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머니와 둘이서 사는 옥희. 사랑방엔 작은 외삼촌도 같이 있었는데 어느날 그 방에 사랑 손님의 오신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친구이자 큰 외삼촌과도 친구이신..그렇게 같이 살며 어머니와 사랑방 아저씨는 서로 짝사랑을 한다. 하지만 당시 사회적으로 재혼에 대한 시선은 정말 많이 부정적이고 비판적이었기 떄문에 둘은 사랑을 포기한 채 헤어지고 만다.나는 사랑방 아저씨와 어머니의 행동에 대해 아쉬움을 느낀다. 서로 사랑하는 데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사랑 아저씨는 너무 소심해서 어미니를 설득시키기 보는 한번 거절당한 걸로 그냥 포기를 했다. 만약 내가 사랑방 아저씨였다면 정말 어머니를 사랑했다면 절대 한번으로는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어머니 역시 소심했고 다른 사람의 눈을 무서워했다. 물론 재혼에 대해서 확실하게 승낙을 받은 건 아니었지만 조금씩 개방되어가면서 너무 틀에 매이지도 않았는데..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떄문에 재혼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처음에 갖은 사랑 손님에 대한 관심이 정말 진정한 것이었다면 사랑 손님의 고백에 좀 더 진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지금의 사회는 너무 사귀고 헤어지는 일이 만연하고 있다. 청소년만해도 그 모습을 잘 볼 수 있다. 정말 좋아하는 감정이 있기는 한건지, 아니면 상대방에게 물질적인것을 받기 위해서 사귀는 것인지 알 수 없을정도로 서로 사귀고 깨지는 것이 정말 쉽게 이루어지고 있다. 옛날에는 이런 일이 정말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사회가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이런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동들은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점점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주위 사람들에 대한 사랑도 식어가고 있다. 우리가 사랑을 할 때에는 적어도 물질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는 사랑이 아닌 정말 마음으로 사랑할 수 는 사람들이 될수 있으면 좋겠다.
이 책을 읽고 당시 우리나라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집에 가난해서 학교에 갈 수 없는 아이들이 배우기 위해서 초라한 예배당으로 모이는 모습이 눈물 겨웠다. 영신이 쫓아냈어도 공부하기 위해서 나무에 올라가 창문에 달라 붙어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지금의 우리는 공부하기 싫어서 학교에 안다녔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많다. 그리고 학교에 다녀도 공부도 잘 하지 않는다. 이런 우리들과 책속에 나오는 아이들을 비교해보니 내가 너무 잘못생각했다는 생각이들었다. 과연 내가 저 아이들이 되었을 때도 공부하기 싫다고 생각했을까? 지금은 1학년이 글씨를 모르면 무식하다고 그럴텐데 일제시대때는 나이가 많든 적든 한글을 잘 몰랐다는게 믿겨지지 않는다. 이 책을 읽고나면 내가 왜 공부를 해야하는지 공부를 할수 없다는게 어떤 것인지 알게 해줄것이다. 공부의 소중함을 느껴 열심히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어보기 전까지만 해도 운수좋은날은 말그대로 행운이 가득한 날이라고 생각해서 그날의 일을 표현한 소설이구나 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읽어보니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이 책 줄거리는 간단하다.김첨지는 병이란 놈에게 약을 주어 보내면 재미 들려서 계속 온다는 자기의 우직한 신조로 아픈아내에게 약마저도 주지 안았다.그러다가 비오던 어느날 아내가 김첨지에게 가지 말라고 했지만 가난 때문에 김첨지는 돈을 벌러 나갔고 그날 따라 돈을 많이 벌었다.김첨지는 집에서 가까워질 때마다 아내 걱정 때문에 갈등이 생겼지만,집에서 멀어졌을때는 뛴다기 보다는 날아 다니는 기분으로 일을 했다. 일을 다 마치고 술집에서 친구를 만나 자신이 힘들게 벌어온 돈을 내동댕이 치면서 화를 풀다가 아내에게 줄 설렁탕을 사들고 집으로 왔는데 어린아이는 울고 있었고, 환자를 거친 숨소리 조차 들리지 않았다.이러면서 이야기가 끝나는데 김첨지가 하는 욕을 통해서 그 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느끼고,왜 그런 말투를 썻는지도 이해가 갔다.이글을 읽으면서 그리 슬퍼서 울었던 장면은 없지만 꼭 모두가 한번쯤은 읽어봐야할 소설중의 하나라고 본다.
새로운 문화와 가치관이 밀려들어오는 그 시대에서, 동시대를 사는 삼대의 서로다른 삶의 모습과 시대상을 그려낸 작품이 바로 염상섭의 삼대이다.조병관, 조상훈, 조덕기.. 같은 현실에서 세가지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이다. 아직 봉건주의 시대에 살고있는 조병관과, 신문물이 들어오는 새시대에 살고있는 조상훈, 그리고 그 중간에 위치한 조덕기.. 어쩌면 이 사람들은 지금의 우리모습일지도 모른다.이 가족의 이야기는 철저하게 돈과 관련되어 일어난다. 돈을 노리고 첩으로 들어앉은 수원댁, 그리고 조병관의 돈을 노리는 그 친척들... 비록 30년대의 모습이라 하나 전혀 낯설지 않다.현실주의 문학이 그냥 그 시대의 모습만 담아내는데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그 속에서 지금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가치관의 혼란속에서 잃어버린 정신적 가치의 자리를 돈이 메꾸고 있는 지금의 모습이 바로 이 소설속에서 보여지고 있는 것 같다.
우리민족의 정서로 한을 꼽으면 아무도 이견을 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한을 얼마나 느끼고 있는가. 흔히들 팔자려니 업보라느니 하는 말을 잘쓰지는 않아도 생각은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의 정서 깊은 곳에는 그러한 한이 서려 있다. 우리 민족의 성격인 것이다.이 서편제는 이청준의 남도사랑 연작이라는 연작 소설중에서 소리의 빛, 서편제, 선학동나그네, 새와나무, 다시 태어나는 말의 연작이다. 이청준은 이 남도사랑 연작을 쓰는 시기에 맞추어서 언어사회학서설이라는 또다른 연작을 썼다. 따라서 이 두 연작을 같은 시기에 썼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함께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70년대에 이 작품을 쓰면서 작가는 현실의 억압적인 유신상황하에서 작가로서 진실을 표현하지 못하고 언어와 괴리되는 모습을 언어사회학서설에서 다양한 고민 지점으로 표현했고 이러한 고민과 번민에서 탈출을 시도한 것이 소리를 통한 그것도 한이 깊이 서린 서편제라는 소리를 통한 승화를 모색한 것이다. 결국 남도사랑연작의 마지막 다시 태어나는 말에서 작가 이청준이 작가로서 양심과 현실사이의 괴리를 극복하려는 힘겨운 고민과 번민의 모습을 볼수 있었다.가슴속의 한을 원망이나 복수로 갚지 않고 용서로 그것을 승화시킴으로서 자신의 창작으로 완성해 가는 것이 판소리의 소리의 득음과 관련이 있는 것에서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의 처지와 자신의 자세를 보이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