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의 타자기 미스티 아일랜드 Misty Island
황희 지음 / 들녘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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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은 서영이 작가가 될 거라고 자랑하곤 했다. 타자기는 그때 당선을 축하한다며 친구 우탁이 사준 것이다. 우탁은 서영을 기린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길 좋아했다. 기린이란 '재능이 남다른 사람'을 부를 때 붙이는 이름이며 상상 속의 동물이기도 하기에 우탁의 선물엔 '이 타자기로 네 상상력을 마구 쏟아내길 바란다.'는 뜻이 숨겨져 있었다. - p. 38


기발한 설정과 매력적인 캐릭터로 재미있는 서사를 보여준다고 하는 황희가 쓴 기린의 타자기. 제7회 교보문고 스토리공모전 중장편부문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는 이력이 있는 작품입니다. 다중액자식 구성이어서 초반에는 시점을 따라가기 벅찰 수도 있으나 이런 방식을 왜 취했는지 깨닫고 나면 이해할 수밖에 없어지기도 하더라구요. 이 이야기에는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는 딸 지하와 결혼 후 학대를 당하고 있는 엄마 서영이 나옵니다. 그리고 둘의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진행되는데, 지하가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덕분에 독자인 제 입장에서는서영쪽에 몰입이 더 되었지만 결국은 둘 모두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아픈 이야기였어요.


남편이 던진 타자기에 얼굴이 짓이겨져 스스로 생을 마감한 나의 어머니에게 - p. 41


남편이 던진 타자기에 얼굴이 짓이겨지다니.. 이 문장을 읽은 순간 헉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였는데요. 그래서 이 문장이 어떤 서사에서 응축된 문장일지 궁금해지더라구요. 여기에 나오는 '나의 어머니'란 이야기의 또 다른 주인공 서영을 말하는데요. 친정쪽의 계략으로 인해 강제로 결혼해 시댁에서 모든 가족에게 학대를 받고 있는 가여운 인물입니다. 국회의원이자 유명 교회를 설립한 시아버지, 그리고 서울시의원이자 그 교회의 목사를 맡고 있는 남편. 대외적인 이미지를 중요시해 외부에서는 온화한 가정을 연출하는 이들은 집안에서는 악마로 돌변합니다. 서영 뿐만이 아니라 둘 사이의 딸 지하와 아들 지민에게까지 정도는 약하지만 같은 학대를 일삼죠.


로그아웃. 지하는 보청기를 빼 주머니 속에 넣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보청기를 뺀 상태를 '로그아웃'이라고 불렀다. 이 세상으로부터의 로그아웃. 얼마나 멋진 말인가. 보청기의 힘을 빌려서라도 듣고 남들에게 정상으로 보이기 위해 애쓰는, 그런 삶으로부터의 탈출. 로그아웃하면 그 모든 노력을 내려놓을 수 있다. 일종의 포기였지만 묘하게도 포기하는 순간 오히려 불안감으로부터 해방된다. - p. 82


황희의 기린의 타자기에서는 이런 현실에서 청각장애까지 앓고 있는 지하는 현실에서 로그아웃한다는 표현을 쓰며, 백일몽에도 종종 빠져듭니다. 순간이동 능력이 있는 지하는 누군가를 구하기도 하고, 능력을 써서 쫓기기도 하고 여러 위기상황에 빠지지만 대처해가며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데요. 가정에서의 학대와 장애로 인한 원만치 못한 교우관계 등으로 결핍된 것을 글을 쓰며 극복하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글재주가 있던 서영이 현실과 타협해 재능을 접고 현실에 순응하고 살아가는 것과 달리 강한 자아를 가지고 있어 존경스럽더라구요.


엄마가 말하는 그 '현재'가 바로 지금 이 순간이야. 매시, 매초 '지금 이 순간'이 주어진다는 게 기쁘지 않아? (중략) 그러니까 엄만 방금 엄마가 말한 것처럼 '현재가 만족스러운 사람'이 될 기회를 죽을 때까지 갖고 있는 거야. 매시 매초 지금 이 순간이 주어지니까. - pp. 387-388


이런 지하로부터 몰래 발송된 지하의 첫 책 '조용한 세상'. 가정에서 유일하게 서영을 안쓰러워하는 도우미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손에 얻게 된 이 책을 읽으며 서영은 점차 자신의 상황을 다시 되돌아보게 됩니다. 조용한 세상에서와 다른 지하를 떠올리며 자신도 그 안에 있는 서영과는 다른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서영. 그리고 전개됨에 따라 지하의 능력이 어떻게 가지게 된 능력인지도 풀리게 되며 좀 더 납득할 수 있게 만들어주던 기린의 타자기. 상황에 짓눌려 자신을 찾지 못하던 인물이 어떻게 책 속의 조용한 세상과 달리 어떻게 심경이 변해가고 행동하는지 지켜보는 재미가 있는 가슴이 뭉클해지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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