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몇 가지 장면을 떠올리면서
미처 분명하게 드러내거나 인정하지 못 했던 부끄러운 판단과 선택과 무시의 말과 행동이 진열된다.....
막상, 보통이라는 단어를 내놓아도
정작 그것이 자신에게 돌아왔을 때 얼마나 어려운 기준이었나 하는 것도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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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를 잡는다며 사람들이 육지에서 섬으로 왔다. 경찰옷을 입은 사람도 있었고 군복을 입은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그들 옷에는 계급장이 없었다. 여름에서 겨울 사이 2천 명이넘는 외지인이 제주에 들어왔다. 사람들은 그들을 서북청년단이라고 불렀다. 나랏일 하는 높은 사람들이 보냈다는 말도 있었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잡아갔다. 잡혀가지 않으려고 버티면 몽둥이를 들고 때렸다. 울던 아이들도 서북청년단이란 말을 들으면 무서워서 울음을 그치고 이불 속으로 숨었다. 식당에서 행패를 부린 이들도 서북청년단원이었다.


장동춘이 제 얼굴을 순욱의 얼굴 가까이 들이밀었다. 순욱은 움찔 놀랐다. 그 순간 장동춘이 우악스럽게 순욱의 손을 잡고 할머니 집으로 잡아끌었다. 부하들이 집을 에워쌌다. 순욱은 끌려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장동춘의 힘을 이기지 못했다.
"당장 그 손 놓지 못해!"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군용 트럭이 멈췄다. 그리고 그 안에서 군인들이 내렸다. 군인들이 장동춘과 부하들을 향해 총을겨눴다.
"당장 그 손 놔!"
문상길이었다. 옆에 있던 손선호가 장동춘을 향해 총을 겨눴다.
"상길 씨!"
순욱이 상길을 보며 울먹였다.
"오호라! 저 군인 양반이 남편이로구만. 그런데 빨갱이 잡아야 할 시간에 경비대가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여전히 순욱의 손을 잡은 채 장동춘이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고한 사람들 괴롭히지 말라는 말 못 들었나? 너희들이해야 할 일을 똑바로 하는지 감시하는 것이 내 임무다. 당장 그손 놓고 꺼져!"

그때였다. 십여 미터 떨어진 집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정말로 집에 불을 지르는 모양이었다.
"언니, 명이 명수랑 방에 들어가 이십서 절대로 나오지말곡."
순욱은 신발까지 방안에 던져 넣었다.
"무슨 일인지만 보고 오젠 마씸. 저놈들이 행패를 부리면 상길 씨에게 알려야 되죠."
"아가씨, 가지 맙서. 아가씨!"
순욱은 진숙의 말을 듣지도 않고 집을 나섰다.
순욱은 학교 뒷담을 넘어 건물 뒤에 숨었다. 국민학교 운동장에는 마을 사람 대부분이 모여 있었다. 장동춘이 연단에 올랐다.
"지금 산속에 빨갱이들이 숨어있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위해 불철주야 애쓰고 있는데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빨갱이들이 설쳐대고 있단 말이다. 너희들이 산에 숨어있는 놈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가져다주고 있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다.
빨갱이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준 적이 있는 자는 앞으로나와라, 사실대로 말하면 다른 사람들은 집에 보내주겠다."

차례
총성.....… 6
밤마실 11
명령 그리고 만남.
******27
서북청년단 48
빨갱이 사냥.
남겨진 신발 한짝……85
66
횃불 113
깨지는 평화 협상이별, 그리고 - 146
또 다른 총성
작가의 말******130
170- 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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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라. 먼 나라의 산불이 아니라 언제든 나와 가족이 전염병에 감염될 수 있다는 공포에 온 세계가 사로잡혔다. 
이러한 팬데믹 상황이 발생한 것은 자연에 대한 과도한 개발과 파괴로 인해 야생의 영역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연재해와 사회적 재난은 무관할 수 없고 국지적 양상을 띠지도 않는다. 
글로벌 자본주의체제가 지속되는 한, 화석연료에 의존한 성장사회를 멈추지 않는 한 
부유한 계층이 기득권과 탐욕을 내려놓지 않는 한, 
환경파괴와 노동착취는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인류세‘ 논의를 주도해온 과학자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는 지구의 급박한 위기상황을 ‘연료가 바닥난 비행기, 구멍이 난 배, 불타고 있는 집‘에 비유했다. 
이 총체적 재난은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라는 울리히 벡(Ulrich Beck)의 말처럼, 특정한 나라나 계층에 한정되지 않고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재난의 책임과 영향은 결코 공평하지 않으며, 가장 피해를 많이 입는 것은 경제적·사회적 약자들이다. 
"위험분배의 역사는 부와 마찬가지로 위험이 계급 유형에 밀착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그 방향은 서로 반대다.
 "부는 상층에 축적되지만, 위험은 하층에 축적된다." "
이처럼 생태문제는 정치체제나 경제구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생명정치‘ 또는 ‘정치생태(학)‘라는 말이 시대적 키워드로 회자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91년에 창간된 이래 생태 사상과 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쳐온 『녹색평론』의 글들을 일별해 보면 생태적 전환을 모색하는 범위나 접점, 문제의식 등이 계속 확대되어 온 것을 확인하게 된다. 
김종철의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에서도 에콜로지가 농업, 민주주의,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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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윤동주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어떤 하루
체인 케니언고독
건강한 몸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지 못할 수도 있었는데
시리얼과 달콤한 우유와탐스러운 복숭아를 먹었다
그러지 못할 수도 있었는데
개를 데리고 자작나무 숲으로 올라갔다
아침 내내 좋아하는 일만 하고
오후에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누웠다
그러지 못할 수도 있었는데
우리는 은촛대가 놓인 식탁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러지 못할 수도 있었는데
그림이 걸린 방에서 잠들며
오늘 같은 내일을 기약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언젠가는
그러지 못하게 되리라는 걸

우리는 질문하다가 사라진다
파블로 네루다
어디에서 도마뱀은
꼬리에 덧칠할 물감을 사는 것일까
어디에서 소금은
그 투명한 모습을 얻는 것일까
어디에서 석탄은 잠들었다가
검은 얼굴로 깨어나는가
젖먹이 꿀벌은 언제
꿀의 향기를 처음 맡을까
소나무는 언제
자신이 향을 퍼뜨리기로 결심했을까
오렌지는 언제
태양과 같은 믿음을 배웠을까

연기들은 언제
공중을 나는 법을 배웠을까
뿌리들은 언제 서로 이야기를 나눌까
별들은 어떻게 물을 구할까
전갈은 어떻게 독을 품게 되었고
거북이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그늘이 사라지는 곳은 어디일까
빗방울이 부르는 노래는 무슨 곡일까
새들은 어디에서 마지막 눈을 감을까
왜 나뭇잎은 초록색일까
우리가 아는 것은 한 줌 먼지만도 못하고
짐작만이 산더미 같다
그토록 열심히 배우건만
우리는 단지 질문하다 사라질 뿐

사랑
사랑은 사고파는 물건이 아닙니다.
거저 주는 것이지요.
--프란체스코 교황

두려워 말라. 고통을 피하고 멀리하는 사람은외톨이가 될 것이다.
이기적인 사람보다 더 외로운 사람은 없다.
내가 모든 이를 위해 내 목숨을 내놓았듯이,
네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생명을 내어준다면
풍성한 수확을 얻게 될 것이다.
- 오스카르 아르눌포 로메로 대주교

체로키 인디언의 노래
새로 태어난 아기에게
또 한 사람의 여행자가
우리 곁에 왔네
그가 우리와 함께 지내는 날들이
웃음으로 가득하기를
따뜻한 하늘의 바람이
그의 집 위로 부드럽게 일기를
위대한 정령이 그의 집에 들어가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기를
그의 모카신 신발이
여기저기 눈 위에
행복한 발자국을 남기기를
그의 어깨 위엔늘 무지개가 뜨기를

오늘도 어김없이 해가 뜨고 구름이 흘러갔다. 사람들이지나가고 바람이 불었다. 이 당연한 일이 당연하지 않음을 안다.
미처 생각지 않게 우리와 함께하는 고마운 게 얼마나 많은지.
해와 달, 바람과 함께 흔들리는 풀과 나무하며 지금 옆에는없어도 참 따스한 가족과 지인들, 길과 길, 어느 순간 은총으로 바뀌는 힘든 일 등. 감사 기도를 하는 순간이다. 
힘든 일조차 고맙다는 마음과 환한 마음이 열리고, 창문이 열리고, 첫 새벽하늘이 열리고 해가 떠오른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은 ‘고마‘와 ‘같습니다‘가 하나된 말이다.
고마는 땅의 신으로 우러르는 신성한 동물, 곰을 뜻한다. 
고운여자의 ‘곱다‘도 고마에서 온 거라 한다. 

말의 뿌리를 찾아가면
‘고맙습니다‘라는 말은 ‘당신은 대지의 신처럼 은혜로운사람‘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고 한다. 쓸수록 나 자신도 빛나고,
‘남도 축복하는 멋진 말이니 마르고 닳도록 써도 좋으리라.

고맙다는 마음을 가지면 서로가 더 단단하게 이어진다.
나 자신이 태어나길 잘했다는 것. 숨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오래된 기도
이문재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 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기만 해도.

미술관
로버트 해희망

캐테 콜비츠의 작품이 전시된 미술관의 아침,
젊은 남녀가 식당으로 들어선다.
여자는 아이를 안고 있고
남자는 일요일 뉴욕타임스를 들고 있다.
여자는 등받이가 높은 버드나무 의자에 앉아아이를 감싸안는다. 
남자는 쟁반 가득 신선한 과일과 빵을 가져오고, 흰 컵에 커피를 따른다. 
남자의 머리는헝클어져 있고 여자의 눈은 부석부석하다.
공기를 마시러 물 위로 솟아오른 잠수부처럼잠 속으로 내동댕이쳤다가
순식간에 끌려나온 듯하다.

남자가 아이를 받아 안는다. 여자는커피를 마시고 신문의 첫 페이지를 훑어본다.
태양 아래 조그만 그들의 자리에서
버터를 바르고 빵을 먹는다.

잠시 후, 여자가 아이를 받아 안는다.
남자는 북 리뷰를 읽으며 과일을 먹는다.
여자가 과일 먹고 담배 피우며 신문을 뒤적이는 동안
남자가 다시 아이를 받아 안는다.
서로 눈길을 자주 나누지도 않는 두 사람,
나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저 공평한 풍경과사랑에 빠지고 만다. 아기조차 잠에 빠져 돕고 있지 않은가.

주변엔 캐테 콜비츠의 목판화가 가득하다.
고통을 견딜 재능도 능력도 없는 얼굴들,
무감각해진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얼굴들.
배고픔, 가공할 테러.
그러나 이 젊은 부부는 햇살 아래서
일요일 신문을 읽고 있다.
아이는 잠들었고,
벗겨놓은 멜론 껍질에서 푸른 싹이 돋기 시작한다.
이제 모든 것이 가능할 것만 같다.

세수
이선영

희망어제의 나를 깨끗이 씻어낸다
오늘의 얼굴에 묻은 어제의 눈곱 어제의 잠어젯밤 어둠 어젯밤 이부자리 속의
어지러웠던 꿈 
어제가 혈기를 거둬간
얼굴의 창백함을
힘있지는 않지만 느리지는 않은
내 손길로 문질러버린다
늘 같아 보이지만 
늘 새것인 물이 얼굴에 흠뻑!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오늘엔 오늘 아침 갓 씻어낸
물방울 숭숭 맺힌 나의 얼굴이 있고
그러나 왠지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지 않은가,
어제는 잔주름만 남겨놓았고
오늘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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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선은 언제나 악에게 순식간에 잡아먹한다. 동화 속에서나 존재하는 게 권선징악이다. 어린아이들이나믿을 수 있는 이야기이니까. 물론 예외는 있다. 그래서 선이 악을이길 때를, 그 드물고 보기 힘든 순간을 우리는 기적이라 부른다.

평생을 살면서도 보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 순간, 눈앞에서 보고도 믿지 못할 동화가 현실이 되는 순간 말이다. 그 동화를 연우가 망칠 수는 없었다. 지민이 살아갈 세상이었다.
지민이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 좀 더 아름다워지길 바랐다. 엉뚱한 행운보다는 노력하는 사람들이 성공하고, 타인의 어려움과 고통을 자신의 위안으로 삼기보다는 진심으로 같이 아파할 줄 아는 사람들이 행복한, 그렇게 아름다운 세상이 되길 바랐다. 그래서 연우는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고 물어도 왜그러냐고 물어도 연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쩌면나에게 말할 수조차 없는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분명히 나쁜 일이라고, 마음 깊은 곳에서는 눈치채고 있었는지도모른다. 혹시나 용걸이 나 대신 연우를 때리는 것은 아닐까 불안해 연우의 몸에 상처가 났는지 유심히 살피곤 했다. 상처가 없는것을 확인한 뒤에도 늘 아슬아슬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난 어렸다. 그저 처음으로 평화로운 내 일상을 방해하는 연우가 점점 귀찮아졌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방에 처박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지옥에서 헤맬 때 유일한 빛이었던 연우를 모른 척하는 건 쉬웠다. 이미 지옥을 벗어났는데 지옥을 견딜 수 있게 만들어주는 빛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렇게 난 지옥 속 유일한 희망이었던 그 아이를 지옥에 버려두고 도망쳤다. 그때 난 깨달았다. 
누구든 마음속에 악을 품고 있는 거라고. 사회적 관습이나 법에 억눌려서 그악을 분출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중학교 입학은 연우와 나를 더 멀어지게 했다. 중학교 1학년과초등학교 6학년 사이의 간극은 절대 극복할 수 없는 것처럼 거대해 보였다. 연우가 하는 말과 행동이 모두 유치해 보였다. 
연우는아프다는 핑계로 결석을 자주 하기 시작했다. 내 무관심에 대한 반항이라고 생각했다. 아픈 아이가 점점 체중이 불어날 수는 없을테니까 속이 쓰려서, 기침이 심해서, 다리가 아파서, 연우는 학교

에 가지 않았다. 연우가 학교에 다시 가기 시작한 것은 지민이 우리 집에 오고 나서였다. 몸무게도 서서히 줄어들어 정상으로 돌아왔다. 지민을 돌보느라 힘들어 체중이 줄어드는 거라 생각했었다.
그렇게 외면하고 회피하는 동안 평화로웠다.

지민이 집에 오던 부활절의 기억이 밀려들었다. 새벽에 비명을 지르며 배를 움켜쥐고 데굴데굴 구르던 연우, 연우를 치료하는데 방해가 된다며 집 밖으로 나를 내쫓던 걸 억지로 성당에 가자며 나를 잡아끌던 지호, 그리고 의도적으로 버려져 있던 지민…………
아무리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도 하체가 너덜너덜해진 지민은 도저히 집으로 걸어올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사건이 벌어진 날, 용걸은 10시경 조퇴를 한 뒤 베이비시터를 퇴근시켰다.
하지만 주말 동안 검토하려고 했던 사건 관련 서류 중 두고 온 것이 있어 지민이 좋아하는 만화영화를 틀어준 뒤 검찰청에 잠시들렀다고 했다. 범죄는 용걸이 집을 비웠다는 3시간 동안 벌어진것으로 추정되었다.
어린 시절부터의 세뇌가 효과적이었는지 지민은 혼자서 외출하는 일이 절대 없었다. 범죄현장으로 추정되는 대각선 철거현장에서 발견된 혈흔은 수사에 혼란을 주기 위한 증거물일 수도 있었다.
순간 널브러진 지민의 주위를 감싸고 있던 비린 밤꽃 향기가 갑

자기 떠올랐다. 바로 그것이었다. 내가 잊고 있었던 중요한 기억이.
범죄는 집 안에서 벌어졌다. 바보 같은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리고 용의자는 한 명밖에 없었다.

토했다.
먹은 것도 없어 신물만 나오는데도 구역질은 멈추지 않았다. 위산으로 식도와 입 전체가 헐어도 구역질은 계속됐다. 시뻘건 핏물까지 나오는데도 구역질은 멎지 않았다.
내 결론이 틀리길 바랐다. 용걸의 방문 앞에서 몇 시간이나 서성였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에도 용걸은 통화를 하고 있었다. 
4·15총선을 앞두고 정국이 어수선한 시절이었다. 범인을 잡기 위해 휴직계를 냈다는 건 말뿐이었는지 용걸은 하루 종일 누군가와 통화를 하느라 바빴다.

"여당이고 야당이고 비례대표 1번을 주겠다고 난리법석이야. 후보 등록 마감일까지 얼마 남지 않아서 빨리 결정해야 되는데 고민이네"
용걸의 목소리는 한껏 들떠 있었다.
한밤중, 잠든 용걸 곁에서 앉아 기다렸다. 재개발 때문에 대부분의 가정이 이주한 동네는 밤이 되면 검은 물감이 뒤덮은 듯 어두

있다. 구청에서는 재개발을 이유로 깨진 가로등조차 수리하지 않았다. 어둠에 눈이 적응하자 용걸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가늘고 길게 찢어진 눈, 뭉툭한 콧날, 두툼한 입술, 모두들 용길의 첫인상이 너그럽고 포근해 보인다고 했다. 아마 눈꼬리가 축 처진 것이 한몫했을 터였다. 
하지만 내게는 소름끼치는 얼굴일 뿐이었다. 왜소한 체구의 용걸은 움직이지도 않고 이불 속에서 낮게 코를 골며 편안한 잠에 빠져있었다.
난 연우의 유일한 보호자였다. 내가 없으면 연우가 대신 맞을거란 생각에 도망치지 못했다. 아마 연우도 그래서 도망치지 못했을 것이다. 차마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내 곁에 남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연우에게는 내가 나에게는 연우가 인질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했기 때문에 용걸에게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불행한 신세였다. 그래서 서로의 존재를 원하는 만큼 서로가 사라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나에게 ‘가족‘이란 겨우 그 정도의 의미밖에 되지 못했다. 서로를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일 자격이 없었다.
연민, 분노, 동정, 증오, 수많은 감정들이 끓어 넘쳐흘렀다. 연우가 왜 내게 아무 말 못했는지 이해하면서도 원망스러웠다. 추측의문, 확신, 부정, 수많은 생각들이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용걸이 그런 짓을 벌였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호명할 때는 같이 박수쳐주고 우리반 담임 호명할 때는 가만히 있었죠. 그렇게 개망신을 줬는데도 아직 학교 다니는 거 보면 그 선생도 참 뻔뻔해요."

너무 화가 나서 일어나 밖으로 나와 버렸다. 줄담배를 피워도억울함과 답답함이 가시지를 않았다. 유림이 앞에 있다면 대신 변명해주고 싶었다. 연우는 결코 비겁한 아이가 아니었다. 누구보다 책임감과 정의감이 강한 아이였다. 겁이 많았지만 이유 없이 불의를 모른 척하고 피할 성격은 아니었다. 분명 과중한 업무나 지민의 간병 때문에 지쳐서 그랬을 것이다. 그런 이유조차 비겁한 변명이라 생각해 유림에게 말하지 못했을 연우가 안타까웠다. 
가끔은 인간을 이해할 수 없었다. 모순되는 감정이 요동쳤다. 
처음부터 자신을 편들지 않았던 사람보다 중간에 마음을 바꾼 연우가더 밉다는 유림의 복잡한 심정이 이해되면서도 상처받았을 연우가 걱정스러웠다.

아이들은 순수하다. 순수하게 이기적인 본능으로 가득해 악랄하다. 그 절대적인 무모함이 싫었다. 그래서 민수는 아이들을 싫어한다. 세상의 부조리나 삶의 아이러니 따위는 겪어보지 않아 순수

한 아이들일수록 더 악한 법이었다. 아이들이 싫어서 학교도 싫었다. 
초등학교 시절, 쉬는 시간이면 왼쪽 관자놀이가 뻐근해져왔다.
우당탕탕,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우르르 몰려서 큰 목소리로 떠드는 아이들을 보며 빨리 쉬는 시간이 끝나기만을 빌었다. 언제 아이들이 몰려와 자신을 괴롭힐지 몰라 두려웠다.

민수에게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놀리고 낡은 옷이 더럽다고 침을 뱉던 아이들도 순수했다. 연호에게 죽도록 얻어터지고서야 사과하던 아이들도 커다랗고 순진한 눈망울을 반짝였다. 그래서 교사가되고 싶다는 연우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연호도 마찬가지였다.

"지민이처럼 특별한 아이들을 보살피는 선생님이 되고 싶어."
연우는 그렇게 말했다. 더 이상 민수도, 연호도 연우의 진로를반대하지 못했다.

처음 지민이 노란 가방을 메고 어린이집에 가는 날, 민수와 연호는 학교를 결석하면서까지 따라갔었다.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한 지민의 담임선생님을 붙잡고 유의사항을 얼마나 많이 반복했는지 집으로 돌아올 때는 둘 다 목이 쉬어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지민을 괴롭히고 따돌렸다. 어린 아이들의 눈에는 뜨거운 국에 얼음을 넣어 먹고, 가위를 처음 사용해 보는 지민이 이상하게 보일 만했다. 딸기잼이라 속여 고추장을 먹이고, 뜨거운 주전자를 맨손으로 붙잡으라고 시키고는 

작가의 말

2017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끔찍하고 잔혹한 시간이었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내 믿음은 그해에 완벽하게 부서졌다.
세상의 모든 악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악에 물어뜯기지 않으려 반항하던 내 육체와 정신은 너덜너덜하게 닳아 바스라지기 직전이었다.
소멸하기 직전인 날 위해 유언장 대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해의 기억들을 모두 글 속에 토해내고 나면 잊을 수 있을 것같았다. 한 글자, 한 글자 쓸 때마다 그때의 기억이 날 아프게 하는 시간이었다.
그 잔인했던 2017년의 상처와 고통을 되짚으며 글을 마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다.

달팽이는 동종이나 알 
자식을 잡아먹기도 할 정도로 이기적인 생존본능을 지닌 대표적 동물이다.

"난 달팽이가 좋아. 낯선 이가 나타나면 집 속으로 숨어들어가는 것도,
언제든 숨기 위해 그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다니는 것도 
너무나 연약해서 다치기 쉬운 그 몸도 
상처받을까 봐 숨는 건데 모두들 딱딱한 집만 보고 강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언니랑 닮았잖아. 

그래서 달팽이가
달팽이 따위와는 닮고 싶지 않았다. 

달팽이(Snail)와 뱀(Snake)의 어원은 같다. 이브에게 선악과를 먹으라고 꾀던 간교한 뱀의 이미지가 떠올라 마땅찮았다. 
아니, 뱀보다는 이브가 더 증오스러웠다. 이브가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연우의 삶은 훨씬 아름다웠을 것이다. 결국 인간이 문제였다.
- 본문 중에서

우리나라 학교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 <방과 후>와 비견되는현재 우리 학교에서 벌어지는 충격적인 사건들과 놀라운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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