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은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공간에서 자신의 육체를 통해 즐기는 것이었다. 물론 시간이 지난 후에도 사진을 보거나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공유함으로써 그 사건을 다시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경험에 대한 감정을, 특히 극적이거나 인상적인 경험에 대한 감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때라면 그 느낌은 "네가 거기 있었어야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다. 구글 엔그램 Google Ngram에 따르면, 이 문구의 사용 빈도는 1960년대부터 2012년까지 꾸준히 상승하다가 이후 가파른 하락세로 돌아섰다. 엔그램은 다양한 출판물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른 언어 사용을 측정한다. 2012년은 미국인의 스마트폰 사용이 전년 대비 가장 빠르게 증가한 해이기도 하다. 스마트폰 사용 비율은 단 12개월 만에 31퍼센트에서 44퍼센트로 증가했다. - P29

1930년대 비평가 발터 벤야민은 경험과 분리된 문화, 대부분의 경험이 가장된 문화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했다." 그는 "경험의 빈곤이 사람들을 낯선 유형의 절망으로 몰아넣고 "모든 것이 가장 단순하고 편안한 방법으로 해결되는" 존재 방식에서 안도감을 찾을 것이라고 걱정했다. 경혐의 대단히 많은 부분에서 매개 기술을 수용함으로써 우리는 확실히 더 편안하고 편리한 삶을 살게 되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대가가 따랐다.
가상의 연결에 실질적인 이점이 있는 것은 맞지만 전체로서 우리는 대면 연결보다 매개된 연결을 선호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공적 공간에서 ‘부재의 현존‘을 보여주는 사람들은 비판받는 수많은 일 중 하나를 한 것에 불과하다. 인도를 걸으면서 어떤 식으로든 경험을 매개하는 기술을 이용하는 사람의 수를 세어보라. 운전중에 다른 일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흔해졌는지 생각해보라. 우리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문자 메시지에만 매달린다. 우리는 소셜 미디어에 뒤덮여 살지만 사회적 기술(예의범절, 인내, 눈 맞춤)은 점점 약화되고 있다. 물리적 공간에 대한 이해와 상호작용이 부족하다. 물리적 현실이 가진 한계를 참지 못한다. 우리 몸의 신체적 한계든, 대기 줄에서의 기다림이든, 혹은 지루함이든 말이다. 우리는 실제보다는 가장된 것에 점점 더 끌린다. - P32

20세기 마케터들은 ‘라이프스타일‘을 만능 용어로 사용했다. 21세기에는 ‘경험‘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1997년에 B. 조지프 파인 2세와 제임스 H. 길모어는 고객에게 단순한 상품과 서비스가 아닌 "기억에 남는 개인화된 경험을 제공하는 "경험 경제experience economy"의 부상에 대해 설명했다. ‘
애플 광고가 이런 추세의 전형이다. "바로 이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제품의 경험, 즉 어떤 느낌을 주는가입니다." 이 문구는 매력적인 남성의 이미지와 함께한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적당히 맺힌 땀, 그리고 조각같이 잘 다듬어진 이두박근에는 아이팟이 매달려 있다. 그는 조깅 중에 잠깐 휴식을 취하고 있다. 마치 이 아이팟이 가능하게 한 순간을 음미하기 위해 멈춰선 것처럼. <뉴욕타임스>와 같은 매체에 두 페이지로 실린 이 광고는 애플 제품을 판매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이 광고는 동경의 대상이 되는 경험을 판매하고 있다.
사회심리학 연구는 우리가 물건의 구매보다 여행, 레스토랑에서의 식사, 콘서트 관람과 같은 경험을 통해, 즉 "갖는" 것보다 "하는" 것을 통해 더 큰 행복을 얻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호텔, 화장품, 음료수 등 모든 것을 특별한 경험으로 마케팅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 P37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구분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정도로 모호해졌다"는 유르겐슨의 말이 옳다. 그러나 그것만이 모호해진 것은 아니다. 인간인 우리의 관점도 모호해졌다. 얼마 전만 해도 다른인간의 자살을 목격하는 것은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식되었고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여전히 그렇다.
그러나 이제는 뉴욕의 한 여성이 다리 위에서 자살을 시도하는남자를 의도적으로 배경에 넣어 ‘셀카‘를 찍었다는 이야기나 교통체증에 짜증을 내던 로스앤젤레스 고속도로 통근자들이 고가에서 뛰어내리겠다며 교통 체증을 일으킨 남자를 배경으로 ‘셀카‘를 찍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무엇 때문에 많은 사람이 자살 시도 같은 비극적인 사건조차도 일상적인 오락거리로 훔쳐보게 되었을까? 기술은 우리에게 힘과 통제감을 선사하지만 너무 많이 사용하면 그 힘은 바람직하지 못하게 변질될 수 있다. 리처드 세넷은 썼다. "자기애가 강한 사람들이 갈망하는 것은 보통의 경험이 아닌 과장된 경험이다. 그들은 경험 속에서 자신을 보여주는 데에만 집중해 개별적인 상호작용이나장면이 갖는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다." 지리학자 이-푸투안Yi-Fu Tuan은 "경험은 위험을 극복하는 것이며 ‘경험‘이라는 단어는 ‘실험experiment‘, ‘전문가expert‘, ‘위험한 perilous‘과 어원이 같다"고 했다. 그는 경험은 낯선 곳으로 과감히 나아가고 불확실성과 잠재적인 위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의 위험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는 것은 경험이 아니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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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 두 사람은 누구를 만족시키려고 이러는 거였을까? 리마의 관객들? 아니,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만족하고 있었다. 우리는 놀라운 수준의 훌륭한 것들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와서, 우리가 다시 경험하지 못할 아름다움을 희미하게 기억한 채 살다가,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간다. 피오 아저씨와 카밀라 페리촐레는 그들보다 앞서 칼데론이 스페인에서 그랬던 것처럼, 천상계 수준의 연극을 페루에서 일궈내려고 스스로를 고문하고 있었다. 걸작이 목표로 하는 대중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 - P145

 화창한 날이면 두 모자가 인공으로 조성된 계단식 정원을말없이 걷고 있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띄었다. 그럴 때 카밀라는 자신이 항상 사회적 지위와 연관 지어온 지극한 행복이 언제 시작될지 생각한 반면, 돈 하이메는 그저 햇살을 즐기며 언제 또 구름이 밀려올지 걱정했다. 그들은 어느 외딴 나라에서, 혹은 옛 민요에서 튀어나와 길을 잃고 이곳에 흘러든 존재처럼 보였다. 아직 새로운 언어를 배우지도 새로운 친구를 찾지도 못한 채 말이다. - P163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그녀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의젓한 어린소년이 여관에 나타났다. 소년이 입은 고급 옷은 낡고 얼룩져 있었고, 갈아입을 옷이 담긴 작은 보따리를 손에 들고 있었다. 소년의 어머니는 용돈으로 쓰라며 금화 한 닢을 챙겨 주었다. 잠 못 이루는 밤에 보라며 어둠 속에서 빛을 내는 작은 돌멩이도 주었다. 그들은 마차를 타고 함께출발했지만, 곧 피오 아저씨는 덜컹거리는 마차가 소년에게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소년을 목말 태우고 걸어갔다.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에 가까워졌을 때, 하이메는 수치심을 감추려 애썼다. 남들과 다른 자신의 모습이 드러날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피오 아저씨가 그의 친구인 한 선장을 방금 앞질렀기 때문에 특히 더 창피했다. 그들이 다리에 도달했을때, 피오 아저씨는 어린 소녀와 함께 여행 중인 한 노부인에게 말을 걸었다. 피오 아저씨는 다리를 건너고 나면 잠시 앉아서 쉬자고 말했다. 그러나 결국 그럴 필요가 없게되었다. - P181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삶의 목표로 삼았던 특성들이 어디에나 있고, 세상은 이미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에, 그것을 말해 주는 새로운 증거에,
마치 소녀처럼 행복감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 P204

지금 이 순간에도 나 말고 에스테반과 페피타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오직 카밀라만이 그녀의 아들과 피오 아저씨를 기억하고, 오직 이 여인만이 자신의 어머니를 기억한다. 그러나 우리는 곧 죽을 것이고, 그 다섯 명에 대한 모든 기억도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우리 자신도 한동안 사랑받다가 잊힐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 사랑이면 충분하다. 모든 사랑의 충동은 그것을 만들어 낸 사랑으로 돌아간다. 사랑을 위해서는 기억조차 필요하지 않다. 산 자들의 땅과 죽은 자들의 땅이 있고, 그 둘을 잇는 다리가 바로 사랑이다. 오직 사랑만이 남는다. 오직 사랑만이 의미를 지닌다.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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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그는 사랑에 관한 돌이킬 수 없는 비밀을 발견했다. 가장 완벽한 사랑에서조차 한쪽이 다른 한쪽을 덜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똑같이 착하고 똑같이 재능 있고 똑같이 아름다운 두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서로를 똑같이 사랑하는 두 사람은 세상에 없다.  - P86

카밀라는 마누엘의 손 위로 몸을 숙인 채 그에게 귓속말을 했다. 어둠 속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에스테반에게 그건 자신이 결코 알 수 없을 새로운 친밀감이 형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완벽한 증거였다. 자신의 몸이 오므라들면서 허공 속으로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끝없이 작아지고 끝없이 달갑지 않은 존재가 되는 느낌이었다. 그는 사랑의 장면을 자신에게는 차단된 천국을 한 번 더 힐끔 보고는 벽을 향해 돌아누웠다. - P94

"하지만 마누엘, 우리 마누엘. 네가 어렸을 때 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해줬는지 기억 안 나니? 시내 여기저기를 기꺼이 돌아다니면서 작은 심부름을 해줬었는데, 내가 아플 때는 식당에 가서 수프를 끓여 달래서 가져오기도 했잖아." 다른 사람이었다면 "내가 너를 위해 얼마나많은 것을 해줬는지 기억나니?"라고 말했을 것이다.
"네."
"나도 누군가를 잃었단다, 마누엘, 나도... 우리는 하느님이 사람들을 당신 품으로 데려간다는 것을 알고 있잖니." 하지만 이 말도 전혀 통하지 않았다. 에스테반은 살짝 몸을 돌려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그렇게 스무 걸음쯤가다가 멈춰 서서는 다시 골목길을 내려다보았다. 멀리떠나고 싶지만 돌아오라고 부르는 주인의 기분을 상하게할까 망설이는 개처럼.
그것이 사람들이 그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전부였다. - P108

 그 아이가 주위에 사는수천 명의 다른 소녀들보다 예뻤는지 똑똑했는지는알 도리가 없지만, 어쨌거나 그 아이는 선장 자신의 딸이었어. 커다란 참나무 같은 남자가 계집아이 하나사라졌다는 이유로 마치 장님이 빈집을 헤매는 마냥세상을 떠돈다는 것이 너에게는 하찮게 보일 수도 있겠지. 그래, 넌 이해하지 못할 거야. 하지만 사랑하는내 딸아, 난 이해한다. 사실 그 생각을 하면 얼굴이 창백해질 정도야. 간밤에 선장은 나와 함께 앉아서 딸에 대해 이야기했지. 그가 손으로 턱을 괴고 화롯불을 들여다보며 이렇게 말했어. ‘가끔은 딸아이가 멀리 여행 중이고 그 아이를 다시 보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딸아이가 영국에 있을 것만 같아요.‘ 이런말 하면 넌 나를 비웃겠지만, 선장은 자신이 늙을 때까지 시간을 흘려보내기 위해 세상을 떠도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드는구나. - P113

"절 그냥 놔둬요. 상관 마시라고요."
에스테반이 얼굴을 바닥에 묻고 울부짖었다.
"저는 혼자예요. 혼자, 혼자라고요."
그 옆에 서 있는 선장의 크고 넓은 얼굴이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지며 잿빛으로 변했다. 지난날의 아픈 기억이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선장은 바다에 관한 이야기를 할때를 제외하면, 세상에서 가장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용기를 내어 진부한 말이라도 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바닥에 쓰러진 형체가 듣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말했다.
"에스테반,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네.
최대한 밀고 나갈 수밖에 없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아. 알잖아. 시간은 계속 흘러가니까.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알면 자네도 놀랄 거야."
그들은 리마로 출발했다.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에 도착했을 때, 선장은 물건의 운반을 감독하기 위해 다리 아래 강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에스테반은 다리를 건넜고,
다리와 함께 추락했다. -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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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4년 7월 20일 금요일 정오, 페루에서 가장 멋진 다리가 무너지며 다섯 명의 여행자가 그 아래의 골짜기로 추락했다. 이 다리는 리마와 쿠스코를 잇는 큰길에 놓여있었고, 매일 수백 명의 사람들이 건넜다. 사람들은 리마에 방문한 지인을 이끌고 와서, 백 년도 더 전에 잉카인들이 고리버들을 엮어 만든 이 다리를 구경시키곤 했다. 사실 다리라고 해 봐야 사다리처럼 엮은 얇은 판자 위에 마른 포도덩굴 난간을 달아 놓은 것에 불과했다. 걸을 때마다 다리는 협곡 위에서 출렁거렸다. - P11

그때 그의 시선이 다리에 내려앉았다. 그 순간, 마치 사용하지 않는 빈방에서 악기의 현이 툭 하고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대기를 채우더니, 갑자기 다리가 끊어지며 허우적대는 개미처럼 보이는 다섯 형체가 그 아래의 골짜기로 내던져졌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내심 안도하며 "십 분만 늦었다면나도..."라고 혼잣말을 했겠지만, 주니퍼 수사에게는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왜 하필 저 다섯 사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우주에 어떤 계획이 있다면, 인간의 삶에 어떤 패턴이 있다면, 갑자기 중단된 저들의 삶 속에 숨겨진 불가사의한 무언가를 밝혀낼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우리는 우연히 살고 우연히 죽는 것일까, 아니면 계획에 의해 살고 계획에 의해 죽는 것일까. 주니퍼 수사는 그 순간대기를 가르고 떨어진 그 다섯 명의 숨겨진 삶을 조사하겠다고, 그래서 그들이 그렇게 떠난 이유를 밝혀내겠다고 마음먹었다. - P14

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온갖 색깔의 사랑을 포함할 만큼 광대했지만, 그 안에 폭압적인 그림자도 없진.않았으며, 결국 자신이 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딸을 사랑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비열한 굴레에서 벗어나길 갈망했지만, 딸에 대한 열정이 너무나 강렬해서 감당할 수 없었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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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 시간이 날 때마다 케이지를 둘러봤다. 녹슨 철창을 사이에두고 놀아주는 것이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개들 대부분이 나를 무척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어떤 식으로든 그에 걸맞은 노력을 했다는 뜻은 아니다. 이곳의 개들은 마주보고 있는 케이지의 개들을 바라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게 없었다. 이런 환경에선 철창 틈으로 손을 집어넣기만 해도 개들의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말하자면 부전승으로 얻은 우정인 셈이다. - P325

 내게도 손님 대접을해야 한다면서 급하게 커피를 끓이고 달걀을 삶고 참외를 깎았다. 나는 그들 모두가 개 농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나만큼이나 잘 알고 있는 걸 보고 조금 놀랐다. 짬밥의 꼬락서니가 어떻고 농장이 얼마나 더럽고 냄새나는지, 개들이 어느 정도 크기의 케이지에서 살고 있다는것뿐 아니라 비가 내리면 짬밥이 저수지로 흘러드는 것까지 다 알고있었다. 그런 일들이 괜찮은지 물어보자 상대는 내가 왜 그런 걸 물어보는지 즉시 이해했다.
"개키우는게 다 그런 거지 뭐."
그 대답은 아무런 노력도 들이지 않고 흘러나왔기 때문에 더욱더 확신에 차 있는 듯이 들렸다. 내 자신이 쓸데없는 참견쟁이처럼 느껴졌다. 이곳의 물을 마시고 이곳의 쌀을 먹는 사람들이 괜찮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내가 뭐라고 그게 더럽고 끔찍하다고 난리란 말인가? 나는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선을 다해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들을 이론서 한 귀퉁이에서나 찾을 수 있을 법한 기준을 가지고 폄하하고 있는 걸까? ‘다 그런 거지‘라는 말속엔 내 비난보다 훨씬 더 거대한 존재에게 호소하는 울림이 있었다. 나는 대꾸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 P355

지칠 때 화가 나게 만드는 개는 사나운 개가 아니다. 위협적인 개는예외 없이 사람을 무서워하는 개고 이들은 누군가 다가가면 케이지 뒤로 물러나서는 낮게 으르렁거리며 ‘가까이 오면 짖고 물거야‘ 하는 신호를 보낸다. 이때는 밥만 붓고 지나가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내 부아를 돋우는 개는 사람을 좋아하는 개, 호기심과 장난기가 넘치는 개다. 이런 개들은 엎어진 밥그릇을 돌려놓으려고 하면 그위에 올라서서 내 냄새를 맡으려고 코를 들이민다. 개를 밀어내려고 막대기로 쿡쿡 찌르면 더 신이 나서 달려든다. 그릇을 정리해도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통에 금세 다시 뒤집어놓는다.
한눈에 보인다. 개의 표정에서, 냄새를 맡고 머리를 흔드는 모습에서, 케이지 안에서 방방 뛰어다니는 모습에서 이 개의 정서가 보인다. 인간에 대한 관심과 명랑함이. 하지만 그런 것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물리적인 타격감을 지니고있는 컹컹대는 소리로부터, 털 먼지가 안개처럼 일어나는 케이지로부터, (게이머들이 이해할 만한 방식으로 말해보자면) 가만히 있어도 HP가뚝뚝 떨어지는 공간에서 멀어지는 것뿐이었다. - P375

 그런데도 죄책감은 개의 경우가 가장 컸다. (나만의 좀스러운 방식으로) 부끄러워할 줄도 알았다.
내게 닭은 언제나 고기였다. (돼지도 마찬가지다. 반대로 개는 음식으로 대한적이 없었다. 개를 길러본 적은 없지만 주변에 항상 개를 기르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런저런 방식으로 개와 함께 어울려 지낸 경험이있었기 때문에 개는 온전하게 ‘동물‘이라는 인식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병아리 떼를 폐기시킬 땐 느끼지 못했던 부끄러움을 개에게는 고함을 지르는 것만으로도 느꼈다는 점은 인간 사회 속에 자리 잡은 동물들이 온전한 삶을 누릴 ‘자격‘을 얻기 위해 거쳐야 할 단계를 암시하는듯 보인다.
먼저 그들은 상품이 되어야 하고 다음으로는 아주 비싼 상품이 되어야 하며 궁극적으론 인간의 ‘친구‘(그러니까 감정의 교류가 가능한 상품)가 되어야 한다. 너무 맛있거나 아니면 너무 못생겨서 ‘친구‘가 될 가능성이 없는 동물들의 삶은 앞으로도 고달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 P431

선량한 사람들은 언제나 스스로의 선량함을 의심하며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선량한 사람이 된다.
(폴 오스터, <폐허의 도시>>

개농장을 나아가 공장식 농장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만든 것 역시 ‘의심하지 않음‘이 아닌가 싶다. 누구도 동물들을 그토록 비좁은 공간에 몰아넣고 기르는 것이 괜찮은 것인지 의심해보지 않았다. 누구도 동물의 부리나 이빨을 자르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일인지 의심해보지 않았다. 누구도 생산량을 높이기 위해 동물을 굶기는 것이 합당한 일인지 의심해보지 않았다. 누구도 갓 태어난 동물을 쓸모없다는 이유로 폐기 처리하는 것이 불가피한 일인지 의심해보지 않았다. 누구도 20년을 살 수 있는 동물을 한 달 만에 죽이는 것이 지나친 일이 아닌지 의심해보지 않았다. 누구도 살이 빨리 찌지 않는다는 이유로 동물을 죽이는 것이 온당한 일인지 의심해보지 않았다. 누구도 맛을 위해 동물의 장기를 마취도 하지 않고 뜯어내는 것이 필요한 일인지 의심해보지 않았다. 누구도 동물을 옴짝달싹 할 수 없게 가둬놓고 임신과 출산만을 반복하도록 만드는 것이 옳은 일인지 의심해보지 않았다. 누구도 동물에게 음식 쓰레기를 먹이는 것이 정당한 일인지 의심해보지 않았다. 누구도 목을 매달고 감전시켜서 동물을 죽이는 것이 용인될 수 있는 일인지 의심해보지 않았다.
전통도 스스로를 의심해볼 수 있어야 한다. 효율성도 스스로를 의심해볼 수 있어야 한다. 이윤 추구도 스스로를 의심해볼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를 의심해보지 않는 존재는 그것이 개인이든 집단이든 시스템이든 언제든지 괴물로 변할 수 있다. - P445

닭이나 돼지는 얼마든지 먹어도 좋지만 개만큼은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뭔가 하나만 특별히 여기는 것은 위선 아니냐는 말을 들었어요. 하지만 모든 일에 관여하는 것은 불가능하죠. 모든 비극에 참여하려 했다간 역으로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한가지만이라도 관여할 수 있으면 되는 겁니다." 당장 모두가 채식을 할수 있는 게 아니라면 식량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고 생물학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인간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는 동물부터 고기가되는 운명에서 구제하자는 주장이 위선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우리가 이런저런 윤리나 논리에 대해 고민하는 이유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잔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야기하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루에도 수십 톤의 음식 쓰레기를 쏟아내는 시대가 소비하는 고기의 양과 종류는 느는게 아니라 줄어야 한다. 그것이 동물과 환경뿐아니라 인간에게도 합리적인 길이라고 나는 믿는다. - P455

개는 한참이 지나도 구석에 웅크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미안한 마음에 소시지를 조금 챙겨왔다. 하지만 통로 앞에 섰을 때는 쉽게 발을 내디딜 수가 없었다. 고기 냄새를 맡은 개들이 맹렬하게 짖어대기 시작했다. 소시지를 한 주먹 쥐고 바라보니 이곳에 개들이 얼마나 많은지 실감났다. 마주 보고 있는 철창의 틈으로 개의 코와 앞발이 불쑥불쑥 삐져나와 있었다. 그런 케이지들이 산기슭까지, 내 눈에는 세상 끝까지라도 이어질 것처럼 늘어서 있었다.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 그 형태의 질서정연함 때문에 내가 시비를 걸고 있는 대상이 얼마나 견고한지가 피부에 와 닿았다. 그래서? 이 녀석한테 고기를 먹여서 기분이 나아지면 그다음엔 어떻게 하지? 또 그 옆에 있는 개는? 그 앞에 있는 개는? 사방에서 컹컹대는 소리가 불규칙하게 터져 나왔다. 그 혼돈의 오케스트라 한가운데서 나는 개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돌아서지도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 P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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