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로 시간이 날 때마다 케이지를 둘러봤다. 녹슨 철창을 사이에두고 놀아주는 것이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개들 대부분이 나를 무척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어떤 식으로든 그에 걸맞은 노력을 했다는 뜻은 아니다. 이곳의 개들은 마주보고 있는 케이지의 개들을 바라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게 없었다. 이런 환경에선 철창 틈으로 손을 집어넣기만 해도 개들의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말하자면 부전승으로 얻은 우정인 셈이다. - P325
내게도 손님 대접을해야 한다면서 급하게 커피를 끓이고 달걀을 삶고 참외를 깎았다. 나는 그들 모두가 개 농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나만큼이나 잘 알고 있는 걸 보고 조금 놀랐다. 짬밥의 꼬락서니가 어떻고 농장이 얼마나 더럽고 냄새나는지, 개들이 어느 정도 크기의 케이지에서 살고 있다는것뿐 아니라 비가 내리면 짬밥이 저수지로 흘러드는 것까지 다 알고있었다. 그런 일들이 괜찮은지 물어보자 상대는 내가 왜 그런 걸 물어보는지 즉시 이해했다. "개키우는게 다 그런 거지 뭐." 그 대답은 아무런 노력도 들이지 않고 흘러나왔기 때문에 더욱더 확신에 차 있는 듯이 들렸다. 내 자신이 쓸데없는 참견쟁이처럼 느껴졌다. 이곳의 물을 마시고 이곳의 쌀을 먹는 사람들이 괜찮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내가 뭐라고 그게 더럽고 끔찍하다고 난리란 말인가? 나는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선을 다해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들을 이론서 한 귀퉁이에서나 찾을 수 있을 법한 기준을 가지고 폄하하고 있는 걸까? ‘다 그런 거지‘라는 말속엔 내 비난보다 훨씬 더 거대한 존재에게 호소하는 울림이 있었다. 나는 대꾸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 P355
지칠 때 화가 나게 만드는 개는 사나운 개가 아니다. 위협적인 개는예외 없이 사람을 무서워하는 개고 이들은 누군가 다가가면 케이지 뒤로 물러나서는 낮게 으르렁거리며 ‘가까이 오면 짖고 물거야‘ 하는 신호를 보낸다. 이때는 밥만 붓고 지나가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내 부아를 돋우는 개는 사람을 좋아하는 개, 호기심과 장난기가 넘치는 개다. 이런 개들은 엎어진 밥그릇을 돌려놓으려고 하면 그위에 올라서서 내 냄새를 맡으려고 코를 들이민다. 개를 밀어내려고 막대기로 쿡쿡 찌르면 더 신이 나서 달려든다. 그릇을 정리해도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통에 금세 다시 뒤집어놓는다. 한눈에 보인다. 개의 표정에서, 냄새를 맡고 머리를 흔드는 모습에서, 케이지 안에서 방방 뛰어다니는 모습에서 이 개의 정서가 보인다. 인간에 대한 관심과 명랑함이. 하지만 그런 것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물리적인 타격감을 지니고있는 컹컹대는 소리로부터, 털 먼지가 안개처럼 일어나는 케이지로부터, (게이머들이 이해할 만한 방식으로 말해보자면) 가만히 있어도 HP가뚝뚝 떨어지는 공간에서 멀어지는 것뿐이었다. - P375
그런데도 죄책감은 개의 경우가 가장 컸다. (나만의 좀스러운 방식으로) 부끄러워할 줄도 알았다. 내게 닭은 언제나 고기였다. (돼지도 마찬가지다. 반대로 개는 음식으로 대한적이 없었다. 개를 길러본 적은 없지만 주변에 항상 개를 기르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런저런 방식으로 개와 함께 어울려 지낸 경험이있었기 때문에 개는 온전하게 ‘동물‘이라는 인식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병아리 떼를 폐기시킬 땐 느끼지 못했던 부끄러움을 개에게는 고함을 지르는 것만으로도 느꼈다는 점은 인간 사회 속에 자리 잡은 동물들이 온전한 삶을 누릴 ‘자격‘을 얻기 위해 거쳐야 할 단계를 암시하는듯 보인다. 먼저 그들은 상품이 되어야 하고 다음으로는 아주 비싼 상품이 되어야 하며 궁극적으론 인간의 ‘친구‘(그러니까 감정의 교류가 가능한 상품)가 되어야 한다. 너무 맛있거나 아니면 너무 못생겨서 ‘친구‘가 될 가능성이 없는 동물들의 삶은 앞으로도 고달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 P431
선량한 사람들은 언제나 스스로의 선량함을 의심하며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선량한 사람이 된다. (폴 오스터, <폐허의 도시>>
개농장을 나아가 공장식 농장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만든 것 역시 ‘의심하지 않음‘이 아닌가 싶다. 누구도 동물들을 그토록 비좁은 공간에 몰아넣고 기르는 것이 괜찮은 것인지 의심해보지 않았다. 누구도 동물의 부리나 이빨을 자르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일인지 의심해보지 않았다. 누구도 생산량을 높이기 위해 동물을 굶기는 것이 합당한 일인지 의심해보지 않았다. 누구도 갓 태어난 동물을 쓸모없다는 이유로 폐기 처리하는 것이 불가피한 일인지 의심해보지 않았다. 누구도 20년을 살 수 있는 동물을 한 달 만에 죽이는 것이 지나친 일이 아닌지 의심해보지 않았다. 누구도 살이 빨리 찌지 않는다는 이유로 동물을 죽이는 것이 온당한 일인지 의심해보지 않았다. 누구도 맛을 위해 동물의 장기를 마취도 하지 않고 뜯어내는 것이 필요한 일인지 의심해보지 않았다. 누구도 동물을 옴짝달싹 할 수 없게 가둬놓고 임신과 출산만을 반복하도록 만드는 것이 옳은 일인지 의심해보지 않았다. 누구도 동물에게 음식 쓰레기를 먹이는 것이 정당한 일인지 의심해보지 않았다. 누구도 목을 매달고 감전시켜서 동물을 죽이는 것이 용인될 수 있는 일인지 의심해보지 않았다. 전통도 스스로를 의심해볼 수 있어야 한다. 효율성도 스스로를 의심해볼 수 있어야 한다. 이윤 추구도 스스로를 의심해볼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를 의심해보지 않는 존재는 그것이 개인이든 집단이든 시스템이든 언제든지 괴물로 변할 수 있다. - P445
닭이나 돼지는 얼마든지 먹어도 좋지만 개만큼은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뭔가 하나만 특별히 여기는 것은 위선 아니냐는 말을 들었어요. 하지만 모든 일에 관여하는 것은 불가능하죠. 모든 비극에 참여하려 했다간 역으로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한가지만이라도 관여할 수 있으면 되는 겁니다." 당장 모두가 채식을 할수 있는 게 아니라면 식량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고 생물학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인간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는 동물부터 고기가되는 운명에서 구제하자는 주장이 위선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우리가 이런저런 윤리나 논리에 대해 고민하는 이유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잔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야기하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루에도 수십 톤의 음식 쓰레기를 쏟아내는 시대가 소비하는 고기의 양과 종류는 느는게 아니라 줄어야 한다. 그것이 동물과 환경뿐아니라 인간에게도 합리적인 길이라고 나는 믿는다. - P455
개는 한참이 지나도 구석에 웅크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미안한 마음에 소시지를 조금 챙겨왔다. 하지만 통로 앞에 섰을 때는 쉽게 발을 내디딜 수가 없었다. 고기 냄새를 맡은 개들이 맹렬하게 짖어대기 시작했다. 소시지를 한 주먹 쥐고 바라보니 이곳에 개들이 얼마나 많은지 실감났다. 마주 보고 있는 철창의 틈으로 개의 코와 앞발이 불쑥불쑥 삐져나와 있었다. 그런 케이지들이 산기슭까지, 내 눈에는 세상 끝까지라도 이어질 것처럼 늘어서 있었다.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 그 형태의 질서정연함 때문에 내가 시비를 걸고 있는 대상이 얼마나 견고한지가 피부에 와 닿았다. 그래서? 이 녀석한테 고기를 먹여서 기분이 나아지면 그다음엔 어떻게 하지? 또 그 옆에 있는 개는? 그 앞에 있는 개는? 사방에서 컹컹대는 소리가 불규칙하게 터져 나왔다. 그 혼돈의 오케스트라 한가운데서 나는 개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돌아서지도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 P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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