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의 저유가 정책에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습니다. 이는 2차오일쇼크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이기도 합니다. 사우디는 고유가로 인한 석유 수익의 급증이 사회 분열과 혼란을 야기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실제로 고유가를 주장하던 이란에서 이러한 현상이 심하게 나타났습니다. 당시 이란은 늘어난 석유 수익이 국민에게 고루 분배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오일머니가 일부 계층에 집중되면서 낭비와 타락을 조장하고 빈부 격차를 심화합니다. 자원의 풍요가 오히려 제조업 등 다른 산업의 발달을 저해하는 이른바 ‘자원의 저주Resource Curse‘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오일머니의 홍수는 혼돈과 부패, 인플레이션 속에서 이란 경제와 사회를 파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팔레비 왕가에 대한 반체제 여론을 확산시킵니다. 이란 혁명은 이런 상황에서 터져 나왔고, 그것이 2차 오일쇼크의 출발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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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프랑스는 자신들이 미국과 소련같은 초강대국이 아님을 인식하게 되고 그에 맞춰 새로운 전략을 수립합니다. 1970년대 미국의 국무 장관을 지낸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는 그의 저서 《외교Diplomacy》에서 수에즈 위기는 프랑스와 독일이 화해하는 중요한 계기였다고 말합니다. 콧대 높은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적국이었던독일과 화해를 추진하는데, 이는 프랑스 단독으로 미국과 소련에 맞설수 없는 현실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두 나라는 1963년 독불 화해 협력 조약을 체결합니다. 이 조약은 훗날 유럽연합EU의 출발점이 되고, 두 나라는 유럽연합의 중심 국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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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더 이상 텅 빈 손을 휘저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고 저 수면 아래를 헤엄치는 물고기를 그저 바라보는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의 인생처럼 나의 삶도 신비로우면서도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고귀한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 바로 내곁에 있는 바로 그것.
인생이란 얼마나 예측 불허의 것인가. 그러니 흘러가는 대로,
그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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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그렇게 내 곁을 떠나버린 건 정말 끔찍하게 잘못된 일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제대로 화조차 낼 수 없었다. 제대로 자라지도 못했고 엄마를 떠나지도 못했으며,
엄마에게 불평조차 하지 못했다. 엄마가 제발 좀 다르게 행동해주었으면 하는 것들에 대해 말 한마디 못했으면서 결국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는 엄마가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엄마가 했던 모든 일들은 다 옳은 것이며 엄마를 다시 내 품 안에 꼭 안고 싶어 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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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을 3개월간 혼자서 걸어보겠다는 결심은 여러 단계를 거쳐야 했다. 한번 그렇게 해볼까 하는 생각, 실제로 그 일을 하겠다는 좀 더 진지한 결심, 몇 주 동안 필요한 물건을 사들이고 떠날 준비를 하며 짐을 꾸리는 기나긴 과정 같은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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