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9시 45분. 나는 부엌에 서서 제일 좋아하는 저녁 식사 메뉴를 만드는 중이다. 밀플레이크, 뮤즐릭스 시리얼, 건포도를 섞은 이 맛있는 음식은 내게 위안이 되어준다. 목요일이니 15분 뒤에 드라마<ER>이 방영될 테고, 시청률 조사 기간인 5월 중순이나 나는 기대감에 젖어 있다. 그렇다. 새 에피소드가 방영되는 날이다. 기분은평온하다. 나는 찢어진 레깅스, 티셔츠, 목욕 가운을 입고 있다. 내개는 거실 소파에 흡족하게 (그리고 말없이) 웅크리고 앉아 있다. 전화 자동응답기에 메시지가 몇 통 와 있다고 불이 깜박이는데, 내가 일부러 받지 않은 전화들이고 내일이 되어야 응답할 생각이다. 이때 어떤 생각 하나가 떠오른다. 단순한 사실적 진술 하나가 완전한 문장의 형태로 머릿속에 떠오른다. 나는 그 말을 듣는다.
나는 명랑한 은둔자야.
이것은 정말 마술적이고 변혁적인 순간이다. 이것은 일종의 만화경 같은 변화랄까, 나 자신에 대한 기정사실들이 저절로 모습을바꾸더니 새로운 질서에 따라, 놀랍고 신선한 시각에 따라 재구성되어 내 내면이 삽시간에 재편되는 듯한 순간이다. 오래된 생각이 새로운 생각으로 바뀐다. 기존의 정의가 새로운 전개를, 새로운 분위기를, 새로운 의미를 취한다.
나는 명랑한 은둔자야. 이 말을 다시 들어보라. 산뜻하고 멋지게 들리지 않는가?  - P40

나는 작지만 세심하게 키워온 사교 생활을 즐기고있다. 한 줌의 소중한 친구들이 있고, 사랑하는 언니가 있다. 그들의 존재와 지지는 내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웬디는 조용한 삶과 공허한 삶을 잘 구별하지 못하고, 내 생활 양식이심란하다고 여긴다. 내가 주말 계획을 얼버무리면, 웬디는 마치 내가 48시간 동안 세상과 단절되어 슬프게 지낼 거라고 예상하는 듯이 은근히 불편해하는 표정을 떠올린다. 그래서 나는 웬디를 달래려고 가끔 없는 얘기를 지어낸다. 저녁 약속이 있다고 말하고, 영화를 볼 거라고 말하고, 여자친구와 쇼핑하러 갈 거라고 말한다.
그러면 웬디는 늘 한시름 놓았다는 반응을 보이는데, 꼭 엄마 같은그 태도가 나를 약간 내려다보는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아, 정말잘됐네!"
나는, 홀로 걸어가며 속으로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는 나는, ‘우리의 나라‘에서 살아가는 외톨이 은둔자다.
우리라는 단어, 이것은 꽤 무거운 단어다. - P44

내 경우, 가장 중요한 과제는 고독과 고립의 경계선을 잘 유지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 둘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사회적 기술은 근육과도 같아서 위축될 수 있고, 내가 경험한 바로도 육체적 건강을유지하는 것처럼 사람과의 접촉을 유지하려고 애쓸 필요가 있다. 타인과의 접촉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하지 않으면, 지극히 간단한 사회적 행동마저도 -누구를 만나서 커피를 마신다거나, 외식을 한다거나 엄청나고 무섭고 피곤한 일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프랑스까지 헤엄쳐서 가려고 시도하는 것 못지않게 버거운 일로 느껴진다. 고독은 종종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배경으로 두고즐길 때 가장 흡족하고 가장 유익하다. 적절한 균형을 지키지 못하면, 삶이 약간 비현실적인 것이 된다. TV 등장인물들을 현실의 사람들처럼 생각하게 되고, 집에 들어온 파리가 친구 삼을 만한 상대로 느껴지고, 남들은 더없이 일상적인 일로 생각하는 작은 사건들이(집에 손님이 온다거나, 추리닝 바지보다 더 점잖은 옷을 입어야 하는 상황이라거나) 기이하고 불가해한 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
그날 밤 부엌에서 켈로그 만찬을 준비하며 내 집의 단정함과조용함을 즐길 때, 그 시간이 고마운 선물이자 일종의 승리로 느껴졌다. 예전에 내가 애쓰며 괴로워했던 일들이 과거로 좀 더 멀리 물러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원래 숫기 없는 성격이다. 타인과의 소통을 늘 부담스럽게 느껴왔고, 앞으로도 아마 어느 정도는 계속 그럴 것이다. 따라서 나는 혼자 있는 걸 늘 대단히 편하게여겼지만, 그러면서도 그 상태를 만끽할 줄은 잘 몰랐다. 혼자 방에앉아 있으면서도 초조해지지 않는 것, 연애의 틀 밖에서도 안락과 위로와 인정을 얻을 수 있다고 느끼는 것, 내가 가진 자원만으로도-나라는 사람, 내가 하는 선택만으로도-고독의 어두운 복도를 끝까지 걸어서 밝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 이런 것은 잘하지 못했다.
나는 시리얼 그릇을 들고 거실로 가서 TV 앞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정말로 명랑하게. 이게 내 집이야. - P48

 꼭 우리가 서로 다른 사람이 되려고, 우리의 인생이 너무 긴밀하게 얽히는 것을 막으려고 애쓴 것처럼 느껴진다. 너는 네 영역을지켜, 나는 내 영역을 지킬 테니까. 꼭 서로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렇지만 우리가 서로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진 적은 한 번도없었다. 서로의 감정적 동향을 시야에서 완전히 놓쳐본 적도 없었다. 사실은 이것도 우리가 추는 춤의 일부다. 거리를 유지하되 상대가 필요할 때 응답하지 않는 일은 없어야 하고 서로를 잇는 끈을 아예 놓아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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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의 정연한 논리와 감동적인 진술은 그러나 군부정권의 하수인격인 판·검사들에게는 우이독경이 되었다. 그들은 이 같은 진술이언론에 보도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국민이 알 수 없으리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순간만 넘기면 책임을 면하고, 승진도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서성 판사는 김근태에게 국보법과 집시법 위반으로 징역 7년, 자격정지 6년을 선고했다. 판사는 "승진은 따놓은 당상이군", "창피한 줄 아시오"라는 방청석의 야유를 귓전에 흘리면서 총총 자리를 떴다.
판사의 유죄판결 이유 중에는 모리스 돕의 『자본주의의 과거와 현재』를 갖고 있었다는 것도 포함되었다. 이 책이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이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검찰이 내외문제연구소라는 관변단체의 김영학에게 이 책의 감정을 의뢰하고, 그의 감정서를 바탕으로 유죄판결을 내렸다는 점이다. 김영학은돕의 주저인 정치경제학과 자본주의』, 『자본주의 발전연구』 등의 책이름조차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20세기 후반기 대명천지 밝은세상에서, 돕의 저서를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로 국보법 위반으로 처벌되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었다. 모리스 돕은 영국의 경제학자로 이론경제학, 경제사, 사회주의 경제학, 후진국 문제 등 다방면에 걸친 저작을발표한 세계적 학자다. - P149

김근태는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 소식을 전해 듣고 옥중에서 단식을 결행했다. 곡기를 끊고 절규해도 메아리조차 없었지만, 도저히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였다. 신라의 옛 고도 외곽에 자리한 감옥은 공동묘지처럼 스산했다. 감시병들만 없으면 공동묘지 그대로였다. 3월 12일 그는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잘 잡히지 않는구려. 안개 너머에서 어른거리면서 초점이 모아지지 않는것이었소. 항의도 하거니와 내 마음을 모으기 위해 단식을 한 것이었소.
이 억울하고 불행한 죽음을 듣자마자 분노해 그런 것이기는 하지만.
사흘째부터는 꽤 고통스러웠소. 얼굴 표정도 아마 찌그러졌을 것이오. 건강이 안 좋고, 또 자신감까지 없고 보니 더욱 그랬을 것이오. 공포심이 슬그머니 자리를 잡더니 달걀귀신처럼 자꾸만 커지는 것이었소. 몸과 마음을 비우고, 그 젊은 죽음을 가슴에 받아들여 서로 교감하고자 했던 당초의도는 힘없이 밀려버리고 말았소.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소. 배고픈 고통과 공포, 부끄러운 생각 등의 혼란 속에서 점점 선명하게 부각되어온 것은, 날카롭게 찔러온 것은, 그는 죽었고 나는 살아 있다는 사실이었소. 이 염치없는 끈적끈적한 생각을 하면서 나는 죽지 않았구나라고 혼자 중얼거렸던 것 같소. - P170

위기에 몰린 전두환 정권에서는 계엄령 선포 등 비상조치설이 흘러나왔다. 실제로 전두환은 6월 18일을 전후하여 계엄을 검토한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 측이 여러 채널을 통해 군 병력 투입을 자제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계엄령 선포와 군 병력 투입을 막은 결정적인 요인은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국민항쟁이었다. 1979년 부마항쟁과 1980년 광주항쟁은 제한된 특정 지역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박정희와 전두환은 군 병력을 투입해 진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1980년 5월 70만 인구의 광주를 장악하지 못하고 계엄군이 한때 외각으로 밀려났던 사실에 비추어 보면 인구 1천만이 사는 서울 전역에서 벌어진 시위를 진압하자면 수도권의 군 병력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만약 군 병력 투입으로 진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면 그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그렇게 했을 것이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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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버르와 오르가 각각 니키와 단디를 좋아할 때는 발정기에 한정되어 있다. 따라서 그들의 관계는 성적인 것이지만 그녀들이 다른 수놈과 전혀 접촉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참된 결속이라고는 할 수없다. 파트너인 두 수놈 역시 다른 암놈들과 규칙적으로 교미를 가졌다. 두 젊은 암놈들의 성적 수용 능력은 대단해서 다른 어른 수놈들뿐만 아니라 새끼 수놈들에게까지 미쳤다. 그러나 두 암놈은 자신들이 선호하는 상대 수놈에 대해서만 성적 주도권을 행사했고, ‘섹스댄스‘ 역시 그들만을 위해 남겨두었다. 최근 몇 년간 이런 현상은 조금씩 줄어들었다. 성적 탐닉은 어쩌면 젊은 한때의 특징이기에 나이가 들면서 한결 부드러워지는 건지도 모른다. 아른험에서나 야생에서나 나이 든 침팬지들사이에는 성생활의 파트너가 대개 한정되어 있다. 이것이 침팬지들의 성생활이 완전히 난잡하지는 않다고 하는 한 가지 이유다. 다른 한 가지 이유로는 수놈간의 서열에 따라 성생활이 제한을 받는다는 점이다. - P238

또한 영장류학 문헌에서 ‘성적 훼방(sexual harassment)‘으로 묘사되는 어린놈들의 기묘한 행동도 연구했다. 어른들이 교미를 시작하면 새끼들이 달려들어 암놈의 등에 뛰어올라 수놈을 떼어놓거나, 수놈을 만지려 들거나, 커플 사이에 끼어들어 몸부림치며 훼방을 놓는다. 새끼들은 커플에게 모래를 뿌리거나 덩치도 작은 주제에 위협 과시 행동을 흉내내기도 한다. 하지만 커플에게 노골적으로 공격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내가 본 가장 심한 예로는 니키가 폰스의 어미인 프란예 위에 올라탔을 때 폰스가 니키의 엉덩이를 깨문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갑자기 교미가 중단됐다. 대개 이런간섭은 적대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종종 긍정적인 친밀함으로 보이지만,
교미에 방해가 되는 행동임에는 틀림없다. 새끼들이 교미 중인 커플의절반 정도에게 훼방을 놓고, 이 중 적지 않게 교미를 중단시키기에 이른다. 수놈들이 발정한 암놈에게 접근하기 전에 종종 반쯤 장난으로 새끼들을 멀리 쫓아보내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새끼들은 쫓아내도 몇 번씩이나 되돌아오며 귀찮게 따라붙는 파리와 비슷하다. 마치 자석처럼 어른들의 성적 접촉에 끌리는 것 같다.
••••••
그렇다면 어린 침팬지들의 성적 훼방은 어떤 이점을 가져다주는 것일까? 한 가지 가설은 어린 침팬지가 자신의 어미가 너무 일찍 임신을 해 동생이 빨리 태어나는 것을 방해하려고 애쓴다는 것이다. 그 노력이 성공하면 새끼는 더 오랫동안 어미의 젖, 무등타기, 보살핌을 독점할 수 있다. 새끼들은 자신이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이유를 의식하지는 않는다. 성행위 방해는 젖 먹는 기간을 연장시켜 생존의 기회를 높이려는 생득적인 반응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 P240

왜 이토록 너그렇지 못한 것일까? 어째서 수놈들은 다른 놈들을 가만 놔두지 못하는 것일까? 질투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관건은 그런 질투의 기능이 무엇인가이다. 질투에 수반되는 긴장과 위험이 아무런 긍정적인 기능을 갖지 못했다면 질투는 이미 오래 전에 지구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성행위를 둘러싼 수놈 간의 경쟁을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암놈은 한 마리의 수놈에게서만 수정된다. 수놈은 다른수놈들을 암놈에게서 멀리하도록 해야 그 암놈이 낳은 새끼의 아비가될 확률이 높아진다. 결과적으로 너그러운 수놈보다는 질투심 많은 수놈이 자신의 자식을 임신시킬 확률이 높아진다. 만약 질투심이 유전되는 것이라면(이것이 이 이론이 전제하는 바이다) 이런 성질을 가진 새끼들이점점 많이 태어날 것이며 훗날 어른이 되어 다른 수놈들을 번식 행위에서 배제하려 들 것이다.
수놈은 될 수 있는 한 많은 암놈들을 수정시킬 권리를 얻으려고 싸우는 반면 암놈의 경우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교미 파트너가 하나든 100마리든 암놈이 한 번에 낳을 수 있는 자식의 수는 달라지지 않는다. 따라서 암놈들 사이의 질투는 수놈들보다 덜 두드러진다. 암놈들 간의 경쟁은 많은 조류들과 몇몇 포유류들에서처럼 대부분이 짝 결속을 이루는 종들에게만 발생한다. 그런 경우 암놈은 그 수놈들과 장기적인 유대관계를 확보하고 유지하려고 애쓴다. 우리 인간 종이 바로 좋은 본보기다. 데이비드 버스(David Buss)의 연구에 따르면, 남성은 주로 아내나 애인이 다른 남성과 섹스를 하는 것을 떠올릴 때 안절부절못하는 반면, 여성은 대개 남편이나 애인이 다른 여성과 섹스를 했건 안했건 상관없이 섹스 자체보다는 그 여성을 진짜로 ‘사랑‘하는지 여부에 더 관심을가지고 참지 못한다. 여성은 이런 일들을 관계의 측면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자신의 파트너와 다른 여성 사이의 감정적 유대가 생기는 것을 더욱 걱정하는 것이다.
수놈은 섹스와 권력에 집중한다. 수놈의 권력 지향성은 성적 우선권이 수놈간의 서열로 결정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더 높은 지위를얻기 위한 투쟁이 더 많은 자손으로 달리 해석될 수 있다면 더 많은 자손이 그런 권력욕으로 인해 태어날 것이다. 수놈이 가진 야망의 기원을 설명하는 이런 이론은 단순하고 논리적이며 매우 그럴 듯하다. 그러나그것을 입증하려면 대단히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어느 교미기간이 수정으로까지 이어지는지, 한 마리의 수놈이 청소년기부터 죽을 때까지 서열에서 어떤 지위들을 누리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 P248

여기에서 우리는 세력 균형에 기반을 둔 사회체계의 완벽한 사례를 볼 수 있다. 한쪽이 다른 쪽에 대해 누리는 우위는 제3자의 지원에 의존하기 때문에 각자는 모두 다른 쪽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셈이다.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니키였다. 다른 두 마리 모두 니키의 권력 강화에 기여하면서 제 몫을 챙겼다. 권력이 평등하게 분배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한 마리의 수중에 모든 것이 집중된 것도 아니었다. 연합을이루는 경향이 강한 동물들 사이에서 이것 외의 다른 어떤 방법을 생각할 수 있을까? 국제정치에 대해 마틴 와이트(Martin Wight)가 쓴 글을 인용해보자. ‘세력균형 이외의 대안이라고는 완전한 무정부 상태이거나, 아니면 절대적인 지배 상태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침팬지 정치에 있어서 두 가지 대안 중 어느 것도 상상할 수가 없다. - P259

개체를 알아보는 능력이 안정된 서열 구조의 전제 조건이듯, ‘삼각관계의 인식(triadic awareness)‘도 연합에 바탕을 둔 서열 구조의 전제 조건이다. ‘삼각관계의 인식‘이란 다양한 삼각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자신이외의 다른 개체들 간의 사회적 관계를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예를 들어, 라윗은 이에룬과 니키가 연합을 형성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는 니키가 가까이 있을 때는 이에룬과 싸우려 들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룬과 단독으로 마주쳤을 때는 기꺼이 싸우려고 든다. 이런 유의 지식이 뭐가 특별하단 말인가? 어떤 개체가 집단 내의 모든 이들과 자신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안다는 것은 별로 특별할 것이 없다. 하지만 그 자신이 다른 개체들의 ‘조합‘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사회적 환경에 존재하는 온갖 관계들을 감시하고 평가한다면 이런 능력들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3차원적인 집단생활의초보적 형태는 많은 조류와 포유류에서 발견되지만, 영장류는 이 점에서 분명히 독보적이다. 화해, 떼어놓기 간섭, 고자질, 연합 등은 삼각관계를 인식할 수 없다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 P266

아른험 침팬지 집단에 속한 암놈들의 서열은 위로부터의 위협과 과시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아래로부터의 존경에 바탕을 둔 것처럼 여겨진다. 암놈들은 좀처럼 자기 과시를 하지 않으며, 자발적인 ‘인사‘가 수놈들 사이에서는 13퍼센트에 불과하지만 암놈들은 54퍼센트에 달한다. 다른 유인원 암놈들끼리의 관계도 이와 유사하다. 오랑우탄의 암놈들이 같은 우리에서 사육되면 싸움이나 위협이 전혀 없이 곧바로 안정된 우열관계가 확립된다. 이 우열관계는 체격의 차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어떤 종류의 성격이 존경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야생에서는 연배와 구역이 중요한 요인으로 보인다.  - P271

 큰 수놈 한 마리와 서열 높은 암놈들 사이에서 보이는 세 가지 상호작용을 비교해보았다. 누가 누구에게 ‘인사‘
를 하는가에 따른 ‘공식적‘ 기준에 따르면 수놈이 암놈에 비해 100퍼센트 우위에 있었다. 한편, 공격적인 싸움에서 누가 이겼는가 하는 ‘실제적‘ 기준에 따르면, 수놈은 80퍼센트 우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물건이나 장소를 빼앗는 점에 관해서는 암놈이 81퍼센트의 우위를 나타냈다.
이 같은 암놈의 우위는 체격에 의한 것으로 볼 수는 없고 수놈들의 관용에 달려 있음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왜 수놈들은 암놈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허용하는지 의구심이 남는다. 암놈들은 권력의 싸움터에 육체적 힘 이상의 무기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일까? 암놈들은 수놈들이 힘으로는 획득할 수 없는 것들, 예컨대 성적·정치적 호의, 성질을 죽일 수 있게 도와주는 침묵의 정책 등을 제공할 수 있다. 이것들은 암놈들에게 아주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만일 암놈들 사이의 인기가 수놈의 지도력을 안정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힐을 한다면? 수놈은 당연히 암놈들에게 관대한 태도와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 P272

투키디데스(Thucydides)가 2,000년 전쯤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대해 기록한 이래, 국가들은 공동의 적으로 간주되는 국가에 대항해 연합을 모색해왔다. 공포를 함께 느낀다는 것은 연합 형성의 기초가 되는데, 이때문에 힘의 균형에서 상대적인 약자 쪽에 무게가 실린다. 그 결과 모든 국가들이 영향력 있는 지위를 갖는 권력의 평형상태가 이뤄진다. 사회심리학에서도 적용되는 이 원리는 ‘최소 승리 연합(minimal winningcoalitions)‘이란 용어로 불린다. 만일 실험 게임에 참가한 세 명의 선수중에서 가장 약한 선수가 최강자 혹은 2인자와 협력해 점수를 올릴 기회가 있다면, 그는 2인자와의 동맹을 선호할 것이다. 권좌에서 물러난 이에룬도 흡사한 선택에 직면했다. 즉, 더 강력한 상대인 라윗과 연합할것인가, 아니면 상대적으로 약한 니키와 연합할 것인가. 이에룬의 도움이 필요 없는 라윗의 지배 하에서는 이에룬의 영향력이 제한적이었다. 라윗으로서는 이에룬이 중립을 지키기만 하면 됐다. 그러나 이에룬은 니키를 돕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스스로를 니키의 지도력에 필수 불가결한 존재로 만들었다. 결국 집단에서 이에룬의 영향력은 다시 커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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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선택은 ‘결과에 대한 추정(estimate of the consequences)‘에 바탕을 두고 있다. 따라서 문제는 이에룬이 니키와 연합하기로 결정하기 전에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 P274

자바 마카크 원숭이는 두 가지 방법으로 상대를 위협할 수 있다. 이를 연구한 결과 나는 두 가지 방법에는 제각각의 기능이 있음을 알수 있었다. 젊은 원숭이는 장차 서열에서 앞서야 할 놈들을 상대할 때는 시끄러운 형태의 위협 방식을 사용한다. 조용한 형태의 다른 한 가지 위협 방식은 이미 낮은 지위에 자족하고 있는 놈들에게 사용한다.
첫 번째 형태의 위협은 사회적 사다리를 오르는 데 쓰이는 반면, 두 번째 형태는 단지 기존의 지위를 확인하는 기능을 한다.
비슷한 차이점이 침팬지들의 과시 행동에서도 나타난다. 여기서도 차이점은 침팬지들이 지르는 소리의 세기이다. 하나는 귀청이 찢어질 정도지만 다른 하나는 비교적 조용하다. 침팬지가 첫 번째 유형의 과시 행동을 할 때는 처음에 상체를 흔들다가 ‘후우후우‘ 하는 소리를 점점 크게 낸다. 그런 다음 경쟁자에게 돌진하고, 땅을 구르며, 마지막에는 큰 소리를 지른다. 이 소리에 동반되는 깊고 리드미컬한 들숨과 날숨으로 인해 이런 행동을 ‘헐떡 과시(ventilating display)‘라고 부른다. 우열을 다투는 모든 과정에서 이런 종류의 과시 행위는 특히 도전자 쪽에서 보이는 특징적인 행동이다. 일단 불안정한 시기가 끝나고 경쟁자가굴복하면 도전자는 다른 형태의 과시 행위로 전환한다. 그것은 양 입술을 꼭 다문 채 숨을 참는 것이다. 이때 공기의 압력으로 가슴이 넓어지고 양쪽 볼이 부풀어오르는데, 이것을 ‘우쭐 과시(inflated display)‘라 부른다. 헐떡 과시가 도발적이며 야심찬 행위라면, 우쭐 과시는 승자의 자신감을 나타내는 수단이다. - P276

정리해보자. 협력은 반드시 공감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며, 특히 어른 수놈들이 사회적 지위에 대한 경쟁을 벌일 때는 더욱더 그렇다. 반면 암놈들이나 새끼들은 공감에 치우친 개입을 보여준다. 집단 전체로 보면 그런 개입은 75퍼센트에 달한다. 그들은 싸움이 벌어지면 대개 친척이나 사이좋은 친구들의 편을 든다. 즉,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수단으로 어떤 사건에 개입하기보다는 오히려 집단 내에서 벌어지는사건 자체에 반응하고 있는 셈이다. 개입 패턴에 이런 성차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단적으로 말해, 한쪽은 보살핌과 개인적약속을 중시한다면 다른 한쪽은 전략적이며 지위 상승에 민감하다. 너무 뻔한 도식인가? 내가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침팬지와 인간이 이런 점에서도 놀랄 만큼 유사한 것일까? - P289

나는 각 개체가 다른 개체들의 싸움에 어떻게 개입하고 있는지를비교해봄으로써 연합의 양면적 특성을 통계적으로 연구했다. 안정기에는 그 같은 개입이 (두 마리가 서로를 지원하는 긍정적인 의미와 (두 마리가서로의 적을 지원하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모두 대칭적이다. 그러나 호혜성의 전체적인 모습을 알고자 한다면 더 많은 종류의 행동들을 분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개입이 그것을 상쇄하는 또 다른 개입들로 계속해서 이어질 필요는 없다. 정기적인 수혜자는 시혜자에게 관용을 베풀거나 털고르기를 해주는 방식으로 화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결국 아른험 침팬지들을 상대로 그런 분석을 해낼 수도 있으리라. 당분간 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싶다. 침팬지 집단생활은 권력, 섹스, 애정, 지지, 편협, 적대감이 교환되는 시장과 같다고. 그리고 이런 교환은 다음의 두 가지 기본 원칙에 따라 이뤄진다고. ‘선은 선을 불러온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 P303

인간을 침팬지와 비교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모욕적이거나, 혹은그 이상의 죄악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인간의 동기를더욱 동물적으로 만든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침팬지들 사이에서 권력 정치는 단지 ‘나쁘다‘거나 ‘더럽다‘는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른험 집단에 사는 침팬지들에게 논리적 정합성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민주적 구조도 안겨주었다. 모든 파벌들은 일시적인 권력 균형에 이를 때까지 사회적 영향력을 계속해서 찾는다. 그리고 이런 균형은 서열상의 지위를 새롭게 결정한다. 다소 유동적인 지위가 ‘고정‘될 때까지 관계는 계속해서 변한다. 이 같은 서열의 공식화가 어떻게 화해 가운데 일어나는지를 보게 되면, 집단 내의 서열이경쟁과 충돌을 제한하는 ‘적‘ 요소임을 이해할 수 있다. 육아, 놀이, 섹스, 협력 등은 그로 인해 찾아오는 안정 상태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수면 아래의 상황은 늘 유동적인 상태이다. 권력의 균형은 매일매일 시험되며, 만일 그것이 매우 취약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도전이 일어나고 새로운 균형이 찾아올 것이다. 결국 침팬지들의 정치도 건설적이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로 분류되는 것을 명예롭게 여겨야만 한다. - P312

나는 가족과 친구들은 물론이고 오랜 침팬지 동료들을 만나러 정기적으로 네덜란드로 간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그들을 방문하는데 나이 든 세대들은 여전히 나를 알아본다. 마마는 늘 관절염을 앓고 있는 몸을 이끌고 도랑까지 나와서 헐떡거리는 소리를 내며 나를 반겼고, 호릴라는 누구보다 즐거워하며 반겼다. 내가 호릴라에게 우유병으로 로셔를 수유하는 것을 가르쳐준 뒤로 우리에게 특별한 연대감이 형성된것 같다. 침팬지를 보러 갈 때마다 나는 늘 감사해한다. 정치의 기원에대한 전통적 주장에 의문을 던지게 해준 한 편의 정치적 드라마를 볼수 있었기에, 그리고 그런 올바른 시공간에 내가 존재했던 것에•••••
- P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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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줍음이 곤란한 것은 수줍어하는 사람에게도, 그와 소통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그것이 진공 상태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줍음은 사람의 성격이라는 스튜에 들어 있는 한 가지 재료일 뿐이다. 수줍음은 다른 특징들과 섞여 있고 그리고 종종 다른 특징들에 가려져 있다 이것이 수줍음이 헷갈리게 느껴지는 한 이유다. 수줍어하는 사람 본인에게는 수줍음이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가장 지배적인 성격적 특질로 느껴질 테지만, 다른사람들의 눈에는 그 사실이 늘 그렇게 분명해 보이지는 않는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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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고문은 9월 20일 저녁 8시경부터 밤 10시 반경까지 자행되었는데, 전기고문, 물고문의 합동고문이었다. 김수현·김영두·정현규·박병선 · 최상남, 그리고 또 한 사람이 고문에 가담했다. 이제까지의 ‘자백‘과 ‘번복‘의 되풀이였다. 민청련이 반국가단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고문은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김근태는 "아, 죽게 되는구나. 이렇게 해서 죽는 것이구나" 절망하고, 마구 눈물을 흘렸다.

바깥 사회와 완전히 차단되었던 나는 정치적 사정이 정치군부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위해서 본인의 생명의 말살을 절대로 요청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각한 사태가 전개되고 있다고 단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끔찍한 고문, 말도 안 되는 각본을 만들어낼 수는 없는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결심했습니다. "그래, 죽을 수도 있다. 40년을 살아왔다. 유관순도, 윤동주도, 그리고 김주열도, 80년 광주의 숱한 선량한 시민들도 그렇게 살해당하지 않았는가. 추하게 정치군부 너희들에게 굽실거리지는 않겠다. 절대로 휘청거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마음을 추슬렀습니다.  - P127

26일 오후 3시경 남영동 5층 15호실을 떠나기에 앞서 나는 김수현과 백남은을 찾았습니다. 잠시 책상을 사이에 두고 김수현과 방에서 앉아서 얘기했습니다. 별 의미 있는 얘기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말하고 싶은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내가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속으로울었습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더군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처참하게 고문을 당하고 간다. 일방적으로 당하고 간다. 이러고도 속수무책인 것이 원통하다. 더구나 너무 끔찍하게 당해서 분노하기조차 두려운 것이 한스럽다. 떠나는 지금도 내놓고 욕 한 마디 할 수없고 그런 용기조차 생기지 않는 것이 말이다. 이 저주받을 인간들이, 악마 같은 자들이 내 생사여탈권을 가진 것처럼 군림하였으며 그에 아양조차 떨어야 했던 이 끔찍한 지옥을 All Mighty처럼 덮쳐왔던 것을....."

남영동에서 김근태에게 가한 살인적인 고문을 총지휘한 자는 90킬로그램이 넘는 거구의 이근안이었다. 처음에는 가명이어서 몰랐으나 뒷날에야 그가 이근안임을 알게 되었다. 이근안은 공군 헌병 출신으로 1970년 경찰에 입문한 뒤 1972년부터 대공 분야에 근무하면서 악질적인 ‘고문기술자‘로 이름을 날리며 특진과 승진을 거듭하다 1984년에는경감에 올랐다. 그에게 고문을 당한 인사들의 증언대로 ‘눈에 핏발이서 있었다"고 할 정도로 가학성을 지닌 인물이다. - P128

김근태는 비록 지옥 같은 남영동은 떠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풀려나는 것은 아니었다. 9월 26일 오후 김근태는 검찰청 구치소로 이감되었다. 이날 검찰청으로 호송되는 짧은 시간 동안 그는 부인 인재근을만났다. 그동안 남편의 행방을 백방으로 찾아다니다가 그날 검찰로 이송된다는 소식을 듣고 기다리던 인재근과 해후한 것이다. 그 짧은 순간에 그는 부인에게 발뒤꿈치의 고문당한 상처들을 보여주었다. 이 기적같은 일이 김근태의 고문 실상이 세상에 밝혀지는 계기가 되었다. 기적이었다.

계단을 경찰 한 사람과 본인의 처가 부축해 내려가면서 나는 망설이고 망설였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말했습니다. 불과 1분여 동안이었습니다. 그 고문은 나 개인에 국한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얘기했습니다. 고문얘기를 듣고 처가 괴로워할 것을 생각하고 그만둘까도 생각했지만 그럴문제도 아니었고 도무지 원통해서 견딜 수가 없었기에 나는 말했습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침착하게 말하면서 신고 있었던 양말을 벗었습니다. 발뒤꿈치의 상처들과 발등의 꺼멓게 탄 부분을 보여주었고, 팔꿈치의 상처도 보여주었습니다.
이 만남은 정말 기적 같은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관례와는 달리 늦은 오후에야 도착한 본인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리하여 정치군부의 고문과그 은폐 행위가 폭로되고 국내외적으로 맹렬한 비판을 불러일으키게 된이 만남은 본인에 대한 영원한 기적일 것입니다.  - P130

 용지는 주었지만 자신이 쓴 탄원서를 그대로 둘 리 없다고 의심하면서도 김근태는 심혈을 기울여 한자 한자 써 내려갔다. 그런데 예상대로였다. 애써 쓴 ‘탄원서‘를 출정하는 시간에 누군가가 훔쳐가고 말았다. 여러 날 고심해 쓴 ‘탄원서‘는 빼앗기고 말았지만, 마지막 부분은 생생하게 기억했다.

맨 끝으로 고문을 당하며 속으로 통곡하고 지내온 지난겨울, 이 감옥소에서 나는 애정 넘치는 수많은 학생, 그리고 버림받은 재소자들의 격려 속에서 다시 되살아났다. 그때 두 겹 비닐 창문을 때리는 북풍을 견디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되뇌고 되뇌었다.

내 귀여운 아이들아
느이들하고 놀아주지도 못하고
애비가 어디 가서 오래 못 와도
슬퍼하거나 마음이 약해져선 안 된다
외로울 때는 엄마랑 들에도 나가 보고
봄이 오는 소리를 들어봐야지
바람이 차거들랑 옷깃 잘 여며
감기 들지 않도록 조심도 하고.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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