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네 말로 인해 낡은 생각이 깨지고 나은 생각이 완성되는 찰나의 기쁨을 느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의 문제에 힌트를 얻은 거지. 콘크리트처럼 굳어가는 사람이아니라 남의 말이 스며드는 고운 흙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려면 질색하는 일도 한번 시도해보고 안 읽히는 책도읽고, 파도처럼 부단히 움직여야겠지. 버지니아 울프가 딱 그랬다. [파도]라는 독백과 이미지로 된 형식의 소설에 도전하면서 "완전히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런 작품을 쓰는 나 자신을 매우 존경한다"(해설, 313면)고 일기에 적었대. 자기 쇄신의 실행력이 존경스럽지. "포도송이에서 포도를 떼어내듯이 떼어내어 ‘받아요. 이것이 나의 인생이오‘라고 말"(253면)하는 몽상적이고 아름다운 문장이 있는가 하면, 또 "인생은 즐겁고 좋은 것이다. 월요일 다음에는 화요일이 오고 그다음에는 수요일이 온다"(286면)고 무심하게 삶에 순응하는 책을 마저 읽다가, 그날 너와의 대화를 복기하며 나는 좋은 늙음을 꿈꾼다. - P104
점원의 인상은떠오르지 않았어요 사람이 눈앞에 있는데 사람의 눈을 보지 않고 음식에만 꽂혀 시선을 아래로 고정했어요. 상대의 눈을 보는 일은 존중의 짧은 의례이거늘. - P106
그럼 이제 와서 어쩌나요. 이 집요한 삶의 배반을 견딜 방법은 없는가. 예전에 어느 문학잡지를 보다가 중국계 미국인 작가 이윤 리Yiyun Li의 말이 너무 와닿아서 베껴놓은 적이있어요. 그가 그랬죠. "삶은 그저 삶일 뿐이지요. 늘 고난이 있습니다. 좋은 순간도 나쁜 순간도 있고, 저는 좋든 나쁘든 그 모든 순간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우리는 고통과 슬픔을 경험할 테니까요. 그것은 삶의 일부입니다. 하지만 친절은 우리가 베풀거나 베풀지 않겠다고 선택할 수 있어요. 타인툰 아니라 자신에게도 친절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자신에대한 친절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결국 친절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일 텐데, 선택이기 때문에 저는 친절에대해 쓰는 것이 좋습니다." 고난은 피할 수 없지만, 친절은 선택할 수 있다는 것. 희망적입니다. 게다가 친절은 글쓰기로 훈련할 수 있거든요. - P107
지금 생각하니까 삶의 하중을 받아서 신체가변형되고 있었던 거 같아. 건강검진표에는 나오지 않는 이상 징후들이겠지. 눈빛은 차분함을 잃고 말투는 드세지고 걸음은 쫓기는 사람처럼 허둥지둥. 그런데 더 슬픈 건 그걸 내가 인지하지 못한다는 거야. 하루하루는 똑같아 보여도10년 후에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 두려운 일이지. - P119
우린 슬픔에 무지한 종족입니다. 세월호 이전에도 슬픔은 허용되는 삶의 모드가 아니었죠. 슬퍼하는 사람은 약자로 분류되고, 약자는 구제의 대상이지 자기 목소리를 내는권리의 주체로 받아들여지지 않아요. 공적 발언의 장이 주어지지 않고, 슬픔은 각자 삭여야 할 사적 과제로 여겨집니다. 슬픔을 표현하는 말도, 슬픔에 공감하는 말도 공동체에흐르지 못하니까 슬픔에 관한 언어가 빈곤하죠. 슬픔에 관한 지혜가 모자랍니다. - P171
아이를 키우면서 엄마는 그 나이를 두번 산다. 나도 열일곱 무렵부터 시가 괜히 좋았다. 시집표지가 나달나달해지도록 읽고 노트에 정성스레 베껴 쓰곤했다. 슬픔, 기쁨, 사랑, 그리움 같은 단어가 만든 감정의 둘레에서 나는 마치 꽃그늘 아래 앉은 것처럼 더없이 안전하다 느꼈다. 아이는 왜 그시의 그 부분이 좋았을까. 집 곳곳에 책이 있지만 수레는 거의 책을 읽지 않는다. 나도 굳이 아이에게 권하지 않는다. 한때는 책 읽으면 똑똑해진다는 신앙에 얽매이는 엄마였는데, 똑똑한 게 자기답게사는 데 도움이 되는지 걸림돌이 되는지 언제부턴가 헷갈린다. 그리고 책이 아니더라도 사람은 자기만의 방식으로세상과 교감하며 느낄 것은 느끼고 배울 것은 배운다는 걸이젠 안다. 타인들의 삶을 관찰하고, 아이의 성장을 가까이지켜보며 자연스레 터득했다. - P209
"이야기를 바꾸는 일, 이름을 바꾸는 일, 새 이름이나 용어나 표현을 지어내고 퍼뜨리는 일은 세상을 바꾸려 할때 핵심적인 작업이다. (...) 백인 아이들은 그냥 ‘어울려 노는‘ 것이지만 흑인 아이들은 ‘어슬렁거리고‘ ‘슬금슬금 돌아다니는‘ 것이 된다. 언어는 지우고, 왜곡하고, 잘못된 방향을 가리키고, 거짓 미끼를 던지거나 주의를 흘뜨릴 수 있다."(9-12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이야기를 바꾸는 것이라니. 해볼 만하지 않나요. 우린 이야기를 공기처럼 마시며 삽니다. 그중엔질 나쁜 공기처럼 몸에 해로운 이야기가 있지요. J가 성장기 내내 남성적이라고 일컬어지는 덕목들, 가령 자신감 있어라, 활동적이어야 한다, 같은 것들의 강요에 거부감이 있었지만 또 아빠가 없어서 남자답지 못하다는 말은 듣기 싫었기에 혼란스러웠다고 했던 것처럼요. 솔닛은 세상의 이야기를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말하는 사람‘이 되라고 조언합니다. "여러분의 이야기는 세상을 둘러싼 그 물의 일부가 되어, 기존의 이야기들을 훼손하거나 강화할" (289면) 거라고요. 그러니까 부당함에 침묵하지 말자, 반박하고 저항하는 말들이 물처럼 넘치도록 하자는 뜻이겠죠. - P237
한 사람의 ‘능력‘이란 것은 타고난 재능이나 자질보다 가족으로부터 우수한 학업 기회가 꾸준하게 제공되느냐, 행운이 따르느냐 등 비능력적 요인에 의해 많은 것이 좌우됩니다. 그런 점에서 ""부모를 잘 만나지 못한 능력‘이 현수의능력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72면)고 말해도 무리가없게 됩니다. 저자는 말해요. "능력은 환경적·사회적으로구성되는 것이며 ‘온전히 개인에게 속한 능력‘이란 환상이다."(21)또 하나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왜 능력을 꼭 학력과 성적으로만 측정하는가? 즉, 능력을 도대체 누가 평가하느냐의 문제입니다. - P248
가장 낮은 자리에 있기에 제일 먼저타격을 입고 가장 약한 이들이 모여 있기에 사회 모순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 탁아소가 쉽게 폐쇄되는 사회에서 청년들이라고 안전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긴축은 사람들을 흩어지게, 고독하게, 그리고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다"(20면)며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쁠 것이 분명하다‘는 어두운 전망을 품는 젊은이를 양산했다"(67면)고 지적해요. ‘집도 절도 없다‘는 말을 그대도 들어보았을 거예요. 집과 절은 인간 생활을 떠받치는 두 중심 거점을 뜻하는 거 같아요.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집도 중요하지만 절이라는 출구가 없으면 집은 따뜻한 감옥일지도 몰라요. 의식주가 해결된다고 존엄이 보장되진 않으니까요. 저만 해도 사람답게살아갈 힘과 배움을 얻은 곳은 노조나 인문 공동체 같은 ‘절‘이었어요. 그대가 찾는 곳도 비빌 언덕이 되는 ‘절‘이겠고요. - P274
"사람은 누구나 깨진 꽃병이다. 이렇게 막고 저렇게막고 해봤자 깨진 걸 숨길 수 없다." 저는 연탄난로와 깨진꽃병의 마음이 있는 그곳이 천국이었구나 느끼면서 서울로향합니다. - P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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