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알고 싶지 않아요.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아요." 댄버스 부인이 가까이 다가왔다. 내 얼굴에 자기 얼굴을 바짝들이댔다. "물론 그렇겠죠. 이제 알았나요? 당신은 절대 그분을 이길 수 없어요. 그분은 아직도 이곳 안주인이에요. 진짜 드윈터 부인은 바로 그분이지요. 그림자이고 유령인 건 그분이 아니라 당신이라고요. 아무도 원치 않아 내쳐진 잊혀져버린 존재가 바로 당신이에요. 자, 그런데도 맨덜리를 떠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지요? 왜 그분께 맨덜리를 맡기고 떠나지 못하지요?" 나는 창문 쪽으로 물러섰다. 다시 두려움과 공포가 몰려왔다. 댄버스 부인은 내 팔을 붙잡았다. "왜 가지 않는 거예요? 우린 아무도 당신을 원하지 않아요. 드윈터 씨도 마찬가지죠. 당신을 원했던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분을잊지 못하니까요. 드윈터 씨는 그분과 함께 이 집에 홀로 있고 싶어 해요. 교회 지하 묘지에 누워 있어야 할 사람은 그분이 아니라당신이에요. 죽어야 할 사람은 드윈터 부인이 아니라 당신이라고요" 댄버스 부인은 창문을 열고 나를 그쪽으로 밀었다. 흰 안개 때문에 형체가 희미해진 테라스가 내려다보였다. "저 아래를 봐요. 정말 쉽지 않겠어요? 어째서 뛰어내리지 않는 거죠? 목이 부러진다 해도 고통은 느끼지 못할 거예요. 아주 빠르고 편한 방법이죠. 물에 빠져 죽는 것과는 달라요. 왜 당장 뛰어내리지 않는 거죠?" 안개가 창밖을 가득 채웠다. 끈적거리고 습한 공기가 내 눈에, 콧구멍 안에 밀려들었다. 나는 두 손으로 창틀을 꼭 잡았다. "두려워 마세요. 밀어버리지는 않을 테니. 당신 옆에 있지도 않을 거예요. 혼자서도 충분히 뛰어내릴 수 있으니까. 대체 당신이여기 맨덜리에 있을 이유가 무엇인가요? 당신은 행복하지 않아요. 드윈터 씨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요. 그러니 살아갈 이유가 별로없는거죠? 지금 당장 뛰어내려 끝장을 내버리는 게 어때요? 그러면 더 이상 불행하지 않을 텐데요." 테라스의 꽃봉오리들이 보였다. 수국이 잔뜩 무리 지어 있었다. 돌바닥은 부드러운 회색이었다. 폭신할 듯했다. - P381
"물론 그대로 둘 수 있습니다. 저 또한 시끄러운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은 사람이니까요.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드윈터 씨의 평화로운 삶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전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라는 게 문제입니다. 잠수부는 보트 주위를 돌다가또 다른 한층 더 중요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선실 문이 전혀 손상되지 않은 채 꽉 잠겨 있고 선창도 닫혀 있더랍니다. 돌을 하나 주워 선창을 깨고 안을 들여다보았더니 물이 가득 차긴 했어도 안쪽도 멀쩡하더라는군요.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놀라서 숨이 넘어갈 뻔했다고 합니다." 설 대령이 말을 멈추고는 누구 엿듣는 사람이 없나 확인하려는듯 등 뒤를 돌아보았다. "선실 바닥에 반듯이 누운 시체가 보였다는 겁니다. 물론 뼈만 남은 시체였지요. 하지만 사람이 틀림없다고합니다. 머리통과 팔다리가 보였다고 하니까요. 그는 바로 물 위로 올라와 제게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곧장 이렇게 달려온 겁니다." 나는 처음에는 어리둥절해서, 다음에는 충격을 받아, 마지막으로는 공포에 휩싸여 그를 응시했다. "혼자 배를 탔던 게 아닌가요?" 나는 속삭였다. "누군가 함께 있었다는 얘기군요? 아무도 모르게?" "그런 것 같습니다."" - P408
그는 내 손 위에 자기 손을 올리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레베카가 이겼소"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의 손 아래 있는내 손이 갑자기 차갑게 식었다. "우리 사이에는 늘 레베카의 그림자가 있었소. 그놈의 그림자가우리 둘을 갈라놓곤 했지.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내 가슴속에 늘 자리 잡고 있는데 어떻게 당신을 이렇게꼭 껴안아줄 수 있었겠소? 죽기 전에 나를 바라보던 레베카의 눈빛이 아직도 눈에 선하오. 그 비열한 미소가 또렷하오. 레베카는이미 그때 이런 일을 예상했던 거요. 결국에는 자기가 이긴다는걸 알고 있었소" "맥심" 내가 속삭였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무슨 얘길하고 싶은 거예요?" "그 보트, 그 보트가 발견되었소. 오늘 오후에 잠수부가 찾아냈다는군" "저도 들었어요. 설 대령이 알려주었죠. 당신은 잠수부가 선실에서 보았다는 그 시체 생각을 하는 거죠?" "그래요." "결국 레베카가 혼자가 아니었다는 뜻이죠. 누군가 함께 바다에나갔던 거예요. 이제부터 그자가 누군지 찾아내야죠. 그럼 되는 거예요" "아니, 그렇지 않소." "전 당신과 함께예요. 제가 당신을 도울 거예요" " 레베카와 함께 있었던 사람은 없소. 레베카 혼자였소" 나는 무릎을 꿇은 채 그의 얼굴을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선실 바닥에 있는 시체가 바로 레베카요." - P412
퍼즐조각이 하나씩 맞춰졌다. 레베카가 마침내 장막에서 걸어 나와 살아 있는 인물로 나타났다. 말에게 채찍을 내리치던 레베카 승리감에 도취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발코니에 몸을 기대던 레베카해변에서 깜짝 놀란 표정의 벤과 마주쳤던 일이 떠올랐다. ‘당신은 친절해. 다른 사람과 달라 날 정신병원에 넣지 않을 거지?"라고했었다. 밤에 그 숲길을 따라 걸어온 다른 사람, 키 크고 늘씬한다른 사람이 있었다. 뱀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 맥심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여전히 서재를 이리저리 오가면서말이다. "결혼한 지 닷새째 되는 날 결국 그 여자의 정체를 알았소. 몬테카를로의 언덕 위로 올라갔던 때를 기억하오? 거기 다시 서서기억을 되살리고 싶었던 거요. 그 여자는 거기 앉아 깔깔 웃어댔지.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렸소. 자기 얘기를 늘어놓았지. 도저히 입에 담지 못할 만큼 추악한 얘기였소. 그제야 난 내가 무슨일을 저질렀는지, 어떤 괴물과 결혼한 것인지 알았소. 혈통과 두뇌, 미모라고? 오 맙소사!" - P423
‘내가 아이를 낳게 되면 말이야, 맥스, 당신은 물론이고 세상 그누구도 그 애가 당신 자식이 아니란 걸 증명하지 못해. 그 아이는당신 성을 물려받고 여기 맨덜리에서 자라겠지. 당신이 할 수 있는일은 하나도 없어. 당신이 죽고 나면 맨덜리는 그 아이 것이 되지이 역시 당신이 막지 못하는 일이야. 그 아이가 유일한 상속인일테니.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맨덜리를 위해 후계자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 내 아들이 밤나무 아래에서 유모차를 타고 잔디밭에서 목마 놀이를 하는 모습을, 행복의 계곡에서 나비 잡는 모습을당신도 즐겁게 지켜봐야 해. 내 아들이 날이 갈수록 커가는 것, 당신이 죽으면 이 모든 게 그 아이 소유가 되리라는 것은 맥스, 당신인생 최대의 악몽이 아니겠어?‘ 그 여자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담뱃불을 붙이고 창가로 가서 섰소, 그리고 웃어대기 시작했지. 한참을 그치지 않고 웃었소. 영원히 그렇게 웃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정도였지. ‘오, 하느님, 정말이지 얼마나 기막히게 재미있는지! 자, 이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야 한다는 내 말뜻을 당신도 이해했겠지? 멍청한 주민들, 눈먼 소작인들이 얼마나 기뻐하겠어? 늘 바라마지않던 일이라고 주인 나리에게 축하 인사를 하겠지. 난 완벽한 어머니가 되는 거야. 이제까지 완벽한 아내였던 것처럼. 그 누구도 진실을 모를 거야. 아니, 추측조차 못 할걸‘ 그 여자는 창가에서 뒤돌아서 나를 바라보았소. 미소 띤 얼굴로 한 손은 주머니 속에 넣고, 다른 한 손은 담배를 쥐고 있었지. 내가 죽여버렸을 때도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소. 총알은 정확히그 몸을 관통했다오. 그 여자는 금방 쓰러지지 않았소. 눈을 크게 뜬 채 나를 바라보며 한동안 서 있었소......" 이어 맥심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져 속삭임으로 변했다. 마주 잡은 그의 손이 차디찼다. 나는 그를 바라볼 수 없었다. 그래서 옆에 누워 잠자는 재스퍼의 등을, 가끔씩 바닥을 살짝 내리치는 그 꼬리를 쳐다보았다. "난 생각을 못 했소." 그는 무감각한 목소리로 지친 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사람이 총에 맞으면 그토록 피가 많이 흐른다는 걸 말이오." - P434
"부인께서는 그렇게 진실을 요구했고 전 알려드렸습니다. 어떤환자들에게는 그편이 더 좋은 법이지요. 괜히 복잡하게 말해봤자 좋을 게 없거든요. 댄버스 부인인지 드윈터 부인인지 하여튼 그 부인은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분이 아니더군요 여러분도 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부인께서는 침착했습니다. 전혀 충격을 받지않더군요. 이미 그렇게 짐작하고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진료비를 내고 나갔지요.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는 파일함을 닫고 서류철도 덮었다. "제 진단 소견은 이랬습니다. 그때는 통증이 경미한 수준이었지만 곧 견디기 어렵게 될 것이고 서너 달 후에는 모르핀을 맞아야 한다고요. 이미 수술할 때가 지났으므로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저 모르핀을 맞으면서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태였지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벽난로 위의 시계가 째깍거렸고 소년들이 테니스를 쳤다. 하늘에서 비행기 지나가는 소리가 났다. - P572
"줄리언 대령이 진실을 눈치챈 것 같소?" 나는 내 안경 너머로 맥심을 바라보았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분명 알았을 거요 분명히 맥심이 천천히 말했다. "그렇다 해도 절대로 아무 말 안 할 거예요. 절대로" "그야 그렇겠지" 그는 지배인에게 다시 술을 시켰다. 우리는 어두컴컴한 구석 자리에서 말없이 평화롭게 앉아 있었다. "레베카는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한 거요. 마지막 허세였지. 내가 자기를 죽이게 만들고 싶었던 거요. 모든 것을 다 내다보았겠지.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 웃어댔던 것이고 죽으면서도 그렇게 웃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던 거야" 나는 침묵했다. 그저 브랜디소다를 마셨을 뿐이다. 이제 다 끝났다. 다 정리가 되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맥심의 얼굴이 또다시 창백해질 일은 없다. "마지막으로 한 방 먹인 셈이지. 가장 멋진 한 방이었소. 지금도 나는 레베카가 이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오" - P583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계속 하늘을 보았다. 점점 밝아지는 것 같았다. 태양이 떠오르는 듯 붉은 기가 돌았다. 붉은 기는 조금씩 퍼져갔다. "오로라는 겨울에 보이는 거지요? 지금 같은 여름에는 안 보이지요?" "저건 오로라가 아니오. 저건 맨덜리요" 나는 흘낏 그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맥심 맥심, 저게 뭐죠?" 그가 속도를 냈다. 차는 오르막길을 거의 다 올라간 상태였다. 래니언은 이제 발밑에 있었다. 왼쪽에는 가느다란 은빛 강줄기가흘렀다. 9킬로미터 떨어진 케리스로 가면서 점점 더 넓어질 강줄기였다. 이제 맨덜리로 가는 길이 펼쳐졌다. 달이 없었다. 머리 위쪽 하늘은 완전히 깜깜했다. 하지만 지평선은 깜깜하지 않았다. 불꽃처럼 선명한 붉은빛이었다. 소금기 섞인 바닷바람과 함께 불탄 재가 날아왔다. - P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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