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메모도 책도 초조함도 없이 우리 앞에 서 있었다.
교단은 그녀의 핸드백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고 미소를 짓더니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이 강의 이름이 ‘문화와 문명‘이라는 건 다들 알고 있겠죠. 하지만 불안해하지 마세요. 여러분한테 원그래프를 마구 던지지는 않을 거니까. 여러분 머리를 이런저런 사실로꽉 채우려 하지도 않을 거예요. 거위 배 속에 사료를 채우듯이. 그래봐야 간만 부어올라 건강에 나쁘겠죠. 다음 주에 여러분한테 참고도서 목록을 나눠줄 텐데 읽고 말고는 전적으로 여러분의 선택에 맡겨요. 그걸 무시한다고 해서 점수를손해 보지도 않을 거고 맹렬하게 파고든다 해서 점수를 더따지도 못할 거예요. 당연히 여러분은 성인이고 나는 여러분을 성인으로 여기고 가르칠 겁니다. 교육의 최고 형태는, 그리스인이 알고 있었듯이, 협력이에요. 하지만 나는 소크라테스가 아니고 여기에는 플라톤이 모여 있는 게 아니죠. 그럼에도 우리는 대화를 나눌 거예요. 동시에 여러분은 이제 초등학교에 다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나는 나약한 사람을 달래려고 격려하거나 공허한 칭찬을 하지 않을 거예요. 여러분가운데 몇 사람에게 나는 당연히 최고의 선생이 아니겠죠. 여러분 기질과 성품에 가장 잘 맞는 선생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그럴 사람들을 위해 미리 말해두는 겁니다. 물론 나는 여러분이 이 강의를 흥미롭게 여기기를, 사실 즐거워하기를 바라요. 그러니까 엄격한 즐거움이죠. 이 두 말은 양립 불가능한 게 아닙니다. 또 나는 그 대가로 여러분도 엄격하기를 기대해요. 준비 없이 대충 하는 건 맞지 않아요. 내 이름은 엘리자베스 핀치예요. 고맙습니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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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은 가벼운 우울증에도 완전히 무능력자가 되는 반면어떤 이들은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인생에서 무언가를 이루어 낸다.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물질 남용에 대해 연구하는 데이비드 맥다월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고난 속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들이 그런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덜 고통스러워서가 아닙니다." 절대적인 평가를 내린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다음은 런던대학교 아동심리학자 데버러 크리스티의 말이다. "유감스럽게도 자살이나 고통, 슬픔의 척도는 존재하지 않아요. 우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아픈지, 어떤 증세들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가 없지요. 그저 환자의 말을 들어 주고 그들이느끼는 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뿐입니다." 질환과 성격은 상호작용을 하기 때문에 어떤 환자들은 심각한 증세들도 잘 견디고, 어떤 환자들은 거의 아무것도 견디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우울증에 무릎을 꿇고, 어떤 이들은 그것과 맞서 싸운다. 우울증은 심각하게 의욕을 저하시키기 때문에 그것에 굴복하지 않고 꿋꿋이 견디려면 상당한 생존 욕구가 필요하다. 뭐니 뭐니 해도 유머 감각이 회복의 가장 강력한 척도이며, 그것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가장 강력한 척도이기도 하다.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다면 희망이 있는 것이다. - P707

인간의 표준이 곧 현실은 아니다. 우울증을 완화시키고 결국슬픔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약물들과 치료법들의 발전은 무엇을의미할까? 진화심리학자 랜돌프 네스의 말을 들어 보자. 이제 우리는 많은 신체적 고통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겪는 신체적고통 중에서 과연 어느 정도가 진짜로 필요한 것일까? 5퍼센트 정도? 상해에 대한 경보 역할을 하는 통증은 필요하지만 지속적인 통증은 꼭 필요한 것일까? 만성적인 류머티즘성 관절염이나 대장염, 편두통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물어보라! 그렇다면 우리가 겪는 심리적 고통 중에서 진짜 필요한 건 과연 어느 정도일까? 5퍼센트 이상?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날 알약을 먹고 고통스러운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어떨까?" 프랑스인 정신의학자 쥘리아 크리스테바는 우울증의 심층적인 심리학적 기능을 밝혀냈다. "우리를 압도하고 마비시키는 슬픔은 광기에 대한 방패 노릇을 한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조다 더 많이 슬픔에 의존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 P716

우울증의 최악의 상태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외로움이며 나는 그 체험을 통해 친밀감이라는 가치를 배웠다. 어머니도 암투병중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모두 눈물이 날 정도로 잘해 주지만 내게 적대적으로 변한 이 몸뚱이 속에 혼자 있는 것이 너무도 끔찍하구나." 자신에게 적대적으로 변한 정신 속에 홀로 있는 것도 끔찍한 일이다. 당신은 그런 덫에 걸려 있는 사람에게 무엇을 해 줄 수있겠는가? 사랑만으로는 우울증의 덫에서 끌어낼 수 없다(일시적으로 우울한 기분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는 있겠지만). 용케 그가 있는 곳에 함께 있어 줄 수는 있지만 타인의 정신의 암흑 속에 꼼짝않고 앉아 있는 것은 (밖에서 지켜보는 것보다는 낫더라도) 유쾌한 일이 아니다. 당신은 멀리서 속을 태울 수도 있고 그에게 다가갈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 그에게 다가가는 방법은 침묵을 지키는 것일수도 있으며 심지어 냉담한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외부인인 당신이 임의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야 할 문제다. 우울증은 그 무엇보다 외로운 것이지만 외로움의 반대 되는 것을 길러 낼수 있다. 나는 우울증으로 인해 더 사랑하고 사랑받게 되었으며, 이책을 위해 내가 인터뷰한 많은 사람들도 그러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울증에 걸린 친구나 친척을 위해 무엇을 해 주어야 하는지 물으면 나는 그의 고립감을 덜어 주라고 말한다. 함께 차를 마셔도 좋고 긴 대화를 나누어도 좋고, 말없이 곁에 앉아 있어도 좋다. 기꺼운 마음으로 상황에 맞는 방법을 택하면 된다. - P719

우울증이 사라지는 행복한 날이 도래하면 우리는 많은 것들을 잃게 될 것이다. 만일 지구의 생명체들이 비가 내리지 않아도 살 수있다면, 만일 우리가 기상 현상을 정복하여 화창한 날씨가 계속되게 만든다면 구름 낀 날들과 여름의 폭풍우를 그리워하게 되지 않을까? 몇 개월 동안 음울한 날씨가 이어지는 영국에서 드물게 보는태양은 적도 지방의 태양보다 맑고 눈부시며, 내가 최근에 느끼는행복 또한 과거에는 상상도 못 했던 만큼 강렬하다. 나는 묘하게도나의 우울증을 사랑한다. 우울증 체험은 좋아하지 않지만 우울증 그 자체는 사랑한다. 나는 우울증이 지나간 뒤의 나를 사랑한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둔하고 무딘 만큼 만족을 느낀다. " 테네시 윌리엄스도 행복에 대해 정의해 달라고 하자 "무감각"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지옥을 체험하고 살아남았기에 다시 지옥에 가게 되더라도 살아남을수 있을 것임을 안다. 나는 좀 이상한 방식으로이기는 하지만)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만큼 자신감에 차 있다. 그것으로도 우울증은 거의 완전히는 아니지만) 가치를 지닌다. 나는 다시는 자살을 시도하지 않을 것이며, 전쟁이 터지거나 내가 탄 비행기가 사막에 추락한다 해도 쉽게 목숨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아무래도 나의 삶과 나는 서로 반대 입장에서 서로를 증오하며 서로에게서 벗어나기를 원하면서도 영원히 결합되어 있는 듯하다.
우울증의 반대는 행복이 아니라 활력이며, 이 글을 쓰고 있는나의 삶은 슬플 때조차 생기에 차 있다. 어쩌면 내년쯤 나는 다시 무너질 수도 있으며 우울증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7년 전 지옥이 기습적으로 찾아오기 전까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나의 일부분, 영혼이라고 불러야 할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멋진 발견이었다. 나는 거의 날마다 순간적인 절망감을 맛보며,
늘 다시 무너지기 시작한 건 아닌지 걱정한다. 그리고 번개처럼 스치는 것이기는 하지만 간담이 서늘한 충동들에 젖는다. 차에 치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신호등이 녹색으로 바뀔 때까지 이름악물고 참고 서 있어야 하고, 손목을 긋거나 입에 권총을 물거나 영원히 깨지 않는 잠에 빠져드는 상상을 한다. 나는 그런 감정들이 지긋지긋하지만 그것들로 인해 삶을 더 깊숙이 들여다보게 되었고,
살아야 할 이유들을 발견하고 그 이유들에 매달리게 되었음을 안다. 나는 지금까지의 내 삶을 한탄하지는 않는다. 나는 날마다 (가끔은 투계처럼 용감하게, 가끔은 그 순간의 논리에 반하여) 살아 있기로 선택한다. 그것이야말로 드문 기쁨이 아닐까?  - P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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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우리가 우울증이라 부르는 것은 분명한 경계가 없는 상태들의 특수한 조합이라는 것이다. "기침도 항생제에 반응하는 경우(결핵), 습도의 변화에 반응하는 경우(폐기종), 심리치료에반응하는 경우(신경성 기침), 화학요법을 요하는 경우(폐암), 그리고 고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어떤 기침은 치료하지 않고 방치하면 치명적인 결과를 낳고, 어떤 기침은 만성적이고, 어떤 기침은 일시적이고, 어떤 기침은 계절성이며, 어떤 기침은 저절로 사라진다.
어떤 기침은 바이러스 감염과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기침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기침을 하나의 질병으로 보기보다 다양한 질병들의한 증세로 정의한다. 기침 그 자체에도 목이 아프고 잠을 못 자고 말도 잘 못하고 목구멍이 간질간질하고 호흡이 어려운 증세들이 따르지만 말이다. 우울증도 기침과 마찬가지로 질병의 한 종류라기보다증세들을 지닌 하나의 증세다. 만일 우리가 기침을 유발하는 질병들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난치성 기침"에 대한 이해의 토대를 가질수 없을 것이며, 왜 어떤 기침은 치료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지에 대해 온갖 억측들이 나올 것이다. 현재로서는 우울증의 상이한 유형들과 그 각각의 의미를 가려낼 분명한 체계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우울증은 다양한 원인들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여러 각도에서 연구되어야 한다. 현재 우리는 정신분석학, 생물학, 외적 환경에서 조금씩 취해 아무렇게나 버무려 놓는 식으로 우울증에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우울한 정신 상태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려면 한데 뒤엉켜있는 우울증과 슬픔과 성격과 병을 분리해야 한다. - P662

우울증은 동요 상태의 동면이며, 에너지를 보존하는 침묵이자 위축이며, 모든 신체 조직들의 둔화다. (이것은 우울증이 과거의 잔재라는 생각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울증 환자들이 침대를 그리워하고 집을 나서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동면을 연상시킨다. 동물들은 들판 한가운데서가 아니라 아늑한 굴이라는 안전한 장소에서 동면을 취하기 때문이다. 우울증은 안전한 환경에서 일어나는 자연적인 위축이라는 가설도 있다. 국립정신건강연구소에서 잠에 대해 연구하는 토머스 웨어는 이렇게 말했다. "우울증은 잠과 관련이 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잠을 자는 곳, 집에 있는 것과 관련이 깊기 때문이다." 우울증은 새들이 몇 주씩 알을 품고 있도록 만드는 호르몬인 프로락틴(황체자극호르몬)의 수치 변화에 따른 것일 수 있다. 그것 또한 일종의 위축이며 비활동이다. 토머스 웨어는 가벼운 우울증에 대해 이런 의견을 내놓았다. "무리를 상대할자신이 없는 구성원들은 높은 곳에도 올라가지 않고 굴에도 들어가지 않고 혼자만 눈에 띄지도 않고 낯선 자들을 피했을 것이며, 위험을 감지하면 집에 숨을 것이다. 그들은 필시 장수했을 것이고 새끼들을 많이 낳았을 것이다." - P668

확실히 우울증은 견디기 힘든 부작용을 초래하는 행동들을 차단한다. 예를 들어 지나친 스트레스는 우울증을 유발하며 우울증은 스트레스를 피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지나친 수면 부족은 우울중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우울증은 우리에게 더 많은 수면을 취하게 한다. 우울증의 주요 기능 가운데 하나는 비생산적인 행동을 막는 것이다. 우울증은 우리의 자원이 잘못 투자되었으며 다른 투자처를 찾아야 한다는 표시가 되는 경우가 많다. 현대 사회에 이런 사례는 많다. 바이올린 연주자로 성공하려 하는 여성이 있었는데 그녀를 가르치는 선생님들과 동료들은 그녀의 목표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래도 꿈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녀는 심각한 우울증에 걸렸는데 약물치료도 다른 치료들도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결국 그녀가 음악을 포기하고 자신이 재능을 갖고 있는 분야에 정력을 바치게 되자 우울증이 저절로 가셨다!" 이처럼 우울증은 끔찍한 것이긴하지만 동기를 부여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 P675

우울증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들 가운데 가장 설득력이 강한것은 우울증이 유익한 기능들을 수행하는 메커니즘의 불발이라는주장이다. 우울증은 대개 슬픔에서 생겨나는 슬픔의 변종이다. 멜랑콜리를 애도와 분리해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우울증의 원형은 슬픔 속에 있다. 우울증은 우리에게 유익한 메커니즘인 슬픔이장애를 일으킨 것일 수 있다. 심장은 우리가 다양한 환경과 기후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온몸에 피를 공급한다. 우울증은 손가락과 발가락에 피를 공급하지 못하는 심장처럼 더 이상 고유의 장점을 갖지 못한 극단 상태다.
슬픔은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다. 나는 슬픔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애착의 형성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두려움을 느낄 만큼의 상실감을 겪지 않는다면 강한 애정을 가질 수 없다. 사랑이 깊고넓어지려면 슬픔이 개재되어야 한다. 사랑하는 존재에게 해를 입히지 않으려는 (더 나아가 그들을 도우려는) 마음은 종의 보존에 기여한다. 사랑은 우리가 세상의 고난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계속 살아 있게 만들어 준다. 만일 우리가 자의식만 키우고 사랑은 키우지않았더라면 인생의 돌팔매와 화살을 견딜 수 없었으리라. 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결과를 본 적은 없지만, 사랑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삶에 대한 집착도 강하고 사랑받기도 쉬우리란 것이 나의 믿음이다. 케이 재미슨의 말을 들어 보자. "많은 사람들이 천국을문제가 없는 곳이라기보다 무한한 강렬함과 다양성이 있는 곳으로여긴다. 우리는 감정이라는 연속체의 극단을 제거하고 싶어 하기는하지만 그것을 두 동강 내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고통을 겪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과 감정의 폭을 갖지 않기를 원한다고말하는 것 사이에는 미세한 차이만이 존재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처받기 쉬운 상태가 되는 것이고, 그런 상태를 거부하는 것은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다. - P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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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구라타가 무릎 위에서 주먹을 움켜쥐더니, 출입문 밖에서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줄기 너머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교코는 도서관 책상에 웅크리고 앉아 눈에 핏발을 세우고 관보 페이지를 뒤적거렸습니다. 아버지와 비슷한 사람이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아니, 그게 아니죠."
구라타의 목소리에 채찍질을 당한 듯한 고통의 빛이 스며들었다.
"죽어줘, 제발 죽어줘, 아빠, 교코는 그렇게 기도하면서 페이지를 들척였습니다. 자기 부모예요. 그런데 제발 부탁이니 죽어달라고 애원하는겁니다. 전 더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교코의 그런 모습이 비정하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제 안의 제방이 무너져내렸습니다."
혼마의 뇌리에 조용한 도서관 열람실 한구석의 풍경이 떠올랐다. 시험 공부를 하는 학생, 친구와 속닥이며 숙제를 하는 여학생들, 웅크리고서 잡지를 들척이는 노인, 작정하고 잠든 지친 영업사원들 사이에 뒤섞여서 죽어라 관보 페이지를 뒤지는 신조 교코의 모습이. 앞으로 푹수그린 그녀의 머리, 가녀린 목덜미. 이따금 메마른 입술을 핥고, 지친눈을 깜박이고, 지그시 눈꺼풀을 누르는 모습까지 떠오르는 것 같았다.
관보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제발 부탁이니 죽어줘. - P381

그리고 페이지를 넘기던 손을 멈추고 문득 고개를 든 순간, 교코는 책상 맞은편에 앉아 있는 갓 결혼한 남편의 눈에서 발견했을 것이다. 비난보다 한층 심한 길바닥에 떨어진 오물을 바라보는 듯한 혐오의 빛을. 남편이 멀어져간다. 그녀는 깨달았을 것이다. 말보다 훨씬 더 명백하게. 책상 아래로 서로의 발을 스치는 일도, 남편이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다가오는 일도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그는 온몸으로 뒷걸음치려 하고 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떠돌이 죽음을 맞은 사람들의 목록에서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내려 발버둥치고 있었다. 아무리 그녀를 사랑하고 이해한다 믿었더라도 유복하고 따뜻한 가정에서 자란 구라타는 교코의 그런 모습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을 비난하는 건 가혹하다. 혼마는 생각했다.
"자기 얼굴을 한번 거울로 보라고 말해버렸습니다."
구라타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마치 악마 같다고요."
비로소 손에 넣었다고 믿었던 안정된 삶이 멀어져간다. 붙잡아보려고 너무 세게 움켜쥐었던 탓에, 그녀의 손안에서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혼마의 상상은 적중했다. 신조 교코는 고독했다. 가혹할 정도로 외톨이였고, 뼈를 에는 매서운 바람을 혼자 감당해야 했다.
제발 부탁이야. 부탁이니 부디 죽어줘, 아빠.
가까스로 알아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구라타가 말했다. "우리가 정식으로 이혼한 것은 그로부터 보름 후였습니다." - P382

그때까지 살아온 장소-나고야의 싸구려 숙소와 아파트에서 숙식을해결하며 일했던 이세시의 여관과 구라타 집안 저택에서, 그후 한동안끔찍한 경험을 했던 낯선 마을에서, 오사카 센리추오의 맨션에서, 그리고 나무블록처럼 아기자기하게 생긴 도쿄 호난초의 빌라에서, 교코는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알뜰 볶음밥을 만들어줬다고 이치키 가오리는 말했다). 비 오는 날이면 우산을 펼치고서현관문 밖으로 나가고, 밤에 잠들기 전에 커튼을 치면서 달을 올려다보고, 구두를 닦고, 꽃에 물을 주고, 신문을 읽고, 참새에게 빵을 던져주며살아왔을 것이다. 그런 생활은 때로는 두렵고, 때로는 슬프고 가난하고, 또한 때로는 행복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종일관 변하지 않은 것은 그녀가 도망자였다는 사실이다.
빚쟁이에게 붙잡혀 지옥 같은 삶을 강요당했을 때조차 그녀는 여전히 도망자였다. 불공평한 운명에서 도망치려 했다. 늘 도망치려 발버둥쳤다.
혹시 그녀가 그쯤에서 삶을 포기해버렸다면, 그후의 사건들은 결코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도망자로남았다. - P423

그러나 혼마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고즈에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쉴새없이 뭐라고 얘기하는 신조 교코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얼마나 작고 가냘픈 사람인가.
마침내 찾아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끝에 이르렀다.
계단을 내려간 다모쓰가 고즈에와 교코의 자리로 다가갔다. 고즈에는 미리 약속한 대로 현명하게 인내하며 이쪽을 다모쓰 쪽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 교코의 귀고리가 반짝거리고, 가냘픈 어깨가 즐거운 듯 흔들렸다.
너무 커서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표식을 막 발견한 것 같은 신선한 경이로움을 느끼며, 혼마는 생각했다.
이쪽에서 뭐라고 묻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나는 당신을 만나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던 이야기를, 당신 혼자 짊어져온 이야기를 이리저리 도망쳐온 세월에 숨죽여 살아온 세월에, 당신이 남몰래 쌓아온 이야기를.
시간은 충분하다.
신조 교코••••••
다모쓰가 지금 막 그 어깨에 손을 얹었다. - P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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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기운이 몸속으로 파고들어도 가타세와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까지꽤 많이 걸어다녔다. 도중에 삼각공원인가 하는 곳에서 돌 벤치에 앉아삼십 분쯤 시간을 보냈다. 주위는 아베크족투성이였다. 시간이 더 지나면 잔뜩 취한 주정뱅이와 부랑자들의 잠자리가 될 성싶은, 빈말로라도좋은 환경이라고 하기 힘든 장소에 위치한 딱히 아름답지도 않은 공원인데도 사랑을 속삭이는 데는 에너지만 있으면 그만이라는 뜻일까.
벤치에 앉아 혼마가 생각한 것은 신조 교코도 누군가와 함께 이곳을 찾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가만히 앉아 지나가는 젊은이들을 바라보았을까. 먼지 낀 밤거리를 한가로이 거닐며 네온사인을 올려다보고, 정체된 자동차 행렬을 가로질러 도로를 건너고, 쇼윈도 안을 기웃거리고......
그녀도 그런 행동을 했을까. 그렇게 삶을 즐겼을까. 줄곧 그런 생각을 하며 차디찬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풍경이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눈 속에만 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앉아 있어도 혼마는 신조 교코가 본 오사카 거리를 볼 수 없었다. 그것이 몹시 안타까웠다. - P317

강한 의지가 엿보이는 신조 교코의 눈빛. 구리사카 가즈야 곁에서. 또는 로즈 라인의 가타세 앞에서 사라졌을 때의 그 비정함. 민첩함. 그것은 그녀가 모든 의미에서 고독했다는 인상을 자아냈다.
또한 혼마는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들었다. 신조 교코는 고독했기 때문에, 외톨이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신분을 사칭하고 가로챌 수 있지않았을까. 쫓기고 도망치는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고 구원의 손길을 뻗어주려는 남자가 단 한 사람이라도 곁에 있었다면 그녀는 ‘신조 교코‘라는 자기 이름을 버리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협력자의 힘을 빌려 온전히 신조 교코인 채로 도망치는 길을 고민했을 것이다. 이름이란 타인에게 불리고 인정받음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다. 신조 교코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그녀와 떨어질 수 없는 인간이 주위에 존재했다면.
그녀는 결코 펑크 난 타이어를 버리듯 간단하게 ‘신조 교코‘라는 이름을 내동댕이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이름에는 사랑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 P319

"세키네 씨가 가즈야랑 다투면서까지 갖고 싶어했던 보석이 뭐였는지 내가 알아맞혀볼까요?"
"어, 그걸 아세요?"
"알지."
혼마는 평소답지 않게 가슴이 살짝 내려앉는 느낌을 받으며 말했다.
"에메랄드죠?"
미짱이 감탄의 소리를 냈다. "대단해요.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세키네 씨는 초록빛이 아름답고 희소가치도 높다면서 에메랄드를 굉장히 갖고 싶어했어요."
혼마는 웃으면서 뒷말을 적당히 얼버무렸다. 그리고 남몰래 속으로생각했다.
에메랄드는 5월의 탄생석이니까. 그리고 신조 교코는 5월에 태어났으니까.
교코는 자신의 진짜 탄생석으로 만든 반지를 받길 원했던 것이다. 결혼반지로.
미짱의 목소리가 들렸다. "혼마 씨, 세키네 씨가 돌아오면 사장님과 제가 많이 걱정한다고 전해주세요. 정말 보고 싶어한다고요."
약속하죠. 라고 대답하며 전화를 끊는 순간, 혼마는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처음으로 신조 교코를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보고 싶어한다고. - P335

"그애가 신용카드 삼매경에 빠진 까닭은, 그렇게 하면 착각에 빠져서살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착각?"
"네, 그렇죠." 후미에가 두 손을 활짝 펼쳐 보이며 말했다.
"돈도 없지. 학력도 없지. 딱히 이렇다 하게 내세울 능력도 없어요. 얼굴 하나로 먹고살 만큼 예쁜 것도 아니고.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고. 삼류 이하 회사에서 묵묵히 사무나 봐야 하죠. 그런 인간이 마음속으로 텔레비전이나 소설이나 잡지에서 보고 듣는 풍요로운 생활을 그려보는거예요 옛날에는 그나마 꿈을 꾸는 선에서 끝났어요. 그게 아니면 어떻게든 그 꿈을 실현하려고 열심히 노력했죠. 그래서 실제로 출세한 사람도 있을 테고, 나쁜 길로 빠져 쇠고랑을 찬 사람도 있었겠죠. 그래도옛날에는 얘기가 간단했어요. 방법이야 어떻든 자기 힘으로 그 꿈을 이루거나 현재 상태에 만족하고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 안 그래요?"
다모쓰는 말이 없었다. 혼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말을 재촉했다.
"그런데 지금은 달라요. 꿈을 이룰 수는 없다. 그렇지만 포기하긴 억울하다. 그러니 꿈을 이룬 것 같은 기분이라도 느껴보자. 그런 기분에젖어보자. 안 그래요? 지금은 방법이 많으니까요. 쇼코의 경우는 어쩌다 그게 쇼핑이나 여행처럼 돈을 쓰는 방향으로 나갔을 뿐이에요. 그런상황에서, 분별없이 쉽게 돈을 빌려주는 신용카드나 신용대출이 나타난 것뿐이죠" - P343

"언젠가 남편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제법 그럴듯한 소리를 하는구나생각했죠. 저기. 뱀이 탈피하는 이유가 뭔지 알아요?"
"탈피?"
"뱀은 허물을 벗잖아요? 그거 실은 목숨 걸고 하는 거래요. 그러니 에너지가 엄청나게 필요하겠죠. 그런데도 허물을 벗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혼마보다 앞서 다모쓰가 대답했다. "성장하기 위해서 아닌가요?"
후미에가 웃었다. "아니에요. 목숨 걸고 몇 번이고 죽어라 허물을 벗다보면 언젠가 다리가 나올 거라 믿기 때문이래요. 이번에는 꼭 나오겠지, 이번에는 하면서."
다리 따위 없어도 상관없잖아요. 뱀은 뱀이니까. 그냥 뱀이니까. 후미에가 중얼거렸다.
"그런데도 뱀은 생각해요. 다리가 있는 게 좋다. 다리가 있는 게 행복하다고. 거기까지가 우리 남편의 학설. 그리고 여기부터는 내 학설인데, 이 세상에는 다리를 원하지만 허물벗기에 지쳐버렸거나 게으름뱅이거나 벗는 방법을 모르는 뱀이 수없이 많다는 거죠. 그래서 그런 뱀들에게 다리가 있는 것처럼 비춰주는 거울을 파는 뱀도 있다는 말씀.
그리고 뱀들은 빚을 내서라도 그 거울을 사고 싶어하는 거예요."
난 그저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세키네 쇼코는 미조구치 변호사에게 그렇게 말했다.
혼마는 기억을 떠올렸다. 예의 선로 전환기의 이미지를. 사람들은 대체 거기서 무엇을 보고 정보를 좇아가는 걸까라는 의문을.
이번에는, 이번에는 꼭.
- P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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