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산이라는 것은 없다. 부부는 2세를 갖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생산활동에 돌입한다. 이러한 활동을 가리키는 말로 널리 사용되는 <재생산>은 장차 버거운 현실에 직면할 예비 부모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에두른 표현에불과하다. 그리고 두 사람이 실타래처럼 얽히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암시할뿐이다. 이 개념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잠재의식적 환상에 빠져서, 우리는 흔히 독립적인 인격을 가진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영원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려 한다. 우리의 이기적인 유전자가 계속 이어지길 기대하는 까닭에 우리들 대다수는 익숙치 않은 요구를 할 2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부모가 됨으로써 졸지에 생소한 이방인과 영속적인 관계를 맺게 되고, 그 이방인의 이질적인 부분이 크면 클수록 부정하려는 우리의 기색도 더욱 두드러진다. 우리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서 우리가 사멸하지 않을 거라는 약속을 믿는다. 그리고 그런 불사의 환상을 깨뜨리는특별한 아이들은 우리에게 일종의 모욕감을 준다. 요컨대 그 아이들이 물려받은 우리의 장점 때문이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의 그들을 사랑해야하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식을 사랑하려면 상상력이 필요하다. - P19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정체성이 유전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아이는적어도 어느 정도 부모와 동일한 특징을 공유한다. 이를 수직적 정체성이라고 한다. 속성과 가치는 부모로부터 자식에게 세대를 거쳐 대물림된다. DNA뿐만 아니라 그들이 공유하는 문화적 규범을 통해서도 그렇게 된다.
예를 들어 민족성은 수직적 정체성이다. 유색 인종 아이는 일반적으로 유색 인종 부모에게서 태어난다. 피부색 유전은 특정 피부색을 가진 인간이라는 자아상과 더불어 세대를 거쳐 대물림된다. 물론 그 자아상이 세대에따라 변화를 보일 수는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언어도 수직적이다. 예컨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자녀에게도 대체로 그리스어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 자녀가 그리스어를 변질시키든 대부분의 시간에 다른 언어를 사용하든 그것은 별개의 문제다. 종교도 다분히 수직적이다. 가톨릭신자 부모들에게서 종교를 갖지 않거나 다른 종교로 전향하는 아이들이나올 수 있지만 일단 그들은 그들의 아이를 가톨릭 신자로 키우려 한다. 이민자들을 제외하고는 국적도 수직적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금발머리나근시를 물려주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그런 요소들이 의미 있는 정체성의 토대가 되지는 못한다. 금발머리는 정체성에 거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고 근시는 쉽게 교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가끔은 부모와 이질적인 선천적 또는 후천적 특징을 갖고태어나고 그래서 동류(同類) 집단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하는 아이들도 있다. 이런 특징을 수평적 정체성이라고 한다. 수평적 정체성은 열성 유전자나 돌연변이, 출생 전 영향, 부모와 공유하지 않는 가치관과 성향 등으로나타난다. 게이는 수평적 정체성이다. 대부분의 게이 아동은 이성애자가 분명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비록 그들의 성적 취향이 동류 집단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가족이 아닌 다른 하위문화를 관찰하고 그 문화에 동참함으로써 게이로서 정체성을 습득한다. 신체장애는수평적인 특징이며 천재성도 마찬가지다. 정신병도 대체로 수평적이다. 대부분의 범죄자는 범죄자 부모 밑에서 자라지 않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기만하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자폐와 지적 장애도 매한가지다. 강간에 의해 잉태된 아이는 친모의 정신적 충격에서 기인하지만 친모 자신은 알지 못하는 정서적인 문제들을 안고 태어난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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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5시간에 끝낼 수 있는 작업을 들판에서 10시간이나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러면 우리는 10시간 동안 야외 작업을 해야 했는데, 그래야만 하루 일당을 쳐주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느리게 일했고, 나는 초조하게 해를 바라보며 어서 지기를 바랐다. 나는 작업종료를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릴 때까지 분 단위로 시간을 쟀다. 나는 오래지 않아 권태가 고된 노동만큼 사람을 탈진시킨다는사실을 깨달았다. - P645

해는 점점 높이 떠올랐다. 나를 태우곺갈 트럭은 너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멀리 있는 간부 학교의 굴뚝에서 솟아오르던 커다란 둥근 고리 모양의 연기가 가늘어지자, 어머니는 나에게 새해 아침식사를 차려줄 수 없는 것을 너무나 애석해했다. 어머니는 돌아가서 탕위안을 조금 가지고 오겠다고 우겼다. 어머니가 떠난 후 트럭이 도착했다. 수용소 쪽을 돌아다본 나는 어머니가 내 쪽으로 달려오는 모습을 보았다. 흰색과 황금색 풀들이 어머니의 암청색 스카프 주변에서 물결치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어머니는 오른손에 커다란 법랑식기를 들고 있었다. 어머니는 조심스러운 자세로 뛰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어머니가 탕위안을 쏟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을알았다. 어머니는 아직 상당히 먼 곳에 있었고, 나는 어머니가 20분안에 도착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트럭 기사는 나에게 이미큰 호의를 베풀었기 때문에 나는 20분을 더 기다려달라고 부탁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트럭의 뒤쪽에 올라탔다. 어머니가 여전히 멀리서 달려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제 식기를 들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내가 트럭에 올라타는 모습을 보았을 때 식기가 손에서 떨어졌다고 어머니는 몇 년 뒤 나에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우리가 앉아 있었던 곳까지 계속 달려왔다. 다른 사람이 트럭에 탔을 리 만무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정말 떠났는지를 확인하러 온 것이었다. 그곳의 드넓은 누런색 풍경 속에서 사람의 그림자는 하나도 보이지않았다. 다음 며칠 동안 어머니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수용소 주변을 걸어다녔다. - P673

한편 장칭과 그의 일당은 나라가 올바로 통치되는 것을 방해하기위해서 새로운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이 산업 부문에서 내건구호는 다음과 같았다. "생산을 중단하는 것이 바로 혁명이다." 이제 그들은 농업에도 본격적으로 간섭을 시작하며 다음과 구호를 내걸었다. "우리는 자본주의 곡식보다 사회주의 잡초를 선택할 것이다." 외국 기술의 도입은 외국인들의 꽁무니 냄새를 맡으며 향기롭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교육 분야의 구호는 다음과 같았다. "우리는 교육받은 정신적 귀족들이 아니라 문맹의 노동 대중을 원한다." 그들은 교사들에게 반역하라고 학교 어린이들을 선동했다. 1974년 베이징의 여러 학교에서는 1966년과 마찬가지로 교실의 창문과 책상 및 의자가 파괴되었다. 장칭은 이런 행동이 "18세기에 기계를 파괴한 영국 노동자들의 혁명적 행위"와 같다고 주장했다. 이 모든 대중 선동은 한 가지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즉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을 곤경에 빠트려 혼란을 초래하는 것이었다. 장칭과 문화혁명의다른 스타들이 "빛날" 기회는 오직 인민들을 박해하고 파괴활동을 벌이는 데 있었다. 건설 속에는 그들이 설 자리가 없었다. - P716

한 친구가 1974년 가을 어느 날, 대단한 비밀을 밝히는 듯한 태도로 마오쩌둥과 장칭의 사진이 몇 장 실린 『뉴스위크지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마오쩌둥에 관한 기사가 게재된 잡지였다. 영어를 읽을수 없었던 친구는 기사 내용에 대해서 몹시 궁금해했다. 그 잡지는내가 처음 본 진짜 외국 잡지였다. 기사 속의 문장 하나가 번갯불처럼 내 눈에 들어왔다. 그 내용은 장칭이 마오쩌둥의 "눈과 귀 및 목소리"라고 전했다. 그 순간까지 나는 장칭과 마오쩌둥 사이의 명확한 관계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제 마오쩌둥의 실체가 분명하게 떠올랐다. 그의 이미지를 둘러싸고 있던 모호한 인식들이 초점을 맞춘 듯이 뚜렷해졌다. 문화혁명의 모든 파괴와 고통의 배후에는 마오쩌둥이 있었다. 그가 없었다면 장칭과 그녀의 이류 집단은단 하루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처음으로 마음속에서 마오쩌둥에게 도전하는 데 따른 희열을 느꼈다. - P730

모든 사람이 추도연설을 아버지에 대한 당의 평가로 이해할 것이기 때문에 이는 매우 중요했다. 이 추도사는 아버지의 개인 인사기록철에 추가되고 아버지가 죽은 후에도 자녀들의 미래를 계속 결정하게 된다. 그러한 추도사에는 일정한 형식과 내용이 정해져 있었다. 명예를 회복한 관리에게 사용되는 표준적인 표현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은 당이 사망자에 대해서 유보적 태도를 취했거나 유죄를 판정한 것으로 해석된다. 추도사 초안이 작성되어 어머니에게전달되었다. 초안은 정해진 형식에서 벗어난 악랄하고 비판적인 내용으로 가득했다. 어머니는 이러한 추도사가 낭독될 경우 우리 가족이 결코 의심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기껏해야 우리 가족은 영원히 불안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우리가 대대로 차별대우를 받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어머니는 몇 개의 초안을 거부했다. - P737

그러나 나라의 분위기는 마오쩌둥이 주장한 각종 정책의 지속반대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가 죽고 한 달도 채 안 된 10월 6일 장칭과 나머지 4인방이 함께 체포되었다. 그들은 군부, 경찰, 심지어 자기네 경호원들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그들은 오직 마오쩌둥의 지지만 받았다. 4인방이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실제로는 5인방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4인방이 너무나 쉽게 제거된 경위를 전해들었을 때 서글픈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한 소규모 이류 독재자 집단이 어떻게 9억의 인민을 그토록 오랜 기간 학대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나의 주된 감정은 환희였다. 문화혁명의 마지막 독재자들이 사라졌다. 나와같은 감정을 느낀 사람들이 많았다. 대다수의 동포들과 마찬가지로나는 가족 및 친구들과 축하를 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술을 사러 나갔으나, 여러 상점에 술이 바닥난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모든사람들이 기쁨에 들떠 있었다. - P761

1977년 7월 덩샤오핑이 다시 복권되어 화궈펑 정권의 부총리에임명되었다. 덩샤오핑의 모든 연설은 새바람을 일으켰다. 그는 모든 정치운동을 중단시킬 것이라고 약속했다. 각종 정치학습은 "지나친부담" 이므로 중단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당의 각종 정책은 교조가아닌 현실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마오쩌둥의 모든 발언을 글자 그대로 추종하는 것은 나쁘다고 지적한 것이었다. 덩샤오핑은 중국의 진로를 바꾸고 있었다. 그때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러한 새로운 미래가 실현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꼈다. - P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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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초에 문화혁명의 새로운 제4단계가 시작되었다. 제1단계는 10대의 청소년들로 구성된 홍위병의 출현이었고, 제2단계는 조반파의 등장과 주자파에 대한 박해였다. 제3단계는 조반파들 간의 파벌항쟁이었다. 마오쩌둥은 이제 제4단계에서 파벌항쟁을 중지시키기로 방침을 결정했다. 인민들의 복종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마오쩌둥은 자신의 통치하에서는 어느 누구도 박해에서 예외일 수 없음을 보여주는 새로운 박해를 전개했다. 일부 조반파들까지도 포함하여 지금까지 박해와는 무관했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이제는 새로운 박해의 희생자가 되었다. 새로운 정치운동이 하나씩 착수될 때마다 새로운 계급의 적이 제거되었다. 이런 마녀사냥식 정치운동 중규모가 가장 큰 것이 (계급 내의 적을 청산하는) "청리계급대오淸理階級隊伍"운동으로서 바로 "절름발이 탕씨 같은 인물들을 체포하는 것이었다.  - P580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으나 문화혁명 기간 중에 박해를 받지 않고 살아남은 교사들은 수업을 하지 않았다. 교사들은 학생들을 가르칠 수가 없었다. 문화혁명이 시작되기 전에 사용하던 모든 교과서들은 "부르주아의 독초"라고 부정되었고, 새로운 교과서를 집필할 정도로 용기 있는 교사들이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학생들은 그저 교실에 앉아서 마오쩌둥의 저서를 암송하고 「인민일보」의 사설을 읽는것으로 시간을 때웠다. 전원이 모여 마오쩌둥 주석 어록에 가락을붙여 노래하거나 소홍서」를 흔들고 둥글게 돌면서 "충자무(忠字舞)"라고 이름 붙인 충성의 춤을 추었다. - P588

이번 제9차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는 마오쩌둥의 개인 권력체제를 공식 승인했다. 1956년에 개최된 제8차 전인대에서 선출되었던 고위 지도자들 중에서 제9차 전인대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극소수였다. 17명의 정치국원들 중에서 마오쩌둥, 린뱌오, 저우언라이, 리셴녠 4명만이 정치국원 자리를 유지했다. 이미 죽은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비판을 받고 축출되었다. 축출된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오래지 않아 죽었다.
제8차 전인대에서 제2인자로 선출되었던 국가주석 류사오치는1967년부터 구금 상태에 있었으며, 몇 차례 규탄대회에서 구타를 당했다. 그는 오랜 지병인 당뇨병과 새로 걸린 폐렴에 대한 투약을 거부당했으며, 생명이 위독할 때만 치료를 받았다. 왜냐하면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이 제9차 전인대에 "살아 있는 표적"을 남겨두기 위해서 그의 생명을 유지시키라고 공개적으로 명령했기 때문이다. 전인대에서 그에게 내려진 판결은 저우언라이가 낭독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그는 "반역자이며 적의 첩자이고 제국주의자들과 현대 수정주의자들(구소련) 및 국민당 반동분자들에게 봉사하는 학당‘이었다. 전인대가 끝난 후 류사오치는 고통 속에 죽었다. - P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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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모두가 주자파로 공격당하게 된 것은 두 분이 공무부의 지도적 지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에는 "욕가지죄, 하환무사(欲加之罪, 何患無辭)", 즉 "죄를 씌우려고 마음먹으면 증거는 있는 법이다"라는 속담이 있다. 이런 속담에 입각하여 전국 각지의 크고 작은 모든 직장의 지도자들은 부하 직원들로부터 "자본주의적" 이거나 "반마오쩌둥 주석적" 정책을 실시했다는 이유로 주자파라는 공격을받았다. 이러한 공격이 행해진 이유에는 농촌에서 자유시장의 개설을 허가하고, 노동자들에게 보다 수준 높은 전문기술을 습득하도록 종용하고,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활동을 허가하는것과 같은 정책들이 포함되었으며, 심지어 스포츠 분야에서 경쟁을 장려한 것마저 "우승컵과 메달만을 노리는 부르주아적 광기"라고매도하면서 공격 이유로 삼았다. 이제까지 대부분의 당원들은 마오쩌둥이 이런 정책을 혐오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 이유는 모든 시책들이 마오쩌둥을 정점으로 한 당 중앙의 명령으로 하달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제 와서 뜬금없이 지금까지의 모든 시책들은 당내의 "부르주아 사령부" 가 내려보냈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 P501

"권력 탈취, 奪權둬취안]!" 이것은 중국에서 특별한 마력을 지닌 단어였다. 권력은 정책에 대한 영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민에 대한 생사여탈의 권력을 의미했다. 권력은 돈과 함께 특전, 사람들의 경외, 아첨, 보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중국에는 일반 인민들이 불만을 토로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전혀 없었다. 나라 전체가 마치 내부에서 고압수증기가 부글거리는 압력밥솥처럼 불평불만으로 끓고 있었다. 인민들이 열광할 수 있는 축구시합도 없었고, 인민들의 의견을 대변할 수 있는 압력단체도 없었다.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도 없었고, 심지어 폭력영화마저도 없었다. 체제와 당국에 의한 권리침해에 대해서 어떤 항의의 목소리도낼 수 없었고, 가두시위를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불만을 분출시키는 중요한 수단인 정치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도 중국에서는 금기 사항이었다. 하급자들이 상급자의 불공정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반대로 상급자의 경우에는 자신의 불만을 분출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므로 마오쩌둥이 인민들에게 "권력 탈취"를 요구했을 때, 그는 수많은사람들이 누군가에게 복수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권력이 위험한 것이기는 하지만 권력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편이 보다 바람직했으며, 특히 권력을 한번도 쥐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그러했다. 이제 일반 인민들에게는 마치 마오쩌둥이 권력은 잡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 P505

대체 무엇이 사람들을 괴물로 변하게 한 것일까? 이처럼 아무런의미도 없는 잔학행위를 연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오쩌둥에 대한 나의 신뢰가 퇴색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전에는사람들이 박해를 당했더라도 나는 그들이 과연 무고한 사람들인지를 100퍼센트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부모님의 무고는 내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나의 완전무결한 우상이었던 마오쩌둥주석에 대한 의심이 차츰 마음속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마오쩌둥 주석이 아니라 장칭과 중앙문화혁명소조라고 생각했다. 신과같은 황제인 마오쩌둥은 여전히 의문의 여지 없이 완벽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 P546

그러나 문화혁명이 오랜 기간 계속되면서 국가 경제의 대부분이마비 상태에 빠졌다. 도시 인구가 수천만 명 단위로 증가했음에도불구하고, 도시에 주택이나 공공시설을 새로이 건설하는 사업은 전혀 시행되지 않았다. 소금, 치약, 화장지와 같은 품목은 물론이고 모든 종류의 식품과 의류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생필품들이 배급제로 공급되지 않으면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청두의 경우에는1년 동안 설탕을 구경할 수가 없었으며, 비누 한 조각 없이 6개월을지내기도 했다.
1966년 6월부터는 학교 수업도 정지되었다. 교사들은 규탄대회에내몰리거나, 자신들의 조반파를 조직하는 활동에 나섰다. 학교 수업이 없었으므로 학생들에 대한 통제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학생들은 자유로운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가? 사실상 책, 음악, 영화가 전무했으며 극장, 미술관, 찻집 등은 모두 문을 닫은 상태였다. 마음을 쏟을 수 있는 곳이 한군데도 없었다. 따라서 공식적으로 허가된 것은 아니지만 카드놀이가 은밀하게 되살아났다. 대부분의 혁명과는 달리 마오쩌둥이 추진하는 혁명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몰두해야 할 일거리가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당연히 젊은이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홍위병 활동"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열기와 욕구불만을 분출할 수 있는유일한 방법은 규탄대회에서 폭력을 휘두르거나, 서로를 육체적으로나 말로 치고받는 길밖에 없었다. - P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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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한국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관계의 파탄에는 이 ‘돌봄 역량‘의 문제가 깔려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것이, 사람이 사람을 함부로 대한다는 거예요. 모르면서도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굽니다. 아는 것을 배려하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을 조심하는 것도 아니라, 다 안다고 생각하는 바람에 문자 그대로 ‘함부로‘대해요. 그러니 관계는 파탄이 나고 사람을 피하지 않을 수 없죠. 제가 리터러시에서 특히 말귀를 강조하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말귀가 열려 있어야 돌볼 수가 있고, 또 돌보는 와중에 말을 알아듣는 역량이 커지거든요. - P217

리터러시 교육에서는 그런 짧은 호흡, 내가 당장 뭔가를 해야 될것 같은 시간의 개념을 바꿔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봐요. 긴 글이라는게 단순히 길이가 길어서 가치 있는 게 아니라 읽어내려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에 대한 감각을 키워주고 자신을 돌아보며 심호흡할 수 있도록 하는 게 긴 글이에요. 이해가 되지 않았던 측면이 드러날 수도 있고,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의 반전이 나올 수도 있죠. 이런 건 긴 글을 끝까지 읽어야 경험할수 있어요. 그런데 소셜미디어에서는 당장 내가 뭔가 하지 않으면 내존재감이 없어지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돼요. - P246

세 번째 키워드는 ‘반복‘입니다. 독서를 할 때 텍스트 자체의 이해와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경험이 동시에 일어나죠. 그런데 책을 처음읽을 때는 텍스트 이해에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들일 수밖에 없어요. 다시 한 번 읽을 때에는 전자에 할당되는 자원이 확 줄어들면서 경험을 두텁게 만드는 데 쓸 수 있는 자원이 확연히 커져요. 보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면에서 재차 읽는/보는 행위는 전혀 다른 종류의 여정을 약속하죠. 영화 감상이건 독서건 ‘반복‘은 질적으로 다른 경험이 되는 거예요. 많은 경우 첫 읽기는 저자에게로 가는 길이지만다시 읽기는 나에게로 돌아오는 길이에요. 여러 사람이 "다시 읽지않았다면 읽은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는데, 다시 읽기의 이런 속성을 반영하는 말이라고 봅니다. 이런 측면에서 ‘많이‘보다 ‘반복‘의 힘에 주목하는 리터러시를 상상하고 실천할 필요가 있습니다. - P264

《페다고지》의 입장에서 보면 문해력의 방향이 바뀝니다. 즉 민중이 천문과 인문에 대해 무지한 것이 아니라 민중을 대하는 지식인들이 그들의 언어에 대해 무지한 것이 되죠. 어쩌면 이 이야기야말로선생님과 제가 이 대담에서 말한 리터러시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습니다. 리터러시가 바벨탑을 쌓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다리를 놓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하는 일이내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에요. 문제는 내가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교과서적으로 정확하게 말을 하고 글을 쓸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것이죠. 대부분의 사람은 두루뭉술하게 말을 하거나 얼버무리기도 하죠. 또 상대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많아요. 이럴 때 우리가 그 사람을 비난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말과태도, 분위기의 ‘무늬‘를 읽을 줄 안다면 그 사람과 나 사이에 바벨탑이 아니라 다리가 놓이겠죠. - P275

선생님과 제가 말하는 ‘리터러시‘는 ‘좋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역량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마무리의 시작을 리터러시 앞의 ‘삶‘에 대해 감히 이야기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삶의 리터러시, 삶을 위한 리터러시란 ‘좋은 삶‘을 위한 리터러시입니다. ‘옳음‘이라는 이름으로 타자의 삶을 억압하는 리터러시가 아니에요. ‘좋은 삶‘을 생각하도록 모두를 초대하는 것이 삶의 리터러시입니다. 이런 점에서 리터러시는 모두를 해방하고 자유롭게 하며, 그 자유로운 사람들이 서로서로 다리를 놓으면서 그것이 바로 ‘좋은 삶‘이라는 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합니다.
이를 위해서 저는 각자의 몸, 그리고 그 몸에 새겨진 무늬를 읽을줄 알아야 한다고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글과 책이 어떤 시대에 어떤 세대의 사람들에게 몸이었고 그 몸에 새겨진 무늬였으며 몸의 변신 수단이었고 그 사람들의 말이었다면, 지금은 이미지와 유튜브가 몸이고 그 몸에 새겨진 무늬이자 말이며 변신 수단이 된 시대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그 몸에 새겨진 무늬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하며, 그 몸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하겠죠. 그 변신 수단의 의미와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몸을 보호하는 법 또한 배우고 존중할 수있어야 합니다. - P277

얼마 전 타계한 노벨문학상 수상자 토니 모리슨은 "정의는 정의당한 자들이 아니라 정의한 자들에게 속하는 것이다(Definitions belong to the definers, not the defined)."라는 말을 남겼죠. 리터러시를 논의하는 맥락에서 나온 말은 아니지만, 현재의 ‘리터러시 생태계의 변동‘을 사유할 때 우리가 반드시 던져야 하는 질문의 단초가 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누가 리터러시를 정의하는가‘라는 질문이죠. 이는 다시 누가 리터러시의 평가 방식을 정하는가.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는 누구에 의해 어떻게 활용되는가, 리터러시는 사회적으로 어떤 차별과 기회를 만들어내는가, 공공성에 기반한 리터러시 생태계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같은 질문들로 연결돼요. 그런데 흔히들 ‘디지털네이티브‘라고 불리는 이들은 아직 리터러시를 정의하고 평가할 위치에 있지 않죠. 리터러시를 권력화할 수 있는 단계에 진입하지 못한거예요. 그렇다면 그들이 리터러시에 관련된 정책을 디자인하고 실행할 수 있는 자리에 올랐을 때 리터러시를 어떻게 정의하고 권력화할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할 듯합니다. 그 작업은 미래를 기약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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