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1755)에서 천하의 무자비한 폭군도 극장에서는 타인의 불행을보며 눈물을 흘릴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인간의 태생적 동정심을 긍정했다. 그런데 한 저자는 저 대목을 거꾸로 읽는다. 극장에서는 태연한 눈물을 흘리는 인간도 자신이 직접 행하는 악덕에는무감각해질 수 있다는 뜻으로 말이다. "우리가 스스로 야기한 상처에 대해서는 아무런 동정심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야기하지 않은 고통 앞에서는 울 수 있어도 자신이 야기한 상처 앞에서는 목석같이 굴 것이다." (사이먼 메이, 《사랑의 탄생》, 문학동네, 2016, 292쪽)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자신이 원인을 제공한 슬픔에 더 깊이 공감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그 반대로 행동한다. 이 경우 타인의 슬픔은 내가 어떤도덕적 자기만족을 느끼며 공감을 시도할 만한 그런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추궁하고 심문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 슬픔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나를 불편하게 할것이다. - P25
아이스킬로스의 소위 ‘고통을 통한 배움 (pathei mathos)‘(<아가멤논>, 177행)이란 고통 뒤에는 깨달음이 있다는 뜻이지만 고통없이는 무엇도 진정으로 배울 수 없다는 뜻도 된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같은 경험과 같은 고통만이 같은 슬픔에 이를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비참한 소식이다. 그런데 더 비참한 소식은 우리가 그런 교육을 통해서도 끝내 배움에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 교육이 하나의 생명으로서의 내 존립을 위협하기라도 한다면 말이다. 아가멤논과 스티븐과 우리 사이에는 단 하나의 결정적인 공통점이 있어 다른 많은 차이점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자신을 유지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하나의 생명체라는 것. 이것은 거부할 수도 박살낼 수도 없는 인간의 조건이다. <킬링 디어>가 엄밀한 의미에서 ‘비극‘인 것은 이 인간 조건의 비극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특정한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바로 결함이라는 것. 그러므로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 - P27
<킬링 디어>의 첫 장면을 가득 채우는 것은 뛰고 있는 심장이다. 이 장면은 말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심장이다. 심장은 언제나 제 주인만을 위해 뛰고, 계속 뛰기 위해서만 띈다. 타인의 몸속에서 뛸 수 없고 타인의 슬픔 때문에 멈추지도 않는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다. 그러나 이 한계를 인정하되 긍정하지는 못하겠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줄 아는 생명이기도 하니까.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니까. 그럴 때 인간은 심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슬픔을 공부하는 심장이다. 아마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이기적이기도싫고 그렇다고 위선적이기도 싫지만, 자주 둘 다가 되고 마는 심장의 비참. 이 비참에 진저리치면서 나는 오늘도 당신의 슬픔을 공부한다. 그래서 슬픔에 대한 공부는, 슬픈 공부다. - P28
이에 대한 내 대답은 조심스러웠고 변변치 않았다. 반박할 논리가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논리를 갖다 댈 영역이 아니라는 느낌 때문이었다. 이 세상의 슬픔 중에서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것은 많지 않겠으나, 그런 논리들이 그 슬픔에 ‘위로‘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프로이트가 소개한 또 다른 유명한 꿈을 떠올렸다. 병든 아이의 침상 곁에서 며칠을 지새운 아버지는 아이가 죽자 촛불로 둘러싸인 시신을 잠시 놓아두고 옆방에서 잠이 든다. 그런데 꿈에 죽은 아이가 나타나 아버지에게 말한다. "아빠, 내가 불에 타는 것이 안 보여요?" 깨어나 옆방으로 달려가보니 촛불이 넘어져 아이의 수의(衣)가 타고 있더라는 것. 물론 옆방의 빛과 열기가 잠든 아버지에게도 전달되어 꾸어진 꿈이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어떻게 그 위급한 상황에서 신속히 깨어나지 않고 꿈을 꾸고 있을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프로이트의 답은 이렇다. ‘아버지는 꿈에서 다시 만난 아이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고 싶었다.‘ 그러니 이 꿈 역시 소원 성취인 것이다. 이 꿈을 말할 때 내 목소리는 조금 떨렸는데 학생들은 몰랐을 것이다. ‘아빠, 내가 물에 잠기는 것이 안 보이세요?"라고 말하는 아이를 오늘도 꿈에서 만나고 있을 많은 분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 꿈은 고통일 테지만, 그 꿈에서 깨어나는 일은 그보다 더한 고통일 것이다. 2년 내내 그러했으리라. (2016.4.7) - P35
최근 어느 글에 이런 문장을 쓴 적이 있다. "문학이 위로가 아니라 고문이라는 말도 옳은 말이지만 그럼에도 가끔은 문학이 위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고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의 말이기 때문이고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그런 사람의 말만이 진실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이 말에 보충설명이 필요해 보여서뒤늦게 덧붙이려고 한다. 문학의 기능들 중에 위로라는 것도 있다는 데에는 동의하더라도, 그것이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을 분들이 많을 것이다. 문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분들일수록 더욱 그렇지 않을까. 인간과 세계에대한 깊이 있는 ‘인식‘을 전달하는 것이 문학의 더 본질적인 기능이며, 공감이니 감동이니 위로니 하는 ‘감정‘의 작용들은 부수적이거나 보조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취지로 말이다. - P37
인식의 영역과 감정의 영역이 별개라는 전제하에서만 그렇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그 둘이 서로 뒤섞여 있는 것이라면? 감정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일도 인식의 영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라면? 결론을 당겨 말하자면 이렇다. 어떤 책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으려면 그 작품이 그 누군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 위로는 단지 뜨거운 인간애와 따뜻한 제스처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나를 위로할 수는 없다. 더 과감히 말하면,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해받는다는 것이고, 이해란 곧 정확한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위로란 곧 인식이며 인식이 곧 위로다. 정확히 인식한 책만 정확히 위로할 수 있다. - P38
슬픔에 대한 어설픈 통찰을 늘어놓으면서 빨리 거기서 빠져나오라고 훈계하는 대목은 어디에도 없으므로 어디를 인용해도 상관없지만 내키는 대로 ‘휴식‘이라는 제목의 챕터를 펼친다. "순수한 휴식은 슬픔의 고통을 치료해주는 가장 효과적인 치료제다. 그러나 슬퍼하는 사람이 참 하기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도 휴식이다."(161쪽) 휴식이 왜 어려운가. 저자들은 "슬픔이 원기를 고갈시키는 것처럼, 좋은 감정 역시 에너지를 무척이나 소진시킨다는 점" (165쪽)을 지적한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와서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그것은 고마운 일이므로 나는 좋은 감정으로 응대한다. 그러나 그 응대는 그 자체로 나의 감정적 자원을 크게 소모시키는 일이다. 그런 일들이 피곤하다고 느껴지면 고마워할줄 모르는 나 자신에게 마음이 불편해져서 그것이 또 나를 갉아먹는다. 이런 대목만 보아도 이 저자들이 슬픔에 빠진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구나 하는 신뢰를 가질 수 있다. 저자들은 이렇게 말을 잇는다. 슬픔에 빠져 있지만 말고 외출도 하고 사람도 만나라고 말하는 이들의 헛소리에 신경 쓰지 말라고 당신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저 아무 일도 안 하고 쉬는 것일 뿐이라고, 집안일도 남에게 맡겨버리고 필요하면 수면제도 먹으라고 수면제 대신 캐머마일 차를 드셔보시라고 말하는 친척의 말은 샌드위치 그만 먹고 도장이나 핥으라는 말과 같으니 과감히 무시하라고 함께 기도해주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말하라고 "기도는 제가 직접 할 테니 설거지나 좀 해주시겠어요?" (168쪽) 이쯤 되면, 정확히 알지 못하면 제대로 위로할 수 없다는 말이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지 않은가. 문학에서도 그렇고 인생에서도 그렇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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