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고문은 9월 20일 저녁 8시경부터 밤 10시 반경까지 자행되었는데, 전기고문, 물고문의 합동고문이었다. 김수현·김영두·정현규·박병선 · 최상남, 그리고 또 한 사람이 고문에 가담했다. 이제까지의 ‘자백‘과 ‘번복‘의 되풀이였다. 민청련이 반국가단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고문은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김근태는 "아, 죽게 되는구나. 이렇게 해서 죽는 것이구나" 절망하고, 마구 눈물을 흘렸다.

바깥 사회와 완전히 차단되었던 나는 정치적 사정이 정치군부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위해서 본인의 생명의 말살을 절대로 요청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각한 사태가 전개되고 있다고 단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끔찍한 고문, 말도 안 되는 각본을 만들어낼 수는 없는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결심했습니다. "그래, 죽을 수도 있다. 40년을 살아왔다. 유관순도, 윤동주도, 그리고 김주열도, 80년 광주의 숱한 선량한 시민들도 그렇게 살해당하지 않았는가. 추하게 정치군부 너희들에게 굽실거리지는 않겠다. 절대로 휘청거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마음을 추슬렀습니다.  - P127

26일 오후 3시경 남영동 5층 15호실을 떠나기에 앞서 나는 김수현과 백남은을 찾았습니다. 잠시 책상을 사이에 두고 김수현과 방에서 앉아서 얘기했습니다. 별 의미 있는 얘기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말하고 싶은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내가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속으로울었습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더군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처참하게 고문을 당하고 간다. 일방적으로 당하고 간다. 이러고도 속수무책인 것이 원통하다. 더구나 너무 끔찍하게 당해서 분노하기조차 두려운 것이 한스럽다. 떠나는 지금도 내놓고 욕 한 마디 할 수없고 그런 용기조차 생기지 않는 것이 말이다. 이 저주받을 인간들이, 악마 같은 자들이 내 생사여탈권을 가진 것처럼 군림하였으며 그에 아양조차 떨어야 했던 이 끔찍한 지옥을 All Mighty처럼 덮쳐왔던 것을....."

남영동에서 김근태에게 가한 살인적인 고문을 총지휘한 자는 90킬로그램이 넘는 거구의 이근안이었다. 처음에는 가명이어서 몰랐으나 뒷날에야 그가 이근안임을 알게 되었다. 이근안은 공군 헌병 출신으로 1970년 경찰에 입문한 뒤 1972년부터 대공 분야에 근무하면서 악질적인 ‘고문기술자‘로 이름을 날리며 특진과 승진을 거듭하다 1984년에는경감에 올랐다. 그에게 고문을 당한 인사들의 증언대로 ‘눈에 핏발이서 있었다"고 할 정도로 가학성을 지닌 인물이다. - P128

김근태는 비록 지옥 같은 남영동은 떠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풀려나는 것은 아니었다. 9월 26일 오후 김근태는 검찰청 구치소로 이감되었다. 이날 검찰청으로 호송되는 짧은 시간 동안 그는 부인 인재근을만났다. 그동안 남편의 행방을 백방으로 찾아다니다가 그날 검찰로 이송된다는 소식을 듣고 기다리던 인재근과 해후한 것이다. 그 짧은 순간에 그는 부인에게 발뒤꿈치의 고문당한 상처들을 보여주었다. 이 기적같은 일이 김근태의 고문 실상이 세상에 밝혀지는 계기가 되었다. 기적이었다.

계단을 경찰 한 사람과 본인의 처가 부축해 내려가면서 나는 망설이고 망설였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말했습니다. 불과 1분여 동안이었습니다. 그 고문은 나 개인에 국한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얘기했습니다. 고문얘기를 듣고 처가 괴로워할 것을 생각하고 그만둘까도 생각했지만 그럴문제도 아니었고 도무지 원통해서 견딜 수가 없었기에 나는 말했습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침착하게 말하면서 신고 있었던 양말을 벗었습니다. 발뒤꿈치의 상처들과 발등의 꺼멓게 탄 부분을 보여주었고, 팔꿈치의 상처도 보여주었습니다.
이 만남은 정말 기적 같은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관례와는 달리 늦은 오후에야 도착한 본인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리하여 정치군부의 고문과그 은폐 행위가 폭로되고 국내외적으로 맹렬한 비판을 불러일으키게 된이 만남은 본인에 대한 영원한 기적일 것입니다.  - P130

 용지는 주었지만 자신이 쓴 탄원서를 그대로 둘 리 없다고 의심하면서도 김근태는 심혈을 기울여 한자 한자 써 내려갔다. 그런데 예상대로였다. 애써 쓴 ‘탄원서‘를 출정하는 시간에 누군가가 훔쳐가고 말았다. 여러 날 고심해 쓴 ‘탄원서‘는 빼앗기고 말았지만, 마지막 부분은 생생하게 기억했다.

맨 끝으로 고문을 당하며 속으로 통곡하고 지내온 지난겨울, 이 감옥소에서 나는 애정 넘치는 수많은 학생, 그리고 버림받은 재소자들의 격려 속에서 다시 되살아났다. 그때 두 겹 비닐 창문을 때리는 북풍을 견디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되뇌고 되뇌었다.

내 귀여운 아이들아
느이들하고 놀아주지도 못하고
애비가 어디 가서 오래 못 와도
슬퍼하거나 마음이 약해져선 안 된다
외로울 때는 엄마랑 들에도 나가 보고
봄이 오는 소리를 들어봐야지
바람이 차거들랑 옷깃 잘 여며
감기 들지 않도록 조심도 하고.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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