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는 고요하게 떨어지는 물소리가 아니다. 어떤 물체를 만나느냐에 따라 빗소리는 다양하게 번역되어 들린다. 여느 언어와 마찬가지로, 특히 쏟아낼 것이 너무 많고 통역자를 기다리는 말이 너무 많은언어처럼 하늘의 언어적 바탕은 무궁무진한 형태로 표현된다. 억수비가 내리면 양철 지붕은 요란하게 진동하고, 수백 마리 박쥐의 날개를 때리며 산산이 부서져 강물 위로 떨어지고, 축축한 구름이 우듬지를 감싸면 잎은 물 한 방울 떨어뜨리지 않고 습기를 잔뜩 머금은 채 서로부딪힐 때마다 붓질하는 소리를 낸다 - P15

소리들은 케이폭나무의 숲밑understory (하층식생)에서 들려온다. 이 식물들은 케이폭나무의 활짝 벌린 가지 밑에서 줄기 둘레의 부엽토에 뿌리를 내렸다. 숲밑을 때리는 물은 이미 위에서 여러 잎을 거친 뒤다. 우듬지의 잎들은 대부분 표면이 매끄럽고 끄트머리가 뾰족하거나 실모양인 열대 특유의 형태다. 이 ‘뾰족끝*drip ip‘과 미끈한 앞면을 활용하여 물을 모아 커다란 방울을 만든다. 잎끝에서 부풀어 오른 물방울은 렌즈가 되어 빛을 굴절시킨다. 렌즈 안에 숲이 담겼다. 뒤집힌 상태으로, 뾰족끝에는 물방울이 앉을 자리가 거의 없기에 잎은 커진 방울을 몇 초마다 떨어뜨리고 새로 렌즈를 부풀린다. 물방울이 떨어지기직전, 상이 반짝인다. 이런 식으로 잎은 물을 떨구고 몸을 말려 (수분을 좋아하는) 균류와 조류의 생장을 늦춘다. 가뜩이나 커다란 빗방울이 숲 위층의 뾰족끝에서 더욱 팽창하여 숲밑 식물의 살갗 위로 떨어진다. 잎이 클수록 물이 많이 모이고 빨리 떨어지므로, 케이폭나무 우듬지의 다양한 잎 모양은 숲밑에서 다채로운 리듬을 만들어낸다. 숲밑잎들의 무수한 크기, 모양, 두께, 질감, 유연성이 음에 색을 더한다. 심지어 낙엽도 다른 어느 곳보다 활기차게 노래한다. 낙엽이 만들어내는 땅의 소리를 듣고 있으면 수천 개의 태엽 시계가 똑딱거리는 것 같다. - P17

굵은 나뭇가지가 흙을 떠받치고 덩굴이 흙을 붙들어 맨다. 케이폭나무 가지가 만나는 곳에서는 줄기가 사람몸통만 한 무화과나무를비롯하여 대여섯 종의 나무가 뿌리를 내렸다. 이곳은 지상 50미터에뿌리박은 숲이다. 이 나무들은 북쪽과 동쪽에 모여 자라는데, 숲의 그늘진 골짜기처럼 우듬지 흙이 축축하고 케이폭나무 잎이 가장 무성하기 때문이다. 볕에 노출된 남서쪽 가지에는 선인장, 지의류, 뾰족잎 브로멜리아드가 비가 내리면 부풀어 올랐다가 적도의 햇볕이 고스란히내리쬐면 푸석푸석해지면서 홍수와 사막을 번갈아 가며 견딘다. 수직의 줄기에서는 덩굴과 난초 정원의 뒤엉킨 깔개에 물이 고이는데, 여기에 양치식물이 뿌리를 내린다. 이 모든 식물 위로 케이폭나무의 잎이 자란다. 겹잎 하나하나가 어린애 손만 하며 기다란 쪽잎(겹잎을 구성하고 있는 작은 잎_옮긴이) 여덟 장가량이 부채 모양으로 펼쳐져 있다. 잔가지 끝에 잎이 나기 때문에 나무는 투명한 안개처럼 보인다. 잎은 나무의 크기에 비해 하찮게 보이지만, 아래의 피난처에서 자라는 식물과달리 뇌우와 하향격풍을 이겨내야 한다. 다행히 잎의 크기가 작고 부채꼴 모양이어서 쪽잎들이 접혀 바람을 흘려보낸다.
지금껏 대부분의 열대생물학자는 땅에서 연구했지만, 요즘 들어 몇몇이 비계, 밧줄 사다리, 기중기를 타고 우듬지로 올라갔다. 놀랍게도 숲에 서식하는 종수의 절반 또는 그보다 훨씬 많은 종이 우듬지에 서식하고 있었다. 다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종들이었다. 숲에서 수많은 나무 종의 우듬지들이 이루는 덮개를 일컫는 용어인 ‘숲지붕canopy‘
은 이토록 복잡한 3차원 세계를 나타내기에는 너무 단순하다. - P20

바이러스가 보기에 우듬지는 영장류 피로 이루어진 습지대이고 모기의 침은 웅덩이에흘러드는 개울이다. 수십 종의 박쥐와 설치류도 지류를 이룬다. 하이마고구속 모기는 바이러스, 세균, 원생생물을 비롯하여 혈액에 서식하는 온갖 병원체의 집합소다.
다행히도 녀석에게 물린 뒤에 삼림황열병sylvatic yellow fever 같은 질병에 걸리지는 않았지만, 숲에서의 생물학적 투쟁은 대부분 우리의 감각이 미치지 못하는 척도에서 벌어진다는 사실을 되새겼다(우리의 시선을사로잡는 것은 테니슨이 말하는 이빨과 발톱 - 퓨마, 뱀, 피라냐 이지만). 숲의 동물에게서 DNA를 검사하면 예외 없이 살과 피에서 기생충이 발견된다. 하지만 기생충 감염이 겉으로 드러나는 일은 매우 드물다. 브로멜리아드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개미 한 마리가 잎 가장자리에 턱을 박은 채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녀석의 마지막 행동은 물어박기*anchoring bite였다. 포식동충하초속 Ophiocordyceps 기생 균류가 속에서부터 녀석을 먹어치우면서 녀석에게 바람이 세게 부는 곳의 잎으로 기어올라가 단단히 매달리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다. 개미의 목덜미에서 줄기가 돋아났는데, 끄트머리의 홀씨주머니가 잔뜩 부풀어 있었다. 감염성 균류 홀씨를 아래쪽에 있는 모든 개미 위에 흩뿌리려는 수작이다. - P26

숲은 단지 그물망을 통해 결합되었을 뿐인) 개체들의 집합이 아니다. 숲은 오로지 관계의 가닥으로만 이루어진 장소다.
인간의 문화는 이 본질을 철학으로 표현한다. 와오라니족, 슈아르족케추아족을 비롯하여 아마존 숲의 그물망에서 수백 년, 수천 년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숲은 생물학적·물리적 ‘타자‘의 조합이 아니다. 아마존 부족들은 문화가 언어적·역사적으로 다르고 믿음 체계도 여느 대륙과 마찬가지로 다양하지만, 하나만은 일치하는 듯하다. 그것은 서구과학에서 ‘대상으로 구성된 숲 생태계‘라 부르는 것을 정령, 꿈, 잠에서 깨었다는 의미에서의) 현실이 어우러지는 장소로 여긴다는 것이다. (인간 거주민을 포함한) 숲은 이렇게 하나가 된다. 하지만 이것은 따로 떨어진 부분들의 연합이 아니다. 우리는 애초부터 영적 관계 안에서 존재한다. 정령은 머나먼 천국이나 지옥에서 온 저 세상 귀신이 아니라 땅에 뿌리박고 흙과 상상력을 연결하는 숲의 본성 자체다. 아마존 영성의 바탕은 여러 세대에 걸친 실용주의적 경험주의다.
영어의 단어와 개념은 정령에 대해 생각하기에 부적절하다. 영혼이 다른 장소에서 비롯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해를 가로막는 이러한 장벽을 가장 뚜렷하게 표현한 인물은 숲 해설가 마예르 로드리게Mayer Rodriguez다. 그는 수백 명에 이르는 미국 대학 연구자와 학부생에게 숲을 안내했다. 로드리게스는 우리가 그의 정령 이야기를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들을 수는 있지만 소리가 귓속으로 들어오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살아있고 체화된 관계를 숲 공동체 안에서 맺지 않고서는 이해의 공명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해의 바탕이 되는 관계는 시간적으로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며 공간적으로 생물 그물망을 거쳐 뻗어나간다. 로드리게스의 이야기를 들어서 피상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을지 모르나 그 이해를 내면으로부터 전달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앎은 관계이며 속함은 영적 앎이다. - P32

에콰도르의 숲은 값진 광물의 보고이지만, 몇 해 전만 해도 숲을 보호할 절호의 기회가 있었다. 2007년에 라파엘 코레아 Rafael Correa 대통령은 ITT 석유 가치의 절반에 해당하는 지속적 경제 발전 기금을 국제사회가 제공한다면 석유를 영영 땅속에 묻어두겠다고 제안했다. 그뒤에도 개발도상국이 매장 화석연료와 기후 변화를 관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포괄적 기구를 국제연합과 석유수출국기구 산하에 두자고 제안했다. 이와 동시에 에콰도르 정부는 새로운 실천 기준을 정했다. 2008년 에콰도르 헌법은 파차마마Pacha Mama, 즉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권리를 보호한다. 여기에는 인간 아닌 생명체가 살아가고 진화할권리, 인간이 물과 식량에 접근할 권리가 포함된다. 야수니 국립공원과 관련한 제안에는 이 취지가 확고하게 담겼다.
코레아의 계획은 야수니에서의 석유 채굴을 금지하고 아직 연소되지 않은 탄소를 무덤에 봉인하는 것이었다. 이는 특히 지구적 관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세계 평균 기온 상승을 2도 이하로 억제할 가망이 조금이라도 있으려면 이것은 현재 진행 중인 기후 협상의 명시적 목표다 연소되지 않은 연료를 땅속에 묻어두어야 한다. 그러니보물 지도가 있어도 ‘X‘ 표시 앞에서 돌아서야 한다. 돌아서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알려진) 전 세계 화석연료 매장량은 기후 목표치에 해당하는 양의 세 배를 넘는다.
코레아의 제안은 거부당했다. 이제 에콰도르가 석유를 태우지 않으면 잃어버린 기회의 비용은 에콰도르 혼자 짊어져야 한다. 지금껏 대부분의 화석 탄소를 대기 중에 쏟아낸 부유한 산업국 시민들은 석유포기에 따르는 금전적 부담을 나눠 지려 들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석유를 사는 일에는 전혀 거리낌이 없다. 그리하여 케이폭나무는 매일같이 기계 소리에 시달리고 있으며, 우림에서 가장 키 큰 나무보다 더 높은 배기가스연소탑의 불꽃이 밤마다 나무를 비춘다. 지진탐사도 진행중이다. 이것은 땅속으로 탄성파를 발생시켜 석유의 메아리를 찾는 작업이다. - P39

숲의 생존 법칙인 호혜와 연대가 시험대에 올랐다. 이젠 숲 자체의생존이 경각에 달렸다. 공격의 규모가 크고 싸움이 격렬할수록 더 깊은 협력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예전에는 갈등하고 심지어 서로 죽이는관계를 맺던 문화들이 협력망을 이룬다. 마찰이 사라지진 않았지만이곳은 문화적 자율성이 강하다- 에콰도르원주민민족연맹 Confederationof Indigenous Nationalities of Ecuador은 정치 담론의 논조와 내용을 수정할 만큼 융통성을 발휘한다. 이제 연결은 국경선을 넘어 뻗어 나간다. 원주민 공원 경비원들이 국경을 사이에 두고 대화한다.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전역의 판사들이 미주인권재판소에 모여 사라야쿠 주민들이정부와 석유 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 귀를 기울인다. 판사들은 사라야쿠에 우호적인 판결을 내린다.
에콰도르 정부는 어떤 움직임은 받아들이지만 대부분의 움직임에대해서는 반격한다. 국가의 적극적인, 심지어 폭력적인 반응은 역설적으로 연합의 힘을 보여준다.
아마존에서는 싸움의 기술과 전법이 최고조에 도달하고 있다. 이것이 유일한 노래라면 숲은 절멸의 소용돌이에 빠질 것이다. 비아 아우카에서는 그렇게만 보인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생명 공동체의 수막 카우사이가 모습을 드러낸다. 갈등에 내재하는 긴장은 잦아들지 않지만,
이들의 기운은 창조적으로 발현된다. 이끼, 개구리, 심지어 숲의 생각까지도 공중으로 띄워 올릴 만큼. - P48

발삼전나무

온타리오 주 북서부 카카베카
48°23‘45.7" N, 89°37‘17.2" W

나는 바위 절벽 위에 서 있다. 아래쪽 골짜기는 전나무 바늘잎의 청록색 음영, 아스펜aspen과 백자작나무white birch의 잎이 바람을 맞아 떨릴 때 생기는 반짝거림, 가문비나무의 뾰족뾰족한 우듬지, 늪지의 왜소한 나무들 위로 드리운 어둑어둑한 숲지붕 틈새, 늙은 나무가 바람에 쓰러진 자리에 새로 들어선 어린 늘푸른나무 덤불에 이르기까지 북부 숲의 질감과 색조로 가득하다. 나는 이런 덤불 중 하나의 가장자리에 있는 오솔길 위에 서 있다. 덤불이 하도 빡빡해서 통과하려다가는 살갗이 심하게 벗겨질 것 같다. 발삼전나무는 어린나무 무리 위로 우뚝 솟았다. 키는 8미터, 수령은 30년가량이다. 오솔길에서는 전나무의 줄기가 전부 보인다. 나무가 서 있는 절벽 위로 산들바람이 분다. 덕분에 여름이면 나의 포유류 피를 포식하려고 모여드는 모기 수백 마리로부터 이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다.
발삼전나무 꼭대기에서는 섬세한 금속에서 나는 듯한 소리가 난다. 땡땡 쏙쏙, 리벳 두드리는 소리, 거친 가장자리 대패질하는 소리. 새들이 나무 꼭대기를 두른 전나무방울을 뒤진다. 망치질은 그칠 줄 모른다. 녀석들은 무리를 통솔하고 어디에 씨앗이 가장 많은지 알려준다. 새들이 일하는 동안 전나무 가지 사이로 대팻밥이 떨어진다. 공기만큼가벼운 비늘조각이 바늘잎을 스치며 똑딱 소리를 낸다. - P5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머리말

호메로스 시대 그리스에서 ‘클레오스‘(명성)는 노래로 불렸다. 개인의 삶에 대한 평가와 기억은 공기의 진동에 담겼다.
따라서 듣는다는 것은 오래 남는 것을 아는 것이었다.

나는 생태학적 ‘클레오스‘를 찾고자 나무에 귀를 기울였으나 역사의 주역으로서의 영웅이나 개인은 하나도 찾지 못했다. 나무의 노래에 담긴 살아있는 기억은 생명 공동체에 대한, 관계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 인간은 혈육이자 육화된 구성원으로서 이 대화에 참여한다.
따라서 듣는다는 것은 자신의 목소리와 가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 P8

케이폭나무

에콰도르 티푸티니강 유역
0°38‘10.2" S, 76°08‘39.5" W

이끼는 얇디얇은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어찌나 얇은지 빛은 날개를 눈치 채지 못한 채 스쳐 지나간다. 햇빛은 색깔이 아니라 기미만을 남긴다. 잎들이 사방으로 퍼지고 이끼식물이 기다란 줄을 따라 올라간다. 나뭇가지를 뒤덮은 균류 • 조류藻類 군집과 날아다니는 이끼를 붙들어 맨 것은 섬유질 닻이다. 이곳의 이끼는 딴 곳의 이끼처럼 쪼그리고 수그린 채 살아가지 않는다. 이곳의 물은 살갗도, 경계도 없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공기가 곧 물이다. 이끼는 대양의 가느다란 바닷말처럼 자란다.
숲은 모든 피조물에게 입술을 대고 숨을 불어넣는다. 우리가 빨아들이는 뜨겁고 향기롭고 포유류를 닮은 이 숨은 숲의 피에서 우리의폐로 곧장 흘러든다. 약동하는 내밀하고 질식할 것만 같은 숨.  - P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르술라가 언제부터 시력을 잃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말년에 이르러 이제 침대에서 일어날 수조차 없었을 때도, 그저 나이가 들어 기력을 잃은 것처럼 보였을 뿐이지 완전히 장님이 되어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우르술라는 그 사실을 호세 아르까디오가 태어나기 전에 알았었다. 처음에는 일시적인 시력 감퇴인 줄 알고 남몰래 골수로 만든 시럽을 마시고, 눈에 벌꿀을 바르곤 했지만, 이내 자신이 대책 없는 암흑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음을 깨달아가기 시작했는데, 마침내는 마꼰도에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왔을 때도 그 광채만 볼 수 있을 뿐 전기라는 발명품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확실히 알지 못했었다. 자신이 장님이 되었다는 사실을 밝힌다는 것은 곧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알리는 것이 될 것 같아 그 사실을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백내장의 후유증으로 아무것도 볼수 없게 되었을 때라도 기존의 기억을 이용해 계속해서 물건들을 볼 수 있도록 물건들 사이의 거리와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아내는공부를 조용히 집요하게 했었다. 나중에는 예기치 않게 냄새들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어둠 속에서는 부피나 색보다는 훨씬 더 설득력 있는 힘으로 구분되었고, 그녀를 체념으로 인한 수치심으로부터 결정적으로 구원해 주었다. 그녀는 방 안의어둠 속에서도 바늘에 실을 꿰고, 옷에 단춧구멍을 낼 수 있었고, 우유가 언제 꿇을 것인지도 알아냈다. 각각의 물건들이 있는 장소를 어찌나 확실하게 알고 있었던지 때때로는 자기가 장님이라는 사실을 그녀 자신도 잊곤 했다. - P69

 그러나 우르술라는 나이가 들면 생기는 그 통찰력으로 아이들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우는 것은 복화술이나 예언가적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사랑하는 데 무능하다는 명백한 조짐이라는 사실을 터득했고, 그래서 자신의 견해를 사람들에게 자주 얘기했었다. 아들에 대한 이미지를 그렇게 격하시키고 나니, 그 동안 느끼지못하고 있던 아들에 대한 연민의 정이 한꺼번에 갑자기 솟아났다. 한편으로, 자신의 가혹한 마음에 자기 스스로도 놀라고, 모진 슬픔을 못 이겨 스스로 고통스러워했던 아마란따는 이 세상에 존재했던 여자들 가운데 가장 부드러운 여자였다는 사실이 우르술라의 마지막 조사에서 명확하게 밝혀졌고, 또 아마란따가 삐에뜨로 끄레스뼈를 부당한 고문을 가하는 것처럼 냉정하게 대했던 것은, 모든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복수를 하려는 의지때문이 아니었고, 또 헤리넬도 마르께스 대령에게 일부종사하기를 차일피일 미루어 결국은 그의 인생을 망치게 했던 것은, 모든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자신이 겪은 고통에서 비롯된 심술 때문이 아니라, 그 두 가지 사건이 그녀 자신의 측정할 수 없는 사랑과 극복하기 어려운 두려움 사이에서 결사적인 투쟁을 벌이다 결국은 자신의 고통스러운 마음속에 항상 지니고 있던 그 비이성적인 두려움이 승리를 거두어버린 결과라는 사실을 우르술라는 연민 섞인 통찰력으로 이해했다. 우르술라가, 단 한번도 자기의 젖을 먹지 못한 채 땅 흙과 담벼락 석회를 긁어 먹고 자랐으며, 자기의 피가 아니라 무덤 속에서도 뼈가 계속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는 그 낯선 사람들의 낯선 피가 핏줄 속에 흐르고 있던 레베까, 성미가 급하고 특이한 위를 지녔던 레베까만이 그 누구도 속박할 수 없는 진정한 용기, 우르술라 자신이 가문의 핏줄 속에흐르기를 바랐던 그 용기를 지니고 있던 유일한 여자였음을 깊이이해함으로써 뒤늦은 후회와 갑작스럽게 밀어닥친 감탄으로 인해 솟아오르는 해묵은 애정을 느끼며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그녀를 회고하기 시작했던 때도 바로 그때였다. - P7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멜라닌 모세포가 신경릉에서 나와 척추에 수직 방향으로 뻗어간다는 것을 보면, 발생 과정에는 언제든 줄무늬가 생겨날 가능성이 내재해 있다. 일반적으로 단색을 띠는 쥐나 말 등에서도 얼마든지 줄무늬 돌연변이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말과 당나귀 등의 번식 역사를 보면 부분적으로 줄무늬를 가진 동물의 탄생 사례가 아주 많다. 얼룩무늬 같은 것 말이다. 다윈도 『종의 기원』에서 줄무늬 말과 당나귀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였는데, 특히 잡종에 집중했다. 수컷 얼룩말과 암말을 교배시키면 잡종을 만들 수 있다. 이 잡종후손은 보통 줄무늬를 가진다. 하지만 암컷이 배가 하얀 말일 경우, 잡종 후손의 줄무늬는 털색이 어두운 부분에 국한하여 생긴다. 흰색소 유전자가 멜라닌 모세포의 이동에 영향을 미쳐 멜라닌 모세포가 이동할 수 있는 부분에만 줄무늬가 생긴다는 가설과 맞아 떨어지는 현상이다. 그런데 이보다 흥미로운 현상이 있다. 말-얼룩말 잡종은 부모보다 줄무늬 개수가 많아진다는 사실이다. - P304

바드의 모델에서 결정적인 요소는 줄무늬 형성 과정이 배아가 아주 작을 때 시작된다는 점이다. 실제로 털에 색소 착색이 시작되는시점으로부터 6개월 전의 일이다. 이것은 나중에 덩치가 커질 동물의 무늬 형성에서 중요한 대목이다. 무늬 발생은 어느 정도의 거리에 걸쳐서 진행되는데, 그 거리는 세포들이 서로 떨어져 있으면서도상호작용 가능한 최대 거리가 얼마냐에 달려 있다. 그런데 갓 태어난 새끼나 그보다 큰 얼룩말의 몸에서는 줄무늬 사이 간격이 너무넓기 때문에 세포들이 다른 줄무늬 세포들과 소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동물 무늬는 아주 일찍 아웃라인이 정해지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이미 확실히 자리 잡았던 설계가 나중에 커지는것뿐이다.
종간 줄무늬 개수 차이가 실제로 줄무늬 형성 과정의 시작 시기차이 때문이라면, 그것은 멜라닌 모세포 이동에 관여하는 유전자들이 활성화되는 시기가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시기의 변이란 근본적으로 조절 과정의 변화이다. 따라서 줄무늬 개수 차이는 멜라닌모세포의 이동 시기나 공간적 형태를 통제하는 유전자 스위치들에 진화적 변화가 일어난 탓일 것이다. - P306

이 장을 닫기 전에 얼룩말 논쟁으로 돌아가자. 방금 얼룩 바위주머니쥐에 적용했던 논리를 얼룩말에 적용해보자. 줄무늬의 가치를생각할 때, 왜 우리가 보는 얼룩말들은 하나같이 줄무늬를 지니는지 생각해보면 단서가 되지 않겠는가? 줄무늬가 별 의미 없는 것이라면, 어째서 줄무늬 없는 얼룩말은 존재하지 않는가? 사실인즉, 존재하기는 한다. 포유류의 경우 털색 돌연변이는 굉장히 흔한 현상이므로, 드물긴 해도 야생에서 극적인 돌연변이가 탄생하는 사례들이 있다(흰호랑이라거나 점박무늬 얼룩말). 품종 개량자들은 자연적으로일어나는 드문 변이들을 골라 오랜 세월 교배시킴으로써 새로운 종을 탄생시킨다. 얼룩말의 사촌인 말의 경우 여러 빛깔 털을 지닌 개체도 가끔 등장한다. 나는 아프리카 평원이라는 진화의 실험실이 줄무늬가 정말 중요한 속성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줄무늬에 부여된 목적이 무엇인지 우리가 모를 뿐이다. 여러 이론들 중 마음에 드는 대로 골라 생각해도 무방하겠다.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민무늬에 비해 줄무늬가 가지는 상대적 이점이 아주 사소하다 해도 줄무늬가 득세하기에는 충분하리라는 사실이다. 자연선택의 힘이(성선택도 포함된다) 어떤 형질을 획득하거나 유지하는데 강한 영향을 발휘한다는 근본적 원칙은 모든 종의 진화에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 P312

사람을 특징짓는 주요한 물리적 형질들 중에는 단독 변화가 아닌게 많다. 즉 골격과 근육 구조가 동시에 진화한 변화들이었다. 가령이족보행을 생각해보자. 이족보행을 위해서는 척추, 골반, 발, 사지의 균형이 함께 진화해야 했다. 덕분에 자유로워진 손은 새 재주들을 익히는 방향으로 진화해갔다. 침팬지도 필요하면 두 발로 걸을수 있다. 하지만 걷는 모양새가 사람과는 전혀 달라서, 무릎 관절을완전히 펴 다리를 쭉 뻗지 못한다.
초기 사람들이 이족보행을 했으리란 가설은 골격 형태를 살펴보고 내린 결론이다. 그런데 압도적인 증거는 따로 있다. 탄자니아의 라에톨리라는 고고학 발굴지에서 1976년에 발견된 증거이다. 당시고인류학자 앤드류 힐은 참으로 영장류다운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동료에게 코끼리 똥을 던지며 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우연히사람의 발자국 화석을 발견하게 되었다. 화산재 지층 위로 무려 24미터나 이어진 발자국이었다. 이 놀라운 발자국을 남긴 사람은 최소한 두 명인 것 같았는데, 한 명은 크고 한 명은 작았다. 그들은 360만 년 전에 당시 막 땅을 뒤덮은 재 위를 걸었던 것이다. 그 후 발자국은 힐이 발견하기까지 숨겨져 있었다.  - P325

사람의 DNA 서열에는 약 30억 개의 염기쌍이 있다. 그중 98.8퍼센트가 침팬지의 DNA 서열과 동일하다. 차이는 1.2퍼센트에 불과하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동물들 중에 인간과 DNA 서열 차이가 가장 적게 나는 동물이 침팬지다. 하지만 고작 1.2퍼센트라 해도 염기쌍으로 말하면 3천6백만 개다. 인간과 침팬지는 약 6백만 년 전에공통 선조로부터 갈라져 나왔으므로 차이 중 절반은 침팬지 특유의 것(침팬지의 계통에서 일어난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인간 특유의 것(인간 계통에서 일어난 것)이라 가정해도 좋겠다. 그러면 공통 선조에서 인간이 갈라져 나온 이래 변화를 일으킨 염기쌍이 약 천8백만개라는 계산이 나온다(논의의 편의를 위해 숫자를 단순화시켜 말하고있다. 염기의 삭제나 삽입. DNA 조각들의 드나듦에 대해서는 고려하지않았다).
변화한 부분 전부가 의미 있을까? 아니면 일부는 잡음에 불과할까? 천8백만 개의 차이 중 어느 부분이 진화에 기여했는지, 어떻게알 수 있을까?
물론 유전자 돌연변이가 모두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유전암호에는 중복이 많기 때문에 특정 염기가 바뀌어도 단백질에 영향이 없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조용한‘ 치환은 시간이 갈수록 누적된다. 이들을 없앨 조금의 선택압조차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 DNA 중 암호나 조절 기능에 할당된 것은 5퍼센트에 불과하기 때문에, 나머지 방대한 양의 DNA 서열에서 일어난 돌연변이들은 거의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또한 연관관계가 없는 두 사람이 드러내는 차이는 평균적으로 약 3백만 개 염기쌍으로 빚어지는 것이라는사실도 고려해야 한다. 절대 수치로 보면 엄청난 양처럼 느껴지지만 전체 DNA 염기쌍의 0.1퍼센트일 뿐이다. - P338

턱 근육 구조가 축소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는 것은 단지 음식씹는 방식이 바뀌었다는 의미만 갖지 않는다. 근육 구조는 뼈의 성장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실험에 따르면 턱 근육 성장은 두개안면 골격의 크기와 모양에 상당한 영향을 준다. 턱 근육이 축소되어 하악에 가해지는 힘이 줄어들면 두개골 뼈들이 받는 압력도 줄어들 것이다. 그러면 두개는 더욱 얇아지고 커질 수 있다. 따라서 턱근육 변화 및 이에 따른 두개골 속성 변화는 초기 호모속에서 뇌가커진 현상을 설명하는 한 요인일 수 있다. 게다가 턱 근육 축소 덕분에 하악을 보다 정교하게 통제할 수 있게 되었을 텐데, 이는 말을 하는 데 있어 중요한 조건이다.
참으로 흥미롭기 그지없는 상호연관 관계이다. 하지만 이 해부학적 변화들을 단 한 가지 돌연변이로 설명하려는 실수를 저질러서는안 되겠다. 이전까지 나름의 기능을 해왔던 MYH16 유전자를 비활성화시킨 일은 분명 주목할 만한 변화였다. 하지만 비활성화 돌연변이라는 유전적 변화가 측두근 축소 현상에 앞서 이뤄진 것인지, 순차적이거나 병렬적인 여러 변화들 중 하나로 나란히 이뤄진 것인지,
그도 아니면 측두근에서 MYH16 단백질의 역할이 더 이상 필요하지않게 된 연후에 일어난 마지막 변화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내 생각을 말하자면 나는 이것이 유일하고도 결정적인 진화적 계기였다고 단언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뒤에 설명하겠다. 사실인간 진화에 관련된 어떤 유전자에 대해서도 그런 식으로 단언하기는 힘들다.  - P344

이전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종들이 발견되었고, 하나의 먼 조상으로부터 현생인류로 곧장 내려오는 단 하나의 직선이 있기보다는 도중에 끊어진 무수한 가지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실 인간과 침팬지 계통이 갈라지는 부분에 가까운 화석들이 점점 더 많이 발견됨에 따라, ‘바로 그 조상을 찾았다는 주장은 어느 것이든 일단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한편 비교신경생물학은 이제 인간의 재능을 설명하고자 할 때 한결 섬세한 부분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뇌에 두드러진 해부적 특징들이 첫인상보다 훨씬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으며 전적으로 인간에만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게 밝혀졌기때문이다. 또한 인간을 정의하는 특징들, 가령 이족보행, 골격 형태, 두개안면 형태, 뇌 크기, 언어 등의 진화가 손에 꼽을 만한 몇 가지주요 유전자들이 선택된 결과가 아니라는 것도 거의 확실하다.
FOXP와 MYH16은 수수께끼를 풀 조각들 중 최초로 확인된 녀석들일 따름이며, 그들이 가장 중요한 조각이라거나 가장 큰 조각이라고 믿을 까닭도 없다. 결론적으로, 사람의 진화는 어떤 그림일까? 무수한 세대에 걸친 기나긴 시간 동안, 무수한 유전자들이 제각기 변이를 일으키고, 그들이 선택되고, 따라서 형태의 크기나 모양이나 조직 구성 등에 자그만 차이들이 무수히 일어남으로써 전체가 구성된 모자이크일 것이다. - P350

이처럼 진화가 반복되어 일어난 사례들을 보면, 어째서 사람들이진화 과정에서 무작위적 돌연변이가 수행하는 역할을 이해하는 데어려움을 겪었는지 알 만도 하다. 어떻게 ‘무작위적 과정으로부터 참신성과 복잡성이 등장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핵심은 두 가지 단계를 확실히 구분하는 것이다. 돌연변이로 인해 유전적 변이가 일어나는 것은 실제 전적으로 무작위적인 과정이다. 반면 변이들 중 어느 것을 존속시키고 어느 것을 버릴지 결정하는일은 무작위적이지 않은, 강력한 선택적 과정이다. 동물 게놈에는 염기쌍이 수천만 개 또는 수십억 개 있고, 무작위적 복제 오류나 물리적 손상으로 돌연변이를 일으킬 가능성은 모든 염기쌍에 동일하다. 하지만 그 모든 가능한 돌연변이들 중 극히 일부만이 포유류의 털을 생존 가능한 수준에서 바꿀 수 있으며, 큰가시고시의 가시를 끔찍한 부수적 피해 없이 축소할 수 있는 것이다. 동물의 개체군 규모가 크다면, 그리고 장구한 시간이 있다면, 아무리 드문 돌연변이라도 확률상 한 번은 일어나게 된다. 일단 그런 돌연변이가 일어나면 돌연변이가 일으키는 형질의 긍정적 변화가 선택될 것이고, 돌연변이는 갈수록 널리 개체군에 번지게 된다.
자크 모노의 역작 우연과 필연의 제목은(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투스의 금언, ‘우주의 삼라만상은 우연과 필연의 열매이다‘에서 딴것이다) 진화에서 무작위성과 선택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아름답게 표현한 말이다. 진화는 정말 우연의 산물일지 모른다. 하지만무작위로 이루어지는 돌연변이라는 복권 중에서도 어떤 숫자나 조합은 생태학적 필요라는 조건을 남보다 잘 충족시킨다. 그들이 거듭생겨나 거듭 선택되는 것이다. - P363

「종의 기원」 초판 이후 재판이 발간되기까지 그 짧은 기간 동안, 다윈은 앞서 본 유명한 맺음 문구에 단어 몇 개를 삽입하였다. ‘신에의해‘라는 문구를 집어넣어 ‘최초에 신에 의해 단 한 가지, 혹은 소수의 몇 가지 형태로 숨결이 불어넣어졌다‘로 고친 것이다. 다윈은 후에 식물학자 J. D. 후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한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저는 대중의 의견을 좇아 모세5경 식의 창조에 관한 표현을 쓴 것을 뉘우칩니다. 사실 제 말의 의도는 정체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어떤 과정으로 생명이 ‘등장했다‘는 뜻이었습니다."
단어를 삽입한 것은 비평가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였으며, 진화개념을 보다 받아들이기 쉬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한편으론 다윈의 진정한 종교적 입장이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역할도 했다. 화해의 상징이라 할 만한 이 문장. 그리고 다윈이 신앙에 대해 말하기 꺼려했다는 점을(개인적으로 주고받은 편지나 미발표 노트 등에 어느 정도 종교에 대한 견해가 드러나 있긴 하다) 바탕으로 진화와 종교를 화해시키려 한 사람들도 있다. - P371

호트는 진화를 뒷받침하는 과학 증거가 압도적인 수준이라고 판단하며, 성경 문헌은 "과학이 등장하기 전 시대에 작성된 것이므로, 그 직접적인 의미를 21세기 과학의 형식 속에 그대로 펼치려 해서는"(창조론자들의 요구처럼 말이다) 안 된다고 지적한다. 호트는 이렇게 썼다.

아직도 우리가 다윈 이전 세계가 아니라 다윈 이후 세계에 산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신학자들이 많다. 현재의 진화하는 우주는 대부분의 종교 사상들이 태어나고 자란 과거 세계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지적 토양에서 우리 신학이 살아남으려면, 신학은 진화적 용어들을 새롭게 표현할 방법을 알아야 한다. 다윈 이후 시대에 살며 신을 생각하는 우리가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또는 우리 조부모나 부모와 똑같은 생각을 할 수는 없다. 오늘날 우리는 신학의 모든 면을 진화적 용어로 다시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 P377

지금 우리 손에 놓인 것은 영국의 영광이나 미국의 영광이 아니다. 자연의 영광이다. 생물학을 깊이 이해해갈수록 그것을 즐기거나 그것으로부터 배우는 일은 적어진다니, 참으로 비극적인 아이러니아니겠는가? 우리 시대의 유산은 무엇이 될까? 자연을 귀히 여기고 보호하는 것? 아니면 나비나 얼룩말이나 그 밖의 동물들이 타일러사인이나 모아나 도도처럼 전설 속으로 사라지게 하는 것? - P38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실험실 기술자인 줄리 게이츠가 내게 현미경을 보여줬던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유충의 날개에 아름다운 점무늬가 아로새겨진, 너무나놀라운 모습이었다. 날개 하나마다 두 쌍씩 떠오른 그 점들은 정확히 일주일 뒤에 눈꼴무늬로 자라날 지점들이었다. 프레드 네이하우트가 눈꼴무늬의 중심으로 추정했던 위치를 우리는 시각적으로 확인하게 된 것이다(화보8c]. 환상적이었다.
그 점들은 우리가 연구 대상으로 삼은 십여 개의 유전자들 중 하나가 만든 것이었다. 앞서 한참 얘기한 적 있는 유전자, 바로 디스탈리스였다. 어마어마하게 흥미로운 일이었다. 초파리 및 절지동물 부속지 형성에 관여한 유전자가 나비 날개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작업을 하는 것으로 드러난 셈이기 때문이다. 물론 디스탈리스는 종래의임무도 여전히 수행하고 있었다. 즉 여타 곤충류나 절지동물에서처럼 나비 사지에서도 말초부를 발생하는 데 모종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디스탈리스가 나비 날개에서 발현하여 점무늬를 만드는 것은, 그러니까 새로운 재주인 셈이다. 사지 형성이라는 오래된 임무를 맡고 나서 한참 뒤에 새로 ‘배운‘ 재주이다(그림8-6]. 툴킷 단백질 활동은 전적으로 맥락에 달려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디스탈리스는 특정 위치 및 시기에는 변함없이 사지 형성 역할을 수행한다. 다만 날개 무늬에서의 작업은 그와는 또 다른 위치 및 시기의 일로서, 전혀 다른 형태로 통제되고 있는 것이다.
디스탈리스는 날개에서 11 - P268

남아메리카 및 중앙아메리카에 서식하는 헬리코니우스속 나비는 경고색을 띤다. 주로 붉은색과 노란색인데, 포식자들에게 먹지말 것을 알리는 색깔이다. 여러 지역에 헬리코니우스속 나비들을 모방한 의태형들이 있다. 같은 지역에 사는 나비들은 종이 달라도 날개 무늬가 비슷한 반면, 같은 종이라도 다른 지역에 서식하면 무늬가 상당히 다르다. 브라질, 에콰도르, 페루 등의 서식지에서 같이 사는 H. 멜포메네 종과 H. 에라토 종은 서로 비슷하게 생겼지만, 같은종이라도 다른 지역에 사는 것들의 무늬는 꽤 차이 난다[화보8k]. 일반적으로 나비의 포식자인 새들의 종류가 지역마다 다르기 때문에, 나비들이 서로 다른 선택압에 적응하기 위해 자기 지역 포식자를 대응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형태를 취했으리라 설명할 수 있다. 헬리코니우스속 나비 날개의 크기, 모양, 띠무늬와 빗살무늬 색깔 등의 편차를 만드는 유전적 차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개체군 사이에 드러나는 차이들은 대개 몇 종류 안 되는 유전자로 통제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 P28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