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여 에릭은 3년 동안(이곳에서 100해리 떨어진 곳에서는 코카인 밀반입에 통상 교수형이 선고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렇게 과한 형벌도 아니었다.) 공짜로 영어 실력을 갈고닦을 시간을 누리게 되었다. 책 한 권을 독파하는 고급 반용 영어 수업, 문학적이면서 고래학적이고 여행 심리학적인 어학 코스. 산만하게 이것저것 손대기보다는 하나에 집중하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다섯 달이 지나자 에릭의 실력은 이스마엘의 모험담을 거의 외워서 낭송할 수있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등장인물 중에서 에이허브의 목소리로 말하는 건, 특히나 에릭에게 짜릿한 기쁨을 선사하곤 했는데, 마치 편안한 옷을 입은 듯 에릭의 본성과 워낙 잘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다소 괴상하고 촌스럽긴 했지만, 이런 곳에서 이런 책이이런 인물의 손에 들어갔다는 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행운이었다. 여행 심리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가리켜 ‘동시성의 원리‘라고 명명하면서 세상의 이치를 보여 주는 증거로 여겼다. 의미의 실타래, 기이한 논리의 그물망이 이 아름다운 혼돈 속에서 사방으로펼쳐져 있다는 살아 있는 증거 말이다. 그리고 신을 믿는 자의 시각으로 보면 이것이야말로 신의 손가락에 새겨진 일그러진 지문의 흔적과 같은 것이라고 에릭은 생각했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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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이코패스 살인마들의 뇌에 관해 내가 아는 내용을 거론했다. 전사유전자를 초기 학대와 연결하는, 아브샬롬 카스피의 연구결과도 언급했다. 그리고 세 다리 의자 이론이 위험한 사이코패시 행동의 토대가 될수도 있다고 말했다.
나는 세대를 초월하는 폭력의 메커니즘을 제안했다. 세 세대 이상의 아이들이 사회적 폭력을 경험하는 문화에서는 폭력의 비율이 증가해 호전적인 전사 문화가 발생한다는 논리였다. 내가추측한 논리는 다음과 같다. 폭력이 만성적인 사회에서는 소녀들이 기왕이면 자신을 가장 잘 보호해줄 남자들과 어울릴 테고, 그러다 아마도 짝을 지을 테다. 대상은 십중팔구 공격성과 관련이 높은유전자를 가진 소년들일 것이다. 그렇게 두어 세대가 지나면 공격성 관련 유전자가 집중되기 시작하고, 결국 서너 세대 뒤에는 사회안에서 유독 공격적인 하위집단이 나타날 것이다. 그렇다면 설사정치적·종교적·문화적·경제적·사회적 원인들이 갑자기 사라진다고 해도, 공격성 관련 유전자가 유달리 집중된 사람들의 공격적문화는 몇 세기 동안 지속될 수도 있다. 발표에서는 거명하지 않았지만, 그러한 지역으로는 가자. 다르푸르, 요르단강 서안지구의 일부, 과테말라와 콜롬비아의 여러 지역, 미국 도시들의 몇몇 동네가 예상된다. - P147

하지만 프로그램에 필요한 데이터는 얻었다. 내가 통역을 써서각 부족민들을 면담하는 동안, 제임스는 나중에 유전자 검사를 하기 위해 유리병에 부족민들의 타액을 모아 얼음 위에다 얹었다. 유목민들은 네 세대만 거슬러 올라가도 기억하는 게 없는 사람들이라 우리는 그들의 전사유전자 보유율이 낮으며 그들의 평화로운 사회에서는 전사유전자가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가정했다. 백인들은 X염색체 약 30퍼센트에 고위험 MAOA 대립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아프리카인과 중국인, 마오리족은 비율이 훨씬 더 높다. 이러한 인종적 차이는 계속 논란이 되어왔는데 모로코의 유목민 부족들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었다. 그런데 만일 배두인족과 같은 아랍인의 전사유전자 비율이 더 높은 것으로 드러나면 어쩌지? 우리는 두 시험군 모두에서 30퍼센트보다 낮을 것으로 예측했는데.
우리 생각은 틀렸다. 그 비율이 약 30퍼센트로, 유럽인과 북아메리카인만큼 높았던 것이다. 결과대로라면 환경은 내 예상보다더 큰 역할을 할지도 몰랐다. 사막의 가혹한 조건에서는 생존을 위해 협력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폭력적이면 추방될 수도 있을 테고, 그러면 혼자가 되어 죽을지도 모른다. 그런 만큼 이 경우 사람들의 공격성을 제한하고 있는 건 유전이 아니라 문화였다. 본성이아닌 양육 말이다. 이건 DNA가 우리 행동의 80퍼센트를 설명한다는 나의 믿음에 가해진 또 하나의 작은 일격이었다. - P156

사실 나는 ‘사랑에 빠졌다‘라고 말하지만, 다이엔에게 완전히 감정적으로 연결되었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와 다이앤 사이에 유대가 생겨난 이유 중 하나는 내가 공감을 통해 그녀와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다이앤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매혹적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우리에게는 공통의 목표와 가치(가족, 자유의지론, 불가지론)가 있어서 동지애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나에게 언제나 외계인처럼 느껴졌다. 다행히도 나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고도 남았다.
1967년부터 1968년 무렵, 나의 사고와 행동이 변하기 시작했다. 공격성이 눈에 띄게 높아졌고, 풋볼 경기장에서 사람들이 다칠까봐 노심초사하지도 않았다. 알파인 스키 경주를 하면서도 최대한 속도를 빠르게 하는 데만 집중했다. 나는 온화함을 잃었고, 학문적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마치 나의 공격성 스위치가 켜진 듯했다. 교회는 더 이상 다니지 않았고, 도덕성 또한 사라졌다. 허풍의 수준도 날로 높아졌다. - P178

직업적 성과가 오르락내리락하고 몸무게도 미친 듯이 변한다는사실을 깨달은 뒤, 나는 테이프로 이어 붙인 그래프용지 여러 장에이 리듬을 그려보기로 작정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논문 발표 수연구비 액수 등을 기초로 직업적·창의적 산출량과 몸무게의 관계를 도표로 만들고 나니, 그 상관관계가 확실했다. 내 몸무게가 꼭짓점을 찍었을 때마다, 그러니까 몸무게가 대여섯 차례 130~135킬로그램에 육박했을 때마다 나의 직업적·창의적 산출량 또한 절정이었다. 그러다가 살이 다 빠져서 85~95킬로그램으로 돌아가면,
생산성도 0으로 떨어져 그 상태가 1~2년 지속되곤 했다.
내가 많이 먹고 담배 피우고 놀수록 그리고 운동을 덜 할수록, 모든 분야에서 성과가 좋았다. 다른 사실도 눈에 띄었다. 내 몸무게가 최고의 눈금을 찍을 때, 가까운 사람들과 소통하는 능력도 나아지는 듯했다. 몸무게가 최고점에 다가가는 동안에는 사람들, 특히 가족들과의 유대감도 커지는 듯했다. 어떤 식으로든 이 긍정적특성, 지적·창의적 성과와 유대감은 연결된 듯 보였다. 그리고 때때로 담배 때문에 살이 빠졌을 때엔 생산성이 떨어지고 어떤 종류의 공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정기적으로 섹시한 파티 보이가 되었지만, 동시에 얼간이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때의 나는 나의 어떤 행동이 남들의 감정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아니 물리적으로 해칠지 모른다는 걱정조차 전혀 하지 않았다.
••••••
몸무게의 변화와 행동의 변화가 왜 연결되는지 결코 알아내지못했지만, 나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추측했다. 혹시 세로토닌과 도파민이 그리고 어쩌면 엔도르핀과 테스토스테론도 내 변연계 안에서 비정상적이지만 주기적으로 활동하는 건 아닐까? 이들 신경전달물질, 조절인자, 호르몬이 모여들어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측두엽과 그에 연관된 변연계, 곧 감정의 뇌가 특히 의심스러웠다. 수면 리듬을 포함해 세로토닌이 조절하는 나의 일일 리듬들이 바뀌면서 이 거센 요동에 연료를 공급한다고 짐작할 수 있었지만, 이는 추측에 불과했다. - P184

공감은 여러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첫 번째로 공감을 동정과대비시킬 수 있다. 이때 공감이란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는, 다시 말해 그가 경험하는 감정을 당신도 경험하듯 상상하는 능력이라고 여겨진다. 반면에 동정이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하는 욕구에 가깝지, 실제로 상대의 감정을 그대로 느끼는 것은 아니다. 공감은 일반적으로 타인에 대한 감정 반응도를 가리킨다. 동정은 지진이나 홍수 피해자들의 곤경을 전해 들은 사람이 자신은 그런 피해를 실제로 경험한 적이 없는데도 시간을 내어 피해자들을 돕거나 구호자금을 기부하게 하는 감정이다. 이는 남을 도우려는 사람은 피해자들에게 공감은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반드시 공감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반대로 공감하는 사람 중에는 자기가 남들의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을 감지하면서도 남을 돕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UCLA 마르코 야코보니 Marco lacoboni가 진행한 생리학 연구들은 사람들의 관계 및 영향에대해 큰 시사점을 준다. - P186

거울뉴런계는 야코보니의 발견을 근거로 가정되는 뇌 회로다. 남이 뭔가를 하는 모습을 한 번만 지켜보면 즉시 자기도 같은 행동을 할 수 있는 영장류, 특히 인간의 능력은 전두엽과 두정피질의영역에 있는 이 뉴런들 사이에 형성된 회로를 바탕으로 한다고 여겨진다.
예컨대 엄마가 수건을 개는 모습을 지켜본 아이가 바로 수건을개려고 시도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거울뉴런계의 존재는 도움이 된다. 아이는 엄마를 지켜보는 데 사용하는 감각운동계 sensorymutor system와 똑같은 세포군을 써서 그 과제를 수행하기 때문이다. - P187

우리가 공감이라 부르는 것에 이렇게 많은 뇌 영역과 유전자가 연관됨을 알면, 공감이라는 말의 의미가 그토록 애매했던 게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닐 성싶다. 우리는 대개 공감의 부재를 사이코패시와 연관 짓는다. 사이코패스는 사람들을 냉담하게, 거의 무감각하게 다루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사이코패스는 어떤 대상이나 사람에 애정을 갖고 있다. 사이코패스 살인마조차도 자신의 부모와 형제를 사랑할 수 있다. 영화 <양들의 침묵>에 나오는 버펄로 빌을 생각해보라. 그는 죄 없는 여자들을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죽이지만, 자신의 푸들이 위험에 빠지자 눈에 띄게 초조해한다. 하지만 바로 그런 사이코패스들이 나머지 사회 전부를 증오하며 폭력적으로든 비폭력적으로든 복수에 나설 수 있다.
자신의 아버지가 주식투자에 가산을 모두 탕진했다면, 사이코패스는 금융기관에 분노를 돌림으로써 세상에 가혹하게 복수할것이다. 사이코패시 테러리스트나 독재자는 자신의 가족, 종족, 국가, 인종, 종교에 대한 공격을 지각하면 그에 대해 복수하려 들 것이다. 가장 폭력적인 테러리스트, 외톨이 살인자, 독재자는 자신의 집단에게는 공감하지만 타인의 삶과 안녕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 P193

공감의 유형은 이처럼 개인 대 집단이라는 틀로 나눠볼 수도 있지만(이장 앞에서 이야기한 공감대 동정이라는 이분법과도 연관된다). 다른 방식으로 구분해볼 수도 있다. 바로 감정적 공감과 ‘마음이론‘으로 알려져 있는 인지적 공감을 구분하는 것이다. 마음이론은 아동기 전반에 생겨나서 성인기까지 점차 발달하며, 아이들이 자신에게 욕구와 의도와 믿음 같은 정신 상태가 있음을 그리고남들에게도 비슷한 심리가 있음을 깨닫는 주요한 발달적 이행 단계다. 자폐스펙트럼장애를 앓는 사람은 정상적인 마음이론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경계선인격장애 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 와 같은일부 인격장애와 특정한 형태의 양극성장애가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반면에 사이코패시, 자기애성인격장애, 특정한유형의 조현병이 있는 사람들은 인지적 공감은 가능하되 감정적공감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 두 유형의 공감 상실은 전전두피질의아래쪽, 즉 복측 절반 중에서도 서로 다른 부분의 기능부전과 연관된다. - P194

나는 또 상대의 신뢰를 얻으려 거짓말을 하는 걸로도 유명했다. 거짓말은 게임을 나한테 유리하게 이끄는 내 페르소나의 일부이자, 인생이 따분하지 않게끔 삶에 대처하는 한 방법에 불과하다. 내가 하는 거짓말은 대부분 정보를 빠뜨리는 것일 뿐, 없는 정보를보태는 건 아니다. 이를테면 누가 나에게 직업을 물을 때 나는 한때 바텐더 겸 트럭 운전사였지만 지금은 반쯤 은퇴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엄밀하게 따지면 사실이지만 그 목적은 단지 상대에게 트럭 운전사치고는 똑똑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일 수 있다.
이는 일부 사이코패스들에게 해당되는 얘기지만, 그들은 모두다르다. 나쁜 가정에서 태어난 사이코패스가 상식을 뛰어넘는 일을 저지르는 이유는 아버지가 그를 두들겨 패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이는 무감각해진다. 그렇게 성장한 사이코패스를 자극하려면 많은 게 필요하다. 마약 중독자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점점 더자극적인 행동을 해야 쾌감을 얻고 점점 더 극단적인 경험을 해야뭐라도 느낀다. 이는 연애를 통해 긍정적으로 표출될 수도 있지만, 그가 학대를 당했다면 반사회적 행동으로 표출될 수도 있다. 성적학대로 성과 폭력에 관련된 뇌의 배선이 잘못된 사람은 강간을 저지를 수도 있다. 이 부분은 연구가 잘 이루어져 있지 않다.
내가 사람들을 조종하는 것은 대개 쾌락과 관계 있다. 나는 언제나 짜릿함이나 즐거운 시간을 추구하고, 약간의 쾌감을 얻기 위해남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걸로 유명했다. - P200

나 자신을 돌아보면, 이런 성향은 나의 10대 후반과 20대 전반에 잘 들어맞는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자유의지론과 불가지론, 무신론을 정치적·종교적으로 신봉하기 시작했다. 나는 한 아이를구하는 데 우리가 가진 돈을 동전 한 닢까지 다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한 아이만 애지중지하면 결국 인류는 파괴될 것이다. 또 누굴 애지중지할지는 누가 판결하는가? 나는 먼 지평선이 백년, 천년, 만년 뒤에 펼쳐질 상황을 본다. 한 사람이 사회를 위해 내일 거꾸러진다면, 그건 정말 유감이지만 나는 괘념치않는다. 나는 어떤 아이가 내 눈앞에서 굶어 죽게 내버려두지는않겠지만(나는 괴물은 아니다), 내가 정부를 운영한다면 모든 복지제도를 도려낼 것이다. 헌법의 기본 원리(공정성, 사유재산, 기타 등등)를 철저하게 적용한다면 어떤 사람은 죽을 것임을 알고있지만, 나는 괴롭지 않다. 그 체제가 약하거나 게으른 개인들을솎아낸대도, 난 상관없다. 나는 비생산적이거나 무책임한 행동을부추기고 싶지 않다. 그런 행동은 사회를 죽이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난 한 사람이나 한 집단보다 종種에 대해 더 많이 공감한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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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발달 과정에서 환경의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싶지는않다. 아이들은 가르치지 않아도 자기 힘으로 많은 걸 배운다. 웃기, 걷기, 말하기도 그러하고, 성격처럼 더 복잡한 것도 알아서 발달한다. 지독한 학대나 치명적인 유전자 결함만 없으면, 아이들은 무사히 성장할 것이다. 교육적 음악사업과 게임 사업의 규모가 10억달러에 달하고, 아이들의 발달 과정을 제어하겠다고 아이들의 식단을 관리하는 부모도 있지만, 그런 게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는 드물거나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들을 애지중지 키우며 스트레스를 아예 없애주려는 것은 무의미하다. 아이를 키운 부모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어떤 아이도 부모가 바라는 대로는 되지 않으며 아이들이 자라서 어떤 유형의 성인이 될지를 어른들은 거의 좌우할 수 없다. 나와 함께 일하는 소아신경학자들도 "아이는 정해진대로 만들어진다"라고 말하곤 했다. 당신이 아이를 완전히 망쳐놓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 P141

 그날 아침 내 마음의 눈에는 뒤뜰 정원의 다리 셋달린 의자가 사이코패시의 세 가지 요소와 그것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새로운 사이코패시 이론의 토대가 되었다.
세 개의 다리란, 안와전두피질과 편도체를 포함한 전측두엽의유별난 저기능, 전사유전자로 대표되는 고위험 변이 유전자 여러개, 어린 시절 초기의 감정적·신체적·성적 학대였다.
나에게는 ‘유년 시절의 학대‘라는 다리가 없었다. 그래서 몇 년에 걸쳐 사이코패스에 관해 강연을 하면서도 나는 계속 사이코패스에 속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하지만 동료들은 가끔씩 나의 안정된(또는 내가 그렇다고 믿은) 행동을 놓고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동료들이 단순히 내가 한 어떤 짓에 분개했거나 나의 성공을 질투해서 과잉반응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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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박물관의 카페테리아에서 만난 남자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원본과 마주했을 때만큼 만족스러운 순간은 없다고. 세상에 복사본이 많아질수록 원본의 위력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으며, 때로 그 위력은 거룩한 성유물에 버금간다고도 했다. 그에 따르면, 세상에 하나뿐인 것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며, 그로 인해 늘 파손에 대한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앞에 여행객 한 무리가 둘러서서 경건한 태도로 그림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따금 팽팽한 긴장의 순간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어디선가 찰칵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지곤 했다. 마치 디지털 언어로 내뱉는 새로운 ‘아멘‘처럼. - P94

하지만 기차 여행을 선택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허락된 밤 시간 전부를 송두리째바쳐야 한다. 조상들의 오랜 여행 습관처럼 다리와 고가도로, 터널을 일일이 통과하며 육로를 횡단해야 한다. 무엇 하나 빠뜨리거나 건너뛰어선 안 된다. 1밀리미터도 빠짐없이 바퀴로 밟아 가면서 순간과 접선하는 동안, 반복되지 않는 배열이 끝없이 펼쳐진다. 바퀴와 철로, 시간과 공간, 온 우주에서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배열이 계속해서 전개된다. - P97

뭔가를 글로 묘사한다는 건, 그것을 사용하는 것과 비슷해서 결국엔 그것을 망가뜨리게 된다. 색깔이 엷어지고 모서리는 닳아서, 글로 적어 놓은 것들은 결국 희미해지고 사라져 버린다. 특히 장소에 관한 글이 그렇다. 여행 안내서들은 침략이나 전염병처럼 지구의 상당 부분을 파괴하고 막대한 손실을 초래했다. 다양한언어로 수백만 부를 찍으면서 해당 장소를 속박하고 약화시키고 그 윤곽을 지워 버렸다.
나 또한 한때, 젊은 날의 무지함 탓에 어떤 장소들을 묘사해 보겠다는 시도를 한 적이 있다. 하지만 훗날 내가 써 놓은 글을 다시 읽어 보았을 때,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그 강렬했던 존재감을 되살리려 애쓰고 그 글의 소곤거림에 귀를 기울여 보았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진실은 가혹했다. 뭔가를 글로 쓴다는 건, 그것을 파괴한다는 의미였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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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한 건 MAOA 대립유전자와 폭력성 사이의 연결고리뿐이었다. 아직까지 유전자와 사이코패시 사이의 진정한 연결고리는전혀 밝혀지지 않았다. 나는 사례연구를 전부 살펴보았다. 독재자를 포함해 모든 사이코패스가 어릴 때부터 ‘정신병자‘라는 소리를들었으며, 하나같이 학대를 받았고, 생물학적 부모를 한쪽 이상 잃은 경우가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릴 때 학대를 받았다는 사실을 부인한 예도 있었지만, 나중에 알고 보면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너무 창피했거나 가족의 일원인 가해자를 감싸기 위한 것이었다.
수감된 사이코패스 중 유아기에 신체적·감정적 학대나 성적 학대를 당한 사람이 많다는 사실은 여러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청소년 사이코패스 범죄자 35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는 70퍼센트가 어린 시절 내내 심각한 학대를 받았다고 답했다. 어린 시절에 대한 믿을 만한 기억이 기껏해야 서너 살 이후에야 시작된다고보면, 이 결과는 더 높은 비율의 성인 사이코패스 범죄자들이 자신이 기억하는 것보다 일찍부터 상당한 학대를 경험한다는 의미를함축했다. 그렇다면 이들 중 90퍼센트 이상이 생애 초기의 한 시점에 학대를 당했을 수도 있다. 나는 여기에다 가해자를 감싸는 사이코패스들을 더하면, 사이코패스 중 어린 시절에 학대를 받은 비율은 거의 99퍼센트에 육박할 수도 있다고 추론했다.
내가 범죄자가 아닌 이유를 생각하기 시작한 게 바로 이때다. 살인자들은 학대를 당한 적이 있었고 나는 그런 적이 없었다. 우리를 만드는 건 양육이 아니라 본성이라는 나의 신념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떻게 키우느냐‘가 결국은 범죄자를 만들어내는 데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 P125

후성유전학적 꼬리표는 환경적 스트레스 때문에 생기는 많은 유전부호 변경 가운데 하나다. 또 이것이 바로 본성과 양육의 상호작용 바탕에 있는 핵심 기제 중 하나다.
후성유전학적 상호작용이 대사, 암 그리고 전염병 발병에 어떤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최근에 수많은 연구가 있었다. 하지만 후성유전학적 상호작용은 조현병부터 사이코패시에 이르는 정신장애를 이해하는 열쇠이기도 하다. 내가 진로를 선택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영화 <찰리>에서 내가 좋아하는 장면은 주인공이 자신의 교사 겸 치료사의 칠판으로 가서 ‘that that is is that that is not is not is that it it is‘라고 쓰고는 그녀에게 이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장면이다. 그녀가 해독하지 못하자, 주인공은 칠판으로 가서 구두점을 찍는다. That that is, is. That that is not, is not. Is that it? Itis.‘ (있는 건 있어. 없는 건 없고, 이제 됐어? 그래.)
이 수수께끼는 후성유전체 epigenome 가 무엇인지 훌륭하게 비유해준다. 이 비유에서 원래의 DNA 염기쌍 부호는 ‘thatthatisisthatthatisnotisnotisthatititis ‘이고, 서열을 배열하는 방식은 부호가일련의 단어로 전사되게 지시하지만 딱히 문장이 되게끔 지시하는 건 아니다. 보통 DNA에서 RNA로 전사된 메시지는 단백질로, 여기서는 빈틈없고 상식적인 문장 ‘That that is, is. That thatis not, is not. Is that it? It is‘로 번역될 것이다. 하지만 환경적 스트레스 요인들이 원래 유전된 DNA의 일부에 후성유전학적 꼬리표가 첨가되도록 유도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구두점, 띄어쓰기, 일반적 문형을 바꾸어 약간 다른 의미를 생산할 수 있다. "That that is, is. That that is not, is not. Is that it? It is?‘ (있는 건 있어. 없는 건 없고, 이제 됐어? 그래?) 단어들도 같고, 순서도 같지만 마지막에 첨가된 물음표가 메시지의 취지를 바꿔놓는다. 문장이 의도한 ‘유전적 의미에 가해진 이 약간의 ‘후성유전학적 변화는 돌연변이와 다르다. 돌연변이에서는 글자가 하나 이상 추가되거나 기존 글자가 삭제됨으로써 문장의 실제 철자가 바뀐다. 물론 그러한 변화는 문장의 기능을 근본적으로 변질시킬 수 있어서, 문장은이제 이처럼 될 것이다. That that is, is. That that is not, is snot, Is that it? It is. (있는 건 있어. 없는 건 콧물이고. 그게 다야? 네.)다시 말하면 유전체는 당신이 태어날 때 물려받은 책이고, 후성유전체는 당신이 그 책을 읽는 방식이다. - P128

후성유전체가 작동하는 가장 흔한 모습은 환경적 스트레스 요인이 히스톤이라 불리는 단백질 실패에 감겨 있는 DNA 실들을 감쌀 때 볼 수 있다. 스트레스 요인은 메틸 methyl과 아세틸 acetyl 이라는아주 작은 작용기 functional group들을 유전자에 덧붙일 수도 있고 유전자에서 떼어낼 수도 있다. 이 작용기들은 DNA 가닥에 들러붙는작은 원자단atomic group 일 뿐이지만, 그러한 변경은 어떤 유전자가 읽힘으로써 맡은 일을 수행하는 능력을 멈추거나 늦추거나 재촉할 수 있다. 한 유전자의 행동이 바뀌면 만들어지는 단백질의 양이 바뀌므로 뇌 회로 안의 신경전달물질 균형이 바뀌고 결국 사고, 감정, 행동이 바뀐다. 사고, 감정, 행동이 바뀌는 것은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작용을 이해하는 데서 주요 초점이고 본성-양육 문제를 이해하는 열쇠다. 메틸기와 아세틸기를 덧붙이는 주된 환경적 자극중 하나가 스트레스고, 이러한 자극에는 학대, 출생 전 산모의 불안, 마약, 일부 식품이 원인이 된다. 스트레스로 인해 호르몬의 일종인 코르티솔 cortisol이 방출되면, 코르티솔이 메틸기와 아세틸기를 주는 분자로부터 메틸기와 아세틸기를 받아서 DNA로 옮긴다.
이러한 첨가가 사이코패시의 병인을 이해하는 열쇠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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