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의 유지를 받들어, 같은 생각은 해본 적 없었고 애당초 유지라는 게 있지도 않았으며방역업을 시작한 뒤로 삶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 아닌 현재멈춤형이었다. 그녀는 앞날에 대해 어떤 기대도 소망도 없었으며 그저 살아 있기 때문에, 오늘도 눈을 떴기 때문에 연장을 잡았다. 그것으로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확인하지않았고, 자신의 행동에 논거를 깔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살아남으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일찍 죽기 위해 몸을 아무렇게나 던지지도 않았다. 오로지 맥박이 멈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움직이는 것은 훌륭하게 부속이 조합된 기계의 속성이었다. 류를 가끔 떠올렸고 그가 생전에 주의를 준 사항들에 자주 이끌렸지만, 제 몸처럼 부리던 연장으로 인해 손바닥에 잡힌 굳은살과도 같은 감각 외에는, 류를 생각하면서 온몸이 뻐근하게 달뜨고 아파오는 일이 더 이상 없었다. 그녀는, 나이 들어가고 있었다. - P264
"그런데 말입니다." 뭔가 망설이는 듯한 강박사의 목소리가 그녀의 뒷덜미를잡아당긴다. "그렇다고 해서 후회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 말은 그녀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자신이 돌아버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 같은 중얼거림에 가깝지만, 그녀는 지금 그 떨떠름한 한마디로 무저갱에서 건져진 것 같다. "압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 이것이어서, 고개를 돌리고걷기 전 흘끗 본 얼굴이 증오보다는 처절한 슬픔이 고조된간절함으로 빚어져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적어도 그 표점을 다르게 그려줄 가능성이 남아 있으니. - P282
나가기 전에는 언제나처럼 잊지 않고 프로젝트 창의 잠금장치가 걸려 있지 않은지 확인하며, 현관을 닫고 그녀는 생각한다. 이번 일만 끝나고 날씨가 풀리는대로 녀석에게 산책을 좀 더 자주 시켜줄 것이다. 보통의 노부인과 하나도 다를 바 없이 목줄에 개를 끌고 다니고, 조금만 가면 사람이 개를 끄는지 개가 사람을 끄는지 모를 만큼 빨라지는 걸음을 바삐 쫓아가며, 역시 개를 산책시키는 다른 이들과 눈인사도 나눌 것이다. 동네의 다른 개들도 만나게 해주고, 서로 눈 마주치게 놔두어 탐색의 시간을 줄 것이다. 어쩌면 다른 개 주인들은 혈통이나 천것을 운운하며 꺼릴지도 모르지. 분명한 것은 일상생활에 불과한 이런 평범한 약속을 운명처럼 걸어두어야 할 만큼 투우는 쉽지 않은 상대다. - P286
"아버지는 어떠신가요?" 조각이 묻는 것은 눈앞의 40대 한 씨가 아닌 아버지 한씨, 그러니까 원년 멤버의 파트너였던 사람을 가리키는데, 대장암으로 치료를 받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치료란 그야말로 상징적, 형식적으로서 외아들의 면피에 불과하다. 아버지 한 씨는 이미 일흔넷으로, 운동을 계속해온 조각과는 달리 몸이 총체적으로 부실하며 수술 과정을 견뎌낸 것만으로도 경이로운 일이다. 평균수명이 아흔이든 백이든 그것이 노구 자체의 건강을 재는 척도는 되지 못한다. 평균수명이 높아진 것은 다만 죽음이 급습하는 시기를 과학과 의학이 지연시켰기 때문이고 그것은 효율이나 질을 완전 충족시키지 못한 채 생명 연장의 꿈에서 ‘연장‘에 포인트를 맞춘 것으로서 평균수명 100세 시대의 노인이란 어디까지나, 소원을 빌적에 ‘젊은 모습으로 예쁘게‘라는 옵션을 잊어 주름 잡힌 얼굴과 휜 허리로 구차한 영생을 잇게 된 예언 무녀의 운명에 불과하다. - P287
그러나 그쪽은 당연히 일찍 도착했으리라는 생각에 그녀는 프로젝트 창고리를 풀고 가방과 각종 연장 장착을 마친 뒤 밥그릇은 안다미로 채워놓고 아직 잠들어 있는 무용의 머리를 쓸어내린다. "다녀온다. 잘자고 집 잘 봐라." 그 순간 손에 닿는 한기에 그녀는 소스라친다. 털에는 윤기가 없다. 후각이 잘 듣지 않아 모르고 지나칠뻔했는데 두어 번 코를 킁킁대니 이상한 냄새가 난다. 모로누운 무용의 엉덩이 아래로 묽고 검푸른 똥이 퍼져 있다. 그녀는 잠든 무용의 목에 손가락을 대고 깊이 파고들어보다가, 무용 앞에 퍼더버리고 앉아 한참을 그 자세로 손가락만대고 있다. 슬며시 흔들어보는 무용의 몸은 무겁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하나의 존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혼이라는 게 빠져나갔는데도 육신이 더 무거워진다는 것은. 그녀는 몸을 부스스 일으켜 풀어둔 프로젝트 창 고리를 다시 잠근 다음 집을 나선다. - P292
그녀는 점점 무거워져 화물칸에 적재하지 못한 짐짝 같은 자신의 몸이 이순간만큼은 순전히, 투우가 아이에게 다가가는 시간을 늦추기 위해 존재한다고 느낀다. 그리고 아직 시간을 충분히 벌지 못했다고 생각할 즈음 그녀의 늑골 아래를 투우의 칼이 깊게 베고 지나간다. "무슨 생각을 멍청하게 하고 있어." 투우는 슬슬 부아가 끓기 시작하는데 그 이유는 조각의눈에서 이기겠다는 생각 없이 가능한 한 시간을 끌겠다는의도를 엿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그는 모욕감과 함께 돌연 마음이 고요와 공허로 가득해지며 그 무게만큼 자신의 내부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소리를 듣는다. 따라서 그는 온몸의 감각을 두드리는 실망감과 분노의 리듬을 유지한 채 그녀의 숨통을 끊고 아이의 목을 베기로 작정한다. 군데군데 자잘한 상처로 과다 출혈 끝에 사망이라니 그것만큼 그녀에게 시시한 마지막은 없을 것이다. - P321
스쳐지나가는 것들이 헤드에 아무렇게나 손가락을 걸고 잡아 뽑은 녹화 테이프 같지만 그중 의식이 닻을 내리고 정박할 수있는 장면은 하나뿐이다. "갈 때가 되면 떠오른다고." 투우가 두어 번 턱을 까불다 피식 웃자 입안에 고여 있던피가 흘러나온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당신은 아직 갈 때가 안 됐다는 거네." 희미해지던 양치식물의 냄새가 사라지고 그녀는 투우의 눈을 감긴 다음, 역시 무심코 중얼거린다. "이제 알약, 삼킬 줄 아니." - P326
"기본 케어를 하는데 알고 보니 그 손님 왼손이 없었다고요, 왼손이 열 손가락 아니고 다섯 손가락. 그래서 마치고 가실 적에 5만원으로 깎아드렸어요. 그게 정말 잘못한건가요? 한손 없는 손님이 그래도 있는 손이나마 꾸며보겠다고왔는데, 그걸 손가락 수대로 계산해서 반값 처리한 제가 정말 숍의 질을 깎아먹은 거냐고요." 그러면서 말끝에 막내는 다시 훌쩍이기 시작했는데, 그울음은 본질적으론 자신을 질책하는 선배들에게 억울함을호소하기 위해서인 것 같았고 거기에 처음 맞이한 손님이한 손이 없었다는 데 대한 당혹감이나 두려움이 살짝 곁들여졌을 뿐인 듯했지만, 어쩐지 그 순간 원장은 이 아이의 눈물이 아마도 다시 올 일은 없을 노부인에 대한 동정 때문이라 믿고 싶어졌으며, 원칙대로라면 손님 손을 처음 잡을 적에 두 손을 먼저 쇼 글라스에 올려놓고 확인하지 않은 데 대해 한마디 해야겠으나,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난 듯싶었던 이 막내의 유일한 장점이 타인의 불행에 대해 공감하는 능력이라면 데리고 있으면서 쓸 만하게 키워보아도 되겠다고, 애써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잘했다." - P339
시니어패스를 단말기에 대다가, 편의점에서 지갑을 뒤지고 지폐를 내밀다가, 그런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속에서 누군가들은 스쳐 지나가듯이 이 손톱을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손톱을 보고 바로 이어서 손톱 주인의 얼굴을 올려다보자마자 눈을 휘둥그레 뜰지도 모르지. 도저히 당신과 같은 나이의 사람에게 어울리는 장식이 아니라는 편견을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다만 침묵하거나 헛기침하며흘끔거리겠지. 그러나 이 순간 그녀는 깨지고 상하고 뒤틀린 자신의 손톱 위에 얹어놓은 이 작품이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며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올린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그래서 아직은 류, 당신에게 갈 시간이 오지 않은 모양이야. -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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