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이라더니, 내 눈에 보이는 남자는 파란 LA 다저스 모자를 쓴 동양인이었다. 남자는 모하메드와 인사를 나눈 뒤 내게 한국어로 말을 걸어왔다.
"한국인이죠?"
남자의 눈에 확신의 미소가 담겨 있었다.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자신을 소개했다.
" 박제이입니다."
나는 스스럼없이 내미는 그의 손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재이인가. 제이인가.
"제일, 제이, 제삼 할 때 그 제이."
제이는 내 머릿속 질문을 들은 것처럼 얼른 덧붙였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단단하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주는 손이었다. 여자로서는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내 손이 담쏙 싸안길 만큼 컸다. 슬쩍 마주 쥐었다 놓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경쾌하고 담백했다.
"이해상입니다." 나는 입이 자동문처럼 열리는 걸 느꼈다. "천상, 지상, 해상 할 때 그 해상."
제이는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음소리가 손의 느낌과 비슷했다.
생면부지 상대에게 갖게 되는 동물적 경계심을 단박에 허무는 힘이있었다. 나는 눈을 깜박이며 그를 봤다. 내 삶에 그가 웃는 얼굴로 걸어 들어오던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이기도 했다. 그놈이랑 눈 맞추지마. - P151

"왜?"
어쩌면 그때 내가 둘러멘 남자는 제이가 아니라 승주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무의식 속에서 그랬을 거라는 얘기다. 그게 아니고는 내 안에서 폭발한 불가사의한 힘을 설명할 길이 없다. 나는 넘어지지도, 미끄러지지도, 심지어 다리 한번 휘청거리지도 않았다. 마치 캠핑 배낭을 멘 것처럼 몸을 통제하며 구보 속도로 산길을 내려갔다.
하산하는 길은 멀고도 멀었으나 결국 끝이 나타났다. 영원히 도착할 수 없을 것 같던 담장 쪽문이 랜턴 빛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허리를 낮추고 미끄러지듯 내려가 쪽문을 통과했다. 그때부턴 전력으로내리달았다. 식자재 창고와 흡연 구역을 지나 3동 비상구에 도착할때까지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달렸다.
비상구 문을 밀고 들어서자 놀란 얼굴들이 나를 맞았다. 공달 카페입장을 기다리던 노인들이었다. 따뜻한 공기와 함께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시야는 갑자기 흐려졌다. 지금껏 나를 끌고 온 광기가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1동에서 나오는 랑이 언니를 알아본 건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복도 바닥에 흐물흐물 주저앉으며 랑이 언니를 불렀다. 팀장을 깨우라고.
귓가에선 제이가 다른 사람을 부르고 있었다. 잠꼬대처럼 혹은 속삭임처럼.
"해상아…." - P14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