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베르토프의 관객 대다수는 (에이젠시테인과 푸킨의 관객과 마찬가지로) 소련 초기의 영화 선전가들이 고귀한 이상을 그려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실에서는 그 이상이 아무리 배반당했대도 말이다. 
그러나 리펜슈탈을 향한 찬사에는 그러한 구제 수단이 없는데, 리펜슈탈의 복권을 불러온 사람을 비롯해 그 누구도 그를 호감가는 인물로 만들지 못했으며 그는 사상가도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대개 국가사회주의가 잔인함과 공포만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국가사회주의는, 더 나아가 파시즘은, 삶이 곧 예술이라는 이상,
아름다움 추종, 용기에 대한 맹목적 숭배, 공동체에서 느끼는 황홀경을 통한 소외의 해소, 지성에 대한 거부, 지도자를 부모로 둔)인간 가족처럼, 다른 기치 아래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는 다양한이상을 옹호한다. 
이 이상들은 사람들에게 생생한 감동을 준다.
사람들이 의지의 승리>와 <올림피아>에 감명받는 이유가 그저 천재영화감독의 작품이기 때문이라는 말은 동어반복일 뿐만 아니라 부정직하다. 리펜슈탈의 영화가 지금도 유효한 이유는, 무엇보다 작품 속의 갈망이 아직도 존재하고, 많은 사람이 여전히 작품에 담긴 낭만적 이상에 애착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한 낭만적이상은 청년/록 문화와 원시 치료(유아기의 고통을 재경험하면서 내면의 상처를 치료하는 심리치료 기법-옮긴이), 반정신의학(anti-psy-chiatry, 정신의학에 반대하며 정치적·사회적 차원에서 정신병의 원인을 - P-1

설명하려는 움직임-옮긴이), 제3세계 진영 추종, 오컬트에 대한 믿음처럼 다양한 방식의 문화적 저항과 새로운 공동체 선전의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공동체를 찬양한다고 해서 절대적 지도자를 찾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필연적으로 절대적 지도자를찾게 될 수도 있다. 
(현재 구루들 앞에 바짝 엎드려 기괴한 독재적 규율에 복종하고 있는 청년 중 상당수가 과거 1960년대에는 반권위주의자이자 반엘리트주의자였다는 것도 그리 놀랍지 않다.)

오늘날 리펜슈탈을 탈나치화하며 그가 (영화감독으로서, 현재는 사진가로서) 굳건히 아름다움을 추구해온 사제라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안의 파시즘적 갈망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한다는 징조다. 

리펜슈탈은 평범한 탐미주의자나 인류학적 낭만주의자가 아니다. 그의 작품이 가진 힘은 정확히 정치적 · 미학적 신념의 연속성에 있는데, 흥미로운 점은 오늘날보다 과거에 이 사실이 훨씬 명백하게 드러났다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이 구도의 아름다움 때문에 리펜슈탈의 이미지에 끌린다고 주장한다.

역사적 관점이 없다면, 이러한 감식안은 온갖 파괴적 감정(사람들이 그 영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감정)의 선전을 기이할 만큼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결과를 불러온다. 물론 리펜슈탈의 작품같은 예술에서 중요한 것이 아름다움만은 아님을 한편으로 모두가 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양쪽에 판돈을 건다. 이런 예술의 의심할 여지 없는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한편, 고결한 척하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태도를 깔보는 것이다. 엄숙하고 까다로운 형식주의 - P154

적 감상 뒤에는 더 폭넓은 감상, 바로 진지한 태도에서 나오는 망설임이 전혀 없는 캠프적 감성이 있다. 현대적 감성은 형식주의적접근 방식과 캠프적 취향 사이의 끊임없는 절충에 의존한다.
오늘날 파시즘 미학의 주제를 환기하는 예술이 인기를 끌고 있으며, 아마 대다수에게 이런 예술은 그저 캠프의 변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파시즘은 한낱 유행일 뿐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이렇게 무차별적으로 다양한 취향의 유행이 우리를 구할지도모른다. 
그러나 취향에 대한 판단 자체는 그렇게 순수할 수 없는듯하다. 
10년 전에는 소수의 취향이나 상반된 취향으로서 대단히 옹호할 가치가 있어 보였던 예술이 오늘날에는 더 이상 옹호할 수없게 되기도 하는데, 그 예술이 불러일으키는 윤리적·문화적 문제가 전과 달리 심각하고 심지어 위험해졌기 때문이다. 

냉엄한 진실은, 엘리트 문화에서는 용인될 수 있는 것이 대중문화에서는 용인되지 않을 수 있고, 소수의 것으로서 오로지 무해한 윤리적 문제만 일으키던 취향이 더 많은 사람에게 수용되면 유해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취향은 맥락이며, 그 맥락이 달라졌다.
Π두 번째 증거물. 여기 공항 잡지 가판대와 ‘성인용‘ 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는 책 한 권이 있다. 「누바족의 최후』처럼 예술을 애호하고 생각이 올바른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값비싸고 호화로운 책이 아니라 값싼 페이퍼백이다. 그러나 이 두 책은 도덕적 - P-1

기원이 같다. 근원적 집착은 같고, 진화의 단계는 다르다. 「누바족의 최후를 움직이는 개념은 SS 제복SS Regalia』 뒤에 깔린 더조악하고 강렬한 개념만큼 도덕적으로 거리낌 없지 않다. ‘SS 제복은 영국에서 편집한 어엿한 책이지만(역사를 개괄한 3쪽 분량의서문과 함께 책 뒤에 주석도 실려 있다) 

이 책의 매력이 학문적인 것이아니라 성적인 것임을 모두가 안다. 표지에서 이미 그 사실이 명백히 드러난다. SS 완장의 거대하고 검은 스와스티카 위로 사선의 노란색 띠가 지나가고, 그 위에는 "100장 넘는 컬러 사진에 겨우 2.95달러"라고 쓰여 있다. 포르노 잡지 표지 모델의 생식기 위에 반은 농담으로, 반은 검열에 대한 존중으로 붙여놓은 가격 스티커와 똑같다.

제복에는 보편적 환상이 있다. 제복은 공동체, 질서, 정체성(계급장과 배지, 훈장처럼 착용자가 누구이고 어떤 공적을 쌓았는지를공표하는 것들을 통해 착용자의 가치가 인정된다), 유능함, 적법한 권위, 적법한 폭력의 행사를 암시한다. 
그러나 제복은 제복 사진과 같지 않다. 세복 사진은 성적인 자료이며 SS 제복의 사진은 특히널리 퍼진 강력한 성적 판타시의 구성 요소다. 왜 SS일까? SS는폭력의 정당성, 즉 타인을 마음껏 지배하고 그들을 철저히 열등한존재로 취급할 권리를 공공연하게 주장하던 파시즘의 이상적 화신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이 가장 온전히 실현된 곳이 바로SS였다. SS는 몹시 잔혹하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이러한 이상을실행에 옮겼고, 자신들을 특징 미학적 기준과 연결함으로써 그러 - P-1

행위를 극화했다. SS는 지극히 폭력적일 뿐만 아니라 지극히 아름다운 엘리트 군사 집단으로 고안되었다. (‘SA 제복‘이라는 제목의 책은 볼 확률이 낮다. SS로 대체된 SA는 SS보다 덜 잔혹하지는 않았으나. 맥줏집에 있을 법한 뚱뚱하고 땅딸막한 유형, 한낱 ‘갈색 셔츠‘라는 별명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SS 제복은 우아하고 견고하게 만들어졌으며, 기발한 느낌(과하진 않았다)이 있었다. 이에 비해 미 군복은 지루하고 대충 만들어졌는데, 재킷과 셔츠, 넥타이, 바지, 양말, 끈으로 매는 신발로 구성된 미 군복은 훈장과 배지로 아무리 꾸며도 본질적으로 민간인 복장과 다를 바 없었다. SS 제복은 꽉 끼고 무겁고 빳빳했으며, 다리와 발을 무겁게 감싸는 부츠와 손을 덮는 장갑이 있어서 착용자가 꼿꼿이 설 수밖에 없었다. 

『SS 제복』 뒤표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SS 제복의 색은 독일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검은색이었다. SS는 계급을 구분하기 위해 제복 위에 여러 장식과 상징, 배지를 달았는데, 그 종류는 옷깃의 룬 문자에서 해골 모양까지 무척 다양했다. 그 모습은 극적이면서도 위협적이었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듯한 표지 사진은 매우 유혹적이지만,
책 속의 사진은 대부분 따분하다. 나치 대원들은 책에서 찬양한검은색 제복과 함께 거의 미군처럼 보이는 카키색 제복과 위장용 - P-1

외투 및 재킷을 배급받았다. 제복 사진 외에도 옷깃에 다는 패치와 커프 밴드, 계급장, 벨트 버클, 기념 배지, 연대 깃발, 트럼펫에 다는 깃발, 전투모, 공로훈장, 견장, 허가증, 출입증이 여러쪽에 걸쳐 실려 있는데, 악명 높은 룬 문자나 해골 문양이 있는 것은 별로 없고 계급과 부대, 배급 연도와 계절이 전부 꼼꼼히 설명되어 있다. 

거의 모든 사진이 무해하다는 바로 그 사실이 이 이미지의 힘을 입증한다. 

독자는 성적 판타지의 성무일도서를 보고 있는 것이다. 환상이 깊이를 지니려면 반드시 디테일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1944년 봄, SS 병장이 트리어에서 뤼베크로 이동할 때 필요했던 여행 허가증은 무슨 색이었을까? 모든 증거 서류가 필요하다.
파시즘의 메시지가 미학적인 안목을 통해 중화되었다면,
파시즘의 예복은 성애화되었다. 이런 파시즘의 성애화는 미시마유키오의 『가면의 고백』과 『태양과 철』 같은 매혹적이고 경건한작품이나, 케네스 앵거의 <스콜피오 라이징 Scorpio Rising>, 그만큼흥미롭지는 않지만 더욱 최근작인 비스콘티의 <저주받은 자들 TheDamned>과 카바니의 <야간 배달부The Night Porter> 같은 영화에서발견할 수 있다. 파시즘을 진지하게 성애화하는 것은 문화적 공포를 이용한 세련된 유희와 구분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놀이에는 농담의 요소가 있다. 로버트 모리스는 최근 카스텔리 갤러리에서 열린 자기 전시회를 위해 본인의 사진으로 직접 포스터를 만들었다.
사진 속 그는 상반신을 탈의하고 선글라스와 나치 헬멧처럼 보이 - P158

는 것을 썼다. 목에 건 징박힌 금속 복길이에는 두툼한 체인이 달리 있고, 수갑 찬 손으로 그 체인을 붙잡고 있다. 
모리스는 이것이 아직 충격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이미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예술이 무릇 신선한 도발적 제스처의 연속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이들에게는 충격을 주는 것이 예술의 유일한 미덕이다. 
그러나 이 포스터는 정확히 반대의 효과를 낸다. 

그러한 맥락에서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다는 것은 곧 사람들을 그 충격에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한데, 나치 자료가 팝아트의 아이러니적 논평에 사용될 수있는 대중적 도상 체계의 방대한 레퍼토리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치즘은 팝아트적 감성으로 해석된 다른 도상 체계(마오찌둥에서 마릴린 먼로에 이르기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을 매혹한다. 물론 파시즘에 대한 관심이 전반적으로 늘어난 것은 어느정도 호기심의 산물로 볼 수 있다. 1940년대 초반 이후에 태어나공산주의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왁자지껄한 주장에 평생을 시달린 이들에게, 부모 세대의 훌륭한 대화 주제였던 파시즘은 이국적인 미지의 것을 상징한다. 또한 젊은이들은 대체로 공포와 비이성적인 것에 매혹된다. 요즘 대학 캠퍼스에서 파시즘의 역사를 다루는 강의는 (뱀파이어리즘을 비롯한) 오컬트 강의와 더불어 큰 인기를끌고 있다. 이에 더해 「SS 제복」이 뻔뻔할 만큼 적나라하게 증명하는 단연코 성적인 파시즘의 매력은 아이러니나 지나친 친숙함때문에 위축되는 일이 없는 듯 보인다.
전 세계, 그중에서도 특히 미국과 영국, 프랑스, 일본, 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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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를 동시에 요구해야 한다. 
하나는 더 이상 성 정체성에따라 직장의 범위가 결정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전통적으로 ‘여성스럽다고 여겨진 가사 노동을 남성이 똑같이 분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요구 모두 강렬한 저항에 부딪힌다. 
남성은 이 요구들을 난처해하고 위협적으로 느끼는데, 요즘에는 두번째 요구보다 첫 번째 요구를 조금이나마 덜 불편하게 여기는 듯하다. 이 현상은 가정생활의 문법이 (언어 자체처럼) 성차별적 억측의 가장 강력하고 완강한 요새임을 보여준다.

여성을 억압하지 않는 가정생활 방식에서 남성은 모든 가사활동에 참여할 것이다. (그리고 여성은 가족과 아무 관련 없는 ‘바깥의 의무에 상당한 시간을 써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해결책이 남성의 가사 참여도를 높이는 수준에 그쳐선 안 되고, 모든 집안일과 책임을 똑같이 나누는 것이 이상적이다. 가사일 자체도 반드시 재검토해야 한다. 
가족은 봉인된 분자일 필요가 없고, 가족의 모든 활동이 ‘그 분자‘ 안에 속할 필요가 없다. 전근대 사회에서 그랬듯, 많은 가사 업무를 공용 공간에서 더 효율적이고 쾌적하게 수행할 수있다. (여유가 있는 각 가족이 개인 베이비시터나 가정부를 두는 것에는, 즉 프리랜서 여성을 고용해 아내의 비공식적이고 보수도 없는 하인 역할을 분담하거나 대체하는 것에는 진정한 유익이 없다. 
마찬가지로, (이기심과 두려움이라는 이유를 제외한다면) 각 가족이 자기 세탁기와 자동차, 식기세척기, 텔레비전 등등을 갖춰야할 이유는 없다. 여러 국가가 전근대 경제에서 산업화를 거쳐 - P91

상당한 부유층을 제외하고는 개인 가사도우미(주로 여성)를 고용하는 가정이 점점 줄고 있는 한편, 각자 소유한 기계의 도움을 받는 가정이 급증하고 있다. 
소비사회에서는
‘개별‘ 가족이 기계 하인의 서비스를 구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신념이지만, 이런 서비스의 대다수를 여러 가족이 공동으로 소유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불필요하게 중복되는 노동을 없애고 경쟁과 소유욕을 억제하고 쓰레기를 줄일 수 있다. 
가사 노동을 평등하게 나누는 것은 아내와 남편의 역할, 어머니와 아버지의 역할에 대한 억압적 정의를 바꾸는 데 꼭 필요한 단계 중 하나다. 또한 이렇게 하면 작디작은 가족들을 서로 갈라놓음으로써 각 가족의 구성원에게 엄청난 심리적 압박을 가하는 모든 현대 산업사회의벽들을 부술 수 있다.

현대의 ‘핵‘가족은 심리적·도덕적 재앙이다. 성적 탄압의 감옥이자, 일관성 없는 도덕적 해이의 장이자, 소유욕의 박물관이자, 죄책감을 생산하는 공장이자, 이기심의 양성소다. 그러나 가족 구성원들이 불안과 축적된 살인적 감정이라는 지나친 대가를 치르고 있긴 해도, 현대의 가족은 긍정적 경험을 제공하기도한다. 줄리엣 미첼 Juliet Mitchell이 지적했듯이, 오늘날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은 보통 사람을 소외시키지 않는 대인 관계의 근사치(온기와 신뢰, 대화, 경쟁심 없음, 충실함, 자발성, 성적 쾌락, 재미)가 아직 허용되는 유일한 장소다. 노동과 모든 사회적 유대 관계에서 사람을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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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기존의 지배 형태를 재생성하는 역할을 한다.
여성이 남성과 공동 전선을 펴서 상호 해방을 불러와야 한다는 주장은 두 성별 사이의 모든 대화를 결정하는 권력관계의 혹독한 현실을 감춘다. 
남성 해방은 여성이 맡을 과제가 아니며, 먼저 여성은 스스로를 해방해야 한다. 
즉, 당장 화해라는 꿈에 회유되지 않고 대립의 원인을 살펴야 한다는 뜻이다. 
여성은 변화가 남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걱정하지 않고 스스로를 바꿔야 하고, 서로를 바꿔야 한다. 

오로지 여성이 자기 자신을 생각하고 무엇이 남자에게 좋은지를 망각할 때만 여성의 의식이 변화할 것이다. 

남성과 협업해서 이러한 변화에 착수할 수 있다는 생각은 여성 투쟁의 범위와 깊이를 축소하고 하찮게 만든다.

여성이 바뀌면 남성도 바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남성의 변화는 상당한 저항 없이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 어떤 지배계급도 싸우지 않고 자신의 진정한 특권을 먼저 내려놓지 않았다.
이 사회의 구조 자체가 남성의 특권 위에 세워졌고, 남성은 더 인간적이거나 공정한 결정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특권을 양도하지 않을 것이다. 

남성들이 마지못해 양보하며 여성에게 ‘시민권‘
을 더 많이 부여할 수는 있다. 

오늘날 대다수 국가에서 여성은 투표할 수 있고 고등교육 기관에 다닐 수 있으며 전문직 훈련을 받을수 있다. 향후 20년 이내에 여성은 동일 노동에 동일 임금을 받고(피임약에 자유롭게 접근하고 임신 중절을 합법화함으로써) 자기 몸을더욱 실실적으로 소유할 수 있을 것이다.  - P64

여성을 계속 2등 시민으로 만드는 근본적 태도에 이의를 제기하지도, 남성 특권의 뿌리를 건드리지도 않는다.

진보적이 아니라 급진적인 여성의 지위 변화는 ‘본성‘의 신비를 폐지할 것이다. 
여성은 성 정체성과 결부되는 모든 고정관념을. 부정적인 것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것까지 전부 없애려고 노력해야 한다. (참정권과 계약 체결, 교육 기회, 고용에 관한) 구체적 상황에서의 여성 차별적 법규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노동 형태와 성적 관습, 가정생활 개념을 바꿔야 하고, 여성을 향한 오랜 편견을 적나라하게 간직하고 있는 언어 자체도 그대로 놔둬선 안 된다. 우리의 생각이 아무리 급진적이어도 언어를 쓸 때마다 남성의 우월함(능동성)과 여성의 열등함(수동성)을 계속 긍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능동적 행위자는 남성으로 추정하는 것이
‘문법적으로 옳다‘. 문법은 성차별적 세뇌의 궁극적 무대로,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면 여성의 존재를 감춘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성별 중 어느 쪽에도 해당할 수 있는 경우에 반드시 "he"라고 칭해야 한다. "man"은 일반적으로 모든 인간을 지칭하며, "men‘
은 문학적으로 사람들을 의미한다.
 (브레히트의 시구와 한나 아렌트의 저서 제목에 들어 있는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men in dark times" 이라는문장에서 men은 people이라는 뜻이다. 사실 훌륭하고 고결한 이 책에서아렌트가 다룬 열 명의 인물 중 여성은 두 명이다. 그러나 그중 이자크 디네센Isak Dinesen은 남성적인 필명을 사용했고 또 다른 한 명인 로자 룩셈부르크는 표지의 광고 문구가 새침하게 언급하듯 - P65

슬로건 중 하나가 가족의 신성함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는 않지만, 여기서 가족이란 오직 가부장적인 ‘핵‘
가족만을 의미한다. 가정생활은 산업화된 도시 사회가 파괴하면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보존해야만 하는 바로 그 ‘인간적‘ 가치의 시대착오적 보호 구역이다.
자본주의(그리고 그 사촌 적인 러시아식 공산주의)는 살아남기 위해, 즉 시민에게서 생산성과 소비 욕구를 최대한 뜯어내기 위해, 사람을 소외시키는 가치를 계속해서 허용해야만 한다. 

따라서 경제적·정치적으로 무력한 가족이라는 제도 안에서 이러한 가치들에 특권적이거나 보호받는 지위를 부여한다. 바로 이것이 현대 핵가족이라는 형태 뒤에 숨은 이념적 비밀이다. 가족 단위는 수가 적고 너무 기본적인 역할만 남아 있고 생활 공간(전형적으로 방이 세개나 네 개인 도시 아파트)에만 한정되어 있어서, 경제 단위가 되거나 정치권력의 원천과 연결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근대 초기에 가정은 제단이자 의례 장소라는 오래된 역할을 상실했다. 
종교적 기능은 ‘교회‘가 완전히 독점했고, 가족 구성원은 개인으로서 집에서 나와 교회 활동에 참석했다. 18세기 말부터 가족은 자녀를 교육할 (또는 교육하지 않을 권리를 중앙 집권화된 국민국가에 양도해야 했고, 각 가족의 자녀는 개인으로서 국가가 운영하는 ‘공립 학교‘를 반드시 다녀야 하는 법적 의무를 졌다. 기본 가족이라고도 불리는 핵가족은 쓸모없는 가족이며, 도시산업 사회의 이상적인 발명품이다. 쓸모없는 것, 쉼터가 되는 것이 바로 핵가족의 기능 - P93

경제적·종교적·교육적 기능을 박탈당한 가족은 오로지 냉혹한 세상에서 감정적 온기를 제공하는 원천으로서만 존재한다.

가족 예찬은 순전한 위선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이념과 작동 방식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기도 한다. 

현대 가족은 이념적으로 사람들을 조종하는 기능을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현대 가족은 스스로를 조종한다. 가정생활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을 전부 기반으로 일축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진정한 가치들이 핵가족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실제로 오늘날 만연한, 그 빈약한 형태의 가정생활조차 없다면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소외된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이 전략은 무기한 작동하지 않는다. 가정생활이 보호해야 하는 가치들과산업 대중사회가 고취하는 가치들 사이의 모순은 결국 폭발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가족은 할당된 과제, 가족의 현대적 형태를 정당화하는 바로 그 과제를 점점 더 형편없이 수행하고 있다. 산업사회의 윤리 박물관이라는 가족의 기능은 갈수록 저하되고 있으며, ‘인간적‘ 가치는 가족 내에서도 점점 새어 나가고 있다. 

산업대중사회는 사람을 소외시키지 않는 가치들을 안전한 장소에, (성의상) 비정치적인 세도에 보관한다. 그러나 그 어느 곳도 안전하지않다. ‘바깥‘ 세상의 산성이 너무 강해서 가족은 갈수록 부식되고있으며, 사회는, 예를 들면 모든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의 균일한 목소리를 통해 직접 내부로 침투해 가족을 점점 오염시키고 있다.
가족이 권위주의적이기 때문에 가족을 ‘파괴‘해야 한다는 - P-1

집에 묶인, 내 남성 동료의 아내들에게서 간간이 느껴지던 질투와 분노를 제외하면 말이다. 내가 예외임을 자각하고 있었지만 예외로 사는 것은 전혀 힘들지 않았고, 내가 누리는 혜택을 내권리로 받아들였다. 지금은 그것이 잘못이었음을 안다.

나 같은 사례는 드물지 않다. 그리 역설적인 일은 아닌데,
대다수 여성이 해방되지 않은 진보적 사회에서 ‘해방된‘ 여성으로 사는 삶은 당혹스러울 만큼 쉬울 수 있다. 재능이 많고 쾌활하거나 자의식이 고집스럽게 부족하면 자율성을 주장하는 여성이 겪기 쉬운 초기의 장애물과 조롱을 (나처럼) 피할 수도 있다. 이런 여성은 독립적인 삶을 영위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며, 어쩌면여성으로서 눈에 더 잘 띈다든지 하는 직업적 이득을 거둘지도 모른다. 이런 여성이 누리는 행운은 진보적이지만 여전히 인종차별적인 사회에서 일부 흑인이 누리는 행운과 똑같다. 모든 진보적인 집단(그 분야가 정치든 직업이든 예술이든)에는 토큰이 될 여성이 필요하다.
나는 지난 5년간 (여성 운동의 도움을 받아) 나의 경험을 특정정치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법을 배웠다. 내가 누린 행운은 요점과 아무 관련이 없다. 나의 경험이 무엇을 입증하는가? 아무것도 입증하지 못한다. 자신의 특권적 상황을 만족스럽게 받아들이는 이미 ‘해방된‘ 모든 여성은 다른 여성을 억압하는 데 일조한다.
나는 예술과 과학, 자유직, 정치 분야에서 커리어를 쌓은 여성의압도적 다수가 다른 여성을 억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P-1

성공한 여성 대다수가 얼마나 여성을 혐오하는지를 느끼고 충격받은 적이 많다. 그들은 다른 여성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따분하고 피상적이고 성가신지를, 자신이 남성 동료를 얼마나 더 선호하는지를 열렬히 말하려 한다. 
기본적으로 여성을 경멸하고 아랫사람 보듯 하는 대다수 남성과 마찬가지로, ‘해방된‘ 여성들도 대개 다른 여성을 좋아하거나 존경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여성을 성적인 경쟁자로 여기고 두려워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직업적 경쟁자로 여기고 두려워한다. 
그리고 거의 남성으로 구성된 직업 세계에 입장이 허용된 여성이라는 자신의 특별한 지위를 지키고 싶어 한다. ‘해방된‘ 여성으로 불리는 대다수 여성은 뻔뻔한 엉클톰 (백인의 억압에 순응하는 흑인을 의미하는 속어-옮긴이)이다.
그들은 남성 동료들에게 열심히 아침하며 자기만큼 성공하지 못한 다른 여성들을 깎아내리는 공범이 되고, 그들이 여성으로서 겪는 어려움을 거짓말로 축소한다. 
이런 행동은 다른 여성들도 노력만 한다면 자신처럼 성취를 거둘 수 있고, 남성이 세운 장벽은 쉽게 부술 수 있으며, 여성을 방해하는 사람은 주로 여성 자신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해방된‘ 여성의 첫 번째 책임은 최선을 다해 가장 충실하고 자유롭고 창의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두 번째 책임은 다른 여성들과 연대하는 것이다. 해방된 여성은 남성과 함께 살고 일하고 섹스할 수 있다. 
그러나 여성이 처한 상황을 현실보다 더 단순하거나 덜 의심스럽거나 타협으로 가득하지 않은 것처럼 묘

여성이라는 제3세계 - P101

사할 권리는 없다. 남성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다른 자매를 배신해서는 안 된다. 
(1973) - P-1

(물론 리펜슈탈이 말하는 누바족은 남성을 뜻한다) 여성과의•접촉은 불경한 일이다. 그러나 이 이상적인 사회에서 여성은 자기분수를 안다.

레슬링 선수의 약혼자나 아내는 남자들만큼이나 친밀한 접촉을피하고자 한다. 자신이 힘센 레슬링 선수의 신부나 아내라는 자부심이 욕정을 대체한다.
마지막으로, 리펜슈탈이 "죽음을 그저 운명의 문제로 받아들이며 죽음에 저항하거나 대항하지 않는" 사람들과 가장 열렬하고 호화로운 의례가 장례식인 사회를 피사체로 고른 것은 아주훌륭한 선택이다. 죽음 만세.

「누바족의 최후를 리펜슈탈의 과거와 분리하지 않는 것이 불쾌하고 악의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리펜슈탈의 복권이라는 최근의 흥미롭고도 완고한 사건뿐만 아니라 그의 작업의 연속선에서도 유익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셀린과 벤, 마르티네티, 파운드처럼 파시스트가 된 다른 예술가들(팹스트와 피란델로,
함순처럼 힘이 약해지면서 파시즘을 수용한 이들은 말할 것도 없다)의 커리어는 리펜슈탈의 커리어만큼 교훈적이지 않다. 
리펜슈탈은 나치 시대와 완전히 동화되어 제3제국 시기뿐만 아니라 몰락 이후에도 30년간 자기 작품을 통해 파시즘 미학의 여러 주제를 꾸준히 - P-1

‘이상주의‘의 이름으로 사실주의를 경멸한다. 기념비적인 것과 대중의 영웅 공경을 애호하는 취향은 파시즘 예술과 공산주의 예술의 공통점으로, 이는 예술의 기능이 지도자와 그 원칙을 ‘불멸‘하게 하는 것이라는 모든 전체주의 정권의 관점을 반영한다.

웅장하고 딱딱한 움직임의 표현이 또 다른 공통점인데, 이러한 안무가 국가조직의 화합을 예행하기 때문이다. 대중은 형태를 갖추도록 디자인된다. 그러므로 대규모 시범경기와 연출된 신체의 전시는 모든 전체주의 국가에서 중시하는 활동이다. 현재 동유럽에서 큰 인기를 끄는 체조선수의 기술 역시 힘을 억제하고 제한하는행위와 군사적 정확성처럼 파시즘 미학에서 반복되는 특징을 떠올리게 한다.

파시즘 정치와 공산주의 정치 모두 지도자와 합창단의 드라마를 통해 대중 앞에서 의지를 연출한다. 

국가사회주의 하의 정치와 예술의 관계에서 흥미로운 점은 예술이 정치적 필요에 종속되었다는 점이 아니라(그것은 우파뿐만 아니라 좌파 독재 정부에서도마찬가지므로) 정치가 후기 낭만주의 시대 예술의 레토릭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1933년에 괴벨스는 정치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고결하고 종합적인 예술이며, 현대의 독일 정치를 형성하는 우리는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예술과 예술가의 일은, 형성하고 형태를 부여하고 병든 자를 제거하고 건강한 자를 위해 자유를 창조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국가사회주의 예술의 흥미로운 점은 전체주의 예술의 특수한 변종이라고 할 수 있는 특징들이다. 소련과 중국 같은 국가의 - P-1

파시즘예술은 신체의 완벽함을 통해 유토피아적 미학을 드러낸다. 나치시대의 화가와 조각가는 자주 누드를 묘사했지만 신체의 결점을 표현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이들의 누드 작품은 피지크 잡지(phy-sique magazine, 1950~1960년대에 발행된 헐벗은 근육질 남성들의 사진을 실은 잡지들옮긴이) 속 사진들처럼 보인다. 이 사진들은 겉으로는 경건하고 섹스와 무관한 듯 보이지만 동시에 (기술적 의미에서는 포르노물인데, 완벽한 판타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과 건강함에 대한 리펜슈탈의 선전은 분명 이보다 훨씬 섬세하며, 나치 시대의 다른 시각 예술만큼 따분하지도 않다. 리펜슈탈은 다양한 신체 형태를 아름답게 여기며 아름다움의 문제에서 그는 인종을 차별하지 않는다), 실제로 <올림피아>에서는 (이 영화에서 가장 호평받는 다이빙 장면처럼) 양식화되고 매우 수월해 보이는 움직임뿐만 아니라 결점을 수반한 노력과 안간힘까지 보여준다.

공식 공산주의 예술이 무성적이고 순결한 것과 달리, 나치예술은 외설적인 동시에 이상주의적이다. 유토피아적 미학(완벽한신체,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정체성)은 이상적 에로티시즘을 암시하는데, 
여기서 섹슈얼리티는 지도자의 마력과 추종자의 기쁨으로 전환된다. 
파시즘의 이상은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성적인 에너지를
‘영적인‘ 힘으로 바꾸는 것이다. 
성적인 것(즉 여성)은 늘 유혹으로서 존재하며, 이 유혹에 대한 가장 훌륭한 반응은 성적인 충동을 용맹하게 억제하는 것이다. 리펜슈탈은 누바족의 결혼식이 화려 - P-1

한 장례식과 달리 의식도 연회도 없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누바족 남성의 가장 큰 욕망은 여성과의 합일이 아니라 훌륭한 레슬링 선수가 되어 금욕의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다. 
누바족의춤 의식은 관능적인 행사가 아니라 생명력을 봉쇄하는 ‘순결의축제‘다.

파시즘 미학은 활력을 봉쇄하는 데서 나온다. 움직임은 제한되고 붙들리고 억눌린다.

나치 예술은 반동적이며, 금세기 예술이 이룬 주류적 성취를 대놓고 벗어난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현대적 취향의한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최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나치회화 및 조각 전시(전쟁 이후로 처음이다)의 좌파 주최 측은 실망스럽게도 관람객들이 기대보다 훨씬 많고 전혀 진지한 태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브레히트의 교훈적 훈계와 강제수용소 사진을 나란히 배치했음에도, 관람객은 나치 예술을 보고 1930년대의 다른 예술 형식, 그중에서도 특히 아르데코를 떠올린다. 
(아르누보는 결코 파시즘 양식일 수 없다. 오히려 파시즘이 퇴폐적이라고 정의하는 예술의 전형에 가깝다. 가장 훌륭한 파시즘 양식은 선이 날카롭고소재가 투박하고 육중하며 에로티시즘이 석화된 아르네코다.) 
아르노 브레커(히틀러가 가장 좋아했으며 콕토도 한동안은 가장 좋아했던 조각가)와 요제프 토락의 거대한 청동 조각상은, 맨해튼 록펠러센터 앞에 - P-1

근육질의 아틀라스 동상 및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보병들을 기리는 필라델피아 30번가역 앞의 다소 선정적인 기념비와 동일한 미학에서 제작되었다.
독일의 세련되지 못한 대중은 나치 예술이 단순하고 조형적이고 감정적이며, 지적이지 않고, 모더니즘 예술의 지나친 복잡성이 없어서 매력을 느꼈을 수 있다. 
더 세련된 대중은 어느 정도 과거의 모든 양식, 특히 가장 비판받던 양식을 구제하려는 열정에서 나치 예술에 매력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아르누보와 라파엘 전파 회화, 아르데코의 부흥에 뒤이어 나치 예술이 부흥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나치 시대의 회화와 조각은 훈계조일 뿐만 아니라 예술로서도 놀라울 만큼 빈약하다. 그러나 바로 이런 특성때문에 사람들은 나치 예술을 다 안다는 듯 킬킬대며 거리를 둔 채팝아트의 한 형태로 바라보는 것이기도 하다.

리펜슈탈의 작품은 우리가 나치 시대에 제작된 다른 작품에서 발견하는 아마추어리즘과 순진함이 없지만 여전히 여러 똑같은 가치를 선전한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 현대적 감성으로리펜슈탈의 작품을 높이 평가할 수도 있다. 
팝아트 특유의 아이러니한 감각은 리펜슈탈 작품의 형식적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정치적 열의까지도 미학적 과잉의 한 형태로 바라보게 한다. 이렇게 거리를 두고 리펜슈탈의 작품을 감상할 때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주제 자체에 반응하게 되고, 이러한 반응이 그의 작품에 힘을 부여한다. - P-1

● 의지의 승리>와 <올림피아>는 틀림없이 대단히 훌륭한 영화지만(아마 지금까지 제작된 다큐멘터리 중 가장 훌륭한 두 작품일 것이다) 예술 형식으로서의 영화 역사에서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오늘날 영화를 만드는 사람 중 리펜슈탈을 언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반면, (나를 비롯한 많은 영화감독이 지가 베르토프를 영화 언어에 대한 무한한 자극제이자 아이디어의 원천으로 여긴다.
그러나 (다큐멘터리 영화 부문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베르토프가<의지의 승리>나 <올림피아>처럼 순수하게 인상적이고 짜릿한 영화를 만든 적이 없다는 주장도 충분히 나올 수 있다. 
(물론, 베르토프는 리펜슈탈만큼 마음껏 자금을 쓸 수 없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초소련 정부의 선전영화 제작 예산은 전혀 풍족하지 않았다.)좌파와 우파의 선전 예술을 다룰 때는 종종 이중 잣대가 적용된다. 
베르토프의 후기 영화와 리펜슈탈의 영화가 감정을 조작하는 방식이 비슷한 쾌감을 낳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의 작품이 왜 감동적인지를 설명할 때대다수가 베르토프에게는 감상적이고 리펜슈탈에게는 부정직하다. 이처럼 베르토프의 작품은 전 세계의 시네필 관객에게 상당한 도덕적 지지를 끌어내며, 사람들은 기꺼이 그의 작품에 감동한다. 리펜슈탈의 작품을 감상하는 비결은 영화에서 유해한 정치 이념은 걸러내고 ‘미적‘ 가치만 남기는 것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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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누구도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예술이라면 가능하다.

단 한 번의 완벽한 비상에 인생을 건
프리마 발레리나의 마지막 도약
2년 전 치명적인 사고를 당한 후 무대를 떠난 세계적인 발레리나 나탈리아 레오노바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다. 그곳에는 그를 무너지게 했던 연인들, 끝내 버리지 못한 욕망이 기다리고 있다. 자신을 가장 높이 올리고 다시 밑바닥으로 끌어내린 사람들 앞에서 그는 다시 한번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그 길은 재기일까. 또 다른 추락일까.

작은 땅의 야수들로 톨스토이문학상을 받은 김주혜의 두 번째 소설 
밤새들의 도시는 
삶이라는 예술에 바치는 헌사다. 
시련 속에서도 끝내 품위를 잃지 않는 인간의 숭고함에 대한 비유이자, 깊은 상처를 감내할 만큼 간절한 순간을 지나온 우리 모두의 찬란한 삶에 대한 은유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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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시

이별하는 것 말고 다른 것도 할 줄 아는 사람은 시월을 잘 모르는 사람이다. 병동으로 옮겨지기 시작하는 단풍잎. 영혼이 빠져나가 파삭거리기만 하는 풀밭, 초속 오센티미터로 떨어지는 마지막 열매들, 죽은 새끼들을 낙엽에 묻고 날아가는 새들. 그리고 흙장난하는 아이들 이마에 불어오는 사연 많은 바람. 시월엔 가득 찼던 것들과 뜨거워졌던 것들이 저만치 떠날 짐을 꾸린다. 그걸 알아챈 추억들도 남쪽으로 가고, 시월엔 이별이 전부다. 시월은 이별밖에 할 줄 모른다. 시월에 무릎을 꿇는 이유다. 세상엔 만남의 몫이 있는 만큼 헤어짐의 몫도 있어서 이토록 서늘하다.

*신카이 마코토의 애니메이션 제목. - P-1

강물의 개인사

강은 자기 자식들을 만들면서 흘러간다

반쯤 강에 발을 걸친 미루나무를 낳기도 하고검은 조약돌을 낳기도 하고

물고기들의 혼잣말 같은
외로운 알을 낳기도 한다
하루살이의 생애와
물새의 날개를 낳고
잠겼다가 떠오르는 길을 낳기도 한다

그리고 무너지는 인간과 그 인간의 이야기를 낳는다

아픈 마을을 낳고
검은 도시를 낳는다

굴뚝과 네온 불빛과 고무풍선 어지러운 유역을 낳고 - P-1

어부의 탄식과
전설 같은 노래를 낳는다

강이 만들어낸 자식들
누가 이들을 기억해줄까

훌륭한 순간들은 없었을지 모르지만
하구 끝
밤하늘이 밝게 빛나는 건

강에서 태어나 강에서 죽은
이들의 영혼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 P-1

빗나가고 싶었고, 빗나간 것들에 대해 노래하고 싶었고,
빗나간 것들을 증언하고 싶었다

시는 그랬다. 
모든 시는 불온해야 하고 
모든 시는 자유로워야 한다.

불온한 시를 만나는 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과 친해지는 일이다.

내 모든 시를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에 바친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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