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 담당 장관‘이
된다면

영국에서 ‘외로움 담당 장관 Minister for Loneliness‘을 임명했다는 소식이 국내외 언론의 관심을 끈 적이 있다. 처음에는 기사 제목만 흘깃 보고 넘어간지라, 한동안 영국에 ‘고독부‘ 같은 정부부처가 생긴 줄 알았다. 그 부처에서는 무슨 일을 하는 걸까, 혼자 상상하기도 했는데 실체는 내 공상과는 조금 달랐다. - P17

곧 이 문제를 조금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됐다. 대인 접촉이 끊긴 이들이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물질적 사회적으로지원하는 일은 물론 대단히 중요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듯하다. 삶이 곧 외로움이고 그럼에도 우리 모두 살아가야 한다면,
그만큼 ‘외로움을 견디는 힘‘이 필요하다는 뜻 아닐까. 사람들틈바구니에서 복작거리며 하루를 보낸 뒤에도 헛헛함에 몸부림치게 되는 것은, 그만큼 그 의지가 소진됐기 때문 아닐까.
「수선화에게는 그 답까지 제시하는 것 같다.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더 외로워지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살아갈 용기 역시 함께 얻는다. "울지 마라"라는 첫 행보다는 시의 마지막 부분 때문인 것 같다. "산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지구를 움직이고 음파를 전달하는 어떤 섭리 속에 내가 있다. 그 거대서사에서 나는 소외당하지 않는다. 내가 외롭다는 게 그 증거다. 그래서 나는 비록 외로울지라도 내 존재의 의미를 의심하지는 않게 된다. - P18

그래서 현대인은 누구나 마음속 깊이 무력감을 느낀다. 고대인들은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고대인에게는 시스템이 없었고, 대신 변덕스러운 신과 정령, 광포한 자연과 폭군이 세상을 지배했다. 그들은 세상이 이치에 맞게 돌아간다는 생각 자체를 품지않았다. 사방을 향해 생존을 빌며 살았다. 폭력적인 죽음과 신비로운 현상들이 너무 많았기에 역설적이게도 짜릿한 투쟁과 영광, 환희, 영적 충만의 순간을 현대인보다 더 자주 경험했다.
현대문명은 점점 더 정교하고 복잡하고 자체적인 작동 원리를 지닌 기계가 되어간다. 우리는 생존과 안전에 대한 걱정을더는 대가로 그 회색 기계 속 부품으로 살기를 선택했다. 변덕쟁이 신과 사나운 야생보다는 그편이 좀더 우리의 이치에 가까우리라 믿고, 우리는 오늘도 그렇게 다른 부품들 사이에 옴짝달싹 못한 채 서서, 이 무표정한 기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리자가 있기나 한 건지를 궁금해한다. 그러다 속으로 중얼거린다.
‘그런데 이 기계는 늘 어딘가 고장이 나 있는 것 같아‘ - P24

배달 기사의 안전 운행은 오로지 그 자신이 신경써야 할 몫일까? 그게 아니라면, 그러니까 배달 기사가 빗길을 달려와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또 음식을 주문했다면, 그의 안전에 대해우리도 약간은 책임을 져야 하는 걸까?
만약 후자의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다면, 같은 맥락에서 대만 폭스콘 공장의 비인간적인 노동 실태가 폭로됐을 때 우리는애플 제품도 거부해야 하는 걸까? 내가 잠시라도 어떤 사회 시스템에 간여한다면, 그 시스템 전반이 공정하고 정의로운지, 누군가를 착취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야 할 의무가 내게 있는걸까?
이런 질문을 고민하다보면 우리는 금세 무력감에 빠진다. 세계는, 현대사회는, 너무 복잡하다. 우리가 모든 산업부문의 근로조건과 하청 구조에 대해 샅샅이 공부하고 자신만의 견해를지녀야 하는 걸까? 온실가스 배출이나 동물 실험, 이른바 ‘공정무역‘ 같은 이슈에 대해서도? 하지만 그게 과연 한 개인이 할수 있는 일인가? 공부하려 한들, 그 실태가 다 조사되어 드러나있기나 한가?
누군가는 그런 문제를 조사하고 있을 테고, 그 결과를 통해법이나 협약이 개정되겠지. 나는 그 법이나 충실히 따르면 되지. 하다가 혹시 그게 바로 아돌프 아이히만의 논리 아니었나싶어 불안해진다. 전체 시스템이 사악할 때 나는 정해진 법대로 따랐을 뿐"이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평범한 악‘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우리가 속한 시스템을 의심의 눈초리로 봐야한다. - P31

한데 지식은 대개 짧지 않다. 지식이란 정보들이 논리에 따라 연결되어 있는 구조물이다. 깊은 지식일수록 규모가 크고 구조가 복잡하다. 따라서 문맥이 중요하다. 책 한 권을 문장 단위로 분리해서 마구 흐트러뜨린 뒤 순서 없이 읽는다면, 그 책의 모든 글자를 다 본다 해도 제대로 이해하는 내용은 아주 적을 게다. 그게 인터넷이고 소셜 미디어다.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에서 빠르게 복제되어 퍼져나가는 자극적인 정보를 최근에는 ‘밈meme‘이라는 명칭으로 부른다. 인터넷이 보급되기 훨씬 전에 ‘밈‘이라는 단어를 만든 리처드 도킨스는 자신이 창시자임에도 그 개념을 마뜩지 않아했다. 인터넷에서 번지는 맥락 파괴적 유행 요소를 밈이라고 부르는 건한 겹 더 부적절하게 들리는데, 그럼에도 그 현상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밈과 가장 가까운 현실의 물건은 아마 감자칩 아닐까? 감자칩은 얇고, 자극적이고, 한번 포장지를 뜯으면 먹는 것을 멈추기 어렵다. 여기서도 ‘얇다‘는 말과 ‘자극적‘이라는 말은 얼마간 동어반복이다. 감자칩을 자극적으로 만들려면 기름에 코팅된면적을 넓혀야 하고, 소금을 비롯한 양념을 최대한 많이 뿌려야한다. 즉, 얇아야 한다. - P51

다만 세상에는 겪을 때에는 엄청나게 괴롭지만 그 시기를 넘기면 의외로 흔적을 남기지 않는 충격도 있다. 외과 치료로 완치되는 단순골절 사고처럼. 나는 코로나19 범유행도 큰 차원에서는 그리되는 것 아닐까 싶고, 그렇게 되길 바란다. 한편으로는 인플루엔자로 인한 사망자도 매년 한국에서 1200~1500명가량 나오는 걸로 추정되지만(한림대 강남성심병원 감염내과이재갑 교수) 그게 사회구조를 바꾸지는 못한다.
반면 세상에는 충격의 단기적인 강도는 약해도 사람의 삶을 서서히, 그러나 지나고 보면 완전히 바꾸는 질병도 있다. 신경쇠약 같은 것들이다. 나는 우리 사회가 최근 십 년 사이에 그런 새로운 바이러스에 걸려서 대단히 심오한 변화를 겪는 중이라고 느낀다. 병의 이름은 아직 정확히 모르겠지만, 병을 옮기는 매개체는 페이스북, 트위터 같은 소셜 미디어들이다. 미래의 역사가들이 이걸 최소한 TV의 보급보다는 더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할거라 확신한다. - P72

도박장에서는 평상심을 유지하기 어렵다. 그런데 세상 전체가 카지노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나는 이런 분위기에서 자라나는 미래세대의 가치관을 진심으로 염려한다. 검소한 생활과 자기 절제, 노동, 꾸준한 노력이 보답받고 또 찬미의 대상이 되는사회에서 인간이 비로소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고 믿기에.
이 거품이 언젠가 꺼지면 그때는 또 얼마나 파괴적인 절망과환멸이 우리를 휩쓸 것인가. 그렇다고 거품을 꺼뜨리지 말고 이대로 놔둬야 하나? 한데 그 선택권이 우리에게 있기는 한가.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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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평소의 소신이나 가치관, 심지어 종교마저 기꺼이 내던져 버린다. 이것만큼 우리가 사랑에 빠져 있다는 것을 잘 보여 주는 증표가 또 있을까? 자발적인 노예 상태에 빠지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보다 위대한 감정은 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의지, 지성, 신념처럼 인간이 자랑스럽게 여기며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것들도 사랑 앞에서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하기때문이다. 노예가 어떻게 자신의 의지를 주장할 수 있겠는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자발적인 포기가 가능할까? 스피노자의 통찰이 절실히 필요한 대목이다.

사랑(amor)이란 외부의 원인에 대한 생각을 수반하는 기쁨이다.
ㅡ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바로 이것이다. 사랑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기쁨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기쁨의 감정은 "인간이 더욱 작은 완전성에서 더욱 큰 완전성으로 이행할 때" 발생하는 감정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결여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더욱 충만해진다는 감정이 바로 기쁨이다. 기쁨이라는 감정과 사랑이라는 감정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는, 사랑에는 외부 원인이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사랑이라는 감정은 특정한 외부 대상을 전제로 하는 기쁨인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볼까. 누군가를 만나 과거보다 더 완전한 인간이 되었다는 기쁨을 느낄때, 우리는 그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 P79

대담함(audacia)이란 동료가 맞서기 두려워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일을 하도록 자극되는 욕망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스피노자의 정의는 지나치게 평범하다. 다른 사람들이라면맞서기 두려워하는 위험을 기꺼이 무릅쓰는 것이 대담함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지만 대담함을 일종의 욕망이라고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스피노자의 비범함에 다시 한번 탄복하게 된다. 스피노자에게 욕망이란 기본적으로 기쁨의 증진을 도모하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사랑만큼 살아가는 힘과 기쁨을 증폭시키는 경험이 또 있을까? - P89

20세기 위대한 작가 F.스콧 피츠제랄드가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민음사)에서 포착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것아니겠는가.

개츠비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이 집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요. 형씨."
"데이지의 목소리에는 신중함이 없어요. 그 애의 목소리에는 뭔가 가득••••••." 나는 머뭇거렸다.
"데이지의 목소리는 돈으로 가득 차 있어요." 갑자기 개츠비가 말했다.
바로 그것이었다. 전에는 그걸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데이지의 목소리는 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안에서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 끝없는 매력, 그 딸랑거리는 소리, 그 심벌즈 같은 노랫소리•••••• 하얀 궁전 속 저 높은 곳에 공주님이 그 황금의 아가씨가••••••."

지금 방금 우리는 『위대한 개츠비』에서 탐욕과 관련하여 셰익스피어의 대사와 함께 영원히 기억될 만큼 가장 인상적인 구절을 읽었다. 표면적으로 소설의 줄거리는 사랑과 결혼을 둘러싼 진부한 멜로드라마처럼 진행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소설에서 부와 관련된 인간의 탐욕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읽어도 읽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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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컴너 가에 가 보았네. 어쩔 수가 없었지. 의심 때문에 너무 괴로웠으니까. 문을 두드렸더니 기품 있는 여자가 문을 열더군. 나는 여자에게 세 들 방이 있느냐고 물었지. ‘글쎄요. 객실들은 다 이미 세를 놓기는 했는데, 세 든 부인을 석 달동안이나 뵙지 못했네요. 집세도 밀렸으니까. 그 방들을 쓰시면 될 것 같아요.‘ ‘이 사람이 그 부인입니까?‘ 나는 사진을 보여 주었네. ‘맞습니다. 바로 그분이에요.‘ 여자가 소리쳤네. ‘부인은 언제 오시죠?‘ ‘부인은 돌아가셨습니다. 내가 대답했네. ‘어머나, 그럴 수가, 어떻게 그런 일이!‘ 여자가 말했네. ‘그분은 가장 좋은 하숙인이었어요. 이따금씩 와서 객실에 앉아 있기만 하면서 일주일에 삼 기니를 냈거든요.‘ ‘그분이 여기서 사람을 만난 겁니까? 내가 물었네. 여자는 그렇지 않다고, 늘 혼자와서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고 확언했네. ‘그럼 대체 여기서 뭘한 겁니까?‘ 내가 소리쳤네. ‘그냥 객실에 앉아서 책을 읽고 가끔 차를 마시기도 했죠. 여자가 대답했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어서 일 파운드 금화를 하나 주고 그곳을 나왔네. 자,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라고 생각하나? 그 여자가 거짓말을 한 것일까?"
"아니라고 보네."
"그럼 왜 알로이 부인이 거기에 갔던 것일까?"
"이보게, 제럴드, 알로이 부인은 그저 수수께끼에 푹 빠진여자였을 뿐이네. 그냥 베일을 쓰고 그곳에 가서 자신이 수수께끼의 여주인공이라고 생각하면서 즐기기 위해 그 방들을 빌렸던 걸세. 비밀을 즐기던 사람이었던 거지. 하지만 그 여자 자신은 비밀이 없는 스핑크스에 불과했다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물론이지." 내가 대답했다.
제럴드는 모로코 가죽 상자를 꺼내 열더니 사진을 보았다.
"그런가?" 제럴드가 마침내 중얼거렸다. - P85

 잠시 후 오티스 씨는 방밖의 복도에서 들리는 이상한 소리에 잠을 깼다. 쇠붙이가 절거덕거리는 소리 같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것 같았다. 오티스 씨는 얼른 일어나 성냥을 켜고 시간을 보았다. 정각 1시였다. 그는 매우 차분한 마음이었다. 맥을 잡아 보았지만 열띤 움직임이라곤 전혀 없었다. 이상한 소리는 계속되었다. 사슬 소리와 함께 발소리가 똑똑하게 들렸다. 오티스 씨는 슬리퍼를 신고 탁자에서 타원형의 작은 약병을 집어든다음 문을 열었다. 그의 바로 앞에 얼굴이 무시무시한 노인이 흐릿한 달빛을 받으며 서 있었다. 눈은 불이 붙은 석탄처럼 시뻘겠다. 긴 잿빛 머리는 뒤엉키고 꼬부라진 채 어깨 위로 늘어져있었다. 옛날식으로 재단한 옷은 더러운 누더기가 되었고, 손목과 발목에는 묵직한 수갑과 녹슨 차꼬가 채워져 있었다.
"이런." 오티스 씨가 말했다. "정말이지 그 사슬에 기름 좀칠해야겠군요. 그래서 여기 태머니라이징선 윤활유를 작은 병으로 하나 가져왔습니다. 한 번만 발라도 효과가 아주 확실하지요. 우리 고향 성직자들 가운데 유명한 몇 분도 그런 취지의 증언을 했다고 포장지에 적혀 있더군요. 여기 침실 촛불 옆에두고 갈 테니 쓰도록 하십시오. 필요하면 언제든지 더 갖다 드리겠습니다." 미합중국 목사는 그렇게 말을 하더니 병을 대리석 탁자에 내려놓고 문을 닫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캔터빌의 유령은 분기탱천하여 잠시 꼼짝도 못하고 그대로 서 있었다. 이윽고 윤활유 병을 광택이 나는 바닥에 집어 던지더니 힘없이 신음을 내뱉으며 복도를 따라 빠르게 사라졌다. 몸에서는 무시무시한 녹색 빛이 뿜어져나왔다. 그가 커다란 떡갈나무 층계 꼭대기에 이르자 문 하나가 활짝 열리더니 하얀 가운을 걸친 작은 형체 둘이 나타났다. 동시에 베개 하나가 캔터빌 유령의 머리 옆을 지나 윙 소리를내며 날아갔다! 어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캔터빌의 유령은 사차원 공간을 이용하여 서둘러 탈출하기로 결정하고 징두리 벽판을 통과하여 사라졌다. 집은 다시 고요해졌다. - P94

유령의 계획은 조용히 워싱턴 오티스의 방으로 가 침대 발치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인 다음 느린 음악에맞추어 자신의 목을 세 번 찌르는 것이었다. 유령은 워싱턴에게 특히 원한이 많았다. 유명한 캔터빌 핏자국을 핑커튼의 패러건 세재를 이용해 습관적으로 지우는 사람이 바로 워싱턴이 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령은 이 무모하고 저돌적인 젊은이를 비참한 공포로 몰아넣은 다음, 미합중국 목사와 그 부인이 쓰고 있는 방으로 갈 계획이었다. 그곳에서 차고 끈적끈적한 손으로 오티스 부인의 이마를 짚고, 떨고 있는 남편의 귀에는 쉭쉭거리는 소리로 납골당의 무시무시한 비밀을 속삭여 줄 생각이었다. 어린 버지니아를 어떻게 할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그녀는 한 번도 그를 모욕한 적이 없었으며 늘 예쁘고 상냥했다. 따라서 옷장에서 희미한 신음을 몇 번 토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았다. 혹시 그것으로 잠에서 깨지 않는다면 마비되어 경련을 일으키는 손가락으로 이불을 잡아당기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쌍둥이는 단단히 혼을 내 주기로 굳게 결심을 했다. 물론 제일 먼저 할 일은 그들의 가슴을타고 앉아 두 아이가 악몽의 답답한 느낌을 맛보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가까이 붙어 있는 두 침대 사이에 얼음처럼차가운 녹색 주검의 모습으로 서서 두 아이가 공포로 몸이 마비되는 모습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의를 벗어 던지고 백골에 두리번거리는 눈알 하나만 달고 방을 기어다니기로 했다. 이것은 ‘멍청이 대니얼, 자살 해골‘로, 그간 여러 번 큰 효과를 본 역할이었다. 유령은 이것이 ‘광인 마틴, 가면을 쓴 수수께끼‘라는 유명한 역할에 버금간다고 생각했다. - P100

 마침내 서재의 핏자국은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오티스가족이 그것을 원치 않는다면 그것을 누릴 자격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비천한 물질주의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어서 감각적 현상의 상징적 가치를 알아볼 능력이 전혀 없는것이 틀림없었다. 유령으로서 출현하는 문제는 물론 아스트랄체*의 발달과 완전히 별개의 사안으로, 사실 캔터빌의 유령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복도에 나타나고, 매달 첫째, 셋째 수요일에 커다란 퇴창에서 알아들을 수없는 말을 지껄이는 것은 그의 엄숙한 의무였다. 그 의무를 어떤 방법으로 명예롭게 피해야 좋을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물론 그는 매우 악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초자연적인 일에서만큼은 언제나 매우 양심적이었다. 그래서 캔터빌의 유령은 그다음 삼 주 동안 토요일마다 평소처럼 자정과 3시 사이에 복도를 가로질렀지만, 누가 듣거나 보지 못하도록 최대한 주의를기울였다. 장화를 벗고, 낡고 벌레 먹은 판자들을 최대한 가볍게 디뎠으며, 크고 검은 벨벳 망토를 걸쳤고, 사슬에 라이징선윤활유를 조심스럽게 칠했다. 이 마지막 방법을 채택한 것이 그로서는 무척 힘겨운 결정이었을 거라는 걸 필자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날 밤 오티스 가족이 저녁을 먹을 때 캔터빌의 유령은 오티스 씨의 방으로 슬며시 들어가 윤활유 병을들고 나왔다. 처음에는 약간 창피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분별력을 회복하여 이 발명품이 매우 훌륭하며 그의 목적에도 꽤 쓸모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P106

브로그로부터 며칠 뒤 버지니아와 그녀의 곱슬머리 기사는클리 초원으로 말을 타러 나갔다. 버지니아는 산울타리를 통과하다 옷이 심하게 찢어져 집에 돌아왔는데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들어가려고 뒤쪽 층계를 이용했다. 종종걸음으로 달려가는데 문이 열린 ‘벽걸이 융단 방‘ 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버지니아는 가끔 그곳으로 일거리를 가지고 들어가는 하녀라고 생각하고 안을 들여다보며 옷을 꿰매 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안에는 사람이 아니라 캔터빌의 유령이 있었다. 버지니아는 깜짝 놀랐다! 유령은 창가에 앉아, 노랗게 변해 가는 나무에서 떨어진 황금 잎이 허공에 흩날리고 붉은 잎들이 긴 가로수길을 따라 미친 듯이 춤추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머리는 한 손에 괴어 놓고 있었다. 자세만 보아도 극심한 우울증에빠졌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어린 버지니아는 처음에는 달아나서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잠글 생각이었다. 그러나 유령이 너무 쓸쓸하고 무기력해 보여 그만 동정심에 사로잡혀서는그를 위로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녀의 발걸음이 너무 가볍고 자신의 우울은 너무 깊어 유령은 그녀가 말을 걸었을 때에야 방에 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할아버지 때문에 마음이 정말 안 좋아요." 버지니아가 말했다. "하지만 동생들은 내일이면 이튼으로 돌아갈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부터 얌전히만 계시면 아무도 귀찮게 하지 않을 거예요."
"나더러 얌전히 있으라고 하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구나" - P112

유령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감히 자신에게 말을붙인 어여쁜 소녀를 바라보았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 나는 사슬을 덜그럭거려야만 하고, 열쇠 구멍으로 신음을 뱉어야 하고, 밤에 이리저리 돌아다녀야 한단 말이다. 한데 그런 걸 하지 말란 말 아니냐. 그것이 내가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인데도말이야." - P113

"아냐, 사양하겠다. 지금은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래도 어쨌든 고맙구나. 너는 지긋지긋하고 무례하고 천박하고 부정직한네 가족보다는 훨씬 착하구나."
"그만하세요!" 버지니아가 소리치며 발을 굴렀다. "무례하고또 지긋지긋하고 또 천박한 건 바로 할아버지예요. 그리고 부정직 이야기를 하시는데, 서재의 그 웃기는 핏자국을 다시 칠하려고 제 상자에서 물감을 훔쳐간 게 할아버지라는 걸 잘 알아요. 처음에는 빨간색을 다 가져가셨어요. 주홍까지 다요. 그래서 저는 석양을 못 그리게 됐죠. 그다음에 할아버지는 에메랄드 녹색하고 크롬 노란색을 가져가셨어요. 결국 남색과 아연백색밖에 안 남았어요. 저는 이제 달빛이 비치는 장면밖에 못그리게 됐어요. 하지만 그건 보기만 해도 우울한 데다가 그리기도 쉽지가 않아요. 저는 무척 화가 났지만 그래도 고자질은 하지 않았어요. 게다가 너무 웃기잖아요. 세상에 에메랄드 녹색의 피가 어디 있어요?"
"하긴 그렇구나." 유령은 약간 온화해진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내가 달리 어떻게 할 수 있겠니? 요즘은 진짜 피를 구하기가 어려워. 게다가 네 오빠가 패러건 세제로 그것을 죄다 닦아내기 시작했으니 내 입장에서는 네 물감을 쓰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지. 그리고 색깔이야 취향 문제 아니겠니. 예를 들어 캔터빌 집안 사람들은 피가 파란색이야. 영국에서 가장 파랗지. 하긴 너희 미국인들이야 이런 종류의 일에는 관심이 없겠지만." - P114

"아빠. 버지니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유령과함께 있었어요. 이제 유령은 죽었어요. 가서 보세요. 아주 악한 유령이었지만 자신이 한 일을 진심으로 회개했어요. 유령은죽기 전에 아름다운 보석이 든 이 상자를 저한테 주었어요"
온 가족이 말문이 막혀 버지니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버지니아는 엄숙하고 진지했다. 그녀는 몸을 돌리더니 가족을 이끌고 징두리 벽판이 열린 곳을 통해 좁은 비밀 복도로걸어갔다. 워싱턴이 탁자에서 촛불을 집어 들고 그 뒤를 따랐다. 이윽고 그들은 커다란 떡갈나무 문 앞에 이르렀다. 문에는 녹슨 징이 박혀 있었다. 버지니아가 문에 손을 대자 묵직한 문이 뒤로 젖혀졌다. 그들은 천장이 낮은 작은 방에 들어섰다. 천장은 원형이었으며 쇠창살이 달린 아주 작은 창이 하나 달려있었다. 벽에는 거대한 쇠고리가 달려 있고, 여기에 연결된 사슬에는 여윈 해골이 묶여 있었다. 해골은 돌바닥으로 길게 몸을 뻗고 있었다. 살이 없는 긴 손가락으로 구식 나무 접시와 물병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접시와 물병은 아슬아슬하게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놓여 있었다. 물병 안에 녹색 곰팡이가 핀 것을 보니 한때는 물이 들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나무 접시에는 먼지만 한 무더기 쌓여 있었다. 버지니아는 해골 옆에 무릎을 꿇고 작은 두 손을 모아 속으로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놀란 표정으로그들 앞에 비밀을 드러낸 무시무시한 비극의 현장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 P123

이런 기괴한 사건들이 벌어지고 난 나흘 뒤 밤 11시쯤 캔터빌 저택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검은 말 여덟 마리가 영구차를 끌었다. 말들의 머리에는 모두 까닥거리는 타조 깃털이 한 무더기씩 꽂혀 있었다. 납으로 만든 관에는 짙은 자주색 보를 덮었다. 황금색으로 수놓아진 캔터빌 문장이 보였다. 영구차와 마차 옆에서 하인들이 횃불을 들고 걸어 장례 행렬은 당당해 보였다. 상주 캔터빌 경은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웨일스에서 일부러 왔으며 귀여운 버지니아와 함께 첫 번째 마차에 앉아 있었다. 그 뒤에 미합중국 목사 부부, 그다음에 워싱턴과 사내아이 셋, 그리고 마지막 마차에는 엄니 부인이 탔다. 엄니 부인은 오십여 년 동안 유령을 겁내며 살아왔기 때문에모두들 그녀가 유령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볼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교회 묘지 한쪽 구석에는 깊은 무덤을 팠다. 늙은 주목 바로 밑이었다. 오거스터스 댐피어 신부는 당당한 태도로 장례미사를 주관했다. 식이 끝나자 하인들은 캔터빌 가문의 오랜 관습에 따라 횃불을 껐다. 하관이 시작되자 버지니아가 앞으로 나서서 관 위에 하얀색과 분홍색 편도 꽃으로 만든 커다란 십자가를 올려놓았다. 순간 달이 구름 뒤에서 나와 작은 교회 묘지에 소리 없이 은 빛을 흘려 보냈고, 먼 관목 숲에서는 나이팅게일이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버지니아는 유령이 묘사했던 죽음의 정원을 떠올렸다. 눈물 때문에 앞이 침침했다. 버지니아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입을 꼭 다물고 아무 말도하지 않았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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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왕자

높고 둥근 기둥 위, 도시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행복한 왕자의 조각상이 우뚝 서 있었다. 왕자의 몸은 순금으로 얇게 박이 입혀져 있었고, 눈은 반짝이는 사파이어였고, 검의 손잡이 끝에서는 크고 붉은 루비가 빛을 발했다. - P9

어느 날 밤 귀여운 제비 한 마리가 도시로 날아왔다. 친구들은 모두 여섯 주 전에 이집트로 가 버렸지만 그는 혼자 남았다. 몹시도 아름다운 갈대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초봄에 커다란 노란 나방을 따라 강 위를 날다 만난 갈대였는데, 그녀의 늘씬한 허리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겨 날개를 접고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대를 사랑해도 될까요?" 제비가 물었다. 제비는 핵심 이야기로 바로 들어가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갈대는 제비를 향해 낮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제비는 그녀 주위를 뱅뱅돌다가 날개를 강물에 살짝 스쳐 은빛 잔물결을 일으켰다. 이것이 제비의 사랑 법이었다. 제비의 사랑은 여름 내내 계속되었다.
"웃기는 사랑일세." 다른 제비가 재잘거렸다. "그 갈대는 돈도 없고 친척만 잔뜩 있는데." 정말이지 강에는 갈대가 가득했다. 이윽고 가을이 오자 제비들은 다 날아가 버렸다. 친구들이 다 가 버리자 제비는 외로웠고 애인에게는 싫증까지났다. "도무지 대화라고는 몰라. 게다가 바람둥이인지도 모르겠어. 바람만 나타나면 애교를 떠니 말이야." 아닌 게 아니라 갈대는 바람만 불면 아주 우아하게 무릎과 허리를 굽혀 절을했다. "그뿐인가. 이 아가씨는 나다니기를 싫어해. 하지만 나는 여행을 좋아하고, 그래서 내 아내가 될 사람도 여행을 좋아해야 하는데."
"나와 함께 가시렵니까?" 제비가 마침내 갈대에게 물었다.
그러나 갈대는 살랑살랑 고개를 저었다. 자기 집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를 가지고 놀았군요." 제비는 소리를 질렀다.
"나는 떠나겠어요. 피라미드로 가겠어요. 잘 있어요!" 제비는 날아가 버렸다. - P10

"제비야, 제비야. 귀여운 제비야." 왕자가 말했다. "나와 함께 하룻밤만 더 있지 않으련?"
"이집트에 기다리는 친구들이 있다니까요." 제비가 대답했다. "내일 내 친구들은 두 번째 폭포로 날아 올라갈 거예요. 그곳 애기부들 사이에는 하마들이 웅크리고 있죠. 커다란 화강암 보좌에는 멤논 신이 앉아 있고요. 멤논 신은 밤새도록 별을 지켜보다가 샛별이 반짝이면 딱 한 번 기쁨의 탄성을 내지르고 다시 입을 다물죠. 정오에는 노란 사자들이 물가로 내려와 물을 마셔요. 사자들 눈은 녹색 에메랄드 같아요. 그들은 폭포가 내는 소리보다 더 크게 울부짖죠." - P16

" 곧 이곳에는 차가운 눈이 내릴 거예요. 이집트에서는 녹색 야자나무 위로 햇볕이 따뜻하게 내리쬐죠. 악어들은 진흙에 엎드려 한가하게 주위를 둘러봐요. 내 친구들은 발벡의 신전에 둥지를 틀고 있어요. 분홍색과 흰색 비둘기들이 내 친구들을 지켜보며 자기들끼리 꾸꾸 소리 내고 있죠. 왕자님, 이제는 떠나야 해요. 하지만 왕자님을 잊지는 않을게요. 왕자님이 내주신 보석을 대신할 아름다운 보석 두 개를 내년 봄에 가져올게요. 내가 가져올 루비는 붉은 장미보다 더 붉을 거예요. 사파이어는 저 넓은 바다보다더 파랄 거예요." - P18

가엾은 제비는 점점 더 추위를 탔다. 그러나 왕자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왕자를 너무도 사랑했기 때문이다. 제비는 주인이 보지 않을 때 빵가게 문밖에 있는 부스러기를 쪼아 먹었고, 날개를 퍼덕여 조금이라도 몸의 온기를 유지해 보려 했다. 마침내 제비는 자신이 곧 죽을 것임을 알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 번 왕자의 어깨 위까지 날아갈 힘밖에 남지 않았다. "안녕히 계세요. 왕자님!" 제비가 중얼거렸다. "손에 키스를 해도 될까요?"
"마침내 이집트로 간다니 다행이구나, 귀여운 제비야." 왕자가 말했다. "너는 여기 너무 오래 있었어. 하지만 꼭 내 입에 키스를 해 주렴. 나는 너를 사랑하거든."
"내가 가는 곳은 이집트가 아니에요." 제비가 말했다. "나는 죽음의 집으로 가요. 죽음은 잠의 형제죠, 안 그런가요?"
제비는 행복한 왕자의 입에 키스를 하고 왕자의 발밑으로떨어져 죽었다.
그 순간 조각상 안에서 금이 가는 듯한 묘한 소리가 들렸다. 뭔가가 부서지는 것 같았다. 납으로 만든 심장이 둘로 쪼개진 것이다. 정말 무시무시한 된서리가 내린 모양이었다. - P20

 윈더미어 부인은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상아 빛깔의 목에서는 기품이 드러났으며, 큰 눈은 물망초 빛깔이었고, 풍성한 곱슬머리는 황금 빛깔, 다시 말해 or pur, 그러니까 순금 빛깔이었다. 요즘 들어 황금 빛깔이라는 우아한 이름을 찬탈해 버린 옅은 지푸라기 색깔이 아니라, 햇살 속에 깃들어 있거나 묘한 호박 속에 감추어진 그런 황금 빛깔이었다. 이 머리카락 때문에 그녀의 얼굴은 성자의 후광에 둘러싸인 듯한 느낌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죄인 특유의 매력 또한 물씬 풍겼다. 윈더미어 부인은 심리학적으로 볼때 진귀한 연구 대상이었다. 그녀는 무분별함만큼 세상에 순결함과 흡사해 보이는 것은 없다는 중요한 진리를 일찌감치 터득했다. 그래서 일련의 무모한 탈선을 감행한 끝에 (그 가운데 반은 전혀 무해한 것이었지만) 명사(名士)의 모든 특권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그녀는 한 번 이상 남편을 바꾸었다. 사실 <디브렛 귀족 연감》은 그녀가 세 번 결혼한 공로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애인은 한 번도 바꾼 적이 없기 때문에 그녀는 꽤 오랫동안 추문으로 인한 구설수에 오르지 않았다. 윈더미어 부인은 이제 나이가 마흔이었고 자식은 없었으며 무절제한 쾌락 추구에 몰두했는데, 실은 그것이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기도 했다. - P24

이 얼마나 기막히고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내 손에, 자신은읽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은 판독할 수 있는 문자로 어떤 죄의무시무시한 비밀, 피처럼 붉은 범죄의 표식이 적혀 있단 말인가? 거기서 빠져나갈 방도가 없단 말인가? 보이지 않는 힘에조종당하는 체스의 말보다, 명예를 얻든 창피를 당하든 도기장 마음대로 만들어지는 그릇보다 하등 나을 게 없단 말인가? 그의 이성은 반항했다. 그럼에도 자신의 머리 위에 어떤 비극이 도사리고 있는 느낌, 갑자기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라는요구를 받은 듯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배우들은 운이 좋다. 비극에 나올지 희극에 나올지, 괴로워할지 즐거워할지, 웃을지 울지 선택할 수 있으니.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대부분의 경우 어울리지도 않는 역을 연기할 수밖에 없다. 길든스턴 같은 사람들이 햄릿을 연기하고, 햄릿 같은 사람들이 핼 왕자처럼 농담을 해야 한다." 세계는 무대다. 하지만 배역은 형편없다. - P36

아서 경은 자기도 모르게 이상한 감동을 받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새벽의 은은한 아름다움 속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애처로움이 느껴졌다. 아서 경은 아름다움으로 동이 트는 모든 날들, 폭풍우 속에 저무는 모든 날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이 시골뜨기들, 거칠지만 선량한 목소리에 태평한 행동거지를 보여 주는 이 시골뜨기들을 생각했다. 이들에게는 런던이 얼마나 다르게 보일까! 밤의 죄와 낮의 연기로부터 자유로운 런던, 창백한 유령 같은 도시, 무덤들로 이루어진 황량한 도시! 저 사람들은 이곳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 광채와 그 수치를, 불처럼 번지는 그 격한 기쁨과 그 무시무시한 굶주림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만들고 부수는 그 모든 것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을까? 어쩌면 그들에게 런던이란 과일을 내다 파는 시장, 기껏해야 몇 시간 머물다가 아직 거리가 고요할때 아직 어떤 집도 잠을 깨지 않았을 때 등지고 떠나는 시장에 불과할 것이다. 아서 경은 그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기쁨을 느꼈다. 징을 박은 무거운 구두를 신고 어색하게 걷는 이 사람들은 비록 천해 보이기는 했지만 아르카디아의 한부분을 거느리고 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들은 자연과 함께 살아 온 것 같았다. 자연이 그들에게 평화를 가르쳐 준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서 경이 뭘 부러워하는지 모르는 채 살아갔다. - P43

운명의 여신이 여전히 이 무서운 운을 저울에 올려 놓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어떤 식으로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무슨 일이 있어도 결혼은 미루어야 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분명한 결심이 섰다. 그녀를 열렬히 사랑했지만, 함께 앉아 있을 때면 손가락만 닿아도 몸의 온 신경이 짜릿한 기쁨으로 떨렸지만, 그래도 그는 자신의 의무가 무엇인지는 분명히 알았으며 살인을 저지르기 전에는 결혼할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했다. 살인만 하고 나면, 범죄를 저지르게 될 것이라는 공포 없이 시빌 머튼과 함께 제단 앞에 서서 자신의 삶을 그녀의 손에 맡길 수 있을 것이었다. 살인만 하고 나면 그녀가 자기 때문에 얼굴 붉힐 일도, 창피해서 고개를 숙일 일도 없을것이라고 자신하며 그녀를 품에 안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 우선 살인부터 해야 했다. 빠르면 빠를수록 둘 다에게 좋았다.
그만한 위치에 있는 남자들이라면 대개가 의무의 가파른 산비탈을 오르기보다는 앵초가 핀 길에서 빈둥거리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서 경은 양심적인 사람이었다. 쾌락을 원칙보다 앞세울 수는 없었다. 그의 사랑은 정열만으로 이루어진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시빌은 선하고 고상한 모든 것의 상징이었다. 아서 경은 잠시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역겨움을 느꼈지만 그런 감정은 곧 사라졌다. 그의 가슴은 그것이 죄가 아니라 희생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의 이성은 달리 다른 길이 없다고 일깨우고 있었다.  - P46

아서 경은 2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블랙프라이어스 수도원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모든 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으로 보이는지! 생경한 꿈 같았다! 강 건너편의 집들은 어둠으로 지은 것같았다. 마치 은과 그림자가 세상을 다시 만들어 놓은 듯했다. 세인트폴 성당의 거대한 돔은 어스레한 하늘에 뜬 거품처럼아련해 보였다.
클레오파트라의 바늘로 다가가는데 한 남자가 난간에 몸을 기대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더 가까이 다가갔을 때 남자가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 가스등 불빛이 얼굴 전체를 환하게 비추었다.
수상가 포저스 씨였다! 푸짐한 살, 축 늘어진 얼굴, 금테 안경, 병약해 보이는 미소, 음탕해 보이는 입을 잘못 알아봤을리 없었다.
아서 경은 발을 멈추었다. 멋진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살금살금 포저스 씨 뒤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포저스 씨의 두 발을 붙잡아 템스 강에 내던졌다. 상스러운 욕설에 이어 묵직한 것이 첨벙 하며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잠잠해졌다. 아서 경은 불안한 표정으로 난간 너머를 보았다. 수상가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달빛에 반짝이는 물의 소용돌이를 따라 맴도는 실크해트 하나만 보였다. 잠시후 실크해트마저도 가라앉았다. 포저스 씨는 자취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셈이었다. 문득 살이 뒤룩뒤룩 찐 볼품없는 형체가 다리 옆의 층계로 헤엄쳐 나아가는 모습을 본 듯했다. 아서 경은 실패했다는 아득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것은 그림자에 불과했다. 달이 구름 뒤에서 얼굴을 내밀자 그림자도 사라져 버렸다. 마침내 아서 경은 운명의 명령을 이행한 셈이었다.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자마자 시빌의 이름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 P71

윈더미어 부인은 갑자기 안주인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행복해, 시발?"
"그럼요, 행복하죠, 윈더미어 부인, 행복하지 않으세요?"
"행복할 시간이 없어, 시빌, 나는 늘 가장 최근에 소개받은사람을 좋아해. 하지만 보통 상대를 알자마자 싫증을 느끼게되지."
"윈더미어 부인의 사자들이 만족스럽지 않나요?"
"아, 만족스럽지 않아! 사자는 한 시즌만 좋을 뿐이야. 갈기를 자르는 즉시 세상에서 가장 둔한 동물이 되고 말지. 게다가 잘해 주면 아주 못되게 굴어요. 그 지긋지긋한 포저스 씨 기억나? 그 사람은 정말 끔찍한 사기꾼이었어. 물론 나야 그런 데는 관심 없지만, 심지어는 그 사람이 나한테서 돈을 빌리고 싶어 할 때도 용서를 해 주었지. 하지만 나한테 구애하는 꼴은 견딜 수 없더라고. 정말이지 나는 그 사람 때문에 수상이 싫어졌어. 이제 내 관심은 텔레파시로 옮겨 갔어. 그게 훨씬 더 재미있더라고."
"여기서는 수상에 대해 나쁘게 말씀하시면 안 돼요. 윈더미어 부인. 아서는 다른 건 몰라도 수상을 가지고 농담하는건 좋아하지 않아요. 수상에 대해서는 정말 진지한 태도를 보이죠."
"설마 아서가 그걸 믿는다는 말은 아니겠지, 시빌?"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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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긍심(acquiescentia in se ipso)이란 인간이 자기 자신과 자기의 활동 능력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기쁨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스피노자의 말대로 자긍심은 "자기 자신과 자기의 활동 능력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기쁨"이다. 명시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되돌아본 자신의 모습이 긍정적일 때에만 우리는 기쁨을 느끼는 법이다. 자신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확인할 때, 샹탈이 아닌 다른 누구라도 기쁨을 느끼기마련이다. 자긍심은 얼마나 매력적인 감정인가. 길거리를 걸을 때도 우리의 걸음걸이는 레드카펫을 걷는 여배우처럼 당당하고 아름다울 것이고, 낯선 사람과 대화할 때도 우리의 말과 행동은 거칠 것 없는 아우라를 뿜을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자기 자신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존재라는 걸 자각하고,
그래서 자긍심이라는 감정에 사로잡히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우리는 대개의 경우 모종의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위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샹탈이 받은 스토커의 편지가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당신이 얼마나 많은 보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를 알려 주는 숭배자가 없다면, 자긍심을 갖기란 너무나 힘든 법이니까.
- P40

스토커의 편지가 장마르크가 보낸 것이라는 사실이 들통 나자, 화를 참지 못한 샹탈은 순간적이나마 그를 떠나 버린다. 같이있던 사람이 나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는 그 사람이 내 곁을 떠났을때에야 뒤늦게 자각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샹탈과 장마르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두 남녀는 헤어지고 나서야 자신들이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깨닫게 된다. 그러니 두 연인이 다시 런던에서 재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겠다. 우여곡절 끝에 화해를 한 두 사람은 잠자리를 함께할 때 마침내 알게 된다. 사랑은 서로를 주목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아가 서로를 숭배하면서자긍심을 심어 주는 것이라는 걸. 그래서 소설 『정체성』의 마지막 장면은 우리에게 애잔하지만 깊은 감동을 준다.

그녀는 말했다. "나는 더 이상 당신으로부터 눈길을 떼지 않을 거야. 쉴 새 없이 당신을 바라보겠어." 그리고 말을 멈추었다가 이렇게 이었다. "내 눈이 깜박거리면 두려워. 내 시선이 꺼진 그 순간 당신 대신 뱀, 쥐, 다른 어떤 남자가 끼어들까 하는 두려움."
그는 몸을 조금 일으켜 입술을 그녀에게 대려고 했다.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냥 당신을 보기만 할 거야." 그러더니 다시 말했다. "밤새도록 스탠드를 켜 놓을 거야. 매일 밤마다. - P43

 그래서일까. 우리는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과 함께 있으려고 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상대방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발견하는 놀라운 재주가 있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경탄하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그러니 어떻게 내가 가진 치명적인 단점이 그의 눈에 들어올 리 있겠는가. 그래서 애인은 우리에게 다른 타인이 결코줄 수 없는 자긍심을 되찾아줄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나의 모든 면에 무관심하거나 혹은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좋은 친구 혹은 좋은 동료일 수는 있어도 말이다. 자신에 대해 자긍심이 떨어진 사람에게 유일한 치료약은 애인이 생기는 것이다.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는 금방 자긍심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자신이 충분히 소중하고 매력적인 존재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타인이 나를 사랑한다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겠는가. - P46

-경탄(admiratio)이란 어떤 사물에 대한 관념으로, 이 특수한 관념은 다른관념과는 아무런 연결도 갖지 않기 때문에 정신은 그 관념 안에서 확고하게 머문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다른 관념과 아무런 연결도 갖지 않는 특수한 관념,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다른 것과 비교 불가능한 관념을 말한다. 지금까지 실물로 본 적이 없는 거대한 폭포 앞에 서는 순간, 우리는 입만 바보처럼 벌리고 경탄하게 된다.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풍경이기 때문이다. 칸트라는 철학자가 말한 ‘숭고‘의 감정이 바로 경탄의 감정에 다름 아니다.  - P51

맑은 호수에 떨어진 돌멩이는 파문을 만들고, 그 파문은 퍼져 갈수록 더 커지게 되는 법이다. "슬픔의 둥근 원, 원들"이라고하는, 더 깊어지고 높아지는 슬픔의 파문 속에서 넬은 너무나 뒤늦게, 자신이 진짜 아끼던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자각하게 된다. 결국 주드라는 남자를 놓고 경쟁이 벌어졌던 한 편의 비극은 서로를 갈망하는 두 흑인 여성 사이의 애정 때문이었던 셈이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주드가 전혀 아니었던 셈이다. 주드는 단지 넬과 술라라는 두 꼬맹이 사이에 놓여 있는 근사한 장난감에 지나지않았던 것이다. 스피노자는 경쟁심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던 적이있다.

경쟁심(aemulatio)이란 타인이 어떤 사물에 대해 욕망을 가진다고 우리가생각할 때, 우리 내면에 생기는 동일한 사물에 대한 욕망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그렇지만 여기서의 타인은 단순한 타인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충분히 좋아하는 타인일 수밖에 없다. 자신이 혐오하는 사람이 욕망하는 대상을 똑같이 욕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어쩌면 이것은 사랑에 빠져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것 아닌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가 욕망하는 것을 갖추려고 노력할 것이다.  - P61

야심(ambitio)이란 모든 감정을 키우며 강화하는 욕망이다. 그러므로 이정서는 거의 정복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어떤 욕망에 묶여 있는 동안에는 필연적으로 야심에 동시에 묶이기 때문이다. 키케로는 이렇게 말했다. "가장 고상한 사람들도 명예욕에 지배된다. 특히 철학자들까지도명예를 경멸해야 한다고 쓴 책에 자신의 이름을 써 넣는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스피노자의 말대로 야심은 모든 감정을 키우며 강화하는 욕망이다. 자신의 정의가 이해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자각에서일까. 스피노자는 이어서 키케로가 말한 ‘명예욕‘을 언급하면서 야심에대해 부연 설명을 해 준다. 그러니까 야심이란 둘 사이의 관계 혹은 나와 사물이나 사건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나 욕망과는 다른 것이다. 이 양자의 관계 바깥에 있는 제3자로부터 관심과 존경을 받으려는 것이 바로 야심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여자가 어떤 남자와 사랑에 빠졌는데 동료들이 어떻게 그 남자를 만나게 되었냐며 관심을 보이거나 혹은 "그 남자 정말 멋지던데!"라고 말해 줄 때가 있다. 이런 찬탄과 부러움의 대상이 될 때, 그 남자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더 커지고 강화될 수있다. 이것이 바로 야심이다. 스피노자의 말대로 야심은 사랑만이아니라 모든 감정이나 욕망에도 그대로 작동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야심이 때로는 원래 들었던 감정이나 욕망을압도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냥 그 남자를 만나서 사랑의 감정이 싹텄지만, 어느 사이엔가 멋진 커플이라는 평가를 받으려는 야심이 조금씩 사랑의 감정을 잠식할 수 있다.  - P71

"인간이 어떤 욕망에 묶여 있는 동안에는 필연적으로 야심에 동시에 묶일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의 이 씁쓸한 당부를 읽는순간, 우리는 서글퍼지지 않을 수 없다. 아, 사랑에도 이미 야심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있구나! 그래서일까? 사랑에 빠지는 순간, 우리는 사랑의 행복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한다. 이것이 우리의 남루한 자화상 아닐까? 자신의 행복을 알려 모든 사람들로부터 주목받고 싶기 때문이다. 사실 대부분 사람들은 항상 행복한 상태에 있지 않으니, 행복한 사람은 그만큼 주목받기에 충분하다. 이 순간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제3자들을 더 의식하고 있는 것이 된다. 어떻게 이런상태를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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