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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러비드
토니 모리슨 지음, 김선형 옮김 / 들녘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책 말미에서 세 번씩이나 강조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이 이야기는 언어로 전달될 수 없는 정도의 고통을 경험한 인물들의 이야기이다.
“이건 다른 사람한테 퍼뜨릴 이야기가 아니었다.”(455)
“이건 다른 사람한테 퍼뜨릴 이야기가 아니었다.”(455)
“이건 다른 사람한테 퍼뜨릴 이야기가 아니다.”(456)
노예농장에서 탈출한 주인공 세스(Sethe)는 노예사냥꾼들이 찾아오는 것을 보고 스스로 딸의 목에 톱질을 하여 딸이 노예생활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구해낸다. 자기 아이에게 줄 젖을 빼앗기고, 백인의 노리개가 된 아내에게 미안해서 손도 대지 않게 되고, 자신이 농장의 수탉보다 못한 것 같다는 절망을 갖게 되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붙잡혀 불에 구워져 죽어가고…… 자신이 보고, 듣고, 겪었던 인간 이하의 삶을 살게 하느니 차라리 죽음으로써 딸을 구하겠다는 것이었다.
“이거 하나만 말해주세요. 깜둥이는 얼마나 많이 참아야 하나요? 말해주세요. 얼마나?”
“참을 수 있을 만큼 참아야지.” 스탬프 페이드가 말했다. “참을 수 있는 만큼.”
“왜요? 왜요? 왜요? 왜요? 왜요?”(394)
“저 하얀 것들은 내가 가졌던 것, 내가 꿈꿨던 모든 것들을 빼앗아갔다.”
베이비 석스는 말씀하셨다.
“그리고 내 심금을 다 끊어놓았어. 세상에 불운이란 건 없어. 오직 백인들이 있을 뿐이지.”(156-157)
이런 고통 속에서 살아가던 흑인들이 탈출하여 만든 마을이지만 오히려 그런 이들이기에 이웃의 작은 행복에도 질시를 느낀다. 세스의 귀환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한 잔치에서 모종의 오만함을 느낀 이웃들은 세스를 잡으러 온 백인들의 존재를 알려주지 않아 세스가 자신의 딸을 죽이는 살인과정을 방조하는 셈이 된다. 이후 누구도 이 사건과 이 집의 인물들에 대해 말을 하기 꺼렸을 것이고 세스 일가는 마을에서 고립된다. 가장 고통스러웠떤 것은 아무래도 제 손으로 딸을 죽였던 세스였겠지만, 언니의 피가 묻은 젖을 물었으며 자기도 엄마 손에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엄마에 대한 사랑을 함께 느꼈던 덴버, 때마침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어서 세스의 행위를 막을 수 없었으며 이 사실을 폴 D에게 전해주어 자책을 하는 스탬프 페이드, 믿을 수 없는 살인 사건을 전해들어야 했던 폴 D, 그리고 환생해서 돌아온 빌러비드, 또한 이 일을 보고 들었으며 방조했던 모든 마을 사람들.
비록 노예제 밖에서(진정 밖이라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자신들의 공동체를 만들었을지언정 이들은 진정으로 해방된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으며, 자신들이 만들어낸 고통 속으로 스스로 휘말려 들어가 허우적대고 있다.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와 자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서로에 대한 미움과 경계를 풀고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억울하게 죽은 영혼과 고통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줄 수 있을까. 이 책은 따라서 말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삶답지 않은 삶을 삶으로 만들어내는 것에 관한 이야기, 즉 구원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 구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부정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것(이 작품의 경우에는 노예제도에서 백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나 예외적인 백인의 시혜를 통해 ‘스위트 홈’ 같은 농장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구원은 자기 파괴를 감행하면서도 이 부정한 세계에서 통용되는 법이나 공동체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윤리에 도달하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세스와 같이 거대한 죄책감을 갖게 되거나 이웃들로부터 외면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침으로써 자신의 인간적 존엄성을 확인해주는 사랑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시이드는 목을 채운 쇠고랑에 대해 한 번 언급도 하지 않고 심지어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짐승처럼 족쇄에 채워져 있다는 비참한 수치를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오직 이 여자 시이드만이, 그렇게 그가 남성다움을 지킬 수 있도록 해줄 수 있었다. 그는 자기 사연을 그녀의 사연 옆에 나란히 놓고 싶었다.
“시이드. 당신하고 나, 우리한테는 누구보다 어제가 많아. 이제 어떤 식으로든 내일이 필요해.”
그는 몸을 앞으로 숙이고 그녀의 손을 잡는다.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당신, 당신이 제일 귀해. 시이드, 당신이.”
그의 든든한 손가락이 그녀의 손을 잡고 놓지 않는다.
“내가? 내가?”
가장 나락으로 떨어짐으로써만 가장 높은 곳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것. 『빌러비드』는 비극적 구원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오랜 시간 침묵으로 머물 수밖에 없었던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었던 80년 광주에서 절대공동체의 형성과 분화 과정을 그린 『오월의 사회과학』 집필에 이 작품이 많은 영감을 주었다는 데에 수긍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