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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점 ㅣ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20년 9월
평점 :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백 개의 초를 켜 두고 이야기 하나가 끝날 때마다 하나씩 꺼 나간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자리는 점점 어두워지고 마침내 백 번째 이야기에 다다르면 어둠에 휩싸여 진정 괴이한 일이 일어난다고 한다. 미시마야의 특이한 괴담 자리에서는 가게 안쪽에 있는 '흑백의 방'으로 한 번에 한 명, 또는 한 무리의 이야기꾼을 부른다. 마주 앉아서 귀를 기울리며 듣는 이도 한 명이다. 거기에서 오가는 이야기는 결코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
"이야기하고 버리고, 듣고 버리고."
이것이 가장 중요한 규칙이기 때문이다. - pp. 9-10
괴담 시리즈라고 하는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눈물점. 100개의 이야기가 완성되면 무서운 일이 일어나므로, 99개의 이야기로 완성짓겠다고 하는 이 미시야마 시리즈는 미야베 월드 제2막이라고까지 한다고. 이번 소설 눈물점에는 4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고, 한 권에 이 정도 갯수라고 하니 평생의 과업이라고 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이전 미시야마 시리즈에서는 원래 '듣는 역할'이 미시야마의 주인 이헤에의 조카 오치카라는 여성이었다고 하는데, 시집을 가게 되었다는 이유로 '듣는 이'는 이헤에의 차남 도미지로로 바뀌었다고. 그리고 내가 읽은 '눈물점'의 화자가 바로 도미지로인 것이다.

솔직하고 마음씨가 착하며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고, 후계자가 아니니' 도련님'이라고 자칭하는 도미지로.
오치카가 괴담 듣는 일을 했을 무렵, 우연한 인연으로 미시마야에 들어와 괴담 자리의 호위 역할을 맡은 오카쓰.
도미지로가 어렸을 때부터 미시마야에서 고용살이를 해 온 고참 하녀 오시마.
앞으로 이 세 사람이 이야기꾼을 맞이하여 새로운 괴담 자리의 막이 열린다. - pp. 10-11
이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눈물점 속 세계에서는 괴담 자리라는 것이 독특한 모임까진 아닌 모양이다. 괴담 자리란 한 곳에 모여 사람들이 밤새도록 괴담 이야기를 하는 자리를 일컫는 말인데, 미시마야의 괴담 자리는 한 번에 한 명, 또는 한 무리의 이야기꾼만을 부르고, 듣는이도 한 명이기 때문에 특이하다는 평을 듣는 듯하다. 그렇다고 이 '듣는 이'가 괴담에 특출난 사람이냐 하면 또 그것도 아닌게, 그냥 읽으면 살짝 오싹하고 말 이야기를 들으면서 청자인 도미지로는 보통 사람보다도 무서워 하고 있던 것. 청자가 괴담에 특히 강하지 않다는 점이 오히려 독자들에게는 친근함이 느껴져서 일부러 마련한 장치일지도 모르겠다. 보통 이런 독특한 괴담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이라고 하면 어딘가 입 무겁고 조용하고, 그렇지만 동요가 없어 웬만한 이야기나 현상으로는 놀라지 않지 않을까 하는 편견이 있던 나라서 이 설정이 꽤 신선하고 재미있었던 것 같다.

가슴이 술렁거리지 않는가. 대체 무엇이 '시작된' 것일까. - p. 44
이야기 중 첫 번째는 이번 소설 눈물점의 표제작인 '눈물점'이었다. 도미지로와 안면이 있는 '하치타로'가 이야기꾼으로 와서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책에 실린 네 가지 이야기 중에 특히나 기묘한 느낌이 들던 회차였다. 첫째 형수가 둘째 사위를, 둘째 형수가 셋째 누나의 남편을, 딸이 아버지를 덮치게 되는 망측한 일이 연달아 벌어지는데, 이 일이 발각되면 일을 벌인 여성은 기절하고 그 일 자체를 싹 잊어버린다. 그리고 사건 전에 그 사람들에게 눈물점이 생겼다가, 사건이 발각되면 눈물점이 떨어져 나가는데 이 괴이한 인과를 아는 것은 막내딸 뿐. 이 사건이 원인이 되어 시름시름 앓던 누군가는 목숨마저 잃어버리고.. 원인을 알 수 없이 겪게 되는 이상한 일이라 더 찜찜한 느낌이 들었는데 눈물점의 정체를 마지막까지 알 수 없어서 이야기를 전부 읽고 나서도 끝까지 읽은 느낌이 나지 않아 더 기억에 남는다.

"저희 집만은, 여자는 아무도 이 꽃놀이에 낄 수 없었어요."
기묘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 p. 127
그런가하면 두 번째 시어머니의 무덤은 참 고약한 이야기. 특별한 이유 없이 며느리를 심하게 구박하던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죽일까 겁이 난 아들과 남편의 합의에 의해 갇히게 되는데, 그 안에서도 저주를 하며 죽음에 이른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아이고 며느리도 누군가의 귀한 딸인데 진짜 미쳤나보다, 하고 혀를 차고 넘겼을텐데 이 괴롭힘과 저주가 죽고 나서도 저주처럼 따라붙는다니 이쯤 되면 무서울 노릇이다. 어느 곳이나 벚꽃 명소는 있다지만 스미다 제방이라는 곳은 그림같은 풍경으로 마을 차원에서 묘지로 조성된 언덕에서 꽃놀이를 하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 그러나 기묘한 이유로 가가리야의 여자는 이 지상의 극락 같은 풍경은 볼 수 없는데.. 참 전말이 씁쓸한 이야기였다.

처음에 힐끗 보았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해질녘의 어스름 속에서, 어떻게 기모노의 줄무늬나 조리의 발가락 끈까지 또렷하게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저것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귀신이나 요괴임에 틀림없다. - p. 252
세 번째 동행이인은 가메이치라는 파발꾼의 이야기인데, 가족을 잃고 슬픔을 떨치기 위해 먼 거리로 나간 파발행에서 이상한 게 따라붙어버린다. 붉은 어때띠를 매고 두 다리를 가지런히 모은 채 미끄러지듯 따라붙은 이 남자는 머리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손은 축 늘어뜨린채로 가메이치의 뒤를 쫓는데, 일정한 거리를 두고 빠르던 느리던 가메이치의 속도를 유지한 채 계속 따라오며 무슨 짓을 해도 떨어지지 않는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아 미칠 노릇인 셈. 가메이치의 빠른 발로도 떨쳐내지 못한 이 남자를 달고 다니는 동안 가메이치의 그림자는 보통사람에 비해 엷어지고 있기까지.. 이 망령은 대체 무슨 연유로 가메이치에게 붙어다니는 걸까 싶었는데 여기에는 안타까운 사연이 있었다. 가까운 사람을 잃은 슬픔은 이겨내기 어렵기에 여운이 남는다.

눈 앞은 벚나무 숲이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안개의 바다 속에 두툼한 꽃들이 펼쳐져 있다. 진자부로는 놀라서 숨을 멈추었다. 때마침 안개가 크게 후퇴하자 벚나무 숲이 차례차례 나타난다. 꽃보라가 춤을 춘다. 어제로 매화의 만개는 끝나고, 오늘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다니. 역시 이곳은 이 세상이 아니다. 시간의 흐름이 완전히 다르다. - p. 465
마지막 이야기인 구로타케 어신화 저택은 가미카쿠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나는 가미카쿠시라는 이야기를 처음 들어봤는데, 이 단어의 뜻은 사람이 사라졌다가 어느 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오게 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신선이 바둑 두는 걸 구경하다가 홀려 몇 십년 후 돌아왔다던지, 비슷한 이야기는 우리나라에도 얼마든지 있기에 놀랄만한 소재는 아니지만 그 사라졌던 기간에 대해 다루고 있다는 게 흥미롭다.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인물도 본인은 삼년 정도 다녀왔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며칠밖에 지나지 않아 놀랐다고 하는데.. 이 인물이 아닌 같이 사라졌던 다른 진자부로라는 사람으로부터 이야기는 서서히 시작되어 사라졌던 사람들이 어떤 공간에 옮겨진 후, 그 공간은 어떤 곳이고 또 어떻게 헤쳐나오게 되었는지를 상세히 알 수 있게 된다. 책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의 분량이라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는 이 이야기는 이 세상이 아닌 기묘한 공간에 나도 함께 갇혀있었던 것 같은 착각을 준다. 나는 이 미시야마 시리즈를 이번 '눈물점'으로 처음 접하게 되었기에 이전 시리즈인 흑백, 안주, 피리술사, 삼귀, 금빛 눈의 고양이 다섯 권도 궁금해진다. 워낙 이런 기묘한 이야기를 좋아해서 미야베 미유키의 대업이라는 미야베월드 제 2막 미시마야 시리즈 이전 권을 먼저 다 읽고, 앞으로 나올 시리즈도 따라갈 것 같은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