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말이 다 사실이라 치자. 그래도 난 이해를 못하겠네. 과학이 왜 인간한테 그런 짓을 해?"
"과학은 후진이 불가능해. 그저 도착하기로 예정된 곳에 도착한 것뿐이야."
그러니까 롤라는 인간이 결국 도착하고야 말 숙명이자 특이점이라는 얘긴가. 나는 혼잣말처럼 물었다.
"근데 거길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단 말이지?"
"생명체는 유한하고 인간은 영원히 살고 싶으니까."
"그걸 산다고 해도 되는 건가?"
"그건 철학의 영역에 속한 문제겠지. 과학의 입장에선 롤라 자체가 하나의 우주고."
제이에게는 모든 질문에 대한 모든 답변이 준비돼 있었다. 내 입장에선 하나 같이 마음에 안 드는 답변이었다. 오지게 잘난 척은 하는데 알맹이 없는 맹탕 같았다. 나는 물었다.
"그래서 네 입장은 뭔데?"
" 난 철학자도 과학자도 아냐. 게임개발자로서 내게 맡겨진 일을 했을 뿐이지."
"그러니까 네가 뭘 했다는 거냐고?"
"아까 말했잖아 극장을 만들었다고. 인간은 놀이 동물이야. 놀이를통해 삶을 배우고, 순전히 놀기 위해 놀이를 하고, 죽을 때까지 놀이에 몰두하는 철딱서니 없는 종. 그중에서도 가장 고유한 놀이가 아마 서사 놀이일 거야. 영화, 드라마, 뮤지컬, 연극, 문학•••••• 난 그 콘텐츠들을 만드는 데 참여한 거야. 롤라에 도착할 첫 인간 개체들을 위해서."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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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이라더니, 내 눈에 보이는 남자는 파란 LA 다저스 모자를 쓴 동양인이었다. 남자는 모하메드와 인사를 나눈 뒤 내게 한국어로 말을 걸어왔다.
"한국인이죠?"
남자의 눈에 확신의 미소가 담겨 있었다.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자신을 소개했다.
" 박제이입니다."
나는 스스럼없이 내미는 그의 손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재이인가. 제이인가.
"제일, 제이, 제삼 할 때 그 제이."
제이는 내 머릿속 질문을 들은 것처럼 얼른 덧붙였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단단하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주는 손이었다. 여자로서는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내 손이 담쏙 싸안길 만큼 컸다. 슬쩍 마주 쥐었다 놓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경쾌하고 담백했다.
"이해상입니다." 나는 입이 자동문처럼 열리는 걸 느꼈다. "천상, 지상, 해상 할 때 그 해상."
제이는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음소리가 손의 느낌과 비슷했다.
생면부지 상대에게 갖게 되는 동물적 경계심을 단박에 허무는 힘이있었다. 나는 눈을 깜박이며 그를 봤다. 내 삶에 그가 웃는 얼굴로 걸어 들어오던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이기도 했다. 그놈이랑 눈 맞추지마. - P151

"왜?"
어쩌면 그때 내가 둘러멘 남자는 제이가 아니라 승주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무의식 속에서 그랬을 거라는 얘기다. 그게 아니고는 내 안에서 폭발한 불가사의한 힘을 설명할 길이 없다. 나는 넘어지지도, 미끄러지지도, 심지어 다리 한번 휘청거리지도 않았다. 마치 캠핑 배낭을 멘 것처럼 몸을 통제하며 구보 속도로 산길을 내려갔다.
하산하는 길은 멀고도 멀었으나 결국 끝이 나타났다. 영원히 도착할 수 없을 것 같던 담장 쪽문이 랜턴 빛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허리를 낮추고 미끄러지듯 내려가 쪽문을 통과했다. 그때부턴 전력으로내리달았다. 식자재 창고와 흡연 구역을 지나 3동 비상구에 도착할때까지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달렸다.
비상구 문을 밀고 들어서자 놀란 얼굴들이 나를 맞았다. 공달 카페입장을 기다리던 노인들이었다. 따뜻한 공기와 함께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시야는 갑자기 흐려졌다. 지금껏 나를 끌고 온 광기가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1동에서 나오는 랑이 언니를 알아본 건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복도 바닥에 흐물흐물 주저앉으며 랑이 언니를 불렀다. 팀장을 깨우라고.
귓가에선 제이가 다른 사람을 부르고 있었다. 잠꼬대처럼 혹은 속삭임처럼.
"해상아…."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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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남자의 집에 초대되었다. 주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머뭇대지 않고 출발했다. 부르면 찾아가는 게 내 일이었다. 지금 내가 이 어둡고 낯선 거리에 서 있는 건 바로 그 때문이고, 이정표가 알려주기로, 이 거리의 이름은 만경로란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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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이 어디나 군기, 텃세 같은 게 엄청 심해요. 그자리 하루만 일하고 그만둔 사람 엄청 많아요. 핫파트가 일도 힘들지만, 관리자가 옆에붙어서 그렇게 쪼니까 스트레스받아서 못 견디고 나가요."
"근데 제가 이해가 안 가는 게 사람들이 금방 그만둬서 힘들다 그러면서 왜 그렇게 몰아대는 거예요? 어떻게든 데리고 있으려고 애를 써야하는 거 아녜요?"
"아니죠. 어차피 그만둘 사람이면 그래서 막 대해도 상관없는 거고. 있을 사람이면 누가 서열이 높은지 확실하게 보여줘야죠. 주방은워낙 일이 많고 힘드니까 위아래가 확실하게 잡혀 있지 않으면 굴러가지 않아요. 여기선 핫파트가 제일 심해요. 저도 사람 없다고 해서 핫파트 몇번 불려간 적 있는데 너무 힘들어서 핫파트 계속해야 하면 그만둔다고 해서 다시 콜드로 옮긴 거예요. 아마 지금 많이 힘드실 거예요."
인원 부족으로 힘들어하면서도 사람에 미련이 없는 데에는 주방 사람들의 자부심도 한몫했다. 경력이 오래된 사람들은 ‘화‘가 중심에 자리잡은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래, 할 수 있어!‘가 아니라 ‘씨발 다 덤벼!!
류의 자신감이다. 이들은 오랜 시간 동안 과로와 야근으로 점철된 주방생활을 ‘나 아니면 식당이 안 돌아가!‘ 하는 자부심으로 버텼다. 오래 일한 사람은 누구나 가슴 한편에 이 생각을 품고 일한다. 심지어는 나조차도 한두 달 지나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뜨내기 한둘이 사라지는 건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다. 그들이 있건 없건 어차피 내가 여기서 제일 힘들고 일도 제일 많이 하는 건 달라지지 않는다. 신입 직원에게 살갑게대할 이유도 없다. 결국엔 내가 다 하게 될 테니까. 겸손한 래퍼를 힙합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들듯이 일당백이 아닌 요리사도 요식업계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 P213

"너는 내가 이렇게 말하면 기분 나쁠지 모르겠지만 알바는 정말 몰라안 겪어본 사람은 알 수가 없어. 내가 <동물의 세계> 이런거 보는 거 좋아하거든. 거기 보면 아프리카 초원에서 표범이 토끼나 새끼 가젤 같은거 잡으려고 전속력으로 막 달려가, 그러면 조그만 동물이 눈에 핏발 세우고 도망을 친다고, 목숨을 걸고 도망가. 내가 그걸 보고 있으면 무슨생각이 드는 줄 알아? 쟤네들은 내 마음 알 거라고. 온 세상에서 딱 채네들만 지금 내 기분 이해할 거라고. 장사하는 사람 심정이 딱 그거야. 사자가 등 뒤에서 입 벌리고 쫓아오는데 어떻게든 안 잡히려고 도망치는 거. 인건비에 배달비에 재료비에 대출에 적자에 어? 어? 하다가 따라잡히면 그대로 끝장나는 거거든. 그러니까 똥구멍에서 피가 나게 뛰어다니는 거지. 그나마 야생은 편한 거야. 사자는 한 5분 따라오다 안 된다 싶으면 포기라도 하지. 우리는 안 끝나. 혀가 입 밖으로 빠져나와서너덜거릴 정도로 도망을 치는데 그게 안 끝나. 계속 쫓아오고 계속 도망가. 그렇게 19년을 살아봐. 식당 하는게 그런 거야." - P244

"촬영하다 모여서 다들 그 얘기 하거든. ‘이렇게 찍어도 이거 어차피아무도 안 봐.‘ 나도 하다 보면 그런 생각 자주 드는데 그때가 제일 비참해. 진짜 그 기분은 말로 다 못 해. 이런 데가 오히려 돈은 꼬박꼬박 잘챙겨줘. 근데 그런 게 문제가 아니야. 이런 현장 오래 있으면 진짜 폐인돼. 사람이 망가져"
나는 막연히 이들이 이 업계에서의 경력을 부끄러워하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다들 쉬쉬하며 숨기고 싶어 할 거라고 말이다.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사람들이 봐주기만 한다면, 보고서 즐거워한다는 확신만 든다면 그들은 더 적은 돈, 더 긴 시간도 얼마든지 감내할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노고는 철저히 낭비되어 버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노동이 누구에게도 가 닿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들의 노력이 이 세상 어디로도 어느 누구에게도 연결되지 못하고 흩어져 버린다는 사실 때문에 가장 괴로워했다. - P248

논픽션은 공동체의 투병기여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육체의 상처와 고통뿐 아니라 세대와 시대가 앓고 있는 병을 고백하는 글이어야 한다고 말이다. 작가의 역할은 고름이 질질 흐르는 환부가 되는 것이다.
그가 쓸모없다고 확신하는 종류의 책은 끝까지 읽고 나서 작가의 결점을(글의 결점이 아니라) 하나도 발견할 수 없는 책이었다. 그런 책이라면 차리리 쓰지 않는 편이 나으리라. 자신의 못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서 작가로서 정확해질 수 있는 길은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저에게 조언을 하는 겁니까? 그렇다면 자신에 대한 조언과 교정은 이미 끝난것입니까?그래서 남을 지도할 여유가 있는 것입니까?"
나의 마음도 그렇게 비틀어지지는 않았네. 나 자신이 병이 들었는데 남을 간호하지는 않지. 마치 같은 요양소에 누워 있듯이 자네와 공통된 병고에대해 이야기하면서 치료법을 서로 나누고 있는 것이네. 그러니 부디 들어주길 바라네."
#《세네카 삶의 지혜를 위한 편지》, 세네카, 김천운 옮김, 동서문화사, 2016. - P381

그러면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누이트족이 특별했던 점은 하나였다. 그들은 날씨가 더 추워질 수 있다는 걸 예상했다. 그것뿐이었다. 반면에 텍사스인은 지금 날씨가 어떤지만 생각했다. 텍사스인이 이보다 추워지지는 않을 거라고 믿고 있을 때, 이누이트족은 더 혹독한 추위에 대비해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리고 날씨가 실제로 더 추워졌을 때 텍사스인은 무너졌고 이누이트족은 버텨냈다.
세상은 오늘도 날카로운 한기로 사람들을 몰아세운다.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하리라. 다가오는 시간은 지금보다 아주 아주 많이 더 추우리라는 사실을. - P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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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당을 받는 육체노동은 인생을 고체화시킨다. 물류센터에선 매일매일 내가 한 일의 성과를 바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쓸모 있는 무언가를 한다는 느낌을 한순간도 잃지 않는다. 이 일을 하는 동안 인생은 모호하기로 악명 높은 시간 개념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무언가 두 손으로 꼭 붙들고서 집고 휘두를 수 있는 단단하고 구체적인 무언가였다. 그렇게 일을 끝내면 일당이 통장에 차곡차곡 쌓이더니 잔고의 앞자리 숫자가 변하는 것이 보인다. 마치 하루하루 레벨업을 하는 느낌이다. 물론 까대기가 성장시켜 줄 삶에는 지극히 현실적인 한계가 있다. 하지만 온몸의 관절을 박살내버리려는 듯 돌아가는 작업 속에서도 그 감각, 내삶이 전진하고 있다는 감각만큼은 분명하게 전해진다.
이곳에선 하루하루 넘어야 할 산이 워낙 높고 험하기 때문에 일이년후의 지평선을 바라보며 애태울 기운도 애초에 남아나지 않았다. 그렇게 산 하나를 넘고 나면 통쾌한 노곤함과 절대적인 숙면만이 남았다.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까대기는 우리가 오직 현재, 오늘 하루에만 집중하도록 도왔다. 그것은 미래를 방기하는 삶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것 말고 미래를 준비하는 더 나은 방법이 어디있겠는가?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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