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 소설을 쓴다는 것은 그것이 곧 그것을 쓰는 사람의 사는 방식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나 소설 그 자체의 형식은 그것을 쓰는 사람의 생활의 방식과 직결되는 것이고, 후자는 전자의 부연이 되고 전자는 후자의 부연이 되는 법이다. 사카린 밀수업자의 붓에서 「두이노의 비가」가 나올 수 없는 것처럼, 「진달래꽃을 쓴 소월은 자기 반의 부유한 아이들을 10여 명씩 모아 놓고 고가의 과외 공부를 가르치는 국민학교 6학년 선생이나 중학교 3학년의 담임 선생은 될 수 없었다. - P269

이 글의 첫머리에서 필자(이어령)는 ‘에비‘라는 말의 비유를 이렇게 말하고있다. "에비‘란 말은 유아언어에 속한다. 애들이 울 때 어른들은 ‘에비가 온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을 사용하는 어른도 그 말을 듣고 울음을 멈추는 애들도 ‘에비‘가 과연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고 있다.
즉 ‘에비‘란 말은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명사가 아니다. 그것이 지시하고 있는 의미는 막연한 두려움이며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불안, 그리고 가상적인 어떤 금제의 힘을 총칭한다.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인간들은 복면을 쓴 공포, 분위기로만 전달되는 그 위협의 금제감정에 지배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문화를 지배하는 ‘에비‘를 이필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오늘날의 우리들의 ‘에비‘는 결코 ‘구체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명사(名詞)가 아닌‘ ‘가상적인 어떤 금제의 힘‘이 아니다. 그것은 가장 명확한 ‘금제의 힘‘이다. 8.15 직후의 2~3년과 4.19 후의 1년 동안을 회상해 보면 누구나 다 당장에 알 수 있는 일이다. 물론 이 필자가 강조하려고 하는 점이 우리나라의 문화인들이실제 이상의 과대한 공포증과 비지성적인 퇴영성을 나무라고 독려하려는 데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이 필자의 말대로이러한 반문화성이 대두되고 있는 풍토 속에서 한국의 문화인들의 창조의 그림자를 미래의 벌판을 향해 던지기 위해서‘, ‘그 에비의 가면을 벗기고 복자(伏字) 뒤의 의미를 아무리 ‘명백하게 인식해 보았대야 역시 거기에는 복자의 필요가 있고 벽이 있다. 그리고 이 마지막의 복자와 벽을 문화인도 매스 미디어도 뒤엎지 못하기 때문에 일이 있을때마다 번번이 학생들이 들고일어나는 것이다.
또한 이 필자는 끝머리에 가서 ‘우리는 그 치졸한 유아 언어의 ‘에비‘라는 상상적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다시 성인들의 냉철한 언어로 예언의 소리를 전달해야 할 시대와 대면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소설이나 시의 ‘예언의 소리‘는 반드시 냉철할 수만은 없다. 오히려 그것은 예술의 본질을 생각해 볼 때 필연적으로 ‘상상적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않은 ‘유아 언어‘이어야 할 때가 많다. 특히 오늘날의 이곳과 같은 ‘주장‘도 ‘설득‘도 용납되지 않는 지대에 있어서는 더말할 것도 없다. - P300

이어령 씨의 이번의 나에 대한 반론은 거의 전부가 이런 식의 모함으로 충만되어 있고 이것을 일일이 가려낼 만한 의미를 나는 느끼지않는다. 다만 나의 창작 자유 고발의 실제적인 한계가 어디에 있는지 그것만을 다시 한번 명확하게 설명해 두고자 한다. 비근한 예가, 지금말한 이어령 씨의 규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나의 소위 ‘불온시‘다.
지금 말한 것처럼 이어링 씨는 내가 발표하지 못하고 있는 작품을 발표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온한‘ 작품이라고 규정을 내리고 있지만, 나의 생각으로는 발표를 하면 오해를 받을 우려가 있어서 발표는 못하고 있지만, 결코 불온한 작품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나의 자유의 고발의 한계는, 이런 불온하지도 않은 작품을 불온하다고 오해를 받을까 보아 무서워서 발표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이것을 따져보자는 것이다.
이어령 씨는 이에 대한 책임이 작가나 시인 자신에게 있다고 한다. 아니 이들에게만 이들의 역량이 부족해서있다고 한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가장 중요한 장해 세력이 우선 대제도의 에이전트들의 획일주의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나는 지적했다.
그런데 이어령 씨는 ‘불온하다고 보여질 우려가 있는 작품을 기관원도 단정을 내리기 전에 먼저 ‘불온하다‘고 단정을 내림으로써 ‘불온하다‘고 보여질 우려가 있는 작품이 불온하지 않게 통할 수 있는 문화풍토를 조성하자는 나의 설명을 거꾸로 되잡아서, ‘불온하다고 보여질 우려가 있는 작품‘이 바로 ‘불온한 작품‘이니 그런 문화 풍토가 조성되면 문학이 말살된다고 기관원이 무색할 정도의 망상을 하고 있다. 이런 망상은 문학 이론으로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
1968.3. - P309

요즈음 잡지사의 권유로 ‘시 월평‘이라는 걸 써 보았는데, 그 바람에 시는 통 못 썼다. 시인은 심판을 받는 편이 훨씬 행복하다. 시인이 심판을 하게 되면 불필요한 번민을 하게 된다.(남에게 얻어먹은 욕은 즉석에서 철회할 수 있지만, 남에게 한 욕은 철회하기가 매우 힘들다.) 또한 사기를한다. 심판을 하자면 올가미를 씌워야 하는데 이 올가미에 자신까지걸려들기는 싫다. 자기가 걸려드는 올가미는 시를 다칠까 보아 싫고 자기가 걸려들지 않는 올가미는 비평이 거짓말이 되니까 싫다. 나의 월평이 게재된 같은 잡지에 소설평을 담당한 H씨의 글에 이런 말이 나와 있다. "......특히나 요새처럼 작가의 정치색을 가장 날카롭게 작품속에 구상화시키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되어 있을 때 이러한 유행을의식적으로 회피한다는 것은 어쩌면 성실한 작가의 자세라고 봐야 옳을 것인지도 모른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글을 읽고 나는 ‘앗차!‘했다. 지금 말한 것처럼 H씨의 소설평이 실린, 같은 잡지에 나의 시월평이 그분의 글과 나란히 게재되어 있다. 이달뿐이 아니라 지난달 호에도 어깨를 나란히 해서 나는 시 월평을 쓰고 그분은 소설 월평을 썼다. 이달뿐이 아니라 다음 달 호에도 어깨를 나란히 해서 나는 시 월평을 쓰고 그는 소설 월평을 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난달에도 이달에도 시의 현실 참여를 주장해 왔고 내달에도 그것을 주장할 참이다. 그런데 아까와 같은 그분의 글을, 내가 쓴 글을 읽는 끝에 마을 가는 기분으로 읽던 중에 발견한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나는 연 3회를 현실참여의 월평을 써 온 끝이라 또 다음 호에도 똑같은 논지를 내세우는것이 변화가 너무 없는 것 같아서 좀 의아한 생각을 품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분이 재빨리 내 마음을 알아차린 듯이 그런 말을 암시해놓았다.  - P345

오늘날의 시가 골몰해야 할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의 회복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인간의 상실이라는 가장 큰 비극으로 통일되어 있고, 이 비참의 통일을 영광의 통일로 이끌고 나가야 하는 것이 시인의 임무다. 그는 언어를 통해서 자유를 읊고, 또 자유를 산다. 여기에 시의 새로움이 있고, 또 그 새로움이 문제되어야 한다. 시의 언어의 서술이나시의 언어의 작용은 이 새로움이라는 면에서 같은 감동의 차원을 차지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의 생활 현실이 담겨 있느냐 아니냐의 기준도진정한 난해시냐 가짜 난해시냐의 기준도 이 새로움이 있느냐 없느냐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새로움은 자유다. 자유는 새로움이다.
요즘의 시단 저널리즘은 현실 참여의 시라고 해서 무조건 비참한 생활만 그려야 하는 것같이 생각하고, 신문 논설란류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작품들을 도매금으로 난해시라고 배격하는 성급한 습성에 흐르고 있다. 우리의 주위는 모든 정경이 절박하기만 하다. 눈으로는 차마 볼 수 없는 기가 막힌 일들이 너무 많아서 우리는 참말로 눈을 돌릴 곳이 없다. 우리의 양심의 24시간은 온통 고문의 연속이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시는 좀 더 여유를 가져야 할 것 같다. 적어도 시의 양심을 지킬 만한 여유는 가져야 할 것 같다. 시대는 언제나 성인(聖人)이 되라고만 하지 시인이 되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인을 만들어야 할 때도 성인이 되라고 한다. 이런 유혹에 쏠려들 때 항용 가장 위험한 자위의 시가 나오기 쉽다. - P355

국민가요가 추상적인 것이 되지 않으려면 그것은 국민의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노래가 되어야 하고, 한 사회에서 노래가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려면 우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회의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이북의 노래도 식민지의 노래에 지나지않으며, 그것은 너무나 ‘씩씩하고 건전한‘ 식민지의 노래다.
우리들은 이제 이북식의 ‘씩씩하고 건전한‘ 잠재의식에서 벗어날때가 왔다. 언젠가 대학생들의 단식 데모에서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익살스럽게 풍자한 노래가 읊어진 것을 보았는데, 국민가요의 정신은 단적으로 말해서 그러한 것이다. 그것은 철두철미 하극상의 정신이다.
따라서 좋은 국민가요가 나오는 사회는 진정한 기골 있는 야당과 노동조합다운 노동조합이 있는 사회이며 청년들이 살아 있는 사회이다. 우리 사회에 좋은 국민가요가 아직도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천재적인 작사자나 작곡가가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남북통일과 현대 공업화의 비전이 아직까지도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 P367

그러나 이렇게 남의 일만 이야기하다 보니 어쩐지 내 발밑이 불안해진다. 지난 4개월 동안 본지에 ‘시 월평‘이란 것을 쓴 것을 반성해볼 때 정말 정직한 말을 썼는가 하는 자책감이 든다. 나도 어느 사이에 ‘적당히‘ 쓸 줄 아는, 때가 묻은 게 아닌가 하는 자책감이 든다. 나는 아직도 글을 쓸 때면 무슨 38선 같은 선이 눈앞을 알찐거린다. 이 선을 넘어서야만 순결을 이행할 것 같은 강박관념. 우리는 무슨 소리를 해도 반 토막 소리밖에는 못하고 있다는 강박관념. 419 후에 8개월 동안 잠깐 누그러졌다가 다시 굳어진 강박관념. 나는 몇 년 전까지만도 이러한 강박관념을 우리나라만의 불행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거기에 세계의 얼굴이 담겨 있는 것을 알고 약간의 안도감을 느낄 수있었지만, 여기에 비친 세계의 얼굴이 이중이나 삼중 유리 결장에 비치는 얼굴 모양으로 윤곽이 엇갈려서 어떤 것이 어떤 얼굴인지 분간함수 없게 되는 새로운 불안이 생겼다. 따라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38선이 없어지면 그것은 해소되리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38선이 없어져도 좀처럼 해소되지 않고, 또 다른 선이 얼마든지 연달아 생길 것이라는 예측이 서 있다. 35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결국 자유가 없고 민주주의가 없다는 귀결이 온다. 민주주의가 없는 나라에서는 작가의 책무가 이행될 수 없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이러한,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의 수수께끼를 되풀이하고 있다. 이러한 경우에 이북보다 이쪽이
‘비교적‘ 자유가 있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민주주의 사회는 말대답을 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리가 있는 사회다. 그런데 이 지대에서는 아직까지도 이 ‘절대적인‘ 권리에 ‘조건‘을 붙인다.  - P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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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라도 늦지 않으니 썩은 자들이여, 함석헌 씨의 잡지의 글이라도 한번 읽어 보고 얼굴이 뜨거워지지 않는가 시험해 보아라. 그래도 가슴속에 뭉클해지는 것이 없거든 죽어 버려라!
필자는 생업으로 양계를 하고 있는 지가 오래되는데 뉴캐슬 예방주사에 커미션을 내지 않고 맞혀 보기는 이번 봄이 처음이다. 여편네는너무나 기뻐서 눈물을 흘리더라. 백성들은 요만한 선정(善政)에도 이렇게 감사한다. 참으로 우리들은 너무나 선정에 굶주렸다. 그러나 아직도 안심하기는 빠르다. 모이값이 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모이값은 나라 꼴이 되어 가는 형편을 재어 보는 가장 정확한 나의 저울눈이 될수 있는데, 이것이 지금 같아서는 형편없이 불안하니 걱정이다. 또 이 모이값이 떨어지려면 미국에서 도입 농산물자가 들어와야 한다는데, 언제까지 우리들은 미국놈들의 턱밑만 바라보고 있어야 하나?
여하튼 이만한 불평이라도 아직까지는 마음 놓고 할 수 있으니 다행이지만 일주일이나 열흘 후에는 또 어떻게 될는지 아직까지도 아직까지도 안심하기는 빠르다.
《민국일보》 (1961,4,16) - P-1

우리들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인간은 신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다. 그러나 건강한 개인도 그렇고 건강한 사회도 그렇고 적어도 자기의 죄에 대해서 몸부림은 쳐야 한다. 몸부림은 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가장 민감하고 세차고 진지하게 몸부림을 쳐야 하는것이 지식인이다. 진지하게라는 말은 가볍게 쓸 수 없는 말이다. 나의현상에서는 진지란 침묵으로 통한다. 가장 진지한 시는 가장 큰 침묵으로 승화되는 시다. 시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 보더라도 지금의 가장 진지한 시의 행위는 형무소에 갇혀 있는 수인의 행동이 극치가 될 것이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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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시 삼가며 쓴 것이 역시 이렇게 따분하게 되었다. 사실은 이 글의 의도는 마리서사를 빌려서 우리 문단에도 해방 이후에 짧은 시간이기는했지만 가장 자유로웠던, 좌·우의 구별 없던, 몽마르트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는 것을 자랑삼아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 그 당시만 해도 글쓰는 사람과 그 밖의 예술하는 사람들과 저널리스트들과 그 밖의 레이맨들이 인간성을 중심으로 결합될 수 있는 여유 있는 시절이었다. 그당시는 문명(文名)이 있는 소설가 아무개보다는 복쌍 같은 아웃사이더들이 더 무게를 가졌던 시절이고, 예술 청년들은 되도록 작품을 발표하지 않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지금 그 당시의 표준을 가지고 재어 볼 때 정도(正道)를 밟고 있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 진정한 아웃사이더가 몇 사람이나 될까. 가장 가까운 주위에 자랑할 만한 사람이라면 이활, 심재언 정도가 아닐까. 그런데 이들도 그때만큼 틈이 없다. 아웃사이더도 시간의 여유가 있어야 되고, 공부하고 놀 틈이 있어야 되는데 이들에게는 공부할 시간도 놀 장소도 없다. 질식한 아웃사이더들이다.  - P178

이 글을 쓰려고 까만 볼펜을 드니 둘째 손가락과 엄지 손가락이 변색을 한 것이 눈에 뜨이오. 이상해서 자세히 살펴보오. 변색이란 것이 과장이 아니오. 하얗게 바래 있소. 아니 하얗게 떠 있소. 두 손가락의 피부가 표백을 한 거요. 술잔을 쥔 부분의 피부가 표백을 한 것이오.
어저께 당신이 준 5000원 중에서 2500원어치를 마신 거요. 내가 쓴 돈이 그것이지 마신 분량은 내가 지불한 돈의 배가 더 될 거요. 내가 낸돈은 일차의 대푯값하고 이차의 맥주값뿐이지, 삼차에 들어앉은 집에서 마신 것은 다른 친구가 냈으니까. 술 많이 마셨다는 자랑이 아니오.
괴롭단 말이오. 아침에 깨어 보니 또 요에 오줌을 쌌구려. 지금 이 글을 그 축축한 요 위에 팔을 비벼 대면서 쓰는 거요. 정말 괴롭소. 비명이 아니오. 세상에서는 자학이 나쁘다고 하지만 아직도 나는 자학의 미덕에 대신하는 종교를 찾지 못하고 있소. 속되어 가는 나 자신에 대한이나마의 변명이라도 없이는 어디 살겠소? - P184

이런 악덕은 누차 말해 두거니와,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라 나의일이다. 그래서 나는 전법(戰法)을 바꾸었다. 이왕 도둑이 된 바에야 아주 직업적인 도둑놈으로 되자. 아무개 아버지 같은 좀도둑이 아니라 남의 땅에 허가 없이 집을 짓는, 아무개 아버지가 도둑질을 한 집의 주인 같은 날도둑놈이 되자. 그래서 하다못해 무허가의 죄명으로 집을헐리고 때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 편이 낫다. 그 편이 훨씬 남자답고 떳떳하다. 즉, 나다.
이 내가 되는 일, 진짜 속물이 되는 일, 말로 하기는 쉽지만 이 수입도 사실은 여간 어렵지 않다. 속물이 안 되려고 발버둥질을 치는 생활만큼 어렵다. 그리고 그만큼 고독하다. 현대사회에 있어서는 고독은 나일론 재킷이다. 고독은 바늘 끝만치라도 내색을 하면 그만큼 손해를보고 탈락한다. 원래가 속물이 된 중요한 여건의 하나가, 이 사회가 고독을 향유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속물이 된 후에 어떻게 또 고독을 주장하겠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속물은 나일론 재킷을 입고 있다. 아무한테도 보이지 않는 고독의 재킷을 입고 있다. 그러니까 이 재킷을 입고 있는 사람은, 이 글 제목대로 ‘거룩한 속물‘ 즉 고급 속물의 범주에는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흥미를느끼고 있는 것은 이 나일론 재킷을 입은 속물이다. 고독의 재킷을 입지 않은 것은 저급 속물이지 고급 속물은 아니다. 고급 속물은 반드시 고독의 자기 의식을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규정을 하면 내가 말하는 고급 속물이란 자폭을 할 줄 아는 속물, 즉 진정한 의미에서는 속물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 P189

속물의 특성은 겸손하지 않은 것이다. 일본에서도 얼마 전에 12층인가의 고층 건물을 지은 사람을 상대로 그 건물의 뒤에 사는 사람이 햇빛을 막아서 그늘이 진다는 피해로 오랫동안 소송을 걸었다가 진 일이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문화인이라면 옆의 집에 그늘이 지는 것을보고 집까지는 헐 용기가 없더라도 미안한 생각쯤은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신문 소설가나 방송 작가들을 보면 그늘이 진 옆의 집에 미안한 생각을 품기는커녕, 왜 나만큼 큰 집을 못 짓느냐고 호통을치면서, 쓰레기와 오물까지도 아침저녁으로 내리쏟는다. 유독 신문 소설가나 방송 작가뿐이 아니다. 이런 그레셤의 법칙은 문화 단체와 예술 단체의 이름으로, 교수의 이름으로, 학장의 이름으로, 아나운서의 이름으로, 신문기자의 이름으로 날이 갈수록 더 성해 가기만 한다. 유능한 아나운서와 유능한 사회자는 대담자나 회담자나 청중을 리드해간다는 미명으로 무시하고 모욕하는 사람이다. 유명이 유명을 먹고, 더 유명한 것이 덜 유명한 것을 먹고, 덜 유명한 것이 더 유명한 것을잡아 누르려고 기를 쓴다. 이쯤 되면 지옥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회의 대제도(大制度)는 지옥이다. 이 지옥 속의 레슬러들이 속물이다. 너나할 것 없이 모두 다 속물이다. 아무것도 안 붙인 가슴보다는 지옥의 훈장이라도 붙이고 있는 편이 덜 쓸쓸하다. 아무 목걸이도 없느니보다는개의 목걸이라도 걸고 있는 편이 덜 허전하다. 하나님이시여, 이 ‘테리어‘종들에게 구원을! - P191

목욕통에 얼어붙었던 물이 윗덮개가 조용히 풀리기 시작한다. 위의 3분가량에 흥건히 물이 괴어 있고, 얼음의 근심은 소리 없이 밑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아직도 마당 위에 얼어붙은 먼지에 쌓인 얼음들은 요지부동이지만, 직경 2미터도 안 되는 목욕솔의 해빙이 알려 주는봄의 전조는 새싹을 보는 것보다도 더 반갑다. 새싹이 틀 때 봄을 느끼는 것은 이미 늦은 감이 들고, 가을의 낙엽을 보고 셸리처럼 지나치게 일찍이 봄을 예고하는 것은 너무 시적이어서 싫고, 그저 남보다 조금먼저 범인(凡人)처럼 봄을 느끼는 것이 자연스러워 좋다.
새싹이 솟고 꽃봉오리가 트는 것도 소리가 없지만, 그보다 더한 침묵의 극치가 해빙의 동작 속에 담겨 있다. 몸이 저리도록 반가운 침묵. 그것은 지긋지긋하게 조용한 동작 속에 사랑을 영위하는 동작과 침묵이 일치되는 최고의 동작이다.
가라앉은 얼음을 겨우내 굳어 온 근심이라고 생각할 때, 이 불행의 잠수 행위는 희열에 찬 풍자까지도 풍겨 주고, 어지러운 현실의 걱정이야 어찌되었든 우선 까닭 모를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수돗가에 씻어 놓은 저녁쌀이 튀어나올 듯이 하얗게 보이고, 마루에 올라와 난롯가에서 손을 비벼 보면 손의 두께까지도 제법 두툼하게 느껴진다. - P209

그런데 내가 여기서 말하는 시인이란 반드시 시 작품을 신문이나잡지에 주기적으로 발표하는 사람만을 말하고 있는 것도 물론 아니다. 소위 시를 쓰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이번 4.19나 4.26 을 냉담하게 보고있는 친구들이 적지 않은 것을 나는 알고 있는데 어울리지 않게 날뛰는친구도 보기 싫지만 그 이상으로) 나는 이런 위인들을 보면 분이 터져서 따귀라도 붙이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있다.
나는 극언(極言)하건대 이번 4.26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통찰하지 못하는 사람은 미안하지만 시인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불쌍한 사람들이 소위 시인들 속에 상당히 많이 있는 것을 보고 정말놀랐다. 나의 친척에 모 국민학교 교감이 있는데 이 작자가 4.19 날의 데모를 보고 집에 와서 여편네한테 ‘학생들도 이제 볼 장 다 봤어. 그런 폭도들이 어디 있어……." 하며 밤새도록 부부 싸움을 했다나. 그런 시인이나 이런 교감은 모두 다 모름지기 이승만의 뒤나 따라가 살든지 죽든지 양자택일하여라.
4.26 후 나의 성품이 사뭇 고약해져 가는 것을 알면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너무 흥분한 탓이려니 해서 도봉산 밑에 있는 아우 집에 가서 한 이틀 동안을 쉬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왔는데 서울에 와 보니 역시 마찬가지다. 마음이 정 고약해져서 시를 쓰지 못할 만큼 거칠어진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시대의 윤리의 명령은 시 이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거센 혁명의 마멸(磨滅) 속에서 나는 나의 시를 다시한 번 책형대(책刑臺) 위에 걸어 놓았다.
《경향신문》, 1960.5.20 - P232

일전에 4월 이후의 새로운 현상에 대한 잡담이 나온 자리에서 어느문학지 기자가 하는 말이, 요즈음 통 잡지가 팔리지 않는다고 하면서이것이 ‘나츠가레‘‘가 원인이 되고 있기도 하지만 학생들이 정치에 몰두하여 문학잡지 같은 것은 보지 않게 된 바람에 그런 것이라고 하는말을 들었다.
필자는 이 말을 듣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말이 만약에 사실이라면 우리나라의 문학지는 오늘날과 같은 비상시에는 통용되지 않는다는 말이 되고, 따라서 그들이 문학을 애호하는 것은 (적어도 문학지를 구매한다는 것은) 평화 시절에만 국한될 한사(閑事)에 불과하다는 말도 된다.
그러나 진정한 문학의 본질은 결코 한시(閑時)에만 받아들일 수 있는 애완 대상이 아니며, 오히려 오늘날과 같은 개혁적인 시기에 처해있을수록 그 가치가 더한층 발효되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이와 같은 현상은 (그것이 만약에 사실이라면) 우리나라 문학계 전반에 대한 기막힌 모욕이요 경멸이라고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혁명이란 이념에 있는 것이요, 민족이나 인류의 이념을 앞장서서 지향하는 것이 문학인일진대, 오늘날처럼 이념이나 영혼이 필요한 시기에 젊은 독자들에게 버림을 받는 문학인이 문학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사실을 고백하자면 나는 그 기자의 말을 듣고 내심으로는 오히려 통쾌한 감이 들었고, 우리나라 문학계도 이제야 비로소 응당 받아야 할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되었다 하고 쾌재를 부르짖었다.
젊은 층의 전면적인 불신임을 받아야 할 것은 정치계에만 한한 일이 아니라 문학계도 마찬가지이고, 이러한 각성의 시기는 빨리 오면 빨리 올수록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 P237

이(李) 정권 때의 일이다. 펜클럽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분들을 모시고 조그마한 환영회를 갖게 된 장소에서 각국의 언론자유의 실황에대한 이야기가 나온 끝에 모 여류 시인한테 나는 "한국에 언론 자유가있다고 봅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 여자 허, 웃으면서 "이만하면 있다.
고 볼 수 있지요." 하는 태연스러운 대답에 나는 내심 어찌 분개를 하였던지 다른 말은 다 잊어버려도 그 말만은 3, 4년이 지난 오늘까지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 시를 쓰는 사람, 문학을 하는 사람의 처지로서는 ‘이만하면‘이란 말은 있을 수 없다. 적어도 언론 자유에 있어서는 ‘이만하면‘이란 중간사(中間)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 그들에게는 언론자유가 있느냐 없느냐의 둘 중의 하나가 있을 뿐 ‘이만하면 언론 자유가 있다‘고 본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그 자신이 시인도 문학자도 아니라는 말밖에는 아니 된다. 그런데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소설가, 평론가, 시인이 내가 접한 한도 내에서만도 우리나라에 적지않이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문학의 후진성 운운의 문제를 넘어서 더 큰 근본 문제이다.
시고 소설이고 평론이고 모든 창작 활동은 감정과 꿈을 다루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감정과 꿈은 현실상의 척도나 규범을 넘어선 것이다. 말하자면 현실상으로는 38선이 있지만 감정이나 꿈에 있어서는 38선이란 터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이 너무나 초보적인 창작 활동의 원칙을 올바르게 이행해 보지 못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문학을 해 본 일이 없고, 우리나라에는 과거 십수년 동안 문학 작품이 없었다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문학 작품이 없는 곳에 문학자가 어디 있었겠으며 문학자가 없는 곳에 무슨 문학 단체가 있었겠는가. 아마 있었다면 문학 단체의 이름을 도용한 반공 단체는 있었을 것이지만, 이 반공 단체라는 것조차 사실에 있어서는 반공을 판 돈벌이 단체이거나, 문학과 반공을 ‘이중으로‘ 팔아먹은 돈벌이 단체에 불과하였다.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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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지식인의 규정부터 해야 한다. 지식인이라는 것은 인류의 문제를 자기의 문제처럼 생각하고, 인류의 고민을 자기의 고민처럼 고민하는 사람이다. 우선 일본만 보더라도 이런 지식인들이 많이 있는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나라에 지식인이 없지는 않은데 그 존재가 지극히 미약하다. 지식인의 존재가 미약하다는 것은 그들의 발언이 민중의 귀에 닿지 않는다는 말이다. 닿는다 해도 기껏 모깃소리 정도로 들릴까 말까 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식인의 소리가 모깃소리만큼밖에 안 들리는 사회란 여론의 지도자가 없는 사회이며, 따라서 진정한 여론이 성립될 수 없는 사회다. 즉 여론이 없는 사회다. 혹은 왜곡된 여론만이 있는 사회다. 우리나라의 소위 4대 신문의 사설이란 것이 이런 왜곡된 가짜 여론을 매일 조석으로 제조해 내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씌어지고 있다. 이것을 진정한 여론이라고, 민주주의 사회의 여론이라고 생각하는 지식인들이 더도 말고 우리나라의 문학하는 사람들 중에서만도 허다하게 있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이런 사람들이 내가 말하는 지식인이 아닌 것은 물론이다. 우리나라는 문학하는 사람들 중에 지식인이 가물에 콩 나기만큼 있기 때문에 문학가가 아직도 사회적인 멸시를 받고, 그나마 여론을 조성하는 자리에서는 대학교수보다도 볼품이 없고, 우리의 시와 소설은 아직껏 후진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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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은 없는 나라에 웬 교회만 이렇게 많은가. 왜 교회를 볼 때마다 공장이 연상되는가? 요즘 2, 3년 내로 머리악*을 쓰고 집들을 짓는 바람에 교회와 그 주위의 민가들과의 콘트라스트가 약간 완화되기는했지만, 그래도 매머드 교회들의 위관은 속인들로 하여금 그리 좋은 기분을 갖게 하지 않는다.
누구를 위한 교회인가?
이런 질문을 우리들은 집채만 한 배우 얼굴이 걸려 있는 극장이나궁전 같은 고층 병원 앞을 지나갈 때처럼 교회 앞을 지나갈 때마다 하게 된다. 저것은 우리의 병원이 아니다. 저것은 내가 들어갈 극장이 아니다. 저 국민학교는 내 자식을 넣기에는 힘에 겹다. 이와 비슷한 해답이 교회를 볼 때마다 나온다.
오늘날 우리들의 잠재의식은 대제도(大制度)에는 거저가 없다는 공포에 젖어 있다. 저 큰 집을 어떻게 거저 들어갈 수 있을까? 입장료가 없을까? 이렇게 구질구질한 옷을 입고 들어가도 타박을 맞지 않을까하는 공포감이다.
그것은 입장료를 받지 않는 경우에는 반드시 우리들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용한다. 우리들에게 조금도 물질적인 해는 주지 않지만 사실은 깜짝 놀랄 만큼 무섭게 우리들을 이용하고 있다. 입장료도 무섭지만 입장료를 안 받는 것은 더 무섭다.
교회가 이러한 현대의 대제도의 오해를 받지 않으려면 근본적으로 대제도의 인상을 주지 말아야 한다. 공포를 주지 않아야 하고, 그러기위해서는 매머드 건물을 과시하지 말아야 한다.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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