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1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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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는, 나만큼은, 그게 안됐다거나 불쌍하다고는 생각 안 해요. 걔는 분명 도넛 한가운데는 먹었을 테니까. 가장 맛있는 건 다른 사람은 모르는 도넛 한가운데. 하지만 그걸 아는 사람은 도넛을 만든 적 있는 사람뿐이죠. 걔의 진짜 기분 같은 건 분명 아무도 보를 거예요. 있는데 안 보이는 게 아니라 도려냈으니까. - p. 94


자신이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사진이나 영상으로 쉽게 본인도 인지할 수 있는 세상. 독설이 솔직함으로 포장되어 무례함도 어느 정도 관대하게 받아주는 사회적 시선 덕분에 쉽게 외모지적을 당할 수도 있죠. 그래서 그런지 정말 어느 때보다도 외모지상주의라는 단어가 와닿는 시대에 미나토 가나에도 미용에 관한 책을 냈더라구요. 그게 바로 이 조각들 입니다. 고백이라는 작품 이후로 참 눈여겨보고 있는 작가라 왜 하필이면 조각들일까? 그리고 도넛과 줄자, 날카로운 유리와 개미는 어떤 의미일까, 보이는 그대로 직관적인 의미일까 기대하며 읽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다른 눈을 내려주셨단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똑같은 걸 갖고싶어해서 쟁탈전이 벌어질 테니까. - p. 220 


당연히 씁쓸한 이야기일 건 예상했지만 생각보다도 보면서 더 답답하더라구요. 원래 책은 한큐에 읽는 걸 선호하는 타입이라 이 정도 페이지면 펼치자마자 바로 끝장내는 편인데 답답해서 한 세 번쯤 자체 휴식시간을 주고 다른 활동을 했던 것 같아요. 미나토 가나에의 조각들 에서는 엄청난 수의 도넛에 둘러싸여 한 소녀가 자살합니다. 누군가는 미소녀라 했고 또 누군가는 가장 뚱뚱한 여자애라고 하죠. 자 벌써 확 끔찍하면서도 흥미가 돋지 않나요?




놀림당하는 쪽에 득이 없을 때는 애정으로 놀린다고 말하면 안 돼요. 놀린 쪽이 재치 있는 말을 했다면서 만족할 뿐이라면 그건 괴롭힘이죠. 자기 기분이 좋아지려고 타인의 존엄을 짓밟는 거니까 그렇게 판정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 p. 256


누군가의 눈에 왜곡이 있었던 걸까요, 아니면 실제로 소녀가 고무줄 몸무게였던 걸까요.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중요한 건 시골에 사는 여자애가 죽었는데, 그 죽음의 이유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고 그 여자애의 외모에 초점이 맞춰졌다는 점이죠. 이 점이 프롤로그 나오기 전부터 참 쎄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 이야기 전체가 온통 외모에 관한 각 등장인물의 관점과 사건에 대한 선입견으로 점철되어 있더라구요.




자기가 보고 싶은 풍경을 떠올리면서 구멍 건너편을 보는 거야. 그러고 나서 그 도넛을 먹으면 구멍 너머로 그린 풍경이 현실이 돼. 그러니까 소원이 이루어지는 건데, 엄마는 도넛을 못 먹으니까 유우가 먹어줄래? - pp.264-265


히사노라는 성형외과 의사가 있습니다. 바로 그 시골 출신이면서 미스 재팬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성공한 의사입니다. 히사노의 다치바나 뷰티클리닉은 외모를 바꿔 행복을 거머쥘 수 있다면 그 행복을 쥐어주기 위해 도울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데요. 미나토 가나에의 조각들은 이 히사노의 교칙이란 심야 토론 라이브를 프롤로그로 시작해 상담, 그리고 직접 사건 관련자를 추적해 인터뷰를 하는 히사노의 심경이 서서히 변해 에필로그에서 반영이 되는 점이 재미있더라구요. 책을 다 읽고나면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만 한번 쭉 다시 읽어보는 것도 이 책을 더 즐길 수 있는 방법일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행복하게, 행복하게 살쪄갔어요. 제 군살은 어머니하고 다정한 주위 사람들한테 받은 사랑의 덩어리예요. - p. 284


도넛에 감싸여 자살한 소녀의 이름은 유우. 뚱뚱하지만 매력있는 여자애. 유우에게 몸무게는 별로 핸디캡이 되지 못했죠. 운동도 잘 했고, 쾌활했고, 교우관계도 원만했어요. 그렇다면 대체 이 아이는 왜 자살한걸까요? 그리고 히사노는 왜 이 아이의 죽음에 주목해서 관련자들을 쫓아다니는걸까요? 이 의문이 예상치 못한 이유로 풀린 것도 뜻밖이어서 더 남는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마다 비슷해 보이지만 조금씩 들어간 곳이나 튀어나온 곳이 다른. 꼭 겉모습만 그런 게 아니라 내면 역시 조각 형태로 나타납니다.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고, 좋아하는 게 있으면 잘 못하는 게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이라는 조각이 만들어집니다. (중략) 억지로 끼워 넣으면 주위 균형도 깨져버립니다. 조금 형태를 바꾸면 잘 들어갈 텐데. 그게 외모의 문제라고 느끼는 사람이 병원 문을 두드립니다. 혹은 과거에는 딱 들어맞았는데 서서히 이질감을 느끼게 됐다. 잘 속해 있던 시절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 그 형태에 조금이라도 다가가고 싶다. 이렇게 바라며 병원 문을 두드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대환영입니다. 형태를 보정한 뒤의 행복한 그림이 보인다면. 하지만 한 가지 기억해두셨으면 하는 건 자기가 이상이라 생각하는 형태가 타인에게도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겁니다. - pp. 300-301 


미나토 가나에의 조각들 에서는 1장부터 6장까지는 모두 히사노와 대화를 나누는 화자를 보여주고 있는데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하고는 히사노의 의견이나 대사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 온전히 각 장의 중심인물의 사상만을 알 수 있게 집필한 것도 흥미로워요. 히사노와 대화를 하고 있지만 히사노 부분은 모두 삭제되고 화자의 대사 부분만 수록되어 있어 독특하더라구요. 1장은 처음 히사노의 학창시절에 알던 동창 시호가 지방흡입을 받고 싶다며 히사노를 찾아오며 시작됩니다. 그리고 시호와 히사노의 또다른 동창 64kg이라 놀림을 많이 받았던 요코아미 아예코라는 인물이 언급되죠. 2장에서는 아이돌 아미가 학교 후배로 등장해 코수술을 상담받으며 요코아미 아예코의 딸 유우에 대해 이야기하구요. 이런 식으로 각 장의 화자들은 서로 몇 다리 걸쳐서라도 모두 연결되어 있고, 그 사건에 대한 자신의 선입견을 늘어놓죠. 유우의 엄마의 동창, 유우의 동창, 히사노의 동창이자 전남자친구와 유우와 이인삼각을 했던 그 아들, 그 학교의 선생, 유우의 담임, 유우의 엄마 요코아미 아예코, 그리고 기리 유우 본인의 기록까지. 점차 사건의 본질로 갈 수 있는 인물로 좁혀져가는 구성이 완전 좋았습니다.




자기가 만들고 싶은 그림에서는 부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조각이라도 그 조각이 딱 들어맞는 곳이 반드시 있습니다. 반대로 자기가 들어맞는 그림을 그릴 수 없는 경우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럴 때도 원하시면 상상해주세요. 그 그림을 함께 상상해봅시다. 당신이라는 조각이 딱 들어맞는 장소는 반드시 있으니까요. - p. 301 


각 장의 인물이 그 자신이 겪은 환경요인에 의해 외모에 대해 느끼는 의견이 모두 다른 것도 분석해보게 되던 이야기. 목차의 각 장을 구분짓는 내지엔 모두 도넛이 들어가지만 각 이야기를 충분히 함의하고 있다는 점까지 저에겐 참 극호였어요. 이런 지점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미나토 가나에의 조각들 읽으며 직접 각 장의 그림들을 보고 이야기를 곱씹어보는 것도 좋을 듯 해요. 미나토 가나에의 조각들 에서는 작가가 책 전체를 통해 아름다움과 행복의 상관관계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히사노는 에필로그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데요. 독자 스스로가 이 질문에 대한 자신의 답을 찾고 히사노의 답과 비교해보는 것도 참 재미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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