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 한 팀이 된 여자들, 피치에 서다
김혼비 지음 / 민음사 / 2018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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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읽던 #우아하고호쾌한여자축구 가 넘 좋아서, 문장 하나하나가 다 유쾌하고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다가 그만 읽고 침대맡에 고이 놔뒀다.
여기저기 추천과 감탄이 넘칠 때 나도 저 좋은 거 알아 으쓱하면서도 다 못 읽어서 말을 못 보탰다.
문득 위안이 필요해져 다시 읽으니 역시 넘 좋다. 이렇게 글을 잘 쓸 수가 있나!!!

문장마다 깨알같은 유머가 흘러 넘치고 문단마다 주옥같은 킬링&힐링 포인트가 알알이 박혀 있고 챕터마다 배우고 감동한다.

‘나‘의 직접적인 경험과 배움을, 축구의 용어와 룰을 자유자재 비유로 엮어, 날카롭지만 따뜻하게 사람과 삶과 관계를 조망하여, 솔직하고 유머러스하며 감동적인 책이 되었다.

전체를 살피는 현명한 눈과 집요하게 맨투맨으로 달라붙는 솔직한 관찰과 두 번 세 번 아니라 시종일관 꺾어 웃음을 터뜨리는 유머를 적극 추천한다.

나뿐만 아니라 축구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감독 할아버지의 웃는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앞에 가던 언니 셋도 공을 툭툭 차며 돌아본 것은 물론이고 경기 중인 선수들도 잠시 멈춰서 감독 할아버지를 쳐다봤다. 마치 몇 년에 한 번 핀다는 대나무 꽃처럼 희귀한 걸 본 놀라움에 젖어 있는 것 같았다. 아, 저 꽃이 지금 피어서는 안 되는데, 저거 내가 곧 꺾어 버리게 될 텐데.…. 큰일이었다. 저렇게 좋아했는데 그게 오해였단 걸 알면 크게 실망할 게 분명했다. 실망하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저렇게까지 극적으로 좋아하면 이쪽도 책임감 같은 게 생겨 버려 매우 곤란하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드리블도 어려운 일이고, 누군가의 오해를 푸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드리블하면서 오해 풀기‘ 같은, ‘누워서 떡 먹기의 완벽한 반대말 같은 것을 내가 할 수 있을 리 없다.

화산의 나라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거대한 화산이, 1910년에 마지막 분출을 했다는 화산이, 104년 만에 갑자기, 그것도 결혼 한번 해 보겠다고 잡아 놓은 날짜 언저리에 재분화를 시작했다는 이 믿기 어려운 소식에  매일매일 아이슬란드 항공 운항정보 사이트를 새로 고침하며 저 먼 나라의 화산 상태를 세계의지질학자들 다음으로 주시하고, 화산 폭발 시기 예측에 대해 세계의 지질학과 1학년 1학기 학생들만큼 공부하던 내게 친구들은 "네가 기어이 화산까지 움직이는구나.", "이런 마그마 같은 년 ㅋㅋㅋㅋㅋ" 따위의 문자들을 보내왔다. 

물론 이제 와서 ‘나의 시즌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라고 말하기에는 지난 5개월도 나에게는 충분히 ‘본격‘ 이었다. 하지만 어떤 본격은 다른 본격에 의해 갱신되기 전까지만 본격으로서 존재한다. 그보다 더 본격적인 것이 찾아오면 순식간에 ‘안본격‘인 것으로 성질이 바뀌는 것이다. 마치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면 그 이전까지의 연애들은 모두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한 시행착오의 과정이 되어 버리는 것처럼(물론 ‘그 사람‘도 ‘더 본격적인 사랑‘을 만나면 시행착오의 하나로 흡수되어 버릴 운명에 놓여 있다.) 이날을 기점으로 예전과 지금을 나누는 또렷한 선이 그어졌다. 비유적인 표현만이 아니다. 개인 훈련을 하던 피치 라인 바깥에서 이제 그 또렷한 선을 넘어 라인 안쪽에서 뛰게 되었으니까.

얼굴 어딘가에 도발적으로 도사리고 있는데 긴 머리에 가려져 제대로 발현되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할 상큼함과 신선함이 단발을 하는 순간 후두두둑 튀어나올 것만 같고,(하지만 긴 머리가 가리고 있던 건 단지 얼굴, 단지 그냥 얼굴뿐이었다는 슬픈 사실을 곧 마주하게 된다.) 머리 감고 빗는 시간이 줄어 편할 것 같고,(하지만 바쁜 출근 시간에 그놈의 뻗친 머리 펴느라 한참을 낑낑대고 나면 긴 머리보다 훨씬 손이 많이 간다는 사실 또한 마주하게 된다.) 잘려 나간 머리카락 무게만큼 마음도 홀가분해질 것 같고,(반짝 그런 효과가 있지만 앞의 사실들을 마주하면서 점점 무거워진다.) 등등, 어쩐지 삶 구석구석에 작게 뭉쳐 가끔씩 성가신 통증을 유발하는 근육들을 단발이 산뜻하게 풀어 줄 것만 같은 순간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하프라인은 고사하고 저 멀리 반대편 골대 근처에서 상대 팀 선수가 공을 가로채기만 해도 불안 불안하게 매달려 있던 목젖이 배 속 밑바닥으로 뚝 떨어지며 어딘가 움푹 파이는 기분이 들곤 했다. 선수들의 전진 패스에 따라 공이 (<슬램덩크> 시절 또 하나의 고전인 영화 <여고괴담>의 귀신 점프 컷처럼) 순식간에 턱, 턱, 턱 크게 다가올 때면 골문 따위 버리고 도망가고 싶어 반대쪽으로 몸이 움찔움찔하다가도, 골 먹히는 건 또 싫어서 다시 공이 날아오는 쪽으로 움찔움찔 움직인다. 그렇게 공이 날아올 때마다 진저리를 치며 자아가 분열하기 바빴다.
이런 형국이다 보니 첫 번째 게임에서 딱 네 번의 슈팅을 받았을 뿐인데도 슈팅 하나에 10년씩 늙은 것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경기가 끝나갈 즈음 나의 상태는 노년기에 접어들었을때 보일 법한 증상과 비슷했다. 에너지가 고갈되어 기력이 없었고, 축구장 끄트머리에 가만히 서서 정중앙에서 치열한 한때를 보내고 있는 펄펄 뛰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현명한 노인들이 세상을 조망할 때 으레 그렇듯이 선수 각각의 움직임과 전개 방식이 한눈에 훤하게 들어왔다. 게다가 역정도 잘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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