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왕자
높고 둥근 기둥 위, 도시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행복한 왕자의 조각상이 우뚝 서 있었다. 왕자의 몸은 순금으로 얇게 박이 입혀져 있었고, 눈은 반짝이는 사파이어였고, 검의 손잡이 끝에서는 크고 붉은 루비가 빛을 발했다. - P9
어느 날 밤 귀여운 제비 한 마리가 도시로 날아왔다. 친구들은 모두 여섯 주 전에 이집트로 가 버렸지만 그는 혼자 남았다. 몹시도 아름다운 갈대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초봄에 커다란 노란 나방을 따라 강 위를 날다 만난 갈대였는데, 그녀의 늘씬한 허리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겨 날개를 접고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대를 사랑해도 될까요?" 제비가 물었다. 제비는 핵심 이야기로 바로 들어가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갈대는 제비를 향해 낮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제비는 그녀 주위를 뱅뱅돌다가 날개를 강물에 살짝 스쳐 은빛 잔물결을 일으켰다. 이것이 제비의 사랑 법이었다. 제비의 사랑은 여름 내내 계속되었다. "웃기는 사랑일세." 다른 제비가 재잘거렸다. "그 갈대는 돈도 없고 친척만 잔뜩 있는데." 정말이지 강에는 갈대가 가득했다. 이윽고 가을이 오자 제비들은 다 날아가 버렸다. 친구들이 다 가 버리자 제비는 외로웠고 애인에게는 싫증까지났다. "도무지 대화라고는 몰라. 게다가 바람둥이인지도 모르겠어. 바람만 나타나면 애교를 떠니 말이야." 아닌 게 아니라 갈대는 바람만 불면 아주 우아하게 무릎과 허리를 굽혀 절을했다. "그뿐인가. 이 아가씨는 나다니기를 싫어해. 하지만 나는 여행을 좋아하고, 그래서 내 아내가 될 사람도 여행을 좋아해야 하는데." "나와 함께 가시렵니까?" 제비가 마침내 갈대에게 물었다. 그러나 갈대는 살랑살랑 고개를 저었다. 자기 집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를 가지고 놀았군요." 제비는 소리를 질렀다. "나는 떠나겠어요. 피라미드로 가겠어요. 잘 있어요!" 제비는 날아가 버렸다. - P10
"제비야, 제비야. 귀여운 제비야." 왕자가 말했다. "나와 함께 하룻밤만 더 있지 않으련?" "이집트에 기다리는 친구들이 있다니까요." 제비가 대답했다. "내일 내 친구들은 두 번째 폭포로 날아 올라갈 거예요. 그곳 애기부들 사이에는 하마들이 웅크리고 있죠. 커다란 화강암 보좌에는 멤논 신이 앉아 있고요. 멤논 신은 밤새도록 별을 지켜보다가 샛별이 반짝이면 딱 한 번 기쁨의 탄성을 내지르고 다시 입을 다물죠. 정오에는 노란 사자들이 물가로 내려와 물을 마셔요. 사자들 눈은 녹색 에메랄드 같아요. 그들은 폭포가 내는 소리보다 더 크게 울부짖죠." - P16
" 곧 이곳에는 차가운 눈이 내릴 거예요. 이집트에서는 녹색 야자나무 위로 햇볕이 따뜻하게 내리쬐죠. 악어들은 진흙에 엎드려 한가하게 주위를 둘러봐요. 내 친구들은 발벡의 신전에 둥지를 틀고 있어요. 분홍색과 흰색 비둘기들이 내 친구들을 지켜보며 자기들끼리 꾸꾸 소리 내고 있죠. 왕자님, 이제는 떠나야 해요. 하지만 왕자님을 잊지는 않을게요. 왕자님이 내주신 보석을 대신할 아름다운 보석 두 개를 내년 봄에 가져올게요. 내가 가져올 루비는 붉은 장미보다 더 붉을 거예요. 사파이어는 저 넓은 바다보다더 파랄 거예요." - P18
가엾은 제비는 점점 더 추위를 탔다. 그러나 왕자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왕자를 너무도 사랑했기 때문이다. 제비는 주인이 보지 않을 때 빵가게 문밖에 있는 부스러기를 쪼아 먹었고, 날개를 퍼덕여 조금이라도 몸의 온기를 유지해 보려 했다. 마침내 제비는 자신이 곧 죽을 것임을 알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 번 왕자의 어깨 위까지 날아갈 힘밖에 남지 않았다. "안녕히 계세요. 왕자님!" 제비가 중얼거렸다. "손에 키스를 해도 될까요?" "마침내 이집트로 간다니 다행이구나, 귀여운 제비야." 왕자가 말했다. "너는 여기 너무 오래 있었어. 하지만 꼭 내 입에 키스를 해 주렴. 나는 너를 사랑하거든." "내가 가는 곳은 이집트가 아니에요." 제비가 말했다. "나는 죽음의 집으로 가요. 죽음은 잠의 형제죠, 안 그런가요?" 제비는 행복한 왕자의 입에 키스를 하고 왕자의 발밑으로떨어져 죽었다. 그 순간 조각상 안에서 금이 가는 듯한 묘한 소리가 들렸다. 뭔가가 부서지는 것 같았다. 납으로 만든 심장이 둘로 쪼개진 것이다. 정말 무시무시한 된서리가 내린 모양이었다. - P20
윈더미어 부인은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상아 빛깔의 목에서는 기품이 드러났으며, 큰 눈은 물망초 빛깔이었고, 풍성한 곱슬머리는 황금 빛깔, 다시 말해 or pur, 그러니까 순금 빛깔이었다. 요즘 들어 황금 빛깔이라는 우아한 이름을 찬탈해 버린 옅은 지푸라기 색깔이 아니라, 햇살 속에 깃들어 있거나 묘한 호박 속에 감추어진 그런 황금 빛깔이었다. 이 머리카락 때문에 그녀의 얼굴은 성자의 후광에 둘러싸인 듯한 느낌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죄인 특유의 매력 또한 물씬 풍겼다. 윈더미어 부인은 심리학적으로 볼때 진귀한 연구 대상이었다. 그녀는 무분별함만큼 세상에 순결함과 흡사해 보이는 것은 없다는 중요한 진리를 일찌감치 터득했다. 그래서 일련의 무모한 탈선을 감행한 끝에 (그 가운데 반은 전혀 무해한 것이었지만) 명사(名士)의 모든 특권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그녀는 한 번 이상 남편을 바꾸었다. 사실 <디브렛 귀족 연감》은 그녀가 세 번 결혼한 공로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애인은 한 번도 바꾼 적이 없기 때문에 그녀는 꽤 오랫동안 추문으로 인한 구설수에 오르지 않았다. 윈더미어 부인은 이제 나이가 마흔이었고 자식은 없었으며 무절제한 쾌락 추구에 몰두했는데, 실은 그것이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기도 했다. - P24
이 얼마나 기막히고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내 손에, 자신은읽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은 판독할 수 있는 문자로 어떤 죄의무시무시한 비밀, 피처럼 붉은 범죄의 표식이 적혀 있단 말인가? 거기서 빠져나갈 방도가 없단 말인가? 보이지 않는 힘에조종당하는 체스의 말보다, 명예를 얻든 창피를 당하든 도기장 마음대로 만들어지는 그릇보다 하등 나을 게 없단 말인가? 그의 이성은 반항했다. 그럼에도 자신의 머리 위에 어떤 비극이 도사리고 있는 느낌, 갑자기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라는요구를 받은 듯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배우들은 운이 좋다. 비극에 나올지 희극에 나올지, 괴로워할지 즐거워할지, 웃을지 울지 선택할 수 있으니.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대부분의 경우 어울리지도 않는 역을 연기할 수밖에 없다. 길든스턴 같은 사람들이 햄릿을 연기하고, 햄릿 같은 사람들이 핼 왕자처럼 농담을 해야 한다." 세계는 무대다. 하지만 배역은 형편없다. - P36
아서 경은 자기도 모르게 이상한 감동을 받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새벽의 은은한 아름다움 속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애처로움이 느껴졌다. 아서 경은 아름다움으로 동이 트는 모든 날들, 폭풍우 속에 저무는 모든 날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이 시골뜨기들, 거칠지만 선량한 목소리에 태평한 행동거지를 보여 주는 이 시골뜨기들을 생각했다. 이들에게는 런던이 얼마나 다르게 보일까! 밤의 죄와 낮의 연기로부터 자유로운 런던, 창백한 유령 같은 도시, 무덤들로 이루어진 황량한 도시! 저 사람들은 이곳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 광채와 그 수치를, 불처럼 번지는 그 격한 기쁨과 그 무시무시한 굶주림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만들고 부수는 그 모든 것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을까? 어쩌면 그들에게 런던이란 과일을 내다 파는 시장, 기껏해야 몇 시간 머물다가 아직 거리가 고요할때 아직 어떤 집도 잠을 깨지 않았을 때 등지고 떠나는 시장에 불과할 것이다. 아서 경은 그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기쁨을 느꼈다. 징을 박은 무거운 구두를 신고 어색하게 걷는 이 사람들은 비록 천해 보이기는 했지만 아르카디아의 한부분을 거느리고 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들은 자연과 함께 살아 온 것 같았다. 자연이 그들에게 평화를 가르쳐 준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서 경이 뭘 부러워하는지 모르는 채 살아갔다. - P43
운명의 여신이 여전히 이 무서운 운을 저울에 올려 놓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어떤 식으로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무슨 일이 있어도 결혼은 미루어야 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분명한 결심이 섰다. 그녀를 열렬히 사랑했지만, 함께 앉아 있을 때면 손가락만 닿아도 몸의 온 신경이 짜릿한 기쁨으로 떨렸지만, 그래도 그는 자신의 의무가 무엇인지는 분명히 알았으며 살인을 저지르기 전에는 결혼할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했다. 살인만 하고 나면, 범죄를 저지르게 될 것이라는 공포 없이 시빌 머튼과 함께 제단 앞에 서서 자신의 삶을 그녀의 손에 맡길 수 있을 것이었다. 살인만 하고 나면 그녀가 자기 때문에 얼굴 붉힐 일도, 창피해서 고개를 숙일 일도 없을것이라고 자신하며 그녀를 품에 안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 우선 살인부터 해야 했다. 빠르면 빠를수록 둘 다에게 좋았다. 그만한 위치에 있는 남자들이라면 대개가 의무의 가파른 산비탈을 오르기보다는 앵초가 핀 길에서 빈둥거리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서 경은 양심적인 사람이었다. 쾌락을 원칙보다 앞세울 수는 없었다. 그의 사랑은 정열만으로 이루어진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시빌은 선하고 고상한 모든 것의 상징이었다. 아서 경은 잠시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역겨움을 느꼈지만 그런 감정은 곧 사라졌다. 그의 가슴은 그것이 죄가 아니라 희생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의 이성은 달리 다른 길이 없다고 일깨우고 있었다. - P46
아서 경은 2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블랙프라이어스 수도원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모든 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으로 보이는지! 생경한 꿈 같았다! 강 건너편의 집들은 어둠으로 지은 것같았다. 마치 은과 그림자가 세상을 다시 만들어 놓은 듯했다. 세인트폴 성당의 거대한 돔은 어스레한 하늘에 뜬 거품처럼아련해 보였다. 클레오파트라의 바늘로 다가가는데 한 남자가 난간에 몸을 기대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더 가까이 다가갔을 때 남자가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 가스등 불빛이 얼굴 전체를 환하게 비추었다. 수상가 포저스 씨였다! 푸짐한 살, 축 늘어진 얼굴, 금테 안경, 병약해 보이는 미소, 음탕해 보이는 입을 잘못 알아봤을리 없었다. 아서 경은 발을 멈추었다. 멋진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살금살금 포저스 씨 뒤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포저스 씨의 두 발을 붙잡아 템스 강에 내던졌다. 상스러운 욕설에 이어 묵직한 것이 첨벙 하며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잠잠해졌다. 아서 경은 불안한 표정으로 난간 너머를 보았다. 수상가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달빛에 반짝이는 물의 소용돌이를 따라 맴도는 실크해트 하나만 보였다. 잠시후 실크해트마저도 가라앉았다. 포저스 씨는 자취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셈이었다. 문득 살이 뒤룩뒤룩 찐 볼품없는 형체가 다리 옆의 층계로 헤엄쳐 나아가는 모습을 본 듯했다. 아서 경은 실패했다는 아득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것은 그림자에 불과했다. 달이 구름 뒤에서 얼굴을 내밀자 그림자도 사라져 버렸다. 마침내 아서 경은 운명의 명령을 이행한 셈이었다.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자마자 시빌의 이름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 P71
윈더미어 부인은 갑자기 안주인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행복해, 시발?" "그럼요, 행복하죠, 윈더미어 부인, 행복하지 않으세요?" "행복할 시간이 없어, 시빌, 나는 늘 가장 최근에 소개받은사람을 좋아해. 하지만 보통 상대를 알자마자 싫증을 느끼게되지." "윈더미어 부인의 사자들이 만족스럽지 않나요?" "아, 만족스럽지 않아! 사자는 한 시즌만 좋을 뿐이야. 갈기를 자르는 즉시 세상에서 가장 둔한 동물이 되고 말지. 게다가 잘해 주면 아주 못되게 굴어요. 그 지긋지긋한 포저스 씨 기억나? 그 사람은 정말 끔찍한 사기꾼이었어. 물론 나야 그런 데는 관심 없지만, 심지어는 그 사람이 나한테서 돈을 빌리고 싶어 할 때도 용서를 해 주었지. 하지만 나한테 구애하는 꼴은 견딜 수 없더라고. 정말이지 나는 그 사람 때문에 수상이 싫어졌어. 이제 내 관심은 텔레파시로 옮겨 갔어. 그게 훨씬 더 재미있더라고." "여기서는 수상에 대해 나쁘게 말씀하시면 안 돼요. 윈더미어 부인. 아서는 다른 건 몰라도 수상을 가지고 농담하는건 좋아하지 않아요. 수상에 대해서는 정말 진지한 태도를 보이죠." "설마 아서가 그걸 믿는다는 말은 아니겠지, 시빌?"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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