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구라타가 무릎 위에서 주먹을 움켜쥐더니, 출입문 밖에서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줄기 너머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교코는 도서관 책상에 웅크리고 앉아 눈에 핏발을 세우고 관보 페이지를 뒤적거렸습니다. 아버지와 비슷한 사람이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아니, 그게 아니죠." 구라타의 목소리에 채찍질을 당한 듯한 고통의 빛이 스며들었다. "죽어줘, 제발 죽어줘, 아빠, 교코는 그렇게 기도하면서 페이지를 들척였습니다. 자기 부모예요. 그런데 제발 부탁이니 죽어달라고 애원하는겁니다. 전 더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교코의 그런 모습이 비정하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제 안의 제방이 무너져내렸습니다." 혼마의 뇌리에 조용한 도서관 열람실 한구석의 풍경이 떠올랐다. 시험 공부를 하는 학생, 친구와 속닥이며 숙제를 하는 여학생들, 웅크리고서 잡지를 들척이는 노인, 작정하고 잠든 지친 영업사원들 사이에 뒤섞여서 죽어라 관보 페이지를 뒤지는 신조 교코의 모습이. 앞으로 푹수그린 그녀의 머리, 가녀린 목덜미. 이따금 메마른 입술을 핥고, 지친눈을 깜박이고, 지그시 눈꺼풀을 누르는 모습까지 떠오르는 것 같았다. 관보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제발 부탁이니 죽어줘. - P381
그리고 페이지를 넘기던 손을 멈추고 문득 고개를 든 순간, 교코는 책상 맞은편에 앉아 있는 갓 결혼한 남편의 눈에서 발견했을 것이다. 비난보다 한층 심한 길바닥에 떨어진 오물을 바라보는 듯한 혐오의 빛을. 남편이 멀어져간다. 그녀는 깨달았을 것이다. 말보다 훨씬 더 명백하게. 책상 아래로 서로의 발을 스치는 일도, 남편이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다가오는 일도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그는 온몸으로 뒷걸음치려 하고 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떠돌이 죽음을 맞은 사람들의 목록에서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내려 발버둥치고 있었다. 아무리 그녀를 사랑하고 이해한다 믿었더라도 유복하고 따뜻한 가정에서 자란 구라타는 교코의 그런 모습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을 비난하는 건 가혹하다. 혼마는 생각했다. "자기 얼굴을 한번 거울로 보라고 말해버렸습니다." 구라타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마치 악마 같다고요." 비로소 손에 넣었다고 믿었던 안정된 삶이 멀어져간다. 붙잡아보려고 너무 세게 움켜쥐었던 탓에, 그녀의 손안에서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혼마의 상상은 적중했다. 신조 교코는 고독했다. 가혹할 정도로 외톨이였고, 뼈를 에는 매서운 바람을 혼자 감당해야 했다. 제발 부탁이야. 부탁이니 부디 죽어줘, 아빠. 가까스로 알아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구라타가 말했다. "우리가 정식으로 이혼한 것은 그로부터 보름 후였습니다." - P382
그때까지 살아온 장소-나고야의 싸구려 숙소와 아파트에서 숙식을해결하며 일했던 이세시의 여관과 구라타 집안 저택에서, 그후 한동안끔찍한 경험을 했던 낯선 마을에서, 오사카 센리추오의 맨션에서, 그리고 나무블록처럼 아기자기하게 생긴 도쿄 호난초의 빌라에서, 교코는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알뜰 볶음밥을 만들어줬다고 이치키 가오리는 말했다). 비 오는 날이면 우산을 펼치고서현관문 밖으로 나가고, 밤에 잠들기 전에 커튼을 치면서 달을 올려다보고, 구두를 닦고, 꽃에 물을 주고, 신문을 읽고, 참새에게 빵을 던져주며살아왔을 것이다. 그런 생활은 때로는 두렵고, 때로는 슬프고 가난하고, 또한 때로는 행복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종일관 변하지 않은 것은 그녀가 도망자였다는 사실이다. 빚쟁이에게 붙잡혀 지옥 같은 삶을 강요당했을 때조차 그녀는 여전히 도망자였다. 불공평한 운명에서 도망치려 했다. 늘 도망치려 발버둥쳤다. 혹시 그녀가 그쯤에서 삶을 포기해버렸다면, 그후의 사건들은 결코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도망자로남았다. - P423
그러나 혼마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고즈에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쉴새없이 뭐라고 얘기하는 신조 교코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얼마나 작고 가냘픈 사람인가. 마침내 찾아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끝에 이르렀다. 계단을 내려간 다모쓰가 고즈에와 교코의 자리로 다가갔다. 고즈에는 미리 약속한 대로 현명하게 인내하며 이쪽을 다모쓰 쪽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 교코의 귀고리가 반짝거리고, 가냘픈 어깨가 즐거운 듯 흔들렸다. 너무 커서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표식을 막 발견한 것 같은 신선한 경이로움을 느끼며, 혼마는 생각했다. 이쪽에서 뭐라고 묻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나는 당신을 만나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던 이야기를, 당신 혼자 짊어져온 이야기를 이리저리 도망쳐온 세월에 숨죽여 살아온 세월에, 당신이 남몰래 쌓아온 이야기를. 시간은 충분하다. 신조 교코•••••• 다모쓰가 지금 막 그 어깨에 손을 얹었다. - P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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