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기운이 몸속으로 파고들어도 가타세와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까지꽤 많이 걸어다녔다. 도중에 삼각공원인가 하는 곳에서 돌 벤치에 앉아삼십 분쯤 시간을 보냈다. 주위는 아베크족투성이였다. 시간이 더 지나면 잔뜩 취한 주정뱅이와 부랑자들의 잠자리가 될 성싶은, 빈말로라도좋은 환경이라고 하기 힘든 장소에 위치한 딱히 아름답지도 않은 공원인데도 사랑을 속삭이는 데는 에너지만 있으면 그만이라는 뜻일까. 벤치에 앉아 혼마가 생각한 것은 신조 교코도 누군가와 함께 이곳을 찾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가만히 앉아 지나가는 젊은이들을 바라보았을까. 먼지 낀 밤거리를 한가로이 거닐며 네온사인을 올려다보고, 정체된 자동차 행렬을 가로질러 도로를 건너고, 쇼윈도 안을 기웃거리고...... 그녀도 그런 행동을 했을까. 그렇게 삶을 즐겼을까. 줄곧 그런 생각을 하며 차디찬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풍경이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눈 속에만 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앉아 있어도 혼마는 신조 교코가 본 오사카 거리를 볼 수 없었다. 그것이 몹시 안타까웠다. - P317
강한 의지가 엿보이는 신조 교코의 눈빛. 구리사카 가즈야 곁에서. 또는 로즈 라인의 가타세 앞에서 사라졌을 때의 그 비정함. 민첩함. 그것은 그녀가 모든 의미에서 고독했다는 인상을 자아냈다. 또한 혼마는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들었다. 신조 교코는 고독했기 때문에, 외톨이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신분을 사칭하고 가로챌 수 있지않았을까. 쫓기고 도망치는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고 구원의 손길을 뻗어주려는 남자가 단 한 사람이라도 곁에 있었다면 그녀는 ‘신조 교코‘라는 자기 이름을 버리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협력자의 힘을 빌려 온전히 신조 교코인 채로 도망치는 길을 고민했을 것이다. 이름이란 타인에게 불리고 인정받음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다. 신조 교코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그녀와 떨어질 수 없는 인간이 주위에 존재했다면. 그녀는 결코 펑크 난 타이어를 버리듯 간단하게 ‘신조 교코‘라는 이름을 내동댕이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이름에는 사랑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 P319
"세키네 씨가 가즈야랑 다투면서까지 갖고 싶어했던 보석이 뭐였는지 내가 알아맞혀볼까요?" "어, 그걸 아세요?" "알지." 혼마는 평소답지 않게 가슴이 살짝 내려앉는 느낌을 받으며 말했다. "에메랄드죠?" 미짱이 감탄의 소리를 냈다. "대단해요.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세키네 씨는 초록빛이 아름답고 희소가치도 높다면서 에메랄드를 굉장히 갖고 싶어했어요." 혼마는 웃으면서 뒷말을 적당히 얼버무렸다. 그리고 남몰래 속으로생각했다. 에메랄드는 5월의 탄생석이니까. 그리고 신조 교코는 5월에 태어났으니까. 교코는 자신의 진짜 탄생석으로 만든 반지를 받길 원했던 것이다. 결혼반지로. 미짱의 목소리가 들렸다. "혼마 씨, 세키네 씨가 돌아오면 사장님과 제가 많이 걱정한다고 전해주세요. 정말 보고 싶어한다고요." 약속하죠. 라고 대답하며 전화를 끊는 순간, 혼마는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처음으로 신조 교코를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보고 싶어한다고. - P335
"그애가 신용카드 삼매경에 빠진 까닭은, 그렇게 하면 착각에 빠져서살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착각?" "네, 그렇죠." 후미에가 두 손을 활짝 펼쳐 보이며 말했다. "돈도 없지. 학력도 없지. 딱히 이렇다 하게 내세울 능력도 없어요. 얼굴 하나로 먹고살 만큼 예쁜 것도 아니고.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고. 삼류 이하 회사에서 묵묵히 사무나 봐야 하죠. 그런 인간이 마음속으로 텔레비전이나 소설이나 잡지에서 보고 듣는 풍요로운 생활을 그려보는거예요 옛날에는 그나마 꿈을 꾸는 선에서 끝났어요. 그게 아니면 어떻게든 그 꿈을 실현하려고 열심히 노력했죠. 그래서 실제로 출세한 사람도 있을 테고, 나쁜 길로 빠져 쇠고랑을 찬 사람도 있었겠죠. 그래도옛날에는 얘기가 간단했어요. 방법이야 어떻든 자기 힘으로 그 꿈을 이루거나 현재 상태에 만족하고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 안 그래요?" 다모쓰는 말이 없었다. 혼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말을 재촉했다. "그런데 지금은 달라요. 꿈을 이룰 수는 없다. 그렇지만 포기하긴 억울하다. 그러니 꿈을 이룬 것 같은 기분이라도 느껴보자. 그런 기분에젖어보자. 안 그래요? 지금은 방법이 많으니까요. 쇼코의 경우는 어쩌다 그게 쇼핑이나 여행처럼 돈을 쓰는 방향으로 나갔을 뿐이에요. 그런상황에서, 분별없이 쉽게 돈을 빌려주는 신용카드나 신용대출이 나타난 것뿐이죠" - P343
"언젠가 남편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제법 그럴듯한 소리를 하는구나생각했죠. 저기. 뱀이 탈피하는 이유가 뭔지 알아요?" "탈피?" "뱀은 허물을 벗잖아요? 그거 실은 목숨 걸고 하는 거래요. 그러니 에너지가 엄청나게 필요하겠죠. 그런데도 허물을 벗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혼마보다 앞서 다모쓰가 대답했다. "성장하기 위해서 아닌가요?" 후미에가 웃었다. "아니에요. 목숨 걸고 몇 번이고 죽어라 허물을 벗다보면 언젠가 다리가 나올 거라 믿기 때문이래요. 이번에는 꼭 나오겠지, 이번에는 하면서." 다리 따위 없어도 상관없잖아요. 뱀은 뱀이니까. 그냥 뱀이니까. 후미에가 중얼거렸다. "그런데도 뱀은 생각해요. 다리가 있는 게 좋다. 다리가 있는 게 행복하다고. 거기까지가 우리 남편의 학설. 그리고 여기부터는 내 학설인데, 이 세상에는 다리를 원하지만 허물벗기에 지쳐버렸거나 게으름뱅이거나 벗는 방법을 모르는 뱀이 수없이 많다는 거죠. 그래서 그런 뱀들에게 다리가 있는 것처럼 비춰주는 거울을 파는 뱀도 있다는 말씀. 그리고 뱀들은 빚을 내서라도 그 거울을 사고 싶어하는 거예요." 난 그저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세키네 쇼코는 미조구치 변호사에게 그렇게 말했다. 혼마는 기억을 떠올렸다. 예의 선로 전환기의 이미지를. 사람들은 대체 거기서 무엇을 보고 정보를 좇아가는 걸까라는 의문을. 이번에는, 이번에는 꼭. - P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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