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도 착취당한다
지난 70년대에, 한국 땅에서 외국 책으로 공부한 사람은 서대문국제우체국의 미스 아무개‘를 기억할 것이다. 지금이야 외서를 사는 일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쉽다. 아무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원하는 책을 찍어 장바구니에 담고 신용카드로 계산을 끝내면 보통은 보름 안에, 늦어도 한 달 안에 책이 집이나 학교로 배달된다. 이 절차가 너무 간편해서 나쁜 추억을 가진 사람을 오히려 눈물겹게한다. 그 시절에는 외국에서 책을 들여오는 일이 ‘꿈은 이루어진다‘ 같은 표어를 내걸고 감행해야 하는 일대 사업이었다. 먼저 외국의 서적상에게 구입할 책의 목록과 편지를 보내 청구서를 받은다음 외환관리 당국에 외환사용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러고는 은행에서 송금수표를 끊어 외국의 서적상에게 보낸다. 이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는 보장은 물론 없지만, 아무튼 수표를 보내고 나면, 책은 선편으로 빠르면 3개월 뒤에, 늦으면 반년 뒤에 한국 땅에들어온다. 그렇다고 책이 바로 수중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또하나의 절차, 거의 투쟁에 가까운 절차가 남아 있다. - P11
그 시절에 우리는 모두 괴물이었다. 물의를 불의라고 말하는 것이 금지된 시대에 사람들은 분노를 내장에 쌓아두고 살았다. 전두환의 시대가 혹독했다 하나 사람들을 한데 묶는 의기가 벌써 솟아오르고 있었다. 유신시대의 젊은이들은 자기 안의 무력한 분노 때문에 더욱 불행했다. 그래서 나는 요즘 대학생들의 편에서 박정희를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존경한다는 말을 들으면 저 우체국 창구를 뛰어넘을 때와 같은 충동을 다시 느낀다. 학생들의 입장에서라면, 한때의 압제와 불의는 세월의 강 저편으로 물러나 더이상 두려울 것이 없으니, 그렇게 어떻게 이루어졌다는 경제적 성과를 두 손으로 거머쥐기만하면 그만일 것이다. 과거는 바로 그렇게 착취당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2009) - P12
도시 사람들은 자연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자연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도 없다. 도시민들은 늘 자연산‘을 구하지만 벌레 먹은 소채에 손을 내밀지는 않는다. 자연에는 삶과 함께 죽음이 깃들어 있다. 도시민들은 그 죽음을 견디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처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철저하게 막아내려 한다. 그러나 죽음을 끌어안지 않는 삶은 없기에, 죽음을 막다보면 결과적으로 삶까지도 막아버린다. 죽음을 견디지 못하는 곳에는 죽음만 남는다. 사람들이 좋은 소금을 산답시고, 우리 고향 마을의 표현을 빌리자면, ‘죽은 소금‘을 고르게 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같은 이치다. 살아 있는삶, 다시 말해서 죽음이 함께 깃들어 있는 삶을 고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좋은 식품을 고르기 위해서도, 사람 사는 동네에 이른바 혐오시설이 들어서는 것을 용납하기 위해서도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 고향 비금 사람들이 염전에서 장판과 타일을 걷어낼 때도그런 용기가 필요했다. - P21
그래서 몽유도원도의 관람은 일종의 순례 행렬이 되었다. 사람들은 반드시 몽유도원도가 아니라 해도 위대한 어떤 것에 존경을 바치려 했으며, 이 삶보다 더 나은 삶이 있다고 믿고 싶어했다. 저마다 자기들이 서 있는 자리보다 조금 앞선 자리에 특별하게 가치있는 어떤 것이 있기를 바랐고, 자신의 끈기로 그것을 증명했다. 특별한 것은 사실 그 끈기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두텁고 불투명한일상과 비루한 삶의 시간을 헤치고 저마다의 믿음으로 만들어낸 일종의 전리품이었기 때문이다. 아흐레 동안 국립중앙박물관의 광장에 구절양장을 그린 긴 행렬은 이 삶을 다른 삶과 연결시키려는사람들의 끈질긴 시위였다. (2009) - P27
이 유례없는 경쟁사회에서 우리는 조금씩 지쳐 있다. 그렇더라도 마음이 무거워져야할 때 그 무거운 마음을 나누어 짊어지는 것도 우리의 의무다. 엄마가 아이를 키우듯이, 나라 잃은 백성이 독립운동하듯이. (2010) - P54
조선시대에 베잠방이를 걸치고 괭이와 지게로 석탄을 캐어 나르던선조 광부들의 그림, 징용을 당해 일본의 광산에서 인간의 삶이 아닌 삶을 살아야 했던 젊은 광부들의 사진과 아직도 이역의 절간에쌓여 있는 그들의 유골 사진이 벽에 붙어 있고, "탄굴 파서 벌어봐야 햇빛 보면 맥 못추고 첫날부터 외상술에 퇴직금은 빚잔치"라는<탄광 아리랑>의 노랫말처럼, 지난 시절 희망도 없이 막장에서 육체를 소모하던 광부들의 노동 현장과 생활상이 파라핀 인형으로 재현되어 있었다. 내가 옛날에 보았던 방 하나 부엌 하나 지붕 낮은 판잣집도 거기 있었고, 그 작은 마당에서 땅에 금을 긋고놀던 아이들도 거기 있었다. 그 거대한 박물관은 우리 역사의 화석이었다. 그무심한 돌들은 거기에 지긋하게 눈길을 주는 사람을 만나면 그 마음을 타고 물이 되어 흘러나온다. 울고 나오는 영화관은 많지만 울고 나오는 박물관을 다른 데서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화석의 슬픔에 감히 문화자원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은 그나마 이 사회가 발전한 덕분일 것이다. 저 광부들의 고통과 거기 감춰져 있는 작은 희망과 함께 민주 의식이 크게 성장하였고, 인의의 귀중함도 알게 되었다. 과거를 영예롭게도 비열하게도 만드는 것은 언제나 현재다. (2010)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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