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의 정연한 논리와 감동적인 진술은 그러나 군부정권의 하수인격인 판·검사들에게는 우이독경이 되었다. 그들은 이 같은 진술이언론에 보도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국민이 알 수 없으리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순간만 넘기면 책임을 면하고, 승진도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서성 판사는 김근태에게 국보법과 집시법 위반으로 징역 7년, 자격정지 6년을 선고했다. 판사는 "승진은 따놓은 당상이군", "창피한 줄 아시오"라는 방청석의 야유를 귓전에 흘리면서 총총 자리를 떴다.
판사의 유죄판결 이유 중에는 모리스 돕의 『자본주의의 과거와 현재』를 갖고 있었다는 것도 포함되었다. 이 책이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이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검찰이 내외문제연구소라는 관변단체의 김영학에게 이 책의 감정을 의뢰하고, 그의 감정서를 바탕으로 유죄판결을 내렸다는 점이다. 김영학은돕의 주저인 정치경제학과 자본주의』, 『자본주의 발전연구』 등의 책이름조차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20세기 후반기 대명천지 밝은세상에서, 돕의 저서를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로 국보법 위반으로 처벌되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었다. 모리스 돕은 영국의 경제학자로 이론경제학, 경제사, 사회주의 경제학, 후진국 문제 등 다방면에 걸친 저작을발표한 세계적 학자다. - P149

김근태는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 소식을 전해 듣고 옥중에서 단식을 결행했다. 곡기를 끊고 절규해도 메아리조차 없었지만, 도저히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였다. 신라의 옛 고도 외곽에 자리한 감옥은 공동묘지처럼 스산했다. 감시병들만 없으면 공동묘지 그대로였다. 3월 12일 그는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잘 잡히지 않는구려. 안개 너머에서 어른거리면서 초점이 모아지지 않는것이었소. 항의도 하거니와 내 마음을 모으기 위해 단식을 한 것이었소.
이 억울하고 불행한 죽음을 듣자마자 분노해 그런 것이기는 하지만.
사흘째부터는 꽤 고통스러웠소. 얼굴 표정도 아마 찌그러졌을 것이오. 건강이 안 좋고, 또 자신감까지 없고 보니 더욱 그랬을 것이오. 공포심이 슬그머니 자리를 잡더니 달걀귀신처럼 자꾸만 커지는 것이었소. 몸과 마음을 비우고, 그 젊은 죽음을 가슴에 받아들여 서로 교감하고자 했던 당초의도는 힘없이 밀려버리고 말았소.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소. 배고픈 고통과 공포, 부끄러운 생각 등의 혼란 속에서 점점 선명하게 부각되어온 것은, 날카롭게 찔러온 것은, 그는 죽었고 나는 살아 있다는 사실이었소. 이 염치없는 끈적끈적한 생각을 하면서 나는 죽지 않았구나라고 혼자 중얼거렸던 것 같소. - P170

위기에 몰린 전두환 정권에서는 계엄령 선포 등 비상조치설이 흘러나왔다. 실제로 전두환은 6월 18일을 전후하여 계엄을 검토한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 측이 여러 채널을 통해 군 병력 투입을 자제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계엄령 선포와 군 병력 투입을 막은 결정적인 요인은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국민항쟁이었다. 1979년 부마항쟁과 1980년 광주항쟁은 제한된 특정 지역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박정희와 전두환은 군 병력을 투입해 진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1980년 5월 70만 인구의 광주를 장악하지 못하고 계엄군이 한때 외각으로 밀려났던 사실에 비추어 보면 인구 1천만이 사는 서울 전역에서 벌어진 시위를 진압하자면 수도권의 군 병력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만약 군 병력 투입으로 진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면 그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그렇게 했을 것이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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