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9시 45분. 나는 부엌에 서서 제일 좋아하는 저녁 식사 메뉴를 만드는 중이다. 밀플레이크, 뮤즐릭스 시리얼, 건포도를 섞은 이 맛있는 음식은 내게 위안이 되어준다. 목요일이니 15분 뒤에 드라마<ER>이 방영될 테고, 시청률 조사 기간인 5월 중순이나 나는 기대감에 젖어 있다. 그렇다. 새 에피소드가 방영되는 날이다. 기분은평온하다. 나는 찢어진 레깅스, 티셔츠, 목욕 가운을 입고 있다. 내개는 거실 소파에 흡족하게 (그리고 말없이) 웅크리고 앉아 있다. 전화 자동응답기에 메시지가 몇 통 와 있다고 불이 깜박이는데, 내가 일부러 받지 않은 전화들이고 내일이 되어야 응답할 생각이다. 이때 어떤 생각 하나가 떠오른다. 단순한 사실적 진술 하나가 완전한 문장의 형태로 머릿속에 떠오른다. 나는 그 말을 듣는다.
나는 명랑한 은둔자야.
이것은 정말 마술적이고 변혁적인 순간이다. 이것은 일종의 만화경 같은 변화랄까, 나 자신에 대한 기정사실들이 저절로 모습을바꾸더니 새로운 질서에 따라, 놀랍고 신선한 시각에 따라 재구성되어 내 내면이 삽시간에 재편되는 듯한 순간이다. 오래된 생각이 새로운 생각으로 바뀐다. 기존의 정의가 새로운 전개를, 새로운 분위기를, 새로운 의미를 취한다.
나는 명랑한 은둔자야. 이 말을 다시 들어보라. 산뜻하고 멋지게 들리지 않는가?  - P40

나는 작지만 세심하게 키워온 사교 생활을 즐기고있다. 한 줌의 소중한 친구들이 있고, 사랑하는 언니가 있다. 그들의 존재와 지지는 내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웬디는 조용한 삶과 공허한 삶을 잘 구별하지 못하고, 내 생활 양식이심란하다고 여긴다. 내가 주말 계획을 얼버무리면, 웬디는 마치 내가 48시간 동안 세상과 단절되어 슬프게 지낼 거라고 예상하는 듯이 은근히 불편해하는 표정을 떠올린다. 그래서 나는 웬디를 달래려고 가끔 없는 얘기를 지어낸다. 저녁 약속이 있다고 말하고, 영화를 볼 거라고 말하고, 여자친구와 쇼핑하러 갈 거라고 말한다.
그러면 웬디는 늘 한시름 놓았다는 반응을 보이는데, 꼭 엄마 같은그 태도가 나를 약간 내려다보는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아, 정말잘됐네!"
나는, 홀로 걸어가며 속으로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는 나는, ‘우리의 나라‘에서 살아가는 외톨이 은둔자다.
우리라는 단어, 이것은 꽤 무거운 단어다. - P44

내 경우, 가장 중요한 과제는 고독과 고립의 경계선을 잘 유지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 둘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사회적 기술은 근육과도 같아서 위축될 수 있고, 내가 경험한 바로도 육체적 건강을유지하는 것처럼 사람과의 접촉을 유지하려고 애쓸 필요가 있다. 타인과의 접촉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하지 않으면, 지극히 간단한 사회적 행동마저도 -누구를 만나서 커피를 마신다거나, 외식을 한다거나 엄청나고 무섭고 피곤한 일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프랑스까지 헤엄쳐서 가려고 시도하는 것 못지않게 버거운 일로 느껴진다. 고독은 종종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배경으로 두고즐길 때 가장 흡족하고 가장 유익하다. 적절한 균형을 지키지 못하면, 삶이 약간 비현실적인 것이 된다. TV 등장인물들을 현실의 사람들처럼 생각하게 되고, 집에 들어온 파리가 친구 삼을 만한 상대로 느껴지고, 남들은 더없이 일상적인 일로 생각하는 작은 사건들이(집에 손님이 온다거나, 추리닝 바지보다 더 점잖은 옷을 입어야 하는 상황이라거나) 기이하고 불가해한 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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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부엌에서 켈로그 만찬을 준비하며 내 집의 단정함과조용함을 즐길 때, 그 시간이 고마운 선물이자 일종의 승리로 느껴졌다. 예전에 내가 애쓰며 괴로워했던 일들이 과거로 좀 더 멀리 물러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원래 숫기 없는 성격이다. 타인과의 소통을 늘 부담스럽게 느껴왔고, 앞으로도 아마 어느 정도는 계속 그럴 것이다. 따라서 나는 혼자 있는 걸 늘 대단히 편하게여겼지만, 그러면서도 그 상태를 만끽할 줄은 잘 몰랐다. 혼자 방에앉아 있으면서도 초조해지지 않는 것, 연애의 틀 밖에서도 안락과 위로와 인정을 얻을 수 있다고 느끼는 것, 내가 가진 자원만으로도-나라는 사람, 내가 하는 선택만으로도-고독의 어두운 복도를 끝까지 걸어서 밝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 이런 것은 잘하지 못했다.
나는 시리얼 그릇을 들고 거실로 가서 TV 앞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정말로 명랑하게. 이게 내 집이야. - P48

 꼭 우리가 서로 다른 사람이 되려고, 우리의 인생이 너무 긴밀하게 얽히는 것을 막으려고 애쓴 것처럼 느껴진다. 너는 네 영역을지켜, 나는 내 영역을 지킬 테니까. 꼭 서로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렇지만 우리가 서로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진 적은 한 번도없었다. 서로의 감정적 동향을 시야에서 완전히 놓쳐본 적도 없었다. 사실은 이것도 우리가 추는 춤의 일부다. 거리를 유지하되 상대가 필요할 때 응답하지 않는 일은 없어야 하고 서로를 잇는 끈을 아예 놓아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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