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포기한 타락한 모습에 멀어져간 측근, 찬양하다 돌아선 언론, 무엇보다 자신을 버린 아내와 새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아들을 향한 저주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비참한 내 모습을 잘봐둬, 너희들 탓이니까…… 말로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누군가손을 내밀 때까지 소란을 피운다. 요지부동 자신의 생활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고집. 가족이 소중하다면서도 세간에 처자식이 자신을 버렸다는 인식을 심으려 한다. 마음을 고쳐먹고 자기 힘으로인생을 만회하려 한다면, 그는 이제 목숨쯤은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가지이 마나코에게 살해당했다는 남자들에게도 많건 적건 그런 냄새가 나지 않았는가. 피해자가 생전에 한 말, 그리고 그들 주위에 있던 사람의 증언이 하나둘 떠오른다.

이대로 혼자 나이를 먹는 게 두렵다. 생활이 점점 피폐해진다. 누구든 좋으니 밥을 차려주고, 돌봐줄 여자가 필요했다. 수상하다고는 생각한다. 속고 있을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한다. 가족들은 그런여자와 헤어지라고 들볶는다. 그래도 상관없다. 가족과 절연하더라도 그녀를 선택하겠다.

그 여자는 외로운 생활을 보내는 피해자의 마음속 빈틈을 파고들었어요. 남자는 모자란 생물이지 않습니까? 여자의 보살핌과 따스함 없이는 생활해나갈 수 없잖아요?

요리 잘하는 착한 여성이 있다면, 남성이라면 누구라도 끌리지않겠어요? 남자를 잡으려면 먼저 위부터 잡으라고 하잖아요.

이 사건은 어디를 잘라도 그 단면에 고독한 남성의 지나친 자기 연민과 여성을 향한 증오가 배어 있다. 피해자를 탓하는 사고방식일까. ‘자기책임론‘이 제일 싫은데.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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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지은 밥에 버터와 간장을 넣고 비벼 먹는 거예요. 요리를하지 않는 당신도 그 정도는 하겠죠. 버터가 얼마나 훌륭한지 가장 잘 알 수 있는 음식이에요."
얼버무리고 넘어가지 못할 만큼, 그녀는 엄숙하게 말했다.
"버터는 에쉬레Échire"라는 브랜드의 가염 타입을 써요. 마루노우치에 전문점이 있으니 거기에서 손에 들어보고 잘 확인해서 사면 돼요. 버터 품귀인 지금이 해외 고급 버터를 시험할 좋은 기회예요. 맛있는 버터를 먹으면, 난 뭔가 이렇게 떨어지는 느낌이 들어요."
"떨어져요?"
"그래요. 붕 날아오르는 게 아니라, 떨어져요. 엘리베이터에서한층 아래로 쑥 떨어지는 느낌. 혀끝에서 몸이 깊이 가라앉아요."
방금 타고 온 엘리베이터에서 느낀 중력을 떠올려보았다. 메모하는 것도 잊고, 리카는 몸이 절로 앞으로 쏠리는 상대의 말솜씨에 빨려들었다. 가지이의 눈과 입술이 촉촉해지기 시작해서 흠칫놀랐다. 그녀의 황홀한 듯 멍한 시선은 이곳이 아닌 어딘가로 향해 있다.
"버터는 냉장고에서 막 꺼내서 차가운 채로 넣어요. 정말로 맛있는 버터는 차갑고 단단한 상태에서 식감과 향을 맛보아야 해요. 밥의 열기에 바로 녹으니까 반드시 녹기 전에 입으로 가져가야 해요. 차가운 버터와 따뜻한 밥. 일단 그 차이를 즐겨요. 그리고 당신 입속에서 두 가지가 녹아서 섞이며 황금색 샘이 될 거예요. 네, 보이지 않아도 황금색이란 걸 아는, 그런 맛이죠. 버터가 엉킨 밥 한알 한 알이 자기 존재를 주장하고, 마치 볶은 듯한 향기로움이 목에서 코로 빠져나가죠 진한 우유의 달콤함이 혀에 감기고..."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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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지색의 좁은 분양주택이 완만한 언덕배기를 따라가며 끝없이 이어졌다.
잘 정비된 동네는 어디에 있어도 똑같은 인상이어서, 마치다리카는 아까부터 계속 같은 장소를 뱅글뱅글 도는 기분이었다. 꽁꽁 언 오른손 손가락의 거스러미가 벗겨졌다. -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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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은 그 계곡을 찾았더니 바윗돌들이 온통 벌겋다. 샘이 있는 곳마다 붉은 페인트로 십자가가 그려져 있다. 지나가는 등산객의 말로는 근처 기도원의 원장이 사람들을 데리고 와 그 페인트칠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오랫동안 잊고 있던 낱말이 생각났다. 기도원 사람들이 방법을 했구나!
교회 다니는 사람 몇 사람이 봉은사를 비롯한 여러 절에서 땅 밟기를 했다고 한다. 미얀마의 불교 사원까지 찾아가 그 일을 했다니 용맹하기도 하다. 땅 밟기는 구약에 그 근거가 있다는데, 그것은 방법에 해당할까 치성에 해당할까. 종교가 맞닥뜨려 싸워야 할 것은 다른 종교가 아니라 경건함이 깃들 수 없는, 그것이 아예 무엇인지모르는 마음이어야 할 것이다. (2010) - P66

내가 생각하는 바의 좋은 서사는 승리의 서사이다. 세상을 턱없이 낙관하자는 말은 물론 아니다. 우리의 삶에서 행복과 불행은 늘 균형이 맞지 않는다. 유쾌한 일이 하나면 답답한 일이 아홉이고, 승리가 하나면 패배가 아홉이다. 그래서 유쾌한 승리에만 눈을 돌리자는 이야기는 더욱 아니다. 어떤 승리도 패배의 순간과 연결되어있는 것이 사실이고, 그 역도 사실이다. 우리의 드라마가 증명하듯작은 승리 속에 큰 것의 패배가 숨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큰 승리의 약속이 없는 작은 패배는 없다. - P72

그런데 저 환상적으로 엄혹했던 유신 시절의 독재자도 국민들을 나태와 방종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착한 생각이 마음속에 가득했을 것이다. 그는 인간이 저마다 스스로 성장하고 스스로 다스릴만한 판단력이 있다고 믿지 않았을뿐더러 그런 능력 자체가 위험하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는 사람들이 먹고 입는 것을 간섭했고, 자고 일어나는 시간을 정했으며, 부르는 노래를 감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불러야 할 노래를 스스로 만들어 가르쳤다. 그는 우리가 저마다 살아야 할 삶의 목표까지 정해주었지만, 사람들은 날마다 불안했고 나날이 주눅이 들어갔다.
지금 우리의 젊은이들은 노래도 잘부르고 춤도 잘 춘다. 글도 잘쓰고 멋도 잘 낸다. 그것은 이들이 누가 미리 지정해준 삶을 곱게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자유로운 세상에 살고 있으며, 제가 저 자신을 자유롭게 이끌어나갈 수 있다는 긍지를 지녔기 때문이다. 김수영 시인이 「사랑의 변주곡」에서 말했던 것처럼 제 마음속의 복숭아씨와 살구 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을 알고 그 힘을 창조력의 밑받침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판단하고 선택하기전에 모든 것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가려놓은 채, 생명에 삽질을하고 시멘트를 발라 둑을 쌓아둔다면, 거기 고이는 것은 창조하는자의 사랑이 아니라 굴종하는 자의 중오일 것이다. (2011) - P100

신화 시대에 지하신이 물러간 자리에 하늘신이 들어선다.
왕조 시대에 왕조는 조각상으로 왕들의 치적을 나열하여 그 무적불패성을 자랑한다. 이 말 끝에 적은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모든 문명이 망한다는, 그렇게 역사는 매일매일 새로 시작한다는 아주 오래된 증거에 다름 아니다." 지금 손꼽아 6백 일 5백 일을 세는 사람들에게 이 또한 지나가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이 음악처럼 흐르는 사람들에게는 현실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2011)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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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도
착취당한다

지난 70년대에, 한국 땅에서 외국 책으로 공부한 사람은 서대문국제우체국의 미스 아무개‘를 기억할 것이다. 지금이야 외서를 사는 일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쉽다. 아무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원하는 책을 찍어 장바구니에 담고 신용카드로 계산을 끝내면 보통은 보름 안에, 늦어도 한 달 안에 책이 집이나 학교로 배달된다. 이 절차가 너무 간편해서 나쁜 추억을 가진 사람을 오히려 눈물겹게한다. 그 시절에는 외국에서 책을 들여오는 일이 ‘꿈은 이루어진다‘ 같은 표어를 내걸고 감행해야 하는 일대 사업이었다. 먼저 외국의 서적상에게 구입할 책의 목록과 편지를 보내 청구서를 받은다음 외환관리 당국에 외환사용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러고는 은행에서 송금수표를 끊어 외국의 서적상에게 보낸다. 이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는 보장은 물론 없지만, 아무튼 수표를 보내고 나면, 책은 선편으로 빠르면 3개월 뒤에, 늦으면 반년 뒤에 한국 땅에들어온다. 그렇다고 책이 바로 수중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또하나의 절차, 거의 투쟁에 가까운 절차가 남아 있다. - P11

 그 시절에 우리는 모두 괴물이었다. 물의를 불의라고 말하는 것이 금지된 시대에 사람들은 분노를 내장에 쌓아두고 살았다. 전두환의 시대가 혹독했다 하나 사람들을 한데 묶는 의기가 벌써 솟아오르고 있었다. 유신시대의 젊은이들은 자기 안의 무력한 분노 때문에 더욱 불행했다.
그래서 나는 요즘 대학생들의 편에서 박정희를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존경한다는 말을 들으면 저 우체국 창구를 뛰어넘을 때와 같은 충동을 다시 느낀다. 학생들의 입장에서라면, 한때의 압제와 불의는 세월의 강 저편으로 물러나 더이상 두려울 것이 없으니, 그렇게 어떻게 이루어졌다는 경제적 성과를 두 손으로 거머쥐기만하면 그만일 것이다. 과거는 바로 그렇게 착취당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2009) - P12

도시 사람들은 자연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자연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도 없다. 도시민들은 늘 자연산‘을 구하지만 벌레 먹은 소채에 손을 내밀지는 않는다. 자연에는 삶과 함께 죽음이 깃들어 있다. 도시민들은 그 죽음을 견디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처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철저하게 막아내려 한다. 그러나 죽음을 끌어안지 않는 삶은 없기에, 죽음을 막다보면 결과적으로 삶까지도 막아버린다. 죽음을 견디지 못하는 곳에는 죽음만 남는다. 사람들이 좋은 소금을 산답시고, 우리 고향 마을의 표현을 빌리자면, ‘죽은 소금‘을 고르게 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같은 이치다. 살아 있는삶, 다시 말해서 죽음이 함께 깃들어 있는 삶을 고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좋은 식품을 고르기 위해서도, 사람 사는 동네에 이른바 혐오시설이 들어서는 것을 용납하기 위해서도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 고향 비금 사람들이 염전에서 장판과 타일을 걷어낼 때도그런 용기가 필요했다. - P21

그래서 몽유도원도의 관람은 일종의 순례 행렬이 되었다. 사람들은 반드시 몽유도원도가 아니라 해도 위대한 어떤 것에 존경을 바치려 했으며, 이 삶보다 더 나은 삶이 있다고 믿고 싶어했다. 저마다 자기들이 서 있는 자리보다 조금 앞선 자리에 특별하게 가치있는 어떤 것이 있기를 바랐고, 자신의 끈기로 그것을 증명했다. 특별한 것은 사실 그 끈기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두텁고 불투명한일상과 비루한 삶의 시간을 헤치고 저마다의 믿음으로 만들어낸 일종의 전리품이었기 때문이다. 아흐레 동안 국립중앙박물관의 광장에 구절양장을 그린 긴 행렬은 이 삶을 다른 삶과 연결시키려는사람들의 끈질긴 시위였다. (2009) - P27

이 유례없는 경쟁사회에서 우리는 조금씩 지쳐 있다. 그렇더라도 마음이 무거워져야할 때 그 무거운 마음을 나누어 짊어지는 것도 우리의 의무다. 엄마가 아이를 키우듯이, 나라 잃은 백성이 독립운동하듯이. (2010) - P54

조선시대에 베잠방이를 걸치고 괭이와 지게로 석탄을 캐어 나르던선조 광부들의 그림, 징용을 당해 일본의 광산에서 인간의 삶이 아닌 삶을 살아야 했던 젊은 광부들의 사진과 아직도 이역의 절간에쌓여 있는 그들의 유골 사진이 벽에 붙어 있고, "탄굴 파서 벌어봐야 햇빛 보면 맥 못추고 첫날부터 외상술에 퇴직금은 빚잔치"라는<탄광 아리랑>의 노랫말처럼, 지난 시절 희망도 없이 막장에서 육체를 소모하던 광부들의 노동 현장과 생활상이 파라핀 인형으로 재현되어 있었다. 내가 옛날에 보았던 방 하나 부엌 하나 지붕 낮은 판잣집도 거기 있었고, 그 작은 마당에서 땅에 금을 긋고놀던 아이들도 거기 있었다. 그 거대한 박물관은 우리 역사의 화석이었다. 그무심한 돌들은 거기에 지긋하게 눈길을 주는 사람을 만나면 그 마음을 타고 물이 되어 흘러나온다. 울고 나오는 영화관은 많지만 울고 나오는 박물관을 다른 데서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화석의 슬픔에 감히 문화자원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은 그나마 이 사회가 발전한 덕분일 것이다. 저 광부들의 고통과 거기 감춰져 있는 작은 희망과 함께 민주 의식이 크게 성장하였고, 인의의 귀중함도 알게 되었다. 과거를 영예롭게도 비열하게도 만드는 것은 언제나 현재다. (2010)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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