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왕자

높고 둥근 기둥 위, 도시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행복한 왕자의 조각상이 우뚝 서 있었다. 왕자의 몸은 순금으로 얇게 박이 입혀져 있었고, 눈은 반짝이는 사파이어였고, 검의 손잡이 끝에서는 크고 붉은 루비가 빛을 발했다. - P9

어느 날 밤 귀여운 제비 한 마리가 도시로 날아왔다. 친구들은 모두 여섯 주 전에 이집트로 가 버렸지만 그는 혼자 남았다. 몹시도 아름다운 갈대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초봄에 커다란 노란 나방을 따라 강 위를 날다 만난 갈대였는데, 그녀의 늘씬한 허리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겨 날개를 접고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대를 사랑해도 될까요?" 제비가 물었다. 제비는 핵심 이야기로 바로 들어가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갈대는 제비를 향해 낮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제비는 그녀 주위를 뱅뱅돌다가 날개를 강물에 살짝 스쳐 은빛 잔물결을 일으켰다. 이것이 제비의 사랑 법이었다. 제비의 사랑은 여름 내내 계속되었다.
"웃기는 사랑일세." 다른 제비가 재잘거렸다. "그 갈대는 돈도 없고 친척만 잔뜩 있는데." 정말이지 강에는 갈대가 가득했다. 이윽고 가을이 오자 제비들은 다 날아가 버렸다. 친구들이 다 가 버리자 제비는 외로웠고 애인에게는 싫증까지났다. "도무지 대화라고는 몰라. 게다가 바람둥이인지도 모르겠어. 바람만 나타나면 애교를 떠니 말이야." 아닌 게 아니라 갈대는 바람만 불면 아주 우아하게 무릎과 허리를 굽혀 절을했다. "그뿐인가. 이 아가씨는 나다니기를 싫어해. 하지만 나는 여행을 좋아하고, 그래서 내 아내가 될 사람도 여행을 좋아해야 하는데."
"나와 함께 가시렵니까?" 제비가 마침내 갈대에게 물었다.
그러나 갈대는 살랑살랑 고개를 저었다. 자기 집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를 가지고 놀았군요." 제비는 소리를 질렀다.
"나는 떠나겠어요. 피라미드로 가겠어요. 잘 있어요!" 제비는 날아가 버렸다. - P10

"제비야, 제비야. 귀여운 제비야." 왕자가 말했다. "나와 함께 하룻밤만 더 있지 않으련?"
"이집트에 기다리는 친구들이 있다니까요." 제비가 대답했다. "내일 내 친구들은 두 번째 폭포로 날아 올라갈 거예요. 그곳 애기부들 사이에는 하마들이 웅크리고 있죠. 커다란 화강암 보좌에는 멤논 신이 앉아 있고요. 멤논 신은 밤새도록 별을 지켜보다가 샛별이 반짝이면 딱 한 번 기쁨의 탄성을 내지르고 다시 입을 다물죠. 정오에는 노란 사자들이 물가로 내려와 물을 마셔요. 사자들 눈은 녹색 에메랄드 같아요. 그들은 폭포가 내는 소리보다 더 크게 울부짖죠." - P16

" 곧 이곳에는 차가운 눈이 내릴 거예요. 이집트에서는 녹색 야자나무 위로 햇볕이 따뜻하게 내리쬐죠. 악어들은 진흙에 엎드려 한가하게 주위를 둘러봐요. 내 친구들은 발벡의 신전에 둥지를 틀고 있어요. 분홍색과 흰색 비둘기들이 내 친구들을 지켜보며 자기들끼리 꾸꾸 소리 내고 있죠. 왕자님, 이제는 떠나야 해요. 하지만 왕자님을 잊지는 않을게요. 왕자님이 내주신 보석을 대신할 아름다운 보석 두 개를 내년 봄에 가져올게요. 내가 가져올 루비는 붉은 장미보다 더 붉을 거예요. 사파이어는 저 넓은 바다보다더 파랄 거예요." - P18

가엾은 제비는 점점 더 추위를 탔다. 그러나 왕자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왕자를 너무도 사랑했기 때문이다. 제비는 주인이 보지 않을 때 빵가게 문밖에 있는 부스러기를 쪼아 먹었고, 날개를 퍼덕여 조금이라도 몸의 온기를 유지해 보려 했다. 마침내 제비는 자신이 곧 죽을 것임을 알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 번 왕자의 어깨 위까지 날아갈 힘밖에 남지 않았다. "안녕히 계세요. 왕자님!" 제비가 중얼거렸다. "손에 키스를 해도 될까요?"
"마침내 이집트로 간다니 다행이구나, 귀여운 제비야." 왕자가 말했다. "너는 여기 너무 오래 있었어. 하지만 꼭 내 입에 키스를 해 주렴. 나는 너를 사랑하거든."
"내가 가는 곳은 이집트가 아니에요." 제비가 말했다. "나는 죽음의 집으로 가요. 죽음은 잠의 형제죠, 안 그런가요?"
제비는 행복한 왕자의 입에 키스를 하고 왕자의 발밑으로떨어져 죽었다.
그 순간 조각상 안에서 금이 가는 듯한 묘한 소리가 들렸다. 뭔가가 부서지는 것 같았다. 납으로 만든 심장이 둘로 쪼개진 것이다. 정말 무시무시한 된서리가 내린 모양이었다. - P20

 윈더미어 부인은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상아 빛깔의 목에서는 기품이 드러났으며, 큰 눈은 물망초 빛깔이었고, 풍성한 곱슬머리는 황금 빛깔, 다시 말해 or pur, 그러니까 순금 빛깔이었다. 요즘 들어 황금 빛깔이라는 우아한 이름을 찬탈해 버린 옅은 지푸라기 색깔이 아니라, 햇살 속에 깃들어 있거나 묘한 호박 속에 감추어진 그런 황금 빛깔이었다. 이 머리카락 때문에 그녀의 얼굴은 성자의 후광에 둘러싸인 듯한 느낌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죄인 특유의 매력 또한 물씬 풍겼다. 윈더미어 부인은 심리학적으로 볼때 진귀한 연구 대상이었다. 그녀는 무분별함만큼 세상에 순결함과 흡사해 보이는 것은 없다는 중요한 진리를 일찌감치 터득했다. 그래서 일련의 무모한 탈선을 감행한 끝에 (그 가운데 반은 전혀 무해한 것이었지만) 명사(名士)의 모든 특권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그녀는 한 번 이상 남편을 바꾸었다. 사실 <디브렛 귀족 연감》은 그녀가 세 번 결혼한 공로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애인은 한 번도 바꾼 적이 없기 때문에 그녀는 꽤 오랫동안 추문으로 인한 구설수에 오르지 않았다. 윈더미어 부인은 이제 나이가 마흔이었고 자식은 없었으며 무절제한 쾌락 추구에 몰두했는데, 실은 그것이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기도 했다. - P24

이 얼마나 기막히고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내 손에, 자신은읽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은 판독할 수 있는 문자로 어떤 죄의무시무시한 비밀, 피처럼 붉은 범죄의 표식이 적혀 있단 말인가? 거기서 빠져나갈 방도가 없단 말인가? 보이지 않는 힘에조종당하는 체스의 말보다, 명예를 얻든 창피를 당하든 도기장 마음대로 만들어지는 그릇보다 하등 나을 게 없단 말인가? 그의 이성은 반항했다. 그럼에도 자신의 머리 위에 어떤 비극이 도사리고 있는 느낌, 갑자기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라는요구를 받은 듯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배우들은 운이 좋다. 비극에 나올지 희극에 나올지, 괴로워할지 즐거워할지, 웃을지 울지 선택할 수 있으니.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대부분의 경우 어울리지도 않는 역을 연기할 수밖에 없다. 길든스턴 같은 사람들이 햄릿을 연기하고, 햄릿 같은 사람들이 핼 왕자처럼 농담을 해야 한다." 세계는 무대다. 하지만 배역은 형편없다. - P36

아서 경은 자기도 모르게 이상한 감동을 받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새벽의 은은한 아름다움 속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애처로움이 느껴졌다. 아서 경은 아름다움으로 동이 트는 모든 날들, 폭풍우 속에 저무는 모든 날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이 시골뜨기들, 거칠지만 선량한 목소리에 태평한 행동거지를 보여 주는 이 시골뜨기들을 생각했다. 이들에게는 런던이 얼마나 다르게 보일까! 밤의 죄와 낮의 연기로부터 자유로운 런던, 창백한 유령 같은 도시, 무덤들로 이루어진 황량한 도시! 저 사람들은 이곳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 광채와 그 수치를, 불처럼 번지는 그 격한 기쁨과 그 무시무시한 굶주림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만들고 부수는 그 모든 것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을까? 어쩌면 그들에게 런던이란 과일을 내다 파는 시장, 기껏해야 몇 시간 머물다가 아직 거리가 고요할때 아직 어떤 집도 잠을 깨지 않았을 때 등지고 떠나는 시장에 불과할 것이다. 아서 경은 그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기쁨을 느꼈다. 징을 박은 무거운 구두를 신고 어색하게 걷는 이 사람들은 비록 천해 보이기는 했지만 아르카디아의 한부분을 거느리고 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들은 자연과 함께 살아 온 것 같았다. 자연이 그들에게 평화를 가르쳐 준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서 경이 뭘 부러워하는지 모르는 채 살아갔다. - P43

운명의 여신이 여전히 이 무서운 운을 저울에 올려 놓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어떤 식으로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무슨 일이 있어도 결혼은 미루어야 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분명한 결심이 섰다. 그녀를 열렬히 사랑했지만, 함께 앉아 있을 때면 손가락만 닿아도 몸의 온 신경이 짜릿한 기쁨으로 떨렸지만, 그래도 그는 자신의 의무가 무엇인지는 분명히 알았으며 살인을 저지르기 전에는 결혼할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했다. 살인만 하고 나면, 범죄를 저지르게 될 것이라는 공포 없이 시빌 머튼과 함께 제단 앞에 서서 자신의 삶을 그녀의 손에 맡길 수 있을 것이었다. 살인만 하고 나면 그녀가 자기 때문에 얼굴 붉힐 일도, 창피해서 고개를 숙일 일도 없을것이라고 자신하며 그녀를 품에 안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 우선 살인부터 해야 했다. 빠르면 빠를수록 둘 다에게 좋았다.
그만한 위치에 있는 남자들이라면 대개가 의무의 가파른 산비탈을 오르기보다는 앵초가 핀 길에서 빈둥거리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서 경은 양심적인 사람이었다. 쾌락을 원칙보다 앞세울 수는 없었다. 그의 사랑은 정열만으로 이루어진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시빌은 선하고 고상한 모든 것의 상징이었다. 아서 경은 잠시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역겨움을 느꼈지만 그런 감정은 곧 사라졌다. 그의 가슴은 그것이 죄가 아니라 희생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의 이성은 달리 다른 길이 없다고 일깨우고 있었다.  - P46

아서 경은 2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블랙프라이어스 수도원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모든 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으로 보이는지! 생경한 꿈 같았다! 강 건너편의 집들은 어둠으로 지은 것같았다. 마치 은과 그림자가 세상을 다시 만들어 놓은 듯했다. 세인트폴 성당의 거대한 돔은 어스레한 하늘에 뜬 거품처럼아련해 보였다.
클레오파트라의 바늘로 다가가는데 한 남자가 난간에 몸을 기대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더 가까이 다가갔을 때 남자가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 가스등 불빛이 얼굴 전체를 환하게 비추었다.
수상가 포저스 씨였다! 푸짐한 살, 축 늘어진 얼굴, 금테 안경, 병약해 보이는 미소, 음탕해 보이는 입을 잘못 알아봤을리 없었다.
아서 경은 발을 멈추었다. 멋진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살금살금 포저스 씨 뒤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포저스 씨의 두 발을 붙잡아 템스 강에 내던졌다. 상스러운 욕설에 이어 묵직한 것이 첨벙 하며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잠잠해졌다. 아서 경은 불안한 표정으로 난간 너머를 보았다. 수상가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달빛에 반짝이는 물의 소용돌이를 따라 맴도는 실크해트 하나만 보였다. 잠시후 실크해트마저도 가라앉았다. 포저스 씨는 자취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셈이었다. 문득 살이 뒤룩뒤룩 찐 볼품없는 형체가 다리 옆의 층계로 헤엄쳐 나아가는 모습을 본 듯했다. 아서 경은 실패했다는 아득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것은 그림자에 불과했다. 달이 구름 뒤에서 얼굴을 내밀자 그림자도 사라져 버렸다. 마침내 아서 경은 운명의 명령을 이행한 셈이었다.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자마자 시빌의 이름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 P71

윈더미어 부인은 갑자기 안주인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행복해, 시발?"
"그럼요, 행복하죠, 윈더미어 부인, 행복하지 않으세요?"
"행복할 시간이 없어, 시빌, 나는 늘 가장 최근에 소개받은사람을 좋아해. 하지만 보통 상대를 알자마자 싫증을 느끼게되지."
"윈더미어 부인의 사자들이 만족스럽지 않나요?"
"아, 만족스럽지 않아! 사자는 한 시즌만 좋을 뿐이야. 갈기를 자르는 즉시 세상에서 가장 둔한 동물이 되고 말지. 게다가 잘해 주면 아주 못되게 굴어요. 그 지긋지긋한 포저스 씨 기억나? 그 사람은 정말 끔찍한 사기꾼이었어. 물론 나야 그런 데는 관심 없지만, 심지어는 그 사람이 나한테서 돈을 빌리고 싶어 할 때도 용서를 해 주었지. 하지만 나한테 구애하는 꼴은 견딜 수 없더라고. 정말이지 나는 그 사람 때문에 수상이 싫어졌어. 이제 내 관심은 텔레파시로 옮겨 갔어. 그게 훨씬 더 재미있더라고."
"여기서는 수상에 대해 나쁘게 말씀하시면 안 돼요. 윈더미어 부인. 아서는 다른 건 몰라도 수상을 가지고 농담하는건 좋아하지 않아요. 수상에 대해서는 정말 진지한 태도를 보이죠."
"설마 아서가 그걸 믿는다는 말은 아니겠지, 시빌?"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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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긍심(acquiescentia in se ipso)이란 인간이 자기 자신과 자기의 활동 능력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기쁨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스피노자의 말대로 자긍심은 "자기 자신과 자기의 활동 능력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기쁨"이다. 명시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되돌아본 자신의 모습이 긍정적일 때에만 우리는 기쁨을 느끼는 법이다. 자신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확인할 때, 샹탈이 아닌 다른 누구라도 기쁨을 느끼기마련이다. 자긍심은 얼마나 매력적인 감정인가. 길거리를 걸을 때도 우리의 걸음걸이는 레드카펫을 걷는 여배우처럼 당당하고 아름다울 것이고, 낯선 사람과 대화할 때도 우리의 말과 행동은 거칠 것 없는 아우라를 뿜을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자기 자신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존재라는 걸 자각하고,
그래서 자긍심이라는 감정에 사로잡히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우리는 대개의 경우 모종의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위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샹탈이 받은 스토커의 편지가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당신이 얼마나 많은 보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를 알려 주는 숭배자가 없다면, 자긍심을 갖기란 너무나 힘든 법이니까.
- P40

스토커의 편지가 장마르크가 보낸 것이라는 사실이 들통 나자, 화를 참지 못한 샹탈은 순간적이나마 그를 떠나 버린다. 같이있던 사람이 나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는 그 사람이 내 곁을 떠났을때에야 뒤늦게 자각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샹탈과 장마르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두 남녀는 헤어지고 나서야 자신들이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깨닫게 된다. 그러니 두 연인이 다시 런던에서 재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겠다. 우여곡절 끝에 화해를 한 두 사람은 잠자리를 함께할 때 마침내 알게 된다. 사랑은 서로를 주목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아가 서로를 숭배하면서자긍심을 심어 주는 것이라는 걸. 그래서 소설 『정체성』의 마지막 장면은 우리에게 애잔하지만 깊은 감동을 준다.

그녀는 말했다. "나는 더 이상 당신으로부터 눈길을 떼지 않을 거야. 쉴 새 없이 당신을 바라보겠어." 그리고 말을 멈추었다가 이렇게 이었다. "내 눈이 깜박거리면 두려워. 내 시선이 꺼진 그 순간 당신 대신 뱀, 쥐, 다른 어떤 남자가 끼어들까 하는 두려움."
그는 몸을 조금 일으켜 입술을 그녀에게 대려고 했다.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냥 당신을 보기만 할 거야." 그러더니 다시 말했다. "밤새도록 스탠드를 켜 놓을 거야. 매일 밤마다. - P43

 그래서일까. 우리는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과 함께 있으려고 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상대방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발견하는 놀라운 재주가 있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경탄하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그러니 어떻게 내가 가진 치명적인 단점이 그의 눈에 들어올 리 있겠는가. 그래서 애인은 우리에게 다른 타인이 결코줄 수 없는 자긍심을 되찾아줄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나의 모든 면에 무관심하거나 혹은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좋은 친구 혹은 좋은 동료일 수는 있어도 말이다. 자신에 대해 자긍심이 떨어진 사람에게 유일한 치료약은 애인이 생기는 것이다.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는 금방 자긍심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자신이 충분히 소중하고 매력적인 존재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타인이 나를 사랑한다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겠는가. - P46

-경탄(admiratio)이란 어떤 사물에 대한 관념으로, 이 특수한 관념은 다른관념과는 아무런 연결도 갖지 않기 때문에 정신은 그 관념 안에서 확고하게 머문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다른 관념과 아무런 연결도 갖지 않는 특수한 관념,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다른 것과 비교 불가능한 관념을 말한다. 지금까지 실물로 본 적이 없는 거대한 폭포 앞에 서는 순간, 우리는 입만 바보처럼 벌리고 경탄하게 된다.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풍경이기 때문이다. 칸트라는 철학자가 말한 ‘숭고‘의 감정이 바로 경탄의 감정에 다름 아니다.  - P51

맑은 호수에 떨어진 돌멩이는 파문을 만들고, 그 파문은 퍼져 갈수록 더 커지게 되는 법이다. "슬픔의 둥근 원, 원들"이라고하는, 더 깊어지고 높아지는 슬픔의 파문 속에서 넬은 너무나 뒤늦게, 자신이 진짜 아끼던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자각하게 된다. 결국 주드라는 남자를 놓고 경쟁이 벌어졌던 한 편의 비극은 서로를 갈망하는 두 흑인 여성 사이의 애정 때문이었던 셈이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주드가 전혀 아니었던 셈이다. 주드는 단지 넬과 술라라는 두 꼬맹이 사이에 놓여 있는 근사한 장난감에 지나지않았던 것이다. 스피노자는 경쟁심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던 적이있다.

경쟁심(aemulatio)이란 타인이 어떤 사물에 대해 욕망을 가진다고 우리가생각할 때, 우리 내면에 생기는 동일한 사물에 대한 욕망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그렇지만 여기서의 타인은 단순한 타인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충분히 좋아하는 타인일 수밖에 없다. 자신이 혐오하는 사람이 욕망하는 대상을 똑같이 욕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어쩌면 이것은 사랑에 빠져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것 아닌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가 욕망하는 것을 갖추려고 노력할 것이다.  - P61

야심(ambitio)이란 모든 감정을 키우며 강화하는 욕망이다. 그러므로 이정서는 거의 정복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어떤 욕망에 묶여 있는 동안에는 필연적으로 야심에 동시에 묶이기 때문이다. 키케로는 이렇게 말했다. "가장 고상한 사람들도 명예욕에 지배된다. 특히 철학자들까지도명예를 경멸해야 한다고 쓴 책에 자신의 이름을 써 넣는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스피노자의 말대로 야심은 모든 감정을 키우며 강화하는 욕망이다. 자신의 정의가 이해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자각에서일까. 스피노자는 이어서 키케로가 말한 ‘명예욕‘을 언급하면서 야심에대해 부연 설명을 해 준다. 그러니까 야심이란 둘 사이의 관계 혹은 나와 사물이나 사건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나 욕망과는 다른 것이다. 이 양자의 관계 바깥에 있는 제3자로부터 관심과 존경을 받으려는 것이 바로 야심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여자가 어떤 남자와 사랑에 빠졌는데 동료들이 어떻게 그 남자를 만나게 되었냐며 관심을 보이거나 혹은 "그 남자 정말 멋지던데!"라고 말해 줄 때가 있다. 이런 찬탄과 부러움의 대상이 될 때, 그 남자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더 커지고 강화될 수있다. 이것이 바로 야심이다. 스피노자의 말대로 야심은 사랑만이아니라 모든 감정이나 욕망에도 그대로 작동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야심이 때로는 원래 들었던 감정이나 욕망을압도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냥 그 남자를 만나서 사랑의 감정이 싹텄지만, 어느 사이엔가 멋진 커플이라는 평가를 받으려는 야심이 조금씩 사랑의 감정을 잠식할 수 있다.  - P71

"인간이 어떤 욕망에 묶여 있는 동안에는 필연적으로 야심에 동시에 묶일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의 이 씁쓸한 당부를 읽는순간, 우리는 서글퍼지지 않을 수 없다. 아, 사랑에도 이미 야심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있구나! 그래서일까? 사랑에 빠지는 순간, 우리는 사랑의 행복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한다. 이것이 우리의 남루한 자화상 아닐까? 자신의 행복을 알려 모든 사람들로부터 주목받고 싶기 때문이다. 사실 대부분 사람들은 항상 행복한 상태에 있지 않으니, 행복한 사람은 그만큼 주목받기에 충분하다. 이 순간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제3자들을 더 의식하고 있는 것이 된다. 어떻게 이런상태를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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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이 못된 장난꾸러기였다는 말을 듣고 힘이 나면 아주 나쁜 건가요, 아주머니? 린드 아주머니는 그렇다고 하셨어요. 린드 아주머니는 누군가가 나쁜 짓을 했다는 소리를 들으면, 그게 아무리 어릴 적 얘기라도 늘 충격을 받으신대요. 한 번은 어떤 목사님이 어릴 때 친척 아주머니네 벽장에서 딸기 타르트를 훔쳤다고 고백하는 걸 듣고 다시는 그 목사님에게 존경심이 안 생기더래요. 그런데 전 생각이 달라요. 그걸 고백하신 건 정말 고귀한 행동이에요. 못된 짓을 하고 다니던 남자아이들이 자기들도 커서 목사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큰 용기를 얻겠어요. 제 생각은 그래요, 아주머니."
앤이 진지하게 말했다.
"지금 내 생각은 말이다. 앤, 설거지를 벌써 끝냈어야 한다는거다. 수다를 떨어대느라 평소보다 30분이 더 걸렸구나. 일부터 먼저 하고 말은 나중에 하는 법을 좀 배우렴." - P346

"음. 오늘 소중한 교훈을 새로 배웠어요. 초록 지붕 집에 온뒤로 실수를 많이 저질렀지만, 실수 하나하나가 큰 단점을 고치는 데 도움이 됐거든요. 자수정 브로치 사건 때는 남의 물건을 기웃거리는 버릇을 고쳤고요. ‘유령의 숲‘ 때는 상상력이 지나치면 안 된다는 걸 배웠어요. 진통제 케이크로 요리할 때 부주의했던 습관을 고칠 수 있었고, 머리를 염색한 뒤로는 제 허영심을 돌아보게 되었잖아요. 전 이제 머리나 코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요. 하긴 해도 거의 안 하는 편이죠. 오늘 실수 덕분에이제는 너무 낭만만 좇는 버릇을 고치게 됐어요. 에이번리에서낭만을 찾는 건 아무 소용없다는 결론을 내렸거든요 수백 년전 캐멀롯의 성안에서라면 쉬웠을지 몰라도, 요즘 세상에 낭만은 어울리지 않아요. 이런 점에서 곧 제가 크게 달라진 모습을보시게 될 거예요. 아주머니."
"제발 그랬으면 좋겠구나."
마릴라가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구석 자리에 말없이 앉아 있던 매슈는 마릴라가 자리를 뜬 뒤 앤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수줍은 듯 나지막이 속삭였다.
"너의 낭만을 다 버리진 마라, 앤, 낭만이 조금 있는 건 좋은거란다. 물론 너무 많으면 곤란하지. 하지만 조금은 남겨두렴. 조금은 말이다." - P372

"벨벳 양탄자야. 커튼은 실크고! 내가 꿈꾸던 것들이야, 다이애나. 그런데 아무래도 이런 것들 사이에 있으니까 별로 편하지가 않아. 여긴 없는 게 없고 전부 다 굉장히 멋져서 상상할 거리가 하나도 없어. 가난한 사람들이 한 가지 위안 삼을 수 있는게 그거거든. 상상할 거리가 훨씬 더 많다는 거." - P379

밤 11시에 거기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니 정말 근사했고 자유를 만끽하는 기분이었어요. 다이애나는 도시 생활이 자기한테 딱 맞대요. 배리 할머니가 저는 어떠냐고 물어보셨는데, 전 진지하게 생각을 해 봐야 말씀드릴 수 있을 거 같다고 대답했어요. 그래서 잠자려고 침대에 누워서 생각을 해 봤죠. 뭔가를 생각하기에 딱 좋은 때잖아요. 그러고는 결론을 내렸어요, 아주머니. 도시 생활은 제게 맞지 않고, 그래서 기쁘다는 거였어요. 가끔 밤11시에 멋진 식당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건 좋지만, 매일매일 을 생각하면 밤 11시에 동쪽 다락방에서 푹 자는 편이 더 좋아요. 여기서는 자는 동안에도 지붕 위에 별이 반짝이고 바람은개울을 건너 전나무 숲으로 불어온다는 걸 알잖아요. 다음 날아침 식사 자리에서 그렇게 말씀을 드리니 배리 할머니가 웃으셨어요. 배리 할머니는 제가 무슨 말만 하면 잘 웃으세요. 제가아주 진지한 얘기를 해도요. 그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아주머니. 제가 웃기려고 무슨 말을 한 게 아니니까요. 그래도 할머니는 정말 친절하신 분이고 우리를 아주 훌륭하게 대접해 주셨어요"
금요일이 되자 배리 씨가 아이들을 데리러 왔다. 조세핀 배리 할머니가 작별 인사를 했다.
"즐겁게 지냈는지 모르겠구나."
"정말 재밌었어요"
"넌 어땠니, 앤?"
"한순간 한순간이 모두 즐거웠어요."
앤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노부인의 목을 끌어안고 주름진 뺨에 입을 맞추었다. 다이애나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기에 앤의 거리낌 없는 행동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지만 조세핀 배리 할머니는 기뻐했고, 베란다에 서서 마차가 사라질 때까지 지켜봤다. - P383

그 사이 앤은 키도 훌쩍 자랐다. 마릴라는 어느 날 앤과 나란히 섰다가 앤의 키가 더 크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세상에, 앤, 언제 이렇게 컸니!"
마릴라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말끝에 한숨이 따라나왔다. 마릴라는 알 수 없는 서운함을 느꼈다. 마릴라에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준 어린아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진지한 눈빛을 한 키 큰 열다섯 살 소녀가 사려 깊은 조그마한 얼굴을 당당히 들고 서 있었다. 어린아이를 사랑한 만큼 눈앞의 소녀도 사랑했지만, 마릴라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슬픈 상실감이 밀려왔다. - P412

한밤중에 깨니 어둠과 정적만 가득했다. 하루 동안의 기억이앤에게 슬픈 파도처럼 밀려왔다. 전날 저녁 문 앞에서 헤어질때 얼굴을 들여다보며 웃어주던 매슈의 미소가 눈앞에 선했다. "우리 딸, 자랑스러운 내 딸"이라고 말하던 매슈의 음성이 귓가에 울렸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고, 앤은 가슴이 터지도록 울기시작했다. 마릴라가 그 소리를 듣고 앤을 달래 주려 올라왔다.
"자... 자...... 그렇게 울지 마라, 얘야. 그런다고 오라버니가 돌아오진 않아. 그렇게…… 그렇게 울면 안 돼. 그걸 알면서도 아까는 나도 참을 수가 없었지만 오라버닌 언제나 내게 정말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단다. 하느님은 잘 아시겠지."
"아, 그냥 울게 해 주세요, 아주머니. 우는 게 가슴 아픈 거보다 나아요. 잠시만 제 곁에서 절 안아 주세요. 다이애나와 함께 있을 순 없었어요. 다이애나는 착하고 다정다감한 친구지만…… 이건 그 애의 슬픔이 아닌걸요. 다이애나는 슬픔 속에 있지 않으니까 내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고 도와줄 수 없잖아요. 이건 아주머니와 저, 우리 두 사람의 슬픔이에요. 아, 아주머니, 아저씨 없이 어떻게 살죠?" - P479

집으로 돌아와 창가에 앉았던 그날 밤 이후로 슬픈 일들이 연이어서 얼마나 일어났는지! 그때만 해도 앤의 마음은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했고 미래는 장밋빛 약속으로 채워진 듯 보였다. 그날 이후로 몇 년은 지난 느낌이었다. 그러나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앤은 미소를 머금었고 마음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앤은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용기 있게 마주했고, 마음을 내려놓고 순순히 받아들이면 의무도 친구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 P488

퀸스에서 돌아와 창가에 앉았던 그날 밤 이후로 앤 앞에 놓인 미래의 지평선이 좁아졌다. 하지만 발 앞에 놓인 길이 좁아진다 해도, 앤은 그 길을 따라 잔잔한 행복의 꽃이 피어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진실한 노력과 훌륭한 포부와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있다는 기쁨이 앤에게 깃들었다. 그 무엇도 타고난 앤의 상상력과 꿈이 가득한 이상 세계를 빼앗을 수 없었다. 그리고 길에는 언제나 모퉁이가 있었다!
앤이 나직이 속삭였다.
"하느님 하늘에 계시니 세상은 평안하여라." - P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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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이성은 감각들의 증거를 날조하도록 만드는 원인이다.
감각들이 생성, 소멸, 변화를 보여 줄 때,
그것들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 프리드리히 니체

군복무 시절, 휴가만큼 달콤했던 것이 또 있었을까. 특히 첫 번째 휴가는 그야말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가는 것처럼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물론 귀대하던 날은 그 반대로 천길 벼랑으로 다시떨어지는 참담한 느낌이 들었던 순간으로 기억되지만 말이다. 친구들이나 부모님도 첫 휴가를 나온 나를 보면서 당혹감을 털어놓곤 했다. "군기가 바짝 들었는데?" 나는 너무나 각이 져 있고, 무언가에 주눅이 든 것처럼 경직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긴 첫 번째 휴가 기간 동안에도 기상 시간에 벌떡 일어나는 내 모습에 나 자신도 얼마나 쓴웃음을 지었는지. 휴가 동안 나는 친구들을 만나술을 마시고 수다를 떨려고 학교 근처로 가거나, 아니면 혼자 있을 때면 영화관에 가거나 종로에 있던 대형 서점에 들르곤 했다. 가급적 군대에서는 할 수 없었던 다른 경험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휴가 기간에 내가 했던 모든 것은 군대에서 억압할수밖에 없었던 나의 감정들을 되살려 내는 일들이었다. - P15

우리 시대의 삶은 과거보다 더 팍팍해졌다. 그만큼 우리에게서 행복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 삶의 조건이 악화된 만큼, 우리는자신의 감정을 억압하기 쉬우니까. 그렇지만 행복하게 산다는 것, 그것은 감정의 자연스럽고 자유스러운 분출이 가능하냐의 여부에달린 것 아닌가. 떨어지는 벚꽃을 보며 슬픔을, 쏟아지는 은하수에서 환희를, 친구의 행복에 기쁨을, 말러의 5번 교향곡 4악장에서 비애를, 멋진 사람을 만나서 사랑을, 시부모의 무례한 행동에 분노를, 주변 사람들의 평판에 치욕을, 번지점프에서 뛰어내리면서 불안을 이 모든 감정들의 분출로 우리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것을 느끼게 된다. 원하는 감정일 수도 있고, 결코 원하지 않던 감정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떤 감정이든지 간에 그것이 내 안에서 발생하고, 또 나 자신을 감정들의 고유한 색깔로 물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이다. 슬픔, 비애, 질투 등의 감정도 우리에게 소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 불쾌한 감정에 사로잡혀있기에, 내일을 더 희망차게 기다릴 수 있으니까. 장차 내게 행복한 감정이 생길 수도 있다는 설렘, 이것이 어쩌면 우리가 계속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아닐지. - P18

한번이라도 자신과 타인을 제대로 응시했다면, 누구나 인간이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사실 이성이 감정보다 먼저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심지어 이성은 감정을 통제하기 위해 발명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성이감정을 적대시한다면 언젠가 감정의 참혹한 복수 앞에서 자신의 무기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감정에 무조건적으로 적대적이었던 칸트(Immanuel Kant)의 이성과는 다른 종류의 이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감정의 쓰나미를 무모하게 막아서는 이성이 아니라, 감정을 긍정하고 지혜롭게 발휘하는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의 이성 말이다.
철학자들 중 거의 유일하게 스피노자만은 ‘이성의 윤리학‘
이 아니라 개개인의 감정에 주목한 ‘감정의 윤리학‘을 옹호했다. 스피노자가 피력했던 감정의 윤리학은 아주 단순한 사실, 즉 타자를 만날 때 우리는 기쁨과 슬픔 중 어느 하나의 감정에 사로잡힌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한다.

우리들은 정신이 큰 변화를 받아서 때로는 한층 큰 완전성으로, 때로는 한층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이 정념(passiones)은 우리에게 기쁨(laetitia)과 슬픔(tristitia)의 감정을 설명해 준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 P20

표면적으로 게라심은 여지주의 압력에 굴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여지는 결코 게라심에게 무무를 죽이라고 명령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게라심의행위는 소극적이나마 주체적인 결단, 다시 말해 여지주에 대한 소극적인 저항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다. 비록 적극적으로 무무를 지키지는 못했지만, 게라심은 소극적이나마 여지주가 무무를 죽일수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부분이 중요한 것 아닐까? 무무를 강물 속에 던지는 순간, 게라심은 농노로서 가지고 있던 비루함도 함께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철저하게 여지주의 말에 순종하는 존재였다면, 여지주의 손에서 무무를 빼앗아 자신의 손으로 무무의 생명을 앗으려는 결단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마침내 게라심은 자신을 지배하던 비루함을 극복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피노자도 말하지 않았던가.

비루함(abjectio)이란 슬픔 때문에 자기에 대해 정당한 것 이하로 느끼는것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슬픔‘은 어떤 타자가 나의 삶의 의지를 꺾으려고 할 때 발생하는 감정이다. 여지가 주인으로서의 삶을 부정할 때, 게라심이 느꼈던 것도 바로 이 슬픔이다. 이런 슬픔이 반복되면 누구나 비루함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게라심은 자신이 사랑하는 무무의 목숨을 스스로 거둔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스스로‘라는 말일 것이다. 게라심의 행위는 제한적이나마 나름대로 자신의 역량을 발휘했던 능동적인 결단이었으니까. 타티야나를 빼앗겼을 때 철저하게 순응적이기만 했던 모습과는 달리 게라심의 마음은 조금씩 비루함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비록 개일지라도 무무에 대한 애정이 그를 조금씩 주인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기적 아닐까? 사랑이 가져다주는기쁨의 감정은 우리에게 항상 조용히, 그렇지만 강력하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사랑의 기쁨을 지킬 수 있는 주인으로 살고있는가?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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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머니, 내일을 생각하면 기분 좋지 않나요? 내일은 아직아무 실수도 저지르지 않은 새로운 날이잖아요."
"내 보증하다. 넌 내일도 실수를 수두룩이 저지를 거다. 너처럼 실수를 쫓아다니며 저지르는 아이는 처음 본다, 앤."
앤이 풀이 죽어 말했다.
"맞아요. 저도 잘 알아요. 그래도 아주머니, 제게도 장점이하나 있는데, 알고 계세요? 전 같은 실수는 두 번 저지르지 않아요."
"끊임없이 새로운 실수를 저지르니 좋은 점이 있어도 그게그거구나"
"아, 모르세요, 아주머니? 한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실수에는 분명 한계가 있어요. 제가 그 한계에 다다르면 제 실수도 끝나는 거죠.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에 정말 위로가 돼요."
"글쎄, 저 케이크나 가져가서 돼지한테 주렴. 사람이 먹을 건못되더구나. 제리 부트라 해도 말이다." - P292

상황을 차분하게 받아들이라는 것은 앤에게 천성을 바꾸라는 말과 같았다. 하지만 앤이 그렇듯이 ‘순수한 영혼에 불처럼 뜨겁고 이슬처럼 맑은‘ 사람에게는 언제나 삶의 즐거움과 괴로움이 강렬하게 찾아왔다. 마릴라도 이것을 알기에 막연하지만 걱정이 되었다. 세상을 살면서 반복될 기쁜 일과 슬픈 일들이이 충동적인 아이에게 얼마나 힘겨울까, 똑같은 크기로 기쁨이다가온다 해도 과연 고통이 지나간 자리를 치유해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마릴라는 앤을 차분하고평온한 성품의 아이로 키우는 게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얕은 개울 위에서 일렁이는 햇빛을 마주하는 것만큼이나 낯설고 불가능한 일이었다. 서글프지만 마릴라 스스로도 인정했듯이 앤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앤은 간절한 희망이나 계획이 무산되면 ‘고통의 나락‘으로 거꾸러졌고, 반대로 기대가 이루어지면 아찔한 ‘환희의 왕국‘으로 날아올랐다. 마릴라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 아이를 얌전하고 반듯한 모범생으로 만들겠다던 생각을 거의 포기했다. 게다가 마릴라 자신조차 그렇게바뀐 앤을 지금보다 더 좋아할 것 같지 않았다. -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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