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초에 문화혁명의 새로운 제4단계가 시작되었다. 제1단계는 10대의 청소년들로 구성된 홍위병의 출현이었고, 제2단계는 조반파의 등장과 주자파에 대한 박해였다. 제3단계는 조반파들 간의 파벌항쟁이었다. 마오쩌둥은 이제 제4단계에서 파벌항쟁을 중지시키기로 방침을 결정했다. 인민들의 복종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마오쩌둥은 자신의 통치하에서는 어느 누구도 박해에서 예외일 수 없음을 보여주는 새로운 박해를 전개했다. 일부 조반파들까지도 포함하여 지금까지 박해와는 무관했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이제는 새로운 박해의 희생자가 되었다. 새로운 정치운동이 하나씩 착수될 때마다 새로운 계급의 적이 제거되었다. 이런 마녀사냥식 정치운동 중규모가 가장 큰 것이 (계급 내의 적을 청산하는) "청리계급대오淸理階級隊伍"운동으로서 바로 "절름발이 탕씨 같은 인물들을 체포하는 것이었다. - P580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으나 문화혁명 기간 중에 박해를 받지 않고 살아남은 교사들은 수업을 하지 않았다. 교사들은 학생들을 가르칠 수가 없었다. 문화혁명이 시작되기 전에 사용하던 모든 교과서들은 "부르주아의 독초"라고 부정되었고, 새로운 교과서를 집필할 정도로 용기 있는 교사들이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학생들은 그저 교실에 앉아서 마오쩌둥의 저서를 암송하고 「인민일보」의 사설을 읽는것으로 시간을 때웠다. 전원이 모여 마오쩌둥 주석 어록에 가락을붙여 노래하거나 소홍서」를 흔들고 둥글게 돌면서 "충자무(忠字舞)"라고 이름 붙인 충성의 춤을 추었다. - P588
이번 제9차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는 마오쩌둥의 개인 권력체제를 공식 승인했다. 1956년에 개최된 제8차 전인대에서 선출되었던 고위 지도자들 중에서 제9차 전인대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극소수였다. 17명의 정치국원들 중에서 마오쩌둥, 린뱌오, 저우언라이, 리셴녠 4명만이 정치국원 자리를 유지했다. 이미 죽은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비판을 받고 축출되었다. 축출된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오래지 않아 죽었다.
제8차 전인대에서 제2인자로 선출되었던 국가주석 류사오치는1967년부터 구금 상태에 있었으며, 몇 차례 규탄대회에서 구타를 당했다. 그는 오랜 지병인 당뇨병과 새로 걸린 폐렴에 대한 투약을 거부당했으며, 생명이 위독할 때만 치료를 받았다. 왜냐하면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이 제9차 전인대에 "살아 있는 표적"을 남겨두기 위해서 그의 생명을 유지시키라고 공개적으로 명령했기 때문이다. 전인대에서 그에게 내려진 판결은 저우언라이가 낭독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그는 "반역자이며 적의 첩자이고 제국주의자들과 현대 수정주의자들(구소련) 및 국민당 반동분자들에게 봉사하는 학당‘이었다. 전인대가 끝난 후 류사오치는 고통 속에 죽었다. - P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