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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진 여름
전경린 지음 / 다산책방 / 2025년 8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산책방에게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이고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삶이 깊어지면 개념은 없어진다.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이미 규정된 관념이 아니라 그 너머 저마다의 낯선 벼랑길을 걷는다. 그래서 생은 여전히 미확인적인 유혹을 생산해 내는 것이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경험은 당신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일어나는 무언가로 당신이 어떻게 하는 것이라고.
🔖뭔가를 원하는 순간, 의지를 갖는 순간의 긴장과 구차함이 견딜 수 없이 싫었다. 욕망을 갖기 시작하면 하나에서 열까지 필요한 것투성이였다. 갖추려 들기 시작하면 마음은 들끓고 몸은 분주해지고 눈빛은 불안해지고, 나날은 위축되고 누추해질 것이었다.
🔖“사랑이란 동시성을 잃고 시간 밖에서 생각하다 늘 그렇듯이 의심스러운 거야. 그건 어느 시기에 두 사람의 발이 한 데 묶였던 어떤 사건일 뿐인지도 몰라.”
🔖“사랑은 말이야. 처음부터 시작돼, 탄생과 함께. 그러니까, 사람은 저마다 자신이 만날 사랑을 키우면서 성장하는 거야.“
🔖그는 나에게 꽤 많은 것을 가르쳤고 많은 것을 주려고 했다. 하지만 사랑은 아니었다. 절대로.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느끼지 않겠다고, 살기 위해 아무 느낌도 없이 이 시기를 보내겠다고 결심하기도 전에 나는 이미 얼음 나라의 주민처럼 나 자신의 투명한 감시를 받으며 갇혀버렸다. 슬픔은 알려진 것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전에는 예외적인 특별한 경험만이 사람을 변하게 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모든 하루하루가 사람을 변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가장 평범한 하루하루가.
💭
이 소설은 25세의 지방 방송국 라디오 작가인 화자 ‘은령‘과, 사랑에 상처받고 사랑에 빠지기를 두려워하는 시인 ’유경’, 그런 유경의 오랜 지인이자 부유한 바 사장 ‘이진‘ 세 사람의 얽히고설킨 관계와 그 속의 사랑, 욕망, 균열을 그린 이야기이다. 하루만에 다 읽어버렸을 정도로 몰입감이 대단하면서도 파국이 예정되어있는 관계들이 깊어질수록 내 숨이 턱 막힐 지경이라 가쁜 호흡으로 읽어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은령은 유경과 자연스레 이끌리며 사랑에 빠졌지만, 늘 유경의 곁에 있는 이진의 유혹에 굴복하고 그를 통해 태어나 처음으로 욕망에 눈뜬다. 겁내면서도 온 힘을 다해 자신이 가진 거의 유일하고 가장 소중한 것, 사랑을 주려 했던 유경과의 관계는 서로를 원해서 끌어당기는 자석같았다.
반면 먹는 것, 입는 것, 사는 곳까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충족 위한 의식주를 넘치게 채워주면서도 단 하나, 사랑만큼은 절대 주지 않는 이진과의 관계는 마치 태양과 지구를 연상케 한다. 지구를 강력한 힘으로 끌어당기며 적당한 거리에서 생명의 온기를 내주지만, 결코 가까기 다가갈수도 멀어질수도 없는 관계인 것이 그랬다. 어떻게 한 사람에게 두 개의 사랑이 존재할 수 있을까 고민했을 때, 자력과 중력처럼 애초에 각자 다른 성질의 감정이었던 것일 수도 있었겠다.
#스포주의
은령의 행동들에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을 때마다 그가 기댈 곳 없는 25세의 젊은 여성임을 되새기면 모든 것이 납득되었다. 사랑에 방어적인 수밖에 없었던 유경은 말할 것도 없이 가장 안타까운 인물이었지만, 이진의 속내가 가장 이해되지 않아서 덩달아 답답하고 궁금했다. 그런데 그가 사랑을 ‘머물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에 해답이 있었다. 유경의 곁에 ‘머무르려‘하는 여자들을 떠나게 만들고, 결국 상처받고 지친 유경이 ’머무를‘ 유일한 곳이 자신이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작가의 의중은 알 수 없지만 독자의 권한으로 감히 상상해본다.
#스포해제
작품 속에 꾸준히 등장하는 ‘레이스’라는 소재도 눈여겨볼 만하다. 촘촘하지 못해 한없이 연약해보이지만, 위에 마지막으로 인용한 구절처럼 하루하루 묵묵히 떠내려가다보면 어느 순간 되돌아봤을 때 아름다운 하나의 작품이 되어있다는 점에서 우리 삶과 닮아있다.
표지의 석류가 인상깊어 찾아보니 보통 문학에서 석류는 유혹, 금기, 욕망을 의미한다고 한다. 성경 속 선악과라는 욕망을 알게 한 금단의 열매이자, 겉과 속이 다른 이중성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에 가장 잘 어울리는 메타포인 듯하다.
산뜻하고 경쾌한 소나기같은 여름 책들이 조금 질렸다면, 장마처럼 끈적하고 답답해서 숨막히지만 참을 수 없이 매혹적인 이 책에 꼭 도전해보시라 추천하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