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귀도
조동신 지음 / 아프로스미디어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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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마을을 떠나던 날, 웃음을 잃어버린 여자아이는 아무 말 없이 아버지가 빠진 둑길이 있는 방향을 한동안 노려봤다. 그리고 15년의 시간이 흘렀다. - pp. 13-14


바다에 있는 아귀도라는 섬에 고립되어 일어나는 클로저드 서클 속 연쇄살인. 살인마와 괴물이 함께 등장하는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이라니. 여름이라는 계절에도 딱 알맞고 제 취향에도 딱 들어맞지 뭐예요. 그냥 무작위 살인도 아니고 각자가 연결되어 있는 듯 보이는 찜찜한 관계 속 명석하게 추리를 하는 학생도 한 명! 어떻게 보면 혼종 속의 혼종이나 다름 없는데 기대가 되는 혼종(?)이라 많이 궁금해지던 조동신의 소설 아귀도.




문승진은 문주란호를 보며 생각했다. 아버지도 분명 이렇게 생긴 낚싯배를 타고 저 앞바다 어딘가로 가서 사라져 버린 것이라고. 그곳이 어딘지 몰라도, 그곳이 지옥의 입구인지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구멍인지 몰라도 그곳을 내 두 눈으로 꼭 확인하고 싶다고. - p. 43


15년 전 괴 생명체에 의해 아빠를 잃은 소녀가 한 명 나오고 시점이 바뀌어 지금. 아귀도 근처에서는 수상한 실종사건이 많이 일어납니다. 한 두명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 배 자체가 실종되는 일이 두 번이나 벌어지다보니 사건을 아는 사람은 아귀도 자체를 꺼려하게 되는데요. 이 배 실종사건 중 피해자의 아들 문승진이 실마리를 찾기 위해 현장을 찾아가는거죠. 거기서 만난 고생물학과을 전공한 후배 민희주와 함께 아버지의 죽음에 뭔가 연관되어 보이는 낚시모임에 참석하게 됩니다. 괴상한 닉네임들을 내세운 어딘가 수상한 사람들.




이름만 아귀도인 줄 알았더니 정말 아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북쪽은 표면이 깔끔하고 경사가 완만한데 남쪽은 최근에 잘려 나간 것처럼 가파르게 되어 있어서 바위덩어리처럼 보였다. 절벽 밑에는 암초가 많아서 마치 아귀가 입을 벌린 모습 같았다. 암초들의 형상이 아귀의 이빨을 연상시켰다. - p. 55


아니나 다를까 실종된 아버지와의 관계가 속속들이 드러나게 되는 사람들. 이 낚시모임에 참여한 동기마저 수상쩍은데요. 대화를 할 때마다 딱 봐도 우연이 아니라 악연이라는 것이 명백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클로저드 서클 환경이 마련이 되는데요. 실종된 배처럼 이번에 문승진이 탑승한 배에도 문제가 발생하는거죠. 같은 현상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배에 더이상 있을 수 없어 헤엄쳐 피신해 도착한 곳이 바로 아귀도 였던 것입니다. 아주 불길하고 굉장히 흥미롭죠.




하지만 제가 봤을 때 그동안 이 섬에서 발생하 살인 사건과 여러분의 아이디에는 연관성이 있는 것 같아요. 그건 바로 '대멸종'이죠. - p. 235


수상한 생물체와 마주쳐 심각해지기도 하는 한편, 따로 떼어놓고 보면 정말 전형적이게도 고립된 아귀도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지고야 마는데요. 처음에는 명확한 살인이었지만 그 뒤로 이어지는 죽음은 석연찮은 면이 있어 등장인물들의 혼란을 초래합니다. 두려워 혼자 있기를 바라다가 죽어간 사람으로부터 사건의 실마리를 얻게되고, 그로 인해 점차 사건의 진실에 가까워 지는데요. 두려워해야하는 존재가 살인자만이 아닌 괴물까지 있어 고려해야할 점이 많아 흥미로웠어요.




비밀 봉투에는 죽은 치어가 한 마리 있었다. 크기는 팔뚝만했지만 심해어를 포함한 몇 종의 물고기가 혼합된 듯한 기괴한 생김새가 혐오감을 주었다. 특히 뾰족하고 촘촘한 이빨들과 험악한 인상이 지옥에서 온 물고기 같은 인상을 주었다. - pp. 266-267


과연 아귀도에 남아 살인자에게 죽을 것이냐,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 괴물이 있는 바다로 나아갈 것이냐. 에 초점이 맞춰진 이야기가 아니라, 도대체 왜 누가 우릴 죽이려고 하는 것이냐, 목적이 무엇이고 왜 이런 방식을 채택했느냐에 중점을 두고 있어서 상황에 몰린 사람들 같지 않게 침착해 이것 또한 신선했는데요. 촘촘한 심리 스릴러보다 지겹지 않은 미스터리 스릴러를 좋아하는 분들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 같은 조동신의 아귀도. 비오는 날 보면 좀 더 몰입해서 볼 수 있을 것 같은 축축한 이야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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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레터
이와이 슌지 지음, 문승준 옮김 / 하빌리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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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충격에서 미처 헤어나지 못한 채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을 다 쓸 무렵에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평온해질까? 네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될까? - p. 9


러브레터로 아주 잘 알려진 이와이 슌지 감독. 이번에도 첫사랑의 이야기를 들려주네요. 소설 라스트 레터는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하는데요. 이번 이야기는 책으로 먼저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24년 전의 추억으로 첫사랑을 기억하고 있는 소설가 오토사카 교시로가 첫사랑의 죽음을 알게된 후 자신의 시점에서 첫사랑의 죽음과 그 일을 알게된 경위, 밝혀지는 진실을 잔잔하게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로부터 24년. 모든 건 오랜 옛날의 일이다. 서로 꿈을 꾸던 시절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갔고 당시의 일도 이제는 그리운 추억일 뿐이다. 아직도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상심 또한 오래전에 치유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네가 건 마법이 아직도 풀리지 않았따. 너를 만난다면 과연 너는 네가 나에게 건 이 마법을 풀어줄까? 아니다.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24년 만에 너를 만남으로써 내 스스로 결판을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너를 만나서 아직 꺼지지 않은 내 꿈의 불씨를 끄자. 소설가를 그만두자.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 p. 33


모든 것은 동창회로부터 시작됩니다. 유명인사가 된 동창이 동창회를 주최하면서 오토사카 교시로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 첫사랑 미사키를 떠올리게 됩니다. 동창회야 나가도 안나가도 그만이지만 미사키를 만나게 되면 자신의 한 부분에 매듭을 지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나가기로 결심하게 되는거죠. 중학생 시절에는 인기있는 축구부 주전이었던 터라 현재의 보잘것 없는 자신과 셀프비교하며 자조하던 찰나 자신을 미사키라고 소개하는 타인을 마주하게 됩니다. 고작 중학교 3년 중 1년을 공유했던 터라 남들은 다들 깜빡 속아넘어가지만 미사키와 깊은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교시로만이 알아보는거죠. 이 사람은 미사키가 아니라는 것을.




대학 시절 너와 둘이서 흠뻑 젖어 돌아왔던 밤이 생각났다.

너를 만나고 싶어.

널 만날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 p. 209


도대체 왜 이 사람은 미사키를 사칭하는 걸까? 이 사람과 연락을 주고받게 되면 미사키의 근황을 알 수 있게 될까? 하는 호기심에 교시로 또한 장단을 맞춰주게 됩니다. 교시로가 자신을 미사키로 생각하는 것을 알게 된 그 사람은 연락처를 교환하고 몇 번 연락을 주고받죠. 그런데 하필이면 교시로가 미사키에게 미사키를 생각하는 마음을 보낸 것이 해프닝으로 번지게 된 모양입니다. 그 사람은 휴대폰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고 교시로는 편지를 받게 됩니다. 주소를 알 수 없으니 일방적인 편지를 받게 되며 그 사람의 일상을 알게 되는 교시로는 미사키의 근황이 궁금한 나머지 결국 미사키의 주소를 알아내 편지를 하게 되는데.. 그 사람이 편지를 보낼 때마다 말미에 잊어줘. 이게 마지막 편지야. 이런 식으로 적어서 라스트 레터인가 생각하고 있었는데 미사키에게 편지를 보냈을 때는 이래서 소설 라스트 레터인가 싶기도 하더라구요.




서로 아이디어를 내고 문장으로 다듬는 작업을 하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너는 완성된 문장을 내 앞에서 읽어 보았다. 나는 그 한마디 한마디를 전부 기억한다. 너의 목소리는 지금도 내 귓가에 남아 있다. - p. 229 


그렇게 교시로가 보여주는 자신의 기억, 그리고 연결된 상황을 따라가다보면 상황이 재미있게 꼬이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진실이 밝혀져 재미있었던 이와이 슌지의 소설 라스트 레터. 제목의 의미는 마사키의 유서가 아닌가 싶기도 했고 여러모로 궁리해보게 되네요. 중학교 축구스타,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창작에 몰두하는 작가 등 제가 초반에 연상했던 교시로의 이미지가 주변 사람과의 관계에서 박살나는 것도 흥미롭고 좋았습니다. 세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먹먹하거나 여운이 남는다기보다 이런 전개의 결말이 바로 이 소설 라스트 레터가 아닌가 싶어 재미있었고 영화로 보면 또 다른 느낌일 것 같아 궁금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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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지않아 이별입니다
나가쓰키 아마네 지음, 이선희 옮김 / 해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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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언니와 내가 만나는 일은 없었다. 언니는 나와 만나기 전에 멀리 날아가버렸다. - p. 9


누구나 꼭 거쳐가는 인생의 마지막 관문. 하지만 기쁘게 맞이하기 어려운 단계라 그렇게도 이별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고인과 이별한 나의 감정을 다스리는 법에 대해 꽤 관심이 있어 관련 책도 여럿 읽어보곤 했었는데요. 최근 나가쓰키 아마네의 머지않아 이별합니다 라는 책이 눈에 들어오더라구요. 당사자가 아닌 주변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죽음과 죽음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니 흥미로웠거든요.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나에겐 한 가지 능력이 있다. 기(氣)에 민감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이 성가실 만큼 전해지거나 상대의 온몸에 깃들어 있는 생각을 느낀다. 살아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도 포함된다. 일반적으로 영감(靈感)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 p. 28


이 이야기는 반도회관이라는 장례업체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담담하게 그들의 시선에서 각각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의미가 있었을 것 같은데 나가쓰키 아마네의 머지않아 이별입니다 에서는 한가지 특별한 장치를 준비합니다. 주인공인 스미즈 미소라도 그렇고 함께 일하게 된 직원들도 죽은 사람의 기척이나 감정을 느낄 수 있는겁니다. 실제로 볼 수 있는 사람도 있구요.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어떤 사람이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죽음을 맞이한다. 아무리 의학이 발전했다 해도 인간에게는 반드시 끝이 있다. 남겨진 사람들은 죽은 자를 애도하고 슬퍼하고 배웅하며 가끔은 삶에 대해 생각한다. 면면히 이어지는 슬픔의 감정은 시대와 관계없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인간의 그런 근본적인 부분을 받아들이는 공간이 바로 반도회관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마지막 시간. 그 시간에 관여하는 게 나에겐 매우 숭고한 일처럼 여겨졌다. - p. 97


아무래도 죽은 사람의 유가족들만을 담지 않고 그들의 스토리와 이별을 맞이하는 방법을 각각 보여주기 위한 장치가 아닌가 싶었는데 좀 판타지 적인 장치가 등장하자 과몰입해서 슬픔에 잠기지 않고 거리를 유지하며 보게 될 수도 있고 여러모로 저한테는 좋더라구요. 요즘은 너무 슬픈 건 보고싶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각각의 죽음에 그들만의 이야기가 있고 그 점을 유가족 뿐 아니라 죽은자에게서도 힌트를 얻어 죽음으로 인한 이별을 결국 받아들이게 하는 직원들의 노력도 굉장히 좋게 보였습니다.




여기는 결코 희망이 없는 곳이 아닙니다. 소중한 가족을 잃고 힘든 상황에 놓인 유족들이 처음으로 접하는 사람들이 바로 저희들이죠. 저희는 그런 유족들의 슬픔을 받아들이고 그 슬픔에 매듭을 지어줌으로써 그들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물론 때로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유족에게 감정 이입을 해서 슬픔에 빠지기도 하지만요. - p. 201 


이야기는 크게 3가지로 나뉘고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까지 합하면 5장으로 볼 수 있는데요. 프롤로그에서는 주인공 미소라와 주인공의 언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이별을 겪은 주인공에 대해 알 수 있고 1장에서는 반도회관이라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공간에서 일하게 된 주인공에 대해 알 수 있어요. 그리고 여기서 특별한 죽음을 주로 보내주는 우루시바라 라는 직원이 나오죠. 처음 만나 같이 추모식을 준비하고 미소라의 특별한 능력에 대해 인지한 우루시바라는 2장에서 자신을 도와 같이 일을 하자고 제안합니다.




사람을 보내는 일을 하는 사이에 깨달은 게 있다. 죽음은 특별한 게 아니라 나의 가까운 사람에게도 반드시 찾아온다는 걸. 아무리 붙잡고 싶어도 손가락 사이를 스윽 빠져나간다는 걸. - pp. 296-297


그렇게 취업준비를 하다가 다시 돌아가게 된 장례식장 반도회관에서 보람을 느끼고 자신의 진로를 찾아가게 되는 미소라. 죽음이라는 한 단계를 준비해주며 본인 자체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해가는 성장소설이 아닌가 싶었는데요. 프롤로그에 언급된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더라구요. 죽음을 준비하다가 죽음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되며 스스로도 이별을 준비하는.. 여러모로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어 좋았던 나가쓰키 아마네의 머지않아 이별입니다 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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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의 타자기 미스티 아일랜드 Misty Island
황희 지음 / 들녘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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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은 서영이 작가가 될 거라고 자랑하곤 했다. 타자기는 그때 당선을 축하한다며 친구 우탁이 사준 것이다. 우탁은 서영을 기린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길 좋아했다. 기린이란 '재능이 남다른 사람'을 부를 때 붙이는 이름이며 상상 속의 동물이기도 하기에 우탁의 선물엔 '이 타자기로 네 상상력을 마구 쏟아내길 바란다.'는 뜻이 숨겨져 있었다. - p. 38


기발한 설정과 매력적인 캐릭터로 재미있는 서사를 보여준다고 하는 황희가 쓴 기린의 타자기. 제7회 교보문고 스토리공모전 중장편부문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는 이력이 있는 작품입니다. 다중액자식 구성이어서 초반에는 시점을 따라가기 벅찰 수도 있으나 이런 방식을 왜 취했는지 깨닫고 나면 이해할 수밖에 없어지기도 하더라구요. 이 이야기에는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는 딸 지하와 결혼 후 학대를 당하고 있는 엄마 서영이 나옵니다. 그리고 둘의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진행되는데, 지하가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덕분에 독자인 제 입장에서는서영쪽에 몰입이 더 되었지만 결국은 둘 모두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아픈 이야기였어요.


남편이 던진 타자기에 얼굴이 짓이겨져 스스로 생을 마감한 나의 어머니에게 - p. 41


남편이 던진 타자기에 얼굴이 짓이겨지다니.. 이 문장을 읽은 순간 헉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였는데요. 그래서 이 문장이 어떤 서사에서 응축된 문장일지 궁금해지더라구요. 여기에 나오는 '나의 어머니'란 이야기의 또 다른 주인공 서영을 말하는데요. 친정쪽의 계략으로 인해 강제로 결혼해 시댁에서 모든 가족에게 학대를 받고 있는 가여운 인물입니다. 국회의원이자 유명 교회를 설립한 시아버지, 그리고 서울시의원이자 그 교회의 목사를 맡고 있는 남편. 대외적인 이미지를 중요시해 외부에서는 온화한 가정을 연출하는 이들은 집안에서는 악마로 돌변합니다. 서영 뿐만이 아니라 둘 사이의 딸 지하와 아들 지민에게까지 정도는 약하지만 같은 학대를 일삼죠.


로그아웃. 지하는 보청기를 빼 주머니 속에 넣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보청기를 뺀 상태를 '로그아웃'이라고 불렀다. 이 세상으로부터의 로그아웃. 얼마나 멋진 말인가. 보청기의 힘을 빌려서라도 듣고 남들에게 정상으로 보이기 위해 애쓰는, 그런 삶으로부터의 탈출. 로그아웃하면 그 모든 노력을 내려놓을 수 있다. 일종의 포기였지만 묘하게도 포기하는 순간 오히려 불안감으로부터 해방된다. - p. 82


황희의 기린의 타자기에서는 이런 현실에서 청각장애까지 앓고 있는 지하는 현실에서 로그아웃한다는 표현을 쓰며, 백일몽에도 종종 빠져듭니다. 순간이동 능력이 있는 지하는 누군가를 구하기도 하고, 능력을 써서 쫓기기도 하고 여러 위기상황에 빠지지만 대처해가며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데요. 가정에서의 학대와 장애로 인한 원만치 못한 교우관계 등으로 결핍된 것을 글을 쓰며 극복하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글재주가 있던 서영이 현실과 타협해 재능을 접고 현실에 순응하고 살아가는 것과 달리 강한 자아를 가지고 있어 존경스럽더라구요.


엄마가 말하는 그 '현재'가 바로 지금 이 순간이야. 매시, 매초 '지금 이 순간'이 주어진다는 게 기쁘지 않아? (중략) 그러니까 엄만 방금 엄마가 말한 것처럼 '현재가 만족스러운 사람'이 될 기회를 죽을 때까지 갖고 있는 거야. 매시 매초 지금 이 순간이 주어지니까. - pp. 387-388


이런 지하로부터 몰래 발송된 지하의 첫 책 '조용한 세상'. 가정에서 유일하게 서영을 안쓰러워하는 도우미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손에 얻게 된 이 책을 읽으며 서영은 점차 자신의 상황을 다시 되돌아보게 됩니다. 조용한 세상에서와 다른 지하를 떠올리며 자신도 그 안에 있는 서영과는 다른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서영. 그리고 전개됨에 따라 지하의 능력이 어떻게 가지게 된 능력인지도 풀리게 되며 좀 더 납득할 수 있게 만들어주던 기린의 타자기. 상황에 짓눌려 자신을 찾지 못하던 인물이 어떻게 책 속의 조용한 세상과 달리 어떻게 심경이 변해가고 행동하는지 지켜보는 재미가 있는 가슴이 뭉클해지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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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1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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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는, 나만큼은, 그게 안됐다거나 불쌍하다고는 생각 안 해요. 걔는 분명 도넛 한가운데는 먹었을 테니까. 가장 맛있는 건 다른 사람은 모르는 도넛 한가운데. 하지만 그걸 아는 사람은 도넛을 만든 적 있는 사람뿐이죠. 걔의 진짜 기분 같은 건 분명 아무도 보를 거예요. 있는데 안 보이는 게 아니라 도려냈으니까. - p. 94


자신이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사진이나 영상으로 쉽게 본인도 인지할 수 있는 세상. 독설이 솔직함으로 포장되어 무례함도 어느 정도 관대하게 받아주는 사회적 시선 덕분에 쉽게 외모지적을 당할 수도 있죠. 그래서 그런지 정말 어느 때보다도 외모지상주의라는 단어가 와닿는 시대에 미나토 가나에도 미용에 관한 책을 냈더라구요. 그게 바로 이 조각들 입니다. 고백이라는 작품 이후로 참 눈여겨보고 있는 작가라 왜 하필이면 조각들일까? 그리고 도넛과 줄자, 날카로운 유리와 개미는 어떤 의미일까, 보이는 그대로 직관적인 의미일까 기대하며 읽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다른 눈을 내려주셨단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똑같은 걸 갖고싶어해서 쟁탈전이 벌어질 테니까. - p. 220 


당연히 씁쓸한 이야기일 건 예상했지만 생각보다도 보면서 더 답답하더라구요. 원래 책은 한큐에 읽는 걸 선호하는 타입이라 이 정도 페이지면 펼치자마자 바로 끝장내는 편인데 답답해서 한 세 번쯤 자체 휴식시간을 주고 다른 활동을 했던 것 같아요. 미나토 가나에의 조각들 에서는 엄청난 수의 도넛에 둘러싸여 한 소녀가 자살합니다. 누군가는 미소녀라 했고 또 누군가는 가장 뚱뚱한 여자애라고 하죠. 자 벌써 확 끔찍하면서도 흥미가 돋지 않나요?




놀림당하는 쪽에 득이 없을 때는 애정으로 놀린다고 말하면 안 돼요. 놀린 쪽이 재치 있는 말을 했다면서 만족할 뿐이라면 그건 괴롭힘이죠. 자기 기분이 좋아지려고 타인의 존엄을 짓밟는 거니까 그렇게 판정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 p. 256


누군가의 눈에 왜곡이 있었던 걸까요, 아니면 실제로 소녀가 고무줄 몸무게였던 걸까요.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중요한 건 시골에 사는 여자애가 죽었는데, 그 죽음의 이유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고 그 여자애의 외모에 초점이 맞춰졌다는 점이죠. 이 점이 프롤로그 나오기 전부터 참 쎄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 이야기 전체가 온통 외모에 관한 각 등장인물의 관점과 사건에 대한 선입견으로 점철되어 있더라구요.




자기가 보고 싶은 풍경을 떠올리면서 구멍 건너편을 보는 거야. 그러고 나서 그 도넛을 먹으면 구멍 너머로 그린 풍경이 현실이 돼. 그러니까 소원이 이루어지는 건데, 엄마는 도넛을 못 먹으니까 유우가 먹어줄래? - pp.264-265


히사노라는 성형외과 의사가 있습니다. 바로 그 시골 출신이면서 미스 재팬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성공한 의사입니다. 히사노의 다치바나 뷰티클리닉은 외모를 바꿔 행복을 거머쥘 수 있다면 그 행복을 쥐어주기 위해 도울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데요. 미나토 가나에의 조각들은 이 히사노의 교칙이란 심야 토론 라이브를 프롤로그로 시작해 상담, 그리고 직접 사건 관련자를 추적해 인터뷰를 하는 히사노의 심경이 서서히 변해 에필로그에서 반영이 되는 점이 재미있더라구요. 책을 다 읽고나면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만 한번 쭉 다시 읽어보는 것도 이 책을 더 즐길 수 있는 방법일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행복하게, 행복하게 살쪄갔어요. 제 군살은 어머니하고 다정한 주위 사람들한테 받은 사랑의 덩어리예요. - p. 284


도넛에 감싸여 자살한 소녀의 이름은 유우. 뚱뚱하지만 매력있는 여자애. 유우에게 몸무게는 별로 핸디캡이 되지 못했죠. 운동도 잘 했고, 쾌활했고, 교우관계도 원만했어요. 그렇다면 대체 이 아이는 왜 자살한걸까요? 그리고 히사노는 왜 이 아이의 죽음에 주목해서 관련자들을 쫓아다니는걸까요? 이 의문이 예상치 못한 이유로 풀린 것도 뜻밖이어서 더 남는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마다 비슷해 보이지만 조금씩 들어간 곳이나 튀어나온 곳이 다른. 꼭 겉모습만 그런 게 아니라 내면 역시 조각 형태로 나타납니다.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고, 좋아하는 게 있으면 잘 못하는 게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이라는 조각이 만들어집니다. (중략) 억지로 끼워 넣으면 주위 균형도 깨져버립니다. 조금 형태를 바꾸면 잘 들어갈 텐데. 그게 외모의 문제라고 느끼는 사람이 병원 문을 두드립니다. 혹은 과거에는 딱 들어맞았는데 서서히 이질감을 느끼게 됐다. 잘 속해 있던 시절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 그 형태에 조금이라도 다가가고 싶다. 이렇게 바라며 병원 문을 두드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대환영입니다. 형태를 보정한 뒤의 행복한 그림이 보인다면. 하지만 한 가지 기억해두셨으면 하는 건 자기가 이상이라 생각하는 형태가 타인에게도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겁니다. - pp. 300-301 


미나토 가나에의 조각들 에서는 1장부터 6장까지는 모두 히사노와 대화를 나누는 화자를 보여주고 있는데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하고는 히사노의 의견이나 대사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 온전히 각 장의 중심인물의 사상만을 알 수 있게 집필한 것도 흥미로워요. 히사노와 대화를 하고 있지만 히사노 부분은 모두 삭제되고 화자의 대사 부분만 수록되어 있어 독특하더라구요. 1장은 처음 히사노의 학창시절에 알던 동창 시호가 지방흡입을 받고 싶다며 히사노를 찾아오며 시작됩니다. 그리고 시호와 히사노의 또다른 동창 64kg이라 놀림을 많이 받았던 요코아미 아예코라는 인물이 언급되죠. 2장에서는 아이돌 아미가 학교 후배로 등장해 코수술을 상담받으며 요코아미 아예코의 딸 유우에 대해 이야기하구요. 이런 식으로 각 장의 화자들은 서로 몇 다리 걸쳐서라도 모두 연결되어 있고, 그 사건에 대한 자신의 선입견을 늘어놓죠. 유우의 엄마의 동창, 유우의 동창, 히사노의 동창이자 전남자친구와 유우와 이인삼각을 했던 그 아들, 그 학교의 선생, 유우의 담임, 유우의 엄마 요코아미 아예코, 그리고 기리 유우 본인의 기록까지. 점차 사건의 본질로 갈 수 있는 인물로 좁혀져가는 구성이 완전 좋았습니다.




자기가 만들고 싶은 그림에서는 부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조각이라도 그 조각이 딱 들어맞는 곳이 반드시 있습니다. 반대로 자기가 들어맞는 그림을 그릴 수 없는 경우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럴 때도 원하시면 상상해주세요. 그 그림을 함께 상상해봅시다. 당신이라는 조각이 딱 들어맞는 장소는 반드시 있으니까요. - p. 301 


각 장의 인물이 그 자신이 겪은 환경요인에 의해 외모에 대해 느끼는 의견이 모두 다른 것도 분석해보게 되던 이야기. 목차의 각 장을 구분짓는 내지엔 모두 도넛이 들어가지만 각 이야기를 충분히 함의하고 있다는 점까지 저에겐 참 극호였어요. 이런 지점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미나토 가나에의 조각들 읽으며 직접 각 장의 그림들을 보고 이야기를 곱씹어보는 것도 좋을 듯 해요. 미나토 가나에의 조각들 에서는 작가가 책 전체를 통해 아름다움과 행복의 상관관계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히사노는 에필로그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데요. 독자 스스로가 이 질문에 대한 자신의 답을 찾고 히사노의 답과 비교해보는 것도 참 재미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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