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윤동주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어떤 하루 체인 케니언고독 건강한 몸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지 못할 수도 있었는데 시리얼과 달콤한 우유와탐스러운 복숭아를 먹었다 그러지 못할 수도 있었는데 개를 데리고 자작나무 숲으로 올라갔다 아침 내내 좋아하는 일만 하고 오후에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누웠다 그러지 못할 수도 있었는데 우리는 은촛대가 놓인 식탁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러지 못할 수도 있었는데 그림이 걸린 방에서 잠들며 오늘 같은 내일을 기약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언젠가는 그러지 못하게 되리라는 걸
우리는 질문하다가 사라진다 파블로 네루다 어디에서 도마뱀은 꼬리에 덧칠할 물감을 사는 것일까 어디에서 소금은 그 투명한 모습을 얻는 것일까 어디에서 석탄은 잠들었다가 검은 얼굴로 깨어나는가 젖먹이 꿀벌은 언제 꿀의 향기를 처음 맡을까 소나무는 언제 자신이 향을 퍼뜨리기로 결심했을까 오렌지는 언제 태양과 같은 믿음을 배웠을까
연기들은 언제 공중을 나는 법을 배웠을까 뿌리들은 언제 서로 이야기를 나눌까 별들은 어떻게 물을 구할까 전갈은 어떻게 독을 품게 되었고 거북이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그늘이 사라지는 곳은 어디일까 빗방울이 부르는 노래는 무슨 곡일까 새들은 어디에서 마지막 눈을 감을까 왜 나뭇잎은 초록색일까 우리가 아는 것은 한 줌 먼지만도 못하고 짐작만이 산더미 같다 그토록 열심히 배우건만 우리는 단지 질문하다 사라질 뿐
사랑 사랑은 사고파는 물건이 아닙니다. 거저 주는 것이지요. --프란체스코 교황
두려워 말라. 고통을 피하고 멀리하는 사람은외톨이가 될 것이다. 이기적인 사람보다 더 외로운 사람은 없다. 내가 모든 이를 위해 내 목숨을 내놓았듯이, 네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생명을 내어준다면 풍성한 수확을 얻게 될 것이다. - 오스카르 아르눌포 로메로 대주교
체로키 인디언의 노래 새로 태어난 아기에게 또 한 사람의 여행자가 우리 곁에 왔네 그가 우리와 함께 지내는 날들이 웃음으로 가득하기를 따뜻한 하늘의 바람이 그의 집 위로 부드럽게 일기를 위대한 정령이 그의 집에 들어가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기를 그의 모카신 신발이 여기저기 눈 위에 행복한 발자국을 남기기를 그의 어깨 위엔늘 무지개가 뜨기를
오늘도 어김없이 해가 뜨고 구름이 흘러갔다. 사람들이지나가고 바람이 불었다. 이 당연한 일이 당연하지 않음을 안다. 미처 생각지 않게 우리와 함께하는 고마운 게 얼마나 많은지. 해와 달, 바람과 함께 흔들리는 풀과 나무하며 지금 옆에는없어도 참 따스한 가족과 지인들, 길과 길, 어느 순간 은총으로 바뀌는 힘든 일 등. 감사 기도를 하는 순간이다. 힘든 일조차 고맙다는 마음과 환한 마음이 열리고, 창문이 열리고, 첫 새벽하늘이 열리고 해가 떠오른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은 ‘고마‘와 ‘같습니다‘가 하나된 말이다. 고마는 땅의 신으로 우러르는 신성한 동물, 곰을 뜻한다. 고운여자의 ‘곱다‘도 고마에서 온 거라 한다.
말의 뿌리를 찾아가면 ‘고맙습니다‘라는 말은 ‘당신은 대지의 신처럼 은혜로운사람‘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고 한다. 쓸수록 나 자신도 빛나고, ‘남도 축복하는 멋진 말이니 마르고 닳도록 써도 좋으리라.
고맙다는 마음을 가지면 서로가 더 단단하게 이어진다. 나 자신이 태어나길 잘했다는 것. 숨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오래된 기도 이문재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 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기만 해도.
미술관 로버트 해희망
캐테 콜비츠의 작품이 전시된 미술관의 아침, 젊은 남녀가 식당으로 들어선다. 여자는 아이를 안고 있고 남자는 일요일 뉴욕타임스를 들고 있다. 여자는 등받이가 높은 버드나무 의자에 앉아아이를 감싸안는다. 남자는 쟁반 가득 신선한 과일과 빵을 가져오고, 흰 컵에 커피를 따른다. 남자의 머리는헝클어져 있고 여자의 눈은 부석부석하다. 공기를 마시러 물 위로 솟아오른 잠수부처럼잠 속으로 내동댕이쳤다가 순식간에 끌려나온 듯하다.
남자가 아이를 받아 안는다. 여자는커피를 마시고 신문의 첫 페이지를 훑어본다. 태양 아래 조그만 그들의 자리에서 버터를 바르고 빵을 먹는다.
잠시 후, 여자가 아이를 받아 안는다. 남자는 북 리뷰를 읽으며 과일을 먹는다. 여자가 과일 먹고 담배 피우며 신문을 뒤적이는 동안 남자가 다시 아이를 받아 안는다. 서로 눈길을 자주 나누지도 않는 두 사람, 나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저 공평한 풍경과사랑에 빠지고 만다. 아기조차 잠에 빠져 돕고 있지 않은가.
주변엔 캐테 콜비츠의 목판화가 가득하다. 고통을 견딜 재능도 능력도 없는 얼굴들, 무감각해진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얼굴들. 배고픔, 가공할 테러. 그러나 이 젊은 부부는 햇살 아래서 일요일 신문을 읽고 있다. 아이는 잠들었고, 벗겨놓은 멜론 껍질에서 푸른 싹이 돋기 시작한다. 이제 모든 것이 가능할 것만 같다.
세수 이선영
희망어제의 나를 깨끗이 씻어낸다 오늘의 얼굴에 묻은 어제의 눈곱 어제의 잠어젯밤 어둠 어젯밤 이부자리 속의 어지러웠던 꿈 어제가 혈기를 거둬간 얼굴의 창백함을 힘있지는 않지만 느리지는 않은 내 손길로 문질러버린다 늘 같아 보이지만 늘 새것인 물이 얼굴에 흠뻑!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오늘엔 오늘 아침 갓 씻어낸 물방울 숭숭 맺힌 나의 얼굴이 있고 그러나 왠지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지 않은가, 어제는 잔주름만 남겨놓았고 오늘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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