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21세기의 새로운 경제적 도전에
맞서기 위한 핵심 아이디어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는 죽기 전 2년 동안 무려 28점의 자화상을 그렸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의 개정판을 준비하면서 그런 처절한자기 성찰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흐처럼 두 귀를 머리에서 떼어내는짓도 하지 않았다. 나는 1989년 초, 그러니까 이 책의 초판 출간을 위해E.P. 듀턴사에 원고를 넘긴 이후로는 이 책을 두 번 다시 거들떠보지않았다. 작가들 중에는 자신의 작품을 간간이 다시 읽으면서 재치 있는문장이나 선견지명에 감탄하며 추억에 잠기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내 책을 읽어보며 추억에 잠기는 대신, 책 출간 이후 10년 넘게 지나온 세계 경제의 추이를 살펴보면서 이 책의 아이디어와 위대한 경제학자들의 아이디어가 현실 경제에 어떻게 접목되고 있는지 되짚어봤다.  - P19

무엇보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다음 세 가지 변화다. 첫 번째는세계 평화와 관련된 다소 긍정적인 이야기다. 즉,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면서 수억 명의 동유럽인들이 구소련의 압제와 굴레에서 벗어나 자본주의의 자유 시장 체제에 뛰어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낯선 체제에 잘적응해나갔지만, 어떤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시장경제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이 책이 체코와 불가리아에 번역 소개되었다. 두 번째는1980년 말에 세계를 호령하던 경제 대국 일본이 1990년대 들어 초라한난쟁이로 탈바꿈한 것이다. 1989년에 3만 9,000선까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도쿄 주식시장 Nikkei 은 2007년에 1만 7,000선으로 떨어졌다. 그 우수성을 자랑하던 일본의 관리기법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것일까? 세 번째는 중국이 세계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은 미국과 일본을 제외한 다른 어떤 나라보다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하고 있다. 1970년대에 미미한 국내총생산 수준을 보였던 중국이 이제 당당히 세계 경제의 강대국으로 발돋움한 것이다. - P21

 1998년에 일어난 러시아의 경제 붕괴는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신뢰할 수 있는 법제도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자유시장 freemarket은 말 그대로 자유방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시장 행위자들이 따라야 하는 일정한 규칙을 필요로 한다. 계약의 실행을 강제할 법정, 범죄자와 범죄 집단을 단죄할 경찰, 그리고 세금을 징수할 기관이 없는 상황에서 러시아가 정실 자본주의로 빠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로 볼 수 있다.  - P24

첫째, 일본 정부가 자국의 대기업들이 제조업 부문을 지배하는 것을장려하고 있을 때, 미국은 금융과 보건 의료 같은 서비스 산업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비록 일본의 은행들이 규모면에서 세계 금융 시장을 지배하기는 했지만, 수익성이나 정교함에 있어서는 많이 뒤처져 있었다. 주가지수 연동형 펀드에서 복합 파생 금융 상품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금융 상품 대다수는 미국에서 개발된 것이었다. 왜 일본은 이런 아이디어를 내놓지 못했을까? 이유는 국내에서 별다른 경쟁 압력을 받지 않았기때문이었다. 일본 재무성은 예금은행으로부터 보험회사를, 그리고 기업금융으로부터 예금은행을 보호해주었다. 즉, 미국에서 이들 산업들이서로 피 터지는 경쟁을 벌이고 있을 때, 일본 정부는 관료주의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했던 것이다. 재무성은 쥐꼬리만 한 이자를 주는 은행에 돈을 맡기라고 가계를 부추기면서 기업들에게 온순한고객을 잡아먹으라고 데려다 바쳤던 것이다. 애덤 스미스가 지금까지살아 있다면 이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일본의 은행들은 자국 내에서 주어진 밥그릇 싸움만 하느라 더 큰 현실세계에서 싸우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둘째, 일본은 정보통신기술에서도 열세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내 일본인 친구는 처음 인터넷을 접했을 때 거의 모든 웹사이트가 영어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머리를 흔들며 이렇게 말했다. "우린 망했다." 비록 일본이 전자제품 같은 제조업 상품에서 시장 점유율이 높기는 했지만, 한국과 말레이시아 기업들이 전자 산업에 뛰어들면서 어쩔 수 없이 가격을 낮출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의 기업들은 아예 싸움을 포기하고 경쟁력 없는 공장들의 문을 닫기 시작했다. 대신 바다 건너 인건비가 저렴한 중국에 공장을 세우기 시작했다. ‘평생고용 lifetime employment‘의 개념이 사라지면서 직장 여성과 남성의 사기도 꺾였다. 일본의 비평가들은 이런 현상을 ‘도넛doughnut‘ 경제라 불렀다. 즉, 경제 한가운데에 구멍이 뻥 뚫려버린 것이었다. - P26

돌이켜보면 우리는 중상주의자들이 왕족들에게 한 충고 가운데 몇가지 공통적인 견해를 끄집어 낼 수 있다. 첫째, 국가는 왕족에 복종하는 충신들에게 독점권, 특허권, 보조금, 그리고 각종 특권들을 보장해왕족의 권위와 위계를 세우고 유지해야 한다. 둘째, 국가는 국부의 척도라고 할 수 있는 귀금속과 원자재를 확보하기 위해 식민지를 개척해야 하며, 또한 그것들이 있어야 식민지 전쟁도 치를 수 있다. 셋째, 국가는 대외 무역을 엄격히 규제해 수입보다 수출을 늘려야 한다. 무역에서 계속 흑자를 내야 채무국들로부터 황금, 즉 부를 가져올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중상주의 시대에 국가들은 자신들의 영토를 확장할 수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길드 guild(중세 시대 장인 및 상인의 동업 조합). 독점권, 관세 등 경제 권력을 왕실이나 귀족 등 측근들에게 분배함으로써 국내 경제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자국의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에까지 이런 통제를 가한 나라들도 있었다. 프랑스 루이 14세 치하에서 재무장관을 지낸 장 바티스트 콜베르 Jean-Baptiste Colbert는 상품 제조에 대해 각종 규제를 단행하고, 길드에 막대한 권한을 부여했다. 그는 루이 14세의 위세를 등에 업고 프랑스 동부에 위치한 디종 지역(원래는 신성로마제국에 속해 있었으나 1678년에 프랑스로 귀속)에서 생산되는 직물은 1.408수로 되어야 한다고 공표하기도 했다!
이런 중상주의자들은 애덤 스미스의 비판 표적이 되었다. 그래서 애덤 스미스에서 근대 경제사상사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물론 내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만, 내 생각이 그렇다는 뜻이다. 그는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중상주의자들의 이론을 비판했다. 첫째, 중상주의자들은 화폐와 귀금속에 기초해 부를 측정했다. 반면 스미스는 실제 부는 국민들의 생계 수준으로 측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황금 자루가 아무리 많다고 한들 그것이 언제나 쌀가마니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둘째, 스미스는 부는 한 나라의 소비자 관점에서 측정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 통치자나 그에게 아첨하는 상인들에게 돈을 쥐어주는 얄팍한 술책은 국민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셋째, 스미스는 개별적인 동기 부여, 발명, 혁신이 경제 번영의 원동력이라는 것을 알았다. 소수 특권층에게 독점권이나 보호 정책 같은 혜택을부여하고자 했던 중상주의자들의 정책은 부를 늘리기는 했지만, 정치체제는 마비시켰다. 이렇게 해서 근대 경제학이 태동했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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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1755)에서 천하의 무자비한 폭군도 극장에서는 타인의 불행을보며 눈물을 흘릴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인간의 태생적 동정심을 긍정했다. 그런데 한 저자는 저 대목을 거꾸로 읽는다. 극장에서는 태연한 눈물을 흘리는 인간도 자신이 직접 행하는 악덕에는무감각해질 수 있다는 뜻으로 말이다. "우리가 스스로 야기한 상처에 대해서는 아무런 동정심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야기하지 않은 고통 앞에서는 울 수 있어도 자신이 야기한 상처 앞에서는 목석같이 굴 것이다." (사이먼 메이, 《사랑의 탄생》, 문학동네, 2016, 292쪽)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자신이 원인을 제공한 슬픔에 더 깊이 공감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그 반대로 행동한다. 이 경우 타인의 슬픔은 내가 어떤도덕적 자기만족을 느끼며 공감을 시도할 만한 그런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추궁하고 심문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 슬픔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나를 불편하게 할것이다. - P25

아이스킬로스의 소위 ‘고통을 통한 배움 (pathei mathos)‘(<아가멤논>, 177행)이란 고통 뒤에는 깨달음이 있다는 뜻이지만 고통없이는 무엇도 진정으로 배울 수 없다는 뜻도 된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같은 경험과 같은 고통만이 같은 슬픔에 이를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비참한 소식이다. 그런데 더 비참한 소식은 우리가 그런 교육을 통해서도 끝내 배움에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 교육이 하나의 생명으로서의 내 존립을 위협하기라도 한다면 말이다. 아가멤논과 스티븐과 우리 사이에는 단 하나의 결정적인 공통점이 있어 다른 많은 차이점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자신을 유지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하나의 생명체라는 것. 이것은 거부할 수도 박살낼 수도 없는 인간의 조건이다. <킬링 디어>가 엄밀한 의미에서 ‘비극‘인 것은 이 인간 조건의 비극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특정한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바로 결함이라는 것. 그러므로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 - P27

 <킬링 디어>의 첫 장면을 가득 채우는 것은 뛰고 있는 심장이다. 이 장면은 말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심장이다. 심장은 언제나 제 주인만을 위해 뛰고, 계속 뛰기 위해서만 띈다. 타인의 몸속에서 뛸 수 없고 타인의 슬픔 때문에 멈추지도 않는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다. 그러나 이 한계를 인정하되 긍정하지는 못하겠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줄 아는 생명이기도 하니까.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니까. 그럴 때 인간은 심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슬픔을 공부하는 심장이다. 아마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이기적이기도싫고 그렇다고 위선적이기도 싫지만, 자주 둘 다가 되고 마는 심장의 비참. 이 비참에 진저리치면서 나는 오늘도 당신의 슬픔을 공부한다. 그래서 슬픔에 대한 공부는, 슬픈 공부다. - P28

이에 대한 내 대답은 조심스러웠고 변변치 않았다. 반박할 논리가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논리를 갖다 댈 영역이 아니라는 느낌 때문이었다. 이 세상의 슬픔 중에서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것은 많지 않겠으나, 그런 논리들이 그 슬픔에 ‘위로‘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프로이트가 소개한 또 다른 유명한 꿈을 떠올렸다. 병든 아이의 침상 곁에서 며칠을 지새운 아버지는 아이가 죽자 촛불로 둘러싸인 시신을 잠시 놓아두고 옆방에서 잠이 든다. 그런데 꿈에 죽은 아이가 나타나 아버지에게 말한다.
"아빠, 내가 불에 타는 것이 안 보여요?" 깨어나 옆방으로 달려가보니 촛불이 넘어져 아이의 수의(衣)가 타고 있더라는 것.
물론 옆방의 빛과 열기가 잠든 아버지에게도 전달되어 꾸어진 꿈이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어떻게 그 위급한 상황에서 신속히 깨어나지 않고 꿈을 꾸고 있을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프로이트의 답은 이렇다. ‘아버지는 꿈에서 다시 만난 아이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고 싶었다.‘ 그러니 이 꿈 역시 소원 성취인 것이다. 이 꿈을 말할 때 내 목소리는 조금 떨렸는데 학생들은 몰랐을 것이다. ‘아빠, 내가 물에 잠기는 것이 안 보이세요?"라고 말하는 아이를 오늘도 꿈에서 만나고 있을 많은 분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 꿈은 고통일 테지만, 그 꿈에서 깨어나는 일은 그보다 더한 고통일 것이다. 2년 내내 그러했으리라.
(2016.4.7) - P35

최근 어느 글에 이런 문장을 쓴 적이 있다. "문학이 위로가 아니라 고문이라는 말도 옳은 말이지만 그럼에도 가끔은 문학이 위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고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의 말이기 때문이고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그런 사람의 말만이 진실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이 말에 보충설명이 필요해 보여서뒤늦게 덧붙이려고 한다. 문학의 기능들 중에 위로라는 것도 있다는 데에는 동의하더라도, 그것이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을 분들이 많을 것이다. 문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분들일수록 더욱 그렇지 않을까. 인간과 세계에대한 깊이 있는 ‘인식‘을 전달하는 것이 문학의 더 본질적인 기능이며, 공감이니 감동이니 위로니 하는 ‘감정‘의 작용들은 부수적이거나 보조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취지로 말이다. - P37

인식의 영역과 감정의 영역이 별개라는 전제하에서만 그렇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그 둘이 서로 뒤섞여 있는 것이라면? 감정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일도 인식의 영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라면? 결론을 당겨 말하자면 이렇다. 어떤 책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으려면 그 작품이 그 누군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 위로는 단지 뜨거운 인간애와 따뜻한 제스처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나를 위로할 수는 없다. 더 과감히 말하면,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해받는다는 것이고, 이해란 곧 정확한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위로란 곧 인식이며 인식이 곧 위로다. 정확히 인식한 책만 정확히 위로할 수 있다. - P38

슬픔에 대한 어설픈 통찰을 늘어놓으면서 빨리 거기서 빠져나오라고 훈계하는 대목은 어디에도 없으므로 어디를 인용해도 상관없지만 내키는 대로 ‘휴식‘이라는 제목의 챕터를 펼친다. "순수한 휴식은 슬픔의 고통을 치료해주는 가장 효과적인 치료제다. 그러나 슬퍼하는 사람이 참 하기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도 휴식이다."(161쪽) 휴식이 왜 어려운가. 저자들은 "슬픔이 원기를 고갈시키는 것처럼, 좋은 감정 역시 에너지를 무척이나 소진시킨다는 점" (165쪽)을 지적한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와서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그것은 고마운 일이므로 나는 좋은 감정으로 응대한다. 그러나 그 응대는 그 자체로 나의 감정적 자원을 크게 소모시키는 일이다. 그런 일들이 피곤하다고 느껴지면 고마워할줄 모르는 나 자신에게 마음이 불편해져서 그것이 또 나를 갉아먹는다.
이런 대목만 보아도 이 저자들이 슬픔에 빠진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구나 하는 신뢰를 가질 수 있다. 저자들은 이렇게 말을 잇는다. 슬픔에 빠져 있지만 말고 외출도 하고 사람도 만나라고 말하는 이들의 헛소리에 신경 쓰지 말라고 당신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저 아무 일도 안 하고 쉬는 것일 뿐이라고, 집안일도 남에게 맡겨버리고 필요하면 수면제도 먹으라고 수면제 대신 캐머마일 차를 드셔보시라고 말하는 친척의 말은 샌드위치 그만 먹고 도장이나 핥으라는 말과 같으니 과감히 무시하라고 함께 기도해주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말하라고 "기도는 제가 직접 할 테니 설거지나 좀 해주시겠어요?" (168쪽) 이쯤 되면, 정확히 알지 못하면 제대로 위로할 수 없다는 말이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지 않은가. 문학에서도 그렇고 인생에서도 그렇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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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요, 몰라요. 전혀 몰라요." 그들도 고향에 어머니가 있기에 그녀의 고통과 염려를 이해하면서 소소한 일들을 살펴 주었다. 그녀도 그들을 네 명의 적군을 매우 좋아했다. 농부들은 애국심에서 나온 증오 같은 것은 별로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지배계급의 전유물이다. 비천한 사람들은 가난한 데다 온갖 새로운 의무들에 짓눌리기 때문에 가장 큰 희생을 당하며, 수가 많기 때문에 대포에 몸을 내놓고 떼죽음을 당한다. 또한 가장 약하고 잘 저항하지 않기 때문에 잔인한 전쟁의 비극을 가장 처참하게 겪어야 한다. 그들은 호전적인 열정이나 명예와 관련된 흥분하기 쉬운 일들 혹은패전국과 똑같이 승전국도 여섯 달이면 지쳐 버리는, 소위 정치적 책략같은 것을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 P515

내 친구 세르발이 덧붙였다.
"그 보복으로 독일인들이 마을에 있는 내 성관을 파괴한 거야"
나는 그 초가집 안에서 타 죽은 네 명의 온순했던 젊은이의 어머니들을 생각했고, 그 벽에 몸을 기댄 채 총살당한 또 다른 어머니의 처참한영웅적 행위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불 때문에 그때까지도 거무스름한 작은 돌 하나를 땅에서 주워 들었다. - P521

행복 
Le Bonheur

램프에 불을 밝히기 전 차 마시는 시간이었다. 별장은 바다를 굽어보고 있었다. 지는 해가 하늘을 온통 장밋빛으로 물들이고 금가루를 뿌린듯 환히 빛나게 했다. 지중해는 잔물결 없이, 가벼운 흔들림도 없이, 사위어 가는 햇빛 아래에서 잔잔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윤기 나는 드넓은 금속판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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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신사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한 여자가 말했다.
그 여자는 지나치게 손쉬운 이상과 지나치게 원초적인 필요를, 그리고 지나치게 소박한 요구들을 갖고 있었네요. 어리석은 여자일 뿐이에요"
그러자 또 다른 여자가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러면 어때요! 어쨌든 그 여자는 행복했잖아요."
그때 저쪽에서, 수평선 깊숙한 곳에서 코르시카 섬이 어둠 속으로 다시 가라앉으며 천천히 모습을 감추었다. 자신의 기슭으로 피신한 보잘것없는 연인의 이야기를 하려는 듯, 바다에 드리웠던 커다란 그림자를 서서히 지웠다. - P522

아직 혼돈 속에 싸여 있는 그 섬을 상상해 보시오. 격류가 흐르는 좁다란 협곡들이 산봉우리에 내리치는 폭풍우를 갈라놓소. 그 섬에는 평원이 없다오, 물결치는 거대한 화강암과 잡목림이 있고, 구불거리며 굽이치는 땅 위에 밤나무나 소나무로 이루어진 숲만 펼쳐져 있다오. 때때로 산꼭대기에 바윗덩어리를 닮은 마을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곳은 처녀지, 불모의 땅, 황량한 땅이라오, 문화도 산업도, 예술도 없소. 문양이 조각된 나뭇조각 하나, 돌멩이 하나 만나지 못한다오. 우아하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조상들의 유치하거나 세련된 기념물 하나 만나지 못한다오. 그것은 그 당당하고 혹독한 고장이 지닌 가장 충격적인 측면이기도하오. 어떻게 생각하면 그것은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매혹적인 것들을 찾기 이전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초연함인지도 모르겠소. - P524

술통
Le Petit Füt

아돌프 타베르니에에게
에프르빌의 여인숙 주인 시코 씨가 마글루아르 할머니의 농장 앞에 이륜 경마차를 세웠다. 시코 씨는 키가 크고 머리카락이 붉고 배가 나온 마흔 살의 원기 왕성한 남자였고, 상당히 영리한 사람으로 통했다.
그는 울타리의 말뚝에 말을 붙들어 맸다. 그런 다음 뜰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마글루아르 할머니의 농장 옆에 토지를 갖고 있었고, 오래전부터 할머니의 농장을 탐내었다. 그래서 여러 번 그 농장을 팔라고 제안했지만 마글루아르 할머니는 고집스럽게 거절했다.
"나는 여기서 태어났고, 여기서 죽을 거라우." 할머니는 말했다. - P532

29호 침대 
Lelit 29 

도에피방 대위가 길을 지나가면 여자들이 모두 돌아보았다. 그는 참으로 잘생긴 경기병 장교였다. 그는 늘 자기 넓적다리, 허리, 콧수염에 신경을 썼고,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뽐내며 걸어 다녔고, 쉬지 않고 으스댔다. 그의 콧수염, 허리, 넓적다리는 근사했다. 콧수염은 금빛이고 매우 견고했으며, 잘 익은 밀 빛깔의 아름다운 똬리를 이루며 섬세하고 세밀하게 말려 입술 위로 과감하게 흘러내렸다. 그런 다음 입 양쪽에서 무척이나 위풍당당한 두 개의 털 줄기를 이루며 뻗어 내려갔다. 허리는 코르셋을 입은 것처럼 날씬했고, 그 위에는 활처럼 부풀어 오르고 흰 남자답고 건장한 가슴이 있었다. 넓적다리 역시 경탄할 만했다. 착 달라붙는 빨간나사 바지 밑에서 모든 움직임이 마치 그림처럼 모습을 드러내는 체조선수나 무용수 같은 근육질의 넓적다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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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곳을 떴다. 성큼성큼 걸어 매독에 걸린 여자 환자들이 동요하고 있는 두 줄의 침대 사이를 지나 도망쳤다. 쉭쉭거리고 헐떡이는 이르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가 그를 쫓아왔다.
"당신보다 많이. 그래, 내가 당신보다 많이 죽였어. 당신보다 더 많아......"
그는 계단을 네 단씩 급히 뛰어 내려갔다. 그리고 집으로 달려가 틀어박혔다.
다음 날 그는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 P541

귀향
Le Retour

짧고 단조로운 파도가 해안을 후려쳤다. 작고 하얀 구름들이 바람에떠밀려 넓고 푸른 하늘을 새 떼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바다를 향해 뻗어 내려가는 작은 골짜기 사이에 자리한 그 마을은 따뜻한 햇살을 받고 있었다.
마을 끄트머리 길가에 마르탱 레베스크의 집이 외따로 떨어져 있었다. 진흙으로 벽을 쌓아 올린 초라한 어부의 집이었지만, 초가지붕 위에 파란 붓꽃이 피어 있었다. 문 앞에 있는 손수건만 한 뜰에는 양파, 양배추, 파슬리 같은 채소들이 가득했다. 울타리가 길을 따라 그 정원을 둘러싸고 있었다. - P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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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두 번째 산문집을 묶으며건축학을 잘 모르면서도 글짓기는 집짓기와 유사한 것이라믿고 있다. 지면이 곧 지면(面)이어서, 나는 거기에 글을짓는다. 건축을 위한 공정 혹은 준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식을 생산해낼 것. 있을 만하고 또 있어야만 하는 건물이 지어져야한다. 한 편의 글에 그런 자격을 부여해주는 것은 (취향이나 입장이 아니라) 인식이다. 둘째, 정확한 문장을 찾을 것, 건축에 적합한 자재(材)를 찾듯이, 문장은 쓰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다.
특정한 인식을 가감 없이 실어 나르는 단 하나의 문장이 있다는플로베르적인 가정을 나는 믿는다. 그런 문장은 한번 쓰이면 다른 문장으로 대체될 수 없다. 셋째, 공학적으로 배치할 것. 필요한 단락의 개수를 계산하고 각 단락에 들어가야 할 내용을 배분한다. 가급적 각 단락의 길이를 똑같이 맞추고 이를 쌓아 올린다. 이 시각적 균형은 사유의 구조적 균형을 반영한다(반영해야한가). 이제 넘치는ㅍ것도 부족한 것도 없다. 한 단락도 더하거나 빼면 이 건축물은 무너진다(무너져여 한다). -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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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Main

사람들이 예심판사 베르티에 씨 주변에 모여 있었다. 베르티에 씨는 생클루에서 일어난 이상한 사건에 관해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있었다. 그 설명할 수 없는 범죄가 한 달 전부터 파리를 몹시 불안하게 만들었다. 아무도 그 사건에 관해 이해하지 못했다.
베르티에 씨는 벽난로를 등지고 서서 자신이 모은 증거들을 근거로다양한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결론을 내지는 못했다.
여자 여러 명이 근엄한 말들이 흘러나오는 사법관의 입에 눈을 고정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들은 야릇한 두려움에 그녀들의 영혼 속을드나들면서 굶주림처럼 그녀들을 고문하는 탐욕스럽고 만족할 줄 모르는 공포심에 마비되어 전율하고 있었다. - P470

늙은이
Le Vieux

포근한 가을 햇볕이 도랑의 키 큰 너도밤나무 너머로 농장 뜰에 내리쬐었다. 암소들이 뜯어 먹은 풀밭 아래의 흙은 최근에 내린 빗물에 젖어있어서 발로 밟으면 푹푹 빠지며 절벅거리는 소리를 냈다. 사과나무들은 흐릿한 초록색의 열매들을 짙은 초록색의 풀밭 위에 뿌려 놓았다.
암송아지 네 마리가 줄에 묶여 지나가며 이따금씩 집 쪽을 향해 음매 하고 울었다. 가금류들은 축사 앞 퇴비 위에서 활기 넘치는 몸짓을했다. 몸을 문지르고, 움직이고, 꼬꼬댁거렸다. 수탉 두 마리는 쉬지 않고 울어대며 지렁이를 찾고는, 힘차게 꽥꽥거리며 암탉들을 불렀다. - P480

목가
Idylle

모리스 르루아르에게
기차는 막 제노바를 떠나 마르세유를 향해 가고 있었다. 바위투성이의 굽이진 긴 해안을 따라가기도 하고, 바다와 산 사이를 뱀처럼 빠져나가기도 하면서, 잔잔한 물결이 은실처럼 가장자리를 두른 황금빛 모래해변 위로 기어갔다. 짐승들이 자신의 굴속으로 들어가듯이 갑자기 더널의 검은 입속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기차의 맨 마지막 칸에 뚱뚱한 여자와 젊은 남자가 말없이, 이따금 서로를 바라보면서 마주 앉아 있었다. 여자는 스물다섯 살쯤 되어 보였다. 그녀는 창가에 앉아 바깥 풍경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검은 눈과 풍만한 가슴, 통통한 뺨을 가진 피에몬테 지방의 건강한 농부 아낙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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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맛을 잘 음미하려는 듯 두 눈을 감고 그 육체의 샘물을 계속 마시고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그를 떼어 놓았다.
"이제 됐어요. 기분이 나아졌어요. 몸이 한결 좋아진 것 같아요"
젊은이는 손등으로 입을 닦으면서 일어났다.
여자는 살아 있는 두 개의 수통을 옷 속으로 집어넣어 가슴을 부풀리면서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내게 큰 도움을 주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그러자 그가 황송해하는 어조로 대답했다.
"고마워할 사람은 바로 저예요, 부인.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거든요!" - P491

목걸이
La Parure

가난한 월급쟁이를 가장으로 둔 집안에 운명의 신이 잘못 판단해 태어났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세련되고 아름다운 여자들이 태어나는 경우가 있다. 그녀도 그런 여자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결혼할 때 그녀에게는 지참금도 없었고, 물려받을 유산도 없었다. 돈 많고 멋진 남자와 사랑해 청혼을 받을 방법은 더더욱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교육부에서 근무하는 사무원과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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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내 것 대신 다른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사 왔단 말이야?"
"그래. 아직까지 몰랐구나, 응? 하긴, 모양이 정말 똑같았으니까"
그녀는 자랑스러우면서도 순박해 보이는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포레스티에 부인이 감정이 격해져서 친구의 두 손을 붙잡았다.
"오! 가여운 마틸드! 내 목걸이는 가짜였어. 기껏해야 500프랑밖에 나가지 않는!"
- P498

소바주 아주머니
La Mère Sauvage

조르주 푸세에게
나는 15년 전부터 비를로뉴에 간 적이 없다. 올해 가을에야 사냥을하러 친구 세르발의 집을 방문했다. 그 친구가 프로이센군이 파괴했던 성관城館을 마침내 새로 지었던 것이다.
나는 그 고장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세상에는 시각적으로 기분 좋고 관능적인 매력을 지닌 곳들이 있다. 사람들은 그런 곳을 감각적인 애정으로 사랑한다. 지상의 풍광에 매혹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종종 자신을 감동시킨 샘, 숲, 연못, 언덕에 대한 행복한 추억들을 간직한다.  - P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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