
각 성의 지도자들의 세력이 강해지고 자신감도 커짐에 따라서, 그들 가운데 몇몇은 주변 세력과의 분쟁에 무력을 동원하기도 했다. 베이징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전쟁을 일으킨 자들도 있었다. 이후 이들에게는 ‘군벌(軍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쑨원은 군대를 보유하고 광저우를 점령한 상태였음에도 군벌로 분류되지 않았다. 모든 군벌들은 선거로 선출된 베이징 정부를 인정했다. 신문 기사에서는 군벌들 간의 갈등을 상세히 보도했다. 기사만 보면 온나라가 극심한 혼란에 빠진 듯했다. 그러나 사실 다툼은 잦지 않았고 규모도 작았으며, 충돌이 발생했다고 해도 며칠을 넘기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군벌들이 싸우는 방식은 서양인들의 눈에 자못 무성의해 보였다. 회색 군복을 입은 군인들은 대열을 맞추어 전장에 와서 조금 기다리다가, 이내 아무렇게나 총을 몇 발 쏘았다. 이따금 대포가 큰 소리를 내며 발사되었지만 표적을 맞추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사상자도 적었다. 일부 부대에서는 관을 나르는 일꾼을 고용했는데, 이는 전사하더라도 제대로 된 절차에 따라서 묻어주겠다며 병사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용도였다(중국인들에게는 극히 중요한 문제였다), 병사들은 조그마한 찻주전자와 기름을 먹인 종이우산 등 갖가지 생활용품을 들고 왔고, 비가 한 방울이라도 내릴 것같으면 교전을 멈추고 재빨리 우산을 폈다. 전장은 금세 알록달록한 버섯으로 뒤덮인 들판으로 변했다. 이들이 바로 나중에 소련식 훈련을 받은 쑨원의 정예 부대와 대적하게 되는 병사들이었다. - P150
소련의 뜻에 따라서 보로딘은 쑨원에게 몇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광저우를 떠나기 전에 "제국주의(즉 서구 열강)를 타도하자!" 등의 구호가 담긴 성명서를 발표할 것, 그리고 가는 곳마다, 특히 수도 베이징에서 공개적으로 서구 열강을 비난할 것 등이었다. 쑨원이 소련의 후원을 받고 있음을드러내라는 뜻이었다. 쑨원은 정해진 기일에 맞추어 요구받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는 소련의 공산주의의 구호들을 주워섬기면서 보로딘과 함께 11월 13일에 광저우를 떠나 17일에 상하이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 그곳에서 기차를 타고 40시간을 달려 북중국의 주요 항구이자 상업 중심지인 톈진에 당도했다. 수도 베이징이 지척이었다. 하지만 쑨원은 여기에서 멈추었고, 곧장 베이징으로 가는 대신 일본으로 떠나 13일간 머물렀다. 베이징으로 향하는 내내 쑨원은 이해득실을 따져보았다. 보로딘은 그에게 ‘반제국주의‘ 논조를 철저히 고수하라고 요구했다. 쑨원 자신은 그동안 서구 열강을 유독 강하게 비난해왔고, 특히 상하이에서는 (자신이 상하이에 있을 때면 늘 외국 법의 보호를 받기 위해서 조계지에서 머무르고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집권과 동시에 조계지들을 폐지하겠다고 위협했다. 가는 곳마다 소련식 집회의 인파가 외세를 몰아내자는 구호를 외치며 그를 맞이했다. 그가 서구 열강 전부를 적으로 돌리고 오직 소련에만 의지하는 처지가 되어가고 있음은 누가 보아도 명백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은 대중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국민당 당원의 대다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쑨원이 소련 측 사람으로 비친다면 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국민당 당원들도 그를 멀리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계속 보로딘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가는 (소련의 돈을 받는 기독 장군 펑위샹이 아무리열심히 그를 지지한다고 해도) 대총통직을 거머쥘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가까스로 대총통이 되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리에서 쫓겨날지도 몰랐다. 그러나 보로딘의 요구를 거스르는 일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소련 측에서 자금을 지원하고 그의 군대를 무장시켜 지휘까지 하고 있었다. 쑨원은 꼼짝없이 빚을 진 신세였다. 그에게 남은 유일한 대안은 또다른 강력한 후원자를 찾는 것이었다. 쑨원은 다시 한번 일본을 떠올렸다. - P154
쑨원은 볼셰비키가 아니었다.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사후에도 소련이 필요했을 뿐이다. 오직 그들만이 쑨원이 원하는 방식으로 그를 불멸의 존재로 만들어줄 수 있었다. 소련은 쑨원의 정당인 국민당에 권력을 쥐어줄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쑨원 개인을 숭배하는 풍조를 만들 수 있는지 당원들에게 가르칠 것이었다. 쑨원은 일찍이 칭링을 통해서 국민당에자신의 의사를 전했다. "나의 벗 레닌의 본보기를 따라서 내 시신을 방부처리하여 레닌이 안치된 것과 같은 관에 넣어주기를 바란다." 레닌은 쑨원보다 1년 앞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서 특별제작된 유리관에 안치되었다. 몇 주일 만에 수십만 명의 인파가 줄지어 레에게 경의를 표했다고 했다. 개인숭배 풍조가 소련을 휩쓸었고, 레닌은신적인 존재로 격상되었다. 레닌을 그린 초상화와 포스터, 흉상은 사무실에서 교실, 거리에서 공원에 이르는 모든 공적인 장소에서 반드시 구비해야 하는 물품이 되었고, 시종일관 레닌이 전지전능한 구원자라는 신호를주입했다. 쑨원은 이것이 바로 자신이 원하는 사후 모습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가 사망한 뒤에 소련 측은 정말로 그를 위해서 레닌과 같은 유리관을 만들어주었다. 유일한 흠은 그 관에 사용 불가 판단이 내려졌다는 점이었다. 관을 감싼 유리 덮개는 여름철 난징의 열기에 부적합했다. 쑨원의 시신이 레닌처럼 전시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쑨원의 다른 희망 사항들은 충실하게 성취되었다. 국민당은 즉각 레닌식 개인숭배 사업을 시작했다. ‘중국의 국부‘라는 칭호가 처음으로사용되었다. 이후 몇 년간, 특히 국민당이 중국을 장악한 뒤에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쑨원의 이름을 내세워야 했던 1928년에 쑨원 숭배는 전대미문의 수준에 도달했다. 그의 모습을 본뜬 조각상이 시내에 세워졌고, 그가 한 말이라면 아무리 진부해도 경전의 말씀처럼 여겨졌다. 쑨원에 대한 불경한 발언은 한마디도 허락되지 않았다. 소련의 가르침을 받은 국민당의 선전 공작원들은 쑨원을 ‘중화민족의 해방자‘, ‘중국의 5,000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심지어는 ‘모든 억압받는 민족의 구원자‘라고 칭했다. 훗날 마오쩌둥은 자기 자신에 대한 개인숭배 풍조를 조장할 때에 이말들을 그대로 차용했다. - P163
쑨원 숭배의 가장 큰 상징물은 그의 무덤인 중산릉(中山陵)이었다(중산은 쑨원이 일본에 체류하던 시기부터 즐겨 쓴 별명이다/옮긴이), 죽기 전에 쑨원은 자신이 묻힐 장소를 지정해두었다. "난징의 쯔진 산이어야 한다. 임시정부가 탄생한 곳이 난징이기 때문이다." 난징 임시 정부는 쑨원이 40일이나마 ‘임시 대총통‘의 지위를 누린 유일한 정부였다. 쯔진 산은 마지막 한족 왕조인 명조를 건국한 황제 주원장이 묻힌 곳이기도 했다. 주원장에게 경쟁심을 가지고 있던 쑨원은 자신의 무덤을 주원장 옆에 쓰되 그보다 훨씬 더 크고 웅장하게 만들라고, 그리고 "누구도 더 높은 곳에 무덤을 만들지 못할 위치에 두라고 단단히 일렀다. 주원장의 묘는 면적이 170만 제곱미터로, 중국 황제의 무덤으로서는 가장 큰 규모에 속한다. 국민당이 조성한 쑨원의 묘는 그보다 90미터 더 높으며, 계단이 392개이고, 면적이 3,000만 제곱미터가 넘어 쯔진 산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주변의 마을들이 철거되었고, 주민 수천 명이 집과 땅을 정부에 팔도록 강요받았다. 주민들은 절박한 마음으로 탄원했다. 그들은 "보금자리를 잃고 오갈 데 없이 길바닥을 전전해야 했다. 차라리 집과 함께 묻히겠다며 자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묘지를 확장한다는 공고는 계속 이어졌고, 그때마다 "집을 잃게 된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부모를 잃은 것처럼 극도의 공황에 빠졌다. 천지신명께 비는 것 말고 그들이 의지할 곳은 없었다." 탄원을 올린 이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불행이 천하위공(天下爲公) 정신에 모순된다고 항의했다. 오늘날까지도 쑨원의 좌우명으로 알려진 그 말은 "하늘 아래 모든 것은 백성들을 위한 것이다"라는 뜻이었다. 국민당 관료들은 단지 이렇게 대꾸했다. 국부를 위해서 "당신들은 가진 것 전부를 희생함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야한다." - P16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