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긍심(acquiescentia in se ipso)이란 인간이 자기 자신과 자기의 활동 능력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기쁨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스피노자의 말대로 자긍심은 "자기 자신과 자기의 활동 능력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기쁨"이다. 명시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되돌아본 자신의 모습이 긍정적일 때에만 우리는 기쁨을 느끼는 법이다. 자신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확인할 때, 샹탈이 아닌 다른 누구라도 기쁨을 느끼기마련이다. 자긍심은 얼마나 매력적인 감정인가. 길거리를 걸을 때도 우리의 걸음걸이는 레드카펫을 걷는 여배우처럼 당당하고 아름다울 것이고, 낯선 사람과 대화할 때도 우리의 말과 행동은 거칠 것 없는 아우라를 뿜을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자기 자신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존재라는 걸 자각하고, 그래서 자긍심이라는 감정에 사로잡히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우리는 대개의 경우 모종의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위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샹탈이 받은 스토커의 편지가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당신이 얼마나 많은 보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를 알려 주는 숭배자가 없다면, 자긍심을 갖기란 너무나 힘든 법이니까. - P40
스토커의 편지가 장마르크가 보낸 것이라는 사실이 들통 나자, 화를 참지 못한 샹탈은 순간적이나마 그를 떠나 버린다. 같이있던 사람이 나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는 그 사람이 내 곁을 떠났을때에야 뒤늦게 자각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샹탈과 장마르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두 남녀는 헤어지고 나서야 자신들이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깨닫게 된다. 그러니 두 연인이 다시 런던에서 재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겠다. 우여곡절 끝에 화해를 한 두 사람은 잠자리를 함께할 때 마침내 알게 된다. 사랑은 서로를 주목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아가 서로를 숭배하면서자긍심을 심어 주는 것이라는 걸. 그래서 소설 『정체성』의 마지막 장면은 우리에게 애잔하지만 깊은 감동을 준다.
그녀는 말했다. "나는 더 이상 당신으로부터 눈길을 떼지 않을 거야. 쉴 새 없이 당신을 바라보겠어." 그리고 말을 멈추었다가 이렇게 이었다. "내 눈이 깜박거리면 두려워. 내 시선이 꺼진 그 순간 당신 대신 뱀, 쥐, 다른 어떤 남자가 끼어들까 하는 두려움." 그는 몸을 조금 일으켜 입술을 그녀에게 대려고 했다.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냥 당신을 보기만 할 거야." 그러더니 다시 말했다. "밤새도록 스탠드를 켜 놓을 거야. 매일 밤마다. - P43
그래서일까. 우리는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과 함께 있으려고 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상대방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발견하는 놀라운 재주가 있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경탄하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그러니 어떻게 내가 가진 치명적인 단점이 그의 눈에 들어올 리 있겠는가. 그래서 애인은 우리에게 다른 타인이 결코줄 수 없는 자긍심을 되찾아줄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나의 모든 면에 무관심하거나 혹은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좋은 친구 혹은 좋은 동료일 수는 있어도 말이다. 자신에 대해 자긍심이 떨어진 사람에게 유일한 치료약은 애인이 생기는 것이다.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는 금방 자긍심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자신이 충분히 소중하고 매력적인 존재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타인이 나를 사랑한다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겠는가. - P46
-경탄(admiratio)이란 어떤 사물에 대한 관념으로, 이 특수한 관념은 다른관념과는 아무런 연결도 갖지 않기 때문에 정신은 그 관념 안에서 확고하게 머문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다른 관념과 아무런 연결도 갖지 않는 특수한 관념,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다른 것과 비교 불가능한 관념을 말한다. 지금까지 실물로 본 적이 없는 거대한 폭포 앞에 서는 순간, 우리는 입만 바보처럼 벌리고 경탄하게 된다.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풍경이기 때문이다. 칸트라는 철학자가 말한 ‘숭고‘의 감정이 바로 경탄의 감정에 다름 아니다. - P51
맑은 호수에 떨어진 돌멩이는 파문을 만들고, 그 파문은 퍼져 갈수록 더 커지게 되는 법이다. "슬픔의 둥근 원, 원들"이라고하는, 더 깊어지고 높아지는 슬픔의 파문 속에서 넬은 너무나 뒤늦게, 자신이 진짜 아끼던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자각하게 된다. 결국 주드라는 남자를 놓고 경쟁이 벌어졌던 한 편의 비극은 서로를 갈망하는 두 흑인 여성 사이의 애정 때문이었던 셈이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주드가 전혀 아니었던 셈이다. 주드는 단지 넬과 술라라는 두 꼬맹이 사이에 놓여 있는 근사한 장난감에 지나지않았던 것이다. 스피노자는 경쟁심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던 적이있다.
경쟁심(aemulatio)이란 타인이 어떤 사물에 대해 욕망을 가진다고 우리가생각할 때, 우리 내면에 생기는 동일한 사물에 대한 욕망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그렇지만 여기서의 타인은 단순한 타인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충분히 좋아하는 타인일 수밖에 없다. 자신이 혐오하는 사람이 욕망하는 대상을 똑같이 욕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어쩌면 이것은 사랑에 빠져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것 아닌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가 욕망하는 것을 갖추려고 노력할 것이다. - P61
야심(ambitio)이란 모든 감정을 키우며 강화하는 욕망이다. 그러므로 이정서는 거의 정복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어떤 욕망에 묶여 있는 동안에는 필연적으로 야심에 동시에 묶이기 때문이다. 키케로는 이렇게 말했다. "가장 고상한 사람들도 명예욕에 지배된다. 특히 철학자들까지도명예를 경멸해야 한다고 쓴 책에 자신의 이름을 써 넣는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스피노자의 말대로 야심은 모든 감정을 키우며 강화하는 욕망이다. 자신의 정의가 이해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자각에서일까. 스피노자는 이어서 키케로가 말한 ‘명예욕‘을 언급하면서 야심에대해 부연 설명을 해 준다. 그러니까 야심이란 둘 사이의 관계 혹은 나와 사물이나 사건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나 욕망과는 다른 것이다. 이 양자의 관계 바깥에 있는 제3자로부터 관심과 존경을 받으려는 것이 바로 야심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여자가 어떤 남자와 사랑에 빠졌는데 동료들이 어떻게 그 남자를 만나게 되었냐며 관심을 보이거나 혹은 "그 남자 정말 멋지던데!"라고 말해 줄 때가 있다. 이런 찬탄과 부러움의 대상이 될 때, 그 남자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더 커지고 강화될 수있다. 이것이 바로 야심이다. 스피노자의 말대로 야심은 사랑만이아니라 모든 감정이나 욕망에도 그대로 작동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야심이 때로는 원래 들었던 감정이나 욕망을압도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냥 그 남자를 만나서 사랑의 감정이 싹텄지만, 어느 사이엔가 멋진 커플이라는 평가를 받으려는 야심이 조금씩 사랑의 감정을 잠식할 수 있다. - P71
"인간이 어떤 욕망에 묶여 있는 동안에는 필연적으로 야심에 동시에 묶일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의 이 씁쓸한 당부를 읽는순간, 우리는 서글퍼지지 않을 수 없다. 아, 사랑에도 이미 야심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있구나! 그래서일까? 사랑에 빠지는 순간, 우리는 사랑의 행복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한다. 이것이 우리의 남루한 자화상 아닐까? 자신의 행복을 알려 모든 사람들로부터 주목받고 싶기 때문이다. 사실 대부분 사람들은 항상 행복한 상태에 있지 않으니, 행복한 사람은 그만큼 주목받기에 충분하다. 이 순간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제3자들을 더 의식하고 있는 것이 된다. 어떻게 이런상태를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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