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워터 레인 아르테 오리지널 30
B. A. 패리스 지음, 이수영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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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캐시는 폭우가 내리는 밤, 숲을 관통해 지름길로 가기로 한 한순간의 선택때문에 믿을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고통을 겪게된다. 문제적 상황은 이렇다. 그녀는 거센 비바람을 헤치며 가까스로 숲속을 빠져나가다가 서 있는 자동차를 발견한다. 고장이 난 건지, 위험한 상황인지 알수 없어 차를 세우고 경적도 울려보지만 반응이 없다. 내려볼까 망설이다가 결국 집에 도착해서 경찰에 전화하기로 하고 집으로 가지만 깜빡 잊고 잠들어버린다. 다음날 아침, 끔찍한 이야기가 뉴스에서 들려온다. 그녀가 지나쳐 온 차 안에서 사람이 잔혹하게 살해되었고, 그 사람은 바로 얼마전부터 알게된 친구 제인이다. 캐시는 이 상황이 자신의 잘못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이 사람들에게 비난받을까봐 두려웠다. 자신의 이기심이 모든 걸 망쳐버렸다고 절망했고 죄책감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말았다.



생각을 안 하려 노력하지만 그럴 수 없다. 

마음속에 공포가 자리를 잡고

머릿속에서는 의문이 점점 끓어오른다.

미친 소리라는 걸 알지만,

내가 느끼는 공포는 너무나 현실적이다.

<블랙워터 레인>P127




이기적인 실수? 어쩔수 없는 선택?


작가 B.A 패리스는 <비하인드 도어>에 이어서 이번에도 놀라울 정도로 이야기에 몰입하게 하고 다음을 궁금하게 만든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전개도 흥미롭지만 인물의 생생한 심리묘사는 실제 일어나는 일인 양손에 땀을 쥐게 한다. 그리고 캐시의 내면을 통해 인간 심리의 복잡성, 죄책감, 불안, 공포, 가스라이팅, 용서, 슬픔 등을 마주하게 하며 내 안에도 존재하는 감정들을 발견하고 질문하게 만든다. 나라면 캐시와 같은 선택을 했을까? 나라면 나의 행동을 정당화할 것인가? 아니면 사정없이 흔들릴 것인가? 아마도 나는 스스로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겠지만 결국에는 죄책감과 괴로움을 외면하지 못할 것 같고 조금씩 용서와 구원의 방향을 모색할 것 같다. 결국 이 책은 우리에게 캐시와 같은 상황에서 내면의 어둠을 마주할 수밖에 없고, 어둠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성장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자신에게 존재하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대면하고 스스로 물리쳐 이겨내야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고.


가스라이팅이라는 탐욕


그런데 이야기는 이렇게 단순하지 않다. 캐시를 괴롭히는 건 죄책감과 불안만이 아니다. 사십대에 조발성 치매를 앓았던 엄마처럼 자꾸만 잊어버린다. 아닐거라고 외면하지만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져 혼란에 빠진다. 하지만 그녀의 망상과 신경쇠약은 그녀를 조종하기 위한 가스라이팅이었던 것. 캐시는 깨어있는 시간이 너무나 괴롭지만 더는 무너져 내릴 수 없다고 결심한다. 망가져버린 삶을 회복하기 위해 일상을 되찾기 위해 할수 있는 일을 해보기로 한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니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아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제대로 판단할 수 있게된다. 자신을 아끼는 사람이 누군지 이용하려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게 된다.


내면을 휘젓는 것들을 제대로 바라보자


소설은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인간의 이중성과 정신적 문제에 대해서도 심도있게 이야기하고 있어 더욱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다. 나 역시 한순간의 선택때문에 견딜 수 없을 고통을 겪어본 적이 있기에 주인공의 고통이 더욱 진하게 전해졌다. 다행스럽게도 마무리가 통쾌하고 깔끔해서 아주 만족스럽다. 이제 캐시가 자신에 대한 자괴감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다. 더는 '만약에'라는 생각속에 갇혀 헤매지 않기를, 소중한 하루하루를 남이 원하는 대로 내주며 살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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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들의 죽음 - 소크라테스에서 붓다까지 EBS CLASS ⓔ
고미숙 지음 / EBS BOOKS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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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변화들이 원래 하나라는 것에 통달하면 마음의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시시각각의 변하에 완벽히 응하게 되면 만물과 함께 늘 새로 탄생합니다.

이렇게 되면 만물을 만나는 모든 순간이 매번 꽃피는 순간입니다.

이를 타고난 바탕이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_ <현자들의 죽음>p097



머리로는 이해하겠는데 마음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죽음'에 관한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삶을 소중히 여기고 매 순간 가치 있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막상 나의 죽음, 가족의 죽음을 떠올리면 두렵고 피하고만 싶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외면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언제 어떻게 다가올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날이 조금씩 가까워지기 때문에 죽음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더불어 삶을 좀 더 충만하게 채우기 위해서도 이제는 죽음과 마주해야만 한다.


<현자들의 죽음>은 고전 인문학의 대가이신 고미숙 선생님의 작품으로, 모두가 인정하는 현자들의 - 소크라테스, 장자, 간디, 아인슈타인, 연암, 다산, 사리뿟따, 붓다 - 삶과 죽음을 통해 죽음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하여 정확하게 깨우치도록 전달해준다. 책이 일관되게 들려주는 조언은 죽음을 피하지 않는 것이다. 왜?죽음을 피하려고 할수록 삶에 매달리게 되고, 그러면 삶은 감옥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죽음에서 자유로워야, 죽음을 받아들여야 삶이 충만해질 수 있다. 그럼 어떻게? 이 세상이 오직 순환과 변환만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흐름에 올라타야 한다. 집착과 분별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아 매 순간 마음을 챙겨야 한다. 모든 생성된 것은 무상하게 흩어지는 법임을 알면 죽음과 마주하더라도 자유로울 수 있다.


모든 생은 죽음으로부터 온다


우리는 죽음을 모르면서 최악의 재앙이라 여기고 '끝'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이는 무지에서 오는 착각일 뿐이다. 모르는데 왜 불안해하고 두려워한단 말인가. 책은 이러한 우리의 어리석음이라고 지적하고, 삶과 죽음에는 경계가 없다고 말한다. 세상이 존재하려면 삶에서 죽음으로, 죽음에서 삶으로의 이행이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듭 강조한다. 모든 생은 죽음으로부터 온다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운동성으로 이 우주는 존재하므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순환하듯이, 어린시절 청춘 중년 노년도 그렇게 흘러간다. 이렇게 자연은 쉼 없이 교체될 뿐이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시선을 바꿔야 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는 원대한 시선으로. 고정되지 않는, 규정하지 않는 시선으로 나와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철저하고 세밀하게!


그 무엇이건 생성과 변화의 한 스텝일 뿐이다


우주가 만물이 단 한순간도 고정되어 있지 않음에도 우리는 죽을 듯이 괴로워하고 계속될 듯이 기뻐한다. 사실 무엇이 되어도 상관없는데 말이다. 책은 무지한 우리에게 말한다. 그 무엇이건 생성과 변화의 한 스텝일 뿐이라고. 거기에 무슨 아픔, 상처, 슬픔이 개입할 여지가 있냐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모든 것이 한 생각일 뿐. 그 생각때문에 즐겁기도 하고, 괴롭기도 한 것이지 애태울 필요가 하나 없다. 그저 변화의 리듬을 타고, 변화에 잘 응하고, 명랑하게 잘 살면 그만인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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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기쁨 - 책 읽고 싶어지는 책
김겨울 지음 / 초록비책공방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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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기쁨>은 읽는 즐거움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려주는 책이다. 쓸모의 차원을 넘어 책이 주는 즐거움과 기쁨,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하여 진솔한 언어들로 조목조목 설명해준다. 책 속 에피소드들은 저자가 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어떻게 책을 읽어왔는지, 그리고 책과 함께 어떻게 생활하는지 마음껏 보여주고 함께하도록 안내한다. 이 책이 풀어낸 다채로운 독서의 기쁨들을 보면서 나는 그동안의 책읽기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름 읽는 기쁨도 느끼고, 책과 함께 하는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지만 애서가인 저자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뭐 각자의 방식대로 책을 즐기면 되는 일이라는 것은 알지만 나도 더욱 최선을 다해 책을 즐기고 싶어졌다. 아는 만큼 흥미로워지고 배울수록 더 알고 싶어지는 법이니까.


책 1부에서는 책이 왜 재미있는지, 어떤 요소들로 즐거움을 주는지 설명한다. 책 그 자체가 갖는 흥미로움과 내적으로는 호기심 충족, 언어자체가 주는 즐거움, 그리고 상상하는 유희활동임을 이야기한다. 요약하면 독서는 질적으로 훌륭한 차원의 쾌감을 주는 취미라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독서가 취미라고 하면 너무 뻔해보이는 게 아닌가 생각했는데 저자의 멋진 표현에 시선을 바꾸게 되었다. 책보다 더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고 사유를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있을까. 독서는 단연 최고의 취미다. 2부는 저자 김겨울이 어떻게 책의 매혹에 빠지게 되었는지, 어떤 책을 선택하고, 구입하고, 어디서 어떻게 읽는지 자세히 풀어놓는다. 더불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읽는 기쁨과 즐거움을 더할 수 있는 방법들도 소개한다. 특히 '사는 내내 책의 영향을 허락할 셈이라면 책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저자의 말이 인상적이게 와닿는다. 책등이 보이게 꽂아둔 책들을 보는 것 만으로도 책과 연결된다고 하니 나도 앞으로는 쉽게 책을 처분하지 못하게 될 것 같다.


''세상은 우리가 읽는 책이며, 책은 우리가 방문하는 여행지이다." p207


3부는 <바벨의 도서관>을 포함한 5권의 책들을 통해 왜 책이어야 하는지, 책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진지하게 들려준다. 저자는 인간은 누구나 필연적으로 죽기 때문에 '활자로 압축해놓은 세상'을 읽으면서 삶을 생각해보고 상상해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책에서는 우리가 반복해서 같은 삶을 여러번 체험할 수 있고, 살아보지 못한 세상을 살게 해주기도 한다고 강조한다. 맞는 말이다. 이런 경험을 통해 우리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의미를 깨달을 수 있고, 타인의 삶을 이해할 수도 있다. 때로는 그 과정에서 내가 살아내온 방식에 실망하기도 하고, 뜨끔하기도 하겠지만 그럴수록 삶의 자세를 바로 세우기 위해 언어의 세상속에서 살아봐야 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격하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즐겁게 독서하는 법을 찾고 있다면,책이 주는 간접 경험을 깊게 누려보고 싶다면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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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가와 류노스케×청춘 청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최고은 옮김 / 북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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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쇼몽>이란 작품은 들어본 적 있지만,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일본이 나은 대가 나쓰메 소세키가 인정한 천재 작가였으나 정작 자신은 스스로를 신뢰하지 못했고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일찍 요절한 큰 누나와 미쳐버린 어머니를 보면서 자랐고, 자신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을 느끼며 살다가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책 속 열 두 편의 작품에는 작가의 인간적 고뇌와 생에 대한 불안이 곳곳에 녹아 있어 그가 느꼈던 괴로움에 공감할 수 있고, 안타까운 그의 결말을 예감할 수 있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이 나에게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체적으로 익숙하지 않은 내용이었고, 전반적으로 어둡고 혼란스러워 진실이 잘 드러나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낯선 느낌이 신선하게 다가왔고, 그의 이해하기 어려운 세계속에 나와 결이 같은 부분도 분명하게 존재했다. 그리고 너무나 솔직했던 고백들이 용기있게 느껴지기도 했다.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살아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처럼 보였다. 결국 자기 성찰로 그치지 못하고 자살을 선택했지만 말이다.


가장 흥미로웠던 단편은 <갓파>. 정신병원에 수감된 환자가 갓파의 세계에 다녀온 이야기를 풀어낸 작품이다. 갓파는 물에 사는 일본 요괴를 뜻한다. 갓파의 세계는 인간 세상과 많은 부분이 다르다. 갓파는 인간이 진지하게 여기는 걸 우스워하고, 우스워하는 걸 진지하게 여긴다. 아이를 낳는것도 인간과는 달리, 아이 스스로에게 선택권을 준다. 태어나기 전에 뱃속 아기에게 태어날 지 말 지를 묻는다. 그러면 아이는 선택한다.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 산모는 분만하지 않는다. 갓파에게 인간의 가족제도는 서로를 괴롭히는 어리석은 관계로 치부된다. 그들은 누구의 편을 들기 전에 자기 편부터 든다. 자신이 행복한 게 최우선인 것이다.


주인공은 갓파의 세상에서 끊임없이 동분서주하고, 서로를 착취하며 살아가는 인간 사회에 대한 환멸을 느끼지만 결국 다시 인간사회로 돌아온다. 그러나 낯선 세상을 경험한 자는 이단자로 찍히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다행히 갓파들이 주인공을 찾아와 새로운 연대를 맺는 희망적인 내용으로 끝맺는다. 갓파들의 세상은 작가가 바라는 이상향인 듯 하다. 삶에 집착하지 않고 왕성하게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삶. 작가는 갓파들처럼 살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비관하면서 죽음의 예감하며 글을 써내려가면서도 한줄기 희망은 붙들고 있는 듯 보였다.



"나를 불행하게 할 것을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톱니바퀴>P243



저자는 인생을 지옥보다 더 지옥같다고 느꼈고, 자신이 죄를 지어서 지옥에 떨어진 것 같다고 믿었다. 삶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런 생각을 줄곧 했을까. 그의 고뇌가 너무도 처절하다. 나 역시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에서 많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느끼고 살아간다. 그렇지만 삶을 선택의 영역에 두고 싶지는 않다. 불안하든 그렇지 않든 주어진 삶은 살아내야 한다. 또한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불안은 숙명이기에 희미한 미래를 받아들여야 한다. 작가의 말처럼 인생은 보들레르의 시 한 줄만도 못하더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불합리하더라도 지금을 만끽하면서 가볍게 살아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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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청춘 청춘
다자이 오사무 지음, 최고은 옮김 / 북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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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인간실격>을 읽고나서 은근한 불쾌감을 느꼈었다. 작가의 괴로움이 나에게는 부잣집 도련님의 투정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한참 뒤에 다시 책을 읽었을 때에는 그의 방탕한 인생 이면에 감춰진 불안과 허무가 보였다. 자기자신을 연민하면서도 비하하며 조롱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그렇다면 나는 그를 좀 더 이해하게 된건가. 분명 아닐 것이다. 이 책<다자이 오사무X 청춘>을 읽으면서 다시한번 깨달았다. 인간은 서로를 모른다.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상대의 고통과 슬픔을 짐작할 수 없다. 다만, 다름을 인정하고, '모른다'는 태도로 바라볼 수는 있을 것이다. 

책은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중에서 청춘을 테마로 한 12편을 모아 엮은 단편집이다. 그의 다른 작품에서 잘 드러났듯, 이 책에서도 자신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특유의 익살과 섬세한 감수성을 순간순간 드러낸다. 실제로 그는 부유한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한때 좌익 활동을 했고, 예술과 생활 사이에서 고뇌했으며, 복잡한 이성관계와 여러번의 자살시도 끝에 결국 짧은 생을 마감했다. 작품들의 내용과 작가의 생애가 많은 부분 겹치고 있어 작품속 주인공들의 내면세계가 다자이 오사무의 고백처럼 들려온다. 



이제 기대는 버렸어. 모두가 다 예전의 그이고, 그날그날의 바람결에 따라 색이 조금 달라 보일 뿐인 거지.

<그는 예전의 그가 아니다>P069



<그는 예전의 그가 아니다>는 집주인인 '나'와 세입자인 세이센과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 작품이다. 세이센은 말그대로 한량이다.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고 부인을 자주 바꾸고 그녀들에게 얹혀 살아간다. 게다가 집세를 한번도 안내면서 당당한 태도로 일관하는데 화자인 '나'는 그런 그의 허세에 어처구니 없어 하면서도 어쩌면 천재가 아닐까하며 매력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언젠간 그가 예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할거라 기대도 하지만 결국 그는 그일 뿐, 달라지지 않는다고 체념한다. 집주인 '나'는 세입자 세이센과 다를 바 없다. 사회에서 융화되지 못하고, 주변인들을 난감하게 하며 예술가라 칭하지만 자신이 혐오스럽고, 모순덩어리라고 느낀다. 그래서 그들은 현실을 외면한다. 



진지해요. 진지하니까. 진지하니까 괴로운 일도 생기는 거죠.

<어릿광대의 꽃>P137



다른 작품들의 '청춘'도 비슷한 결이다. <어린광대의 꽃>은 <인간실격>에서 카페 여직원과 약을 먹고 동반 자살을 기도했다가 여성만 죽고, 다자이 오사무만 살아남은 사건을 소재로 하였다. 죽어야지 하면서도 살고싶어 하는 자신의 위선을 고백하고, 살아남은 자신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을 지 혼란스러워한다. <우바스테>는 바람난 아내를 미워하는 대신, 함께 동반자살을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각자의 삶을 살게되는 여정을 그린 이야기이다. 역시 다자이 자신의 첫 아내와의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각각의 작품속에서 작가는 혼란속에서 비틀거리고 자신의 치졸함에 점점 더 자신감을 잃어간다.


다자이 오사무의 '청춘'은 어쩔 수 없다는 무력하고 나른한 체념의 시기였던 것 같다. 모두의 기대를 저버린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고, 그럴수록 인생에 대한 기대가 사라져 사는 목적을 잃어갔던 게 아닐까 싶다. 내 삶 역시 모순과 후회로 가득하다. 죄책감과 수치심에 괴롭고 불안하다.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좋을텐데 말처럼 쉽지가 않다. 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알고 있다. 시간의 힘을 믿어야 한다는 것. 모든 일은 지나간다.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의 방향이 달라진다. 중요하게 여겼던 가치가 별 거 아닌게 되기도 하고, 전혀 다른 시선으로 바라봐지기도 한다. 진지함도 좋지만 유쾌함도 나쁘지 않다는 걸 살아가면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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