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선은 언제나 악에게 순식간에 잡아먹한다. 동화 속에서나 존재하는 게 권선징악이다. 어린아이들이나믿을 수 있는 이야기이니까. 물론 예외는 있다. 그래서 선이 악을이길 때를, 그 드물고 보기 힘든 순간을 우리는 기적이라 부른다.
평생을 살면서도 보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 순간, 눈앞에서 보고도 믿지 못할 동화가 현실이 되는 순간 말이다. 그 동화를 연우가 망칠 수는 없었다. 지민이 살아갈 세상이었다. 지민이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 좀 더 아름다워지길 바랐다. 엉뚱한 행운보다는 노력하는 사람들이 성공하고, 타인의 어려움과 고통을 자신의 위안으로 삼기보다는 진심으로 같이 아파할 줄 아는 사람들이 행복한, 그렇게 아름다운 세상이 되길 바랐다. 그래서 연우는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고 물어도 왜그러냐고 물어도 연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쩌면나에게 말할 수조차 없는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분명히 나쁜 일이라고, 마음 깊은 곳에서는 눈치채고 있었는지도모른다. 혹시나 용걸이 나 대신 연우를 때리는 것은 아닐까 불안해 연우의 몸에 상처가 났는지 유심히 살피곤 했다. 상처가 없는것을 확인한 뒤에도 늘 아슬아슬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난 어렸다. 그저 처음으로 평화로운 내 일상을 방해하는 연우가 점점 귀찮아졌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방에 처박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지옥에서 헤맬 때 유일한 빛이었던 연우를 모른 척하는 건 쉬웠다. 이미 지옥을 벗어났는데 지옥을 견딜 수 있게 만들어주는 빛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렇게 난 지옥 속 유일한 희망이었던 그 아이를 지옥에 버려두고 도망쳤다. 그때 난 깨달았다. 누구든 마음속에 악을 품고 있는 거라고. 사회적 관습이나 법에 억눌려서 그악을 분출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중학교 입학은 연우와 나를 더 멀어지게 했다. 중학교 1학년과초등학교 6학년 사이의 간극은 절대 극복할 수 없는 것처럼 거대해 보였다. 연우가 하는 말과 행동이 모두 유치해 보였다. 연우는아프다는 핑계로 결석을 자주 하기 시작했다. 내 무관심에 대한 반항이라고 생각했다. 아픈 아이가 점점 체중이 불어날 수는 없을테니까 속이 쓰려서, 기침이 심해서, 다리가 아파서, 연우는 학교
에 가지 않았다. 연우가 학교에 다시 가기 시작한 것은 지민이 우리 집에 오고 나서였다. 몸무게도 서서히 줄어들어 정상으로 돌아왔다. 지민을 돌보느라 힘들어 체중이 줄어드는 거라 생각했었다. 그렇게 외면하고 회피하는 동안 평화로웠다.
지민이 집에 오던 부활절의 기억이 밀려들었다. 새벽에 비명을 지르며 배를 움켜쥐고 데굴데굴 구르던 연우, 연우를 치료하는데 방해가 된다며 집 밖으로 나를 내쫓던 걸 억지로 성당에 가자며 나를 잡아끌던 지호, 그리고 의도적으로 버려져 있던 지민………… 아무리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도 하체가 너덜너덜해진 지민은 도저히 집으로 걸어올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사건이 벌어진 날, 용걸은 10시경 조퇴를 한 뒤 베이비시터를 퇴근시켰다. 하지만 주말 동안 검토하려고 했던 사건 관련 서류 중 두고 온 것이 있어 지민이 좋아하는 만화영화를 틀어준 뒤 검찰청에 잠시들렀다고 했다. 범죄는 용걸이 집을 비웠다는 3시간 동안 벌어진것으로 추정되었다. 어린 시절부터의 세뇌가 효과적이었는지 지민은 혼자서 외출하는 일이 절대 없었다. 범죄현장으로 추정되는 대각선 철거현장에서 발견된 혈흔은 수사에 혼란을 주기 위한 증거물일 수도 있었다. 순간 널브러진 지민의 주위를 감싸고 있던 비린 밤꽃 향기가 갑
자기 떠올랐다. 바로 그것이었다. 내가 잊고 있었던 중요한 기억이. 범죄는 집 안에서 벌어졌다. 바보 같은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리고 용의자는 한 명밖에 없었다.
토했다. 먹은 것도 없어 신물만 나오는데도 구역질은 멈추지 않았다. 위산으로 식도와 입 전체가 헐어도 구역질은 계속됐다. 시뻘건 핏물까지 나오는데도 구역질은 멎지 않았다. 내 결론이 틀리길 바랐다. 용걸의 방문 앞에서 몇 시간이나 서성였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에도 용걸은 통화를 하고 있었다. 4·15총선을 앞두고 정국이 어수선한 시절이었다. 범인을 잡기 위해 휴직계를 냈다는 건 말뿐이었는지 용걸은 하루 종일 누군가와 통화를 하느라 바빴다.
"여당이고 야당이고 비례대표 1번을 주겠다고 난리법석이야. 후보 등록 마감일까지 얼마 남지 않아서 빨리 결정해야 되는데 고민이네" 용걸의 목소리는 한껏 들떠 있었다. 한밤중, 잠든 용걸 곁에서 앉아 기다렸다. 재개발 때문에 대부분의 가정이 이주한 동네는 밤이 되면 검은 물감이 뒤덮은 듯 어두
있다. 구청에서는 재개발을 이유로 깨진 가로등조차 수리하지 않았다. 어둠에 눈이 적응하자 용걸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가늘고 길게 찢어진 눈, 뭉툭한 콧날, 두툼한 입술, 모두들 용길의 첫인상이 너그럽고 포근해 보인다고 했다. 아마 눈꼬리가 축 처진 것이 한몫했을 터였다. 하지만 내게는 소름끼치는 얼굴일 뿐이었다. 왜소한 체구의 용걸은 움직이지도 않고 이불 속에서 낮게 코를 골며 편안한 잠에 빠져있었다. 난 연우의 유일한 보호자였다. 내가 없으면 연우가 대신 맞을거란 생각에 도망치지 못했다. 아마 연우도 그래서 도망치지 못했을 것이다. 차마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내 곁에 남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연우에게는 내가 나에게는 연우가 인질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했기 때문에 용걸에게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불행한 신세였다. 그래서 서로의 존재를 원하는 만큼 서로가 사라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나에게 ‘가족‘이란 겨우 그 정도의 의미밖에 되지 못했다. 서로를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일 자격이 없었다. 연민, 분노, 동정, 증오, 수많은 감정들이 끓어 넘쳐흘렀다. 연우가 왜 내게 아무 말 못했는지 이해하면서도 원망스러웠다. 추측의문, 확신, 부정, 수많은 생각들이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용걸이 그런 짓을 벌였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호명할 때는 같이 박수쳐주고 우리반 담임 호명할 때는 가만히 있었죠. 그렇게 개망신을 줬는데도 아직 학교 다니는 거 보면 그 선생도 참 뻔뻔해요."
너무 화가 나서 일어나 밖으로 나와 버렸다. 줄담배를 피워도억울함과 답답함이 가시지를 않았다. 유림이 앞에 있다면 대신 변명해주고 싶었다. 연우는 결코 비겁한 아이가 아니었다. 누구보다 책임감과 정의감이 강한 아이였다. 겁이 많았지만 이유 없이 불의를 모른 척하고 피할 성격은 아니었다. 분명 과중한 업무나 지민의 간병 때문에 지쳐서 그랬을 것이다. 그런 이유조차 비겁한 변명이라 생각해 유림에게 말하지 못했을 연우가 안타까웠다. 가끔은 인간을 이해할 수 없었다. 모순되는 감정이 요동쳤다. 처음부터 자신을 편들지 않았던 사람보다 중간에 마음을 바꾼 연우가더 밉다는 유림의 복잡한 심정이 이해되면서도 상처받았을 연우가 걱정스러웠다.
아이들은 순수하다. 순수하게 이기적인 본능으로 가득해 악랄하다. 그 절대적인 무모함이 싫었다. 그래서 민수는 아이들을 싫어한다. 세상의 부조리나 삶의 아이러니 따위는 겪어보지 않아 순수
한 아이들일수록 더 악한 법이었다. 아이들이 싫어서 학교도 싫었다. 초등학교 시절, 쉬는 시간이면 왼쪽 관자놀이가 뻐근해져왔다. 우당탕탕,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우르르 몰려서 큰 목소리로 떠드는 아이들을 보며 빨리 쉬는 시간이 끝나기만을 빌었다. 언제 아이들이 몰려와 자신을 괴롭힐지 몰라 두려웠다.
민수에게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놀리고 낡은 옷이 더럽다고 침을 뱉던 아이들도 순수했다. 연호에게 죽도록 얻어터지고서야 사과하던 아이들도 커다랗고 순진한 눈망울을 반짝였다. 그래서 교사가되고 싶다는 연우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연호도 마찬가지였다.
"지민이처럼 특별한 아이들을 보살피는 선생님이 되고 싶어." 연우는 그렇게 말했다. 더 이상 민수도, 연호도 연우의 진로를반대하지 못했다.
처음 지민이 노란 가방을 메고 어린이집에 가는 날, 민수와 연호는 학교를 결석하면서까지 따라갔었다.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한 지민의 담임선생님을 붙잡고 유의사항을 얼마나 많이 반복했는지 집으로 돌아올 때는 둘 다 목이 쉬어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지민을 괴롭히고 따돌렸다. 어린 아이들의 눈에는 뜨거운 국에 얼음을 넣어 먹고, 가위를 처음 사용해 보는 지민이 이상하게 보일 만했다. 딸기잼이라 속여 고추장을 먹이고, 뜨거운 주전자를 맨손으로 붙잡으라고 시키고는
작가의 말
2017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끔찍하고 잔혹한 시간이었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내 믿음은 그해에 완벽하게 부서졌다. 세상의 모든 악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악에 물어뜯기지 않으려 반항하던 내 육체와 정신은 너덜너덜하게 닳아 바스라지기 직전이었다. 소멸하기 직전인 날 위해 유언장 대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해의 기억들을 모두 글 속에 토해내고 나면 잊을 수 있을 것같았다. 한 글자, 한 글자 쓸 때마다 그때의 기억이 날 아프게 하는 시간이었다. 그 잔인했던 2017년의 상처와 고통을 되짚으며 글을 마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다.
달팽이는 동종이나 알 자식을 잡아먹기도 할 정도로 이기적인 생존본능을 지닌 대표적 동물이다.
"난 달팽이가 좋아. 낯선 이가 나타나면 집 속으로 숨어들어가는 것도, 언제든 숨기 위해 그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다니는 것도 너무나 연약해서 다치기 쉬운 그 몸도 상처받을까 봐 숨는 건데 모두들 딱딱한 집만 보고 강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언니랑 닮았잖아.
그래서 달팽이가 달팽이 따위와는 닮고 싶지 않았다.
달팽이(Snail)와 뱀(Snake)의 어원은 같다. 이브에게 선악과를 먹으라고 꾀던 간교한 뱀의 이미지가 떠올라 마땅찮았다. 아니, 뱀보다는 이브가 더 증오스러웠다. 이브가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연우의 삶은 훨씬 아름다웠을 것이다. 결국 인간이 문제였다. - 본문 중에서
우리나라 학교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 <방과 후>와 비견되는현재 우리 학교에서 벌어지는 충격적인 사건들과 놀라운 결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