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베르토프의 관객 대다수는 (에이젠시테인과 푸킨의 관객과 마찬가지로) 소련 초기의 영화 선전가들이 고귀한 이상을 그려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실에서는 그 이상이 아무리 배반당했대도 말이다. 
그러나 리펜슈탈을 향한 찬사에는 그러한 구제 수단이 없는데, 리펜슈탈의 복권을 불러온 사람을 비롯해 그 누구도 그를 호감가는 인물로 만들지 못했으며 그는 사상가도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대개 국가사회주의가 잔인함과 공포만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국가사회주의는, 더 나아가 파시즘은, 삶이 곧 예술이라는 이상,
아름다움 추종, 용기에 대한 맹목적 숭배, 공동체에서 느끼는 황홀경을 통한 소외의 해소, 지성에 대한 거부, 지도자를 부모로 둔)인간 가족처럼, 다른 기치 아래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는 다양한이상을 옹호한다. 
이 이상들은 사람들에게 생생한 감동을 준다.
사람들이 의지의 승리>와 <올림피아>에 감명받는 이유가 그저 천재영화감독의 작품이기 때문이라는 말은 동어반복일 뿐만 아니라 부정직하다. 리펜슈탈의 영화가 지금도 유효한 이유는, 무엇보다 작품 속의 갈망이 아직도 존재하고, 많은 사람이 여전히 작품에 담긴 낭만적 이상에 애착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한 낭만적이상은 청년/록 문화와 원시 치료(유아기의 고통을 재경험하면서 내면의 상처를 치료하는 심리치료 기법-옮긴이), 반정신의학(anti-psy-chiatry, 정신의학에 반대하며 정치적·사회적 차원에서 정신병의 원인을 - P-1

설명하려는 움직임-옮긴이), 제3세계 진영 추종, 오컬트에 대한 믿음처럼 다양한 방식의 문화적 저항과 새로운 공동체 선전의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공동체를 찬양한다고 해서 절대적 지도자를 찾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필연적으로 절대적 지도자를찾게 될 수도 있다. 
(현재 구루들 앞에 바짝 엎드려 기괴한 독재적 규율에 복종하고 있는 청년 중 상당수가 과거 1960년대에는 반권위주의자이자 반엘리트주의자였다는 것도 그리 놀랍지 않다.)

오늘날 리펜슈탈을 탈나치화하며 그가 (영화감독으로서, 현재는 사진가로서) 굳건히 아름다움을 추구해온 사제라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안의 파시즘적 갈망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한다는 징조다. 

리펜슈탈은 평범한 탐미주의자나 인류학적 낭만주의자가 아니다. 그의 작품이 가진 힘은 정확히 정치적 · 미학적 신념의 연속성에 있는데, 흥미로운 점은 오늘날보다 과거에 이 사실이 훨씬 명백하게 드러났다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이 구도의 아름다움 때문에 리펜슈탈의 이미지에 끌린다고 주장한다.

역사적 관점이 없다면, 이러한 감식안은 온갖 파괴적 감정(사람들이 그 영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감정)의 선전을 기이할 만큼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결과를 불러온다. 물론 리펜슈탈의 작품같은 예술에서 중요한 것이 아름다움만은 아님을 한편으로 모두가 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양쪽에 판돈을 건다. 이런 예술의 의심할 여지 없는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한편, 고결한 척하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태도를 깔보는 것이다. 엄숙하고 까다로운 형식주의 - P154

적 감상 뒤에는 더 폭넓은 감상, 바로 진지한 태도에서 나오는 망설임이 전혀 없는 캠프적 감성이 있다. 현대적 감성은 형식주의적접근 방식과 캠프적 취향 사이의 끊임없는 절충에 의존한다.
오늘날 파시즘 미학의 주제를 환기하는 예술이 인기를 끌고 있으며, 아마 대다수에게 이런 예술은 그저 캠프의 변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파시즘은 한낱 유행일 뿐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이렇게 무차별적으로 다양한 취향의 유행이 우리를 구할지도모른다. 
그러나 취향에 대한 판단 자체는 그렇게 순수할 수 없는듯하다. 
10년 전에는 소수의 취향이나 상반된 취향으로서 대단히 옹호할 가치가 있어 보였던 예술이 오늘날에는 더 이상 옹호할 수없게 되기도 하는데, 그 예술이 불러일으키는 윤리적·문화적 문제가 전과 달리 심각하고 심지어 위험해졌기 때문이다. 

냉엄한 진실은, 엘리트 문화에서는 용인될 수 있는 것이 대중문화에서는 용인되지 않을 수 있고, 소수의 것으로서 오로지 무해한 윤리적 문제만 일으키던 취향이 더 많은 사람에게 수용되면 유해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취향은 맥락이며, 그 맥락이 달라졌다.
Π두 번째 증거물. 여기 공항 잡지 가판대와 ‘성인용‘ 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는 책 한 권이 있다. 「누바족의 최후』처럼 예술을 애호하고 생각이 올바른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값비싸고 호화로운 책이 아니라 값싼 페이퍼백이다. 그러나 이 두 책은 도덕적 - P-1

기원이 같다. 근원적 집착은 같고, 진화의 단계는 다르다. 「누바족의 최후를 움직이는 개념은 SS 제복SS Regalia』 뒤에 깔린 더조악하고 강렬한 개념만큼 도덕적으로 거리낌 없지 않다. ‘SS 제복은 영국에서 편집한 어엿한 책이지만(역사를 개괄한 3쪽 분량의서문과 함께 책 뒤에 주석도 실려 있다) 

이 책의 매력이 학문적인 것이아니라 성적인 것임을 모두가 안다. 표지에서 이미 그 사실이 명백히 드러난다. SS 완장의 거대하고 검은 스와스티카 위로 사선의 노란색 띠가 지나가고, 그 위에는 "100장 넘는 컬러 사진에 겨우 2.95달러"라고 쓰여 있다. 포르노 잡지 표지 모델의 생식기 위에 반은 농담으로, 반은 검열에 대한 존중으로 붙여놓은 가격 스티커와 똑같다.

제복에는 보편적 환상이 있다. 제복은 공동체, 질서, 정체성(계급장과 배지, 훈장처럼 착용자가 누구이고 어떤 공적을 쌓았는지를공표하는 것들을 통해 착용자의 가치가 인정된다), 유능함, 적법한 권위, 적법한 폭력의 행사를 암시한다. 
그러나 제복은 제복 사진과 같지 않다. 세복 사진은 성적인 자료이며 SS 제복의 사진은 특히널리 퍼진 강력한 성적 판타시의 구성 요소다. 왜 SS일까? SS는폭력의 정당성, 즉 타인을 마음껏 지배하고 그들을 철저히 열등한존재로 취급할 권리를 공공연하게 주장하던 파시즘의 이상적 화신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이 가장 온전히 실현된 곳이 바로SS였다. SS는 몹시 잔혹하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이러한 이상을실행에 옮겼고, 자신들을 특징 미학적 기준과 연결함으로써 그러 - P-1

행위를 극화했다. SS는 지극히 폭력적일 뿐만 아니라 지극히 아름다운 엘리트 군사 집단으로 고안되었다. (‘SA 제복‘이라는 제목의 책은 볼 확률이 낮다. SS로 대체된 SA는 SS보다 덜 잔혹하지는 않았으나. 맥줏집에 있을 법한 뚱뚱하고 땅딸막한 유형, 한낱 ‘갈색 셔츠‘라는 별명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SS 제복은 우아하고 견고하게 만들어졌으며, 기발한 느낌(과하진 않았다)이 있었다. 이에 비해 미 군복은 지루하고 대충 만들어졌는데, 재킷과 셔츠, 넥타이, 바지, 양말, 끈으로 매는 신발로 구성된 미 군복은 훈장과 배지로 아무리 꾸며도 본질적으로 민간인 복장과 다를 바 없었다. SS 제복은 꽉 끼고 무겁고 빳빳했으며, 다리와 발을 무겁게 감싸는 부츠와 손을 덮는 장갑이 있어서 착용자가 꼿꼿이 설 수밖에 없었다. 

『SS 제복』 뒤표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SS 제복의 색은 독일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검은색이었다. SS는 계급을 구분하기 위해 제복 위에 여러 장식과 상징, 배지를 달았는데, 그 종류는 옷깃의 룬 문자에서 해골 모양까지 무척 다양했다. 그 모습은 극적이면서도 위협적이었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듯한 표지 사진은 매우 유혹적이지만,
책 속의 사진은 대부분 따분하다. 나치 대원들은 책에서 찬양한검은색 제복과 함께 거의 미군처럼 보이는 카키색 제복과 위장용 - P-1

외투 및 재킷을 배급받았다. 제복 사진 외에도 옷깃에 다는 패치와 커프 밴드, 계급장, 벨트 버클, 기념 배지, 연대 깃발, 트럼펫에 다는 깃발, 전투모, 공로훈장, 견장, 허가증, 출입증이 여러쪽에 걸쳐 실려 있는데, 악명 높은 룬 문자나 해골 문양이 있는 것은 별로 없고 계급과 부대, 배급 연도와 계절이 전부 꼼꼼히 설명되어 있다. 

거의 모든 사진이 무해하다는 바로 그 사실이 이 이미지의 힘을 입증한다. 

독자는 성적 판타지의 성무일도서를 보고 있는 것이다. 환상이 깊이를 지니려면 반드시 디테일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1944년 봄, SS 병장이 트리어에서 뤼베크로 이동할 때 필요했던 여행 허가증은 무슨 색이었을까? 모든 증거 서류가 필요하다.
파시즘의 메시지가 미학적인 안목을 통해 중화되었다면,
파시즘의 예복은 성애화되었다. 이런 파시즘의 성애화는 미시마유키오의 『가면의 고백』과 『태양과 철』 같은 매혹적이고 경건한작품이나, 케네스 앵거의 <스콜피오 라이징 Scorpio Rising>, 그만큼흥미롭지는 않지만 더욱 최근작인 비스콘티의 <저주받은 자들 TheDamned>과 카바니의 <야간 배달부The Night Porter> 같은 영화에서발견할 수 있다. 파시즘을 진지하게 성애화하는 것은 문화적 공포를 이용한 세련된 유희와 구분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놀이에는 농담의 요소가 있다. 로버트 모리스는 최근 카스텔리 갤러리에서 열린 자기 전시회를 위해 본인의 사진으로 직접 포스터를 만들었다.
사진 속 그는 상반신을 탈의하고 선글라스와 나치 헬멧처럼 보이 - P158

는 것을 썼다. 목에 건 징박힌 금속 복길이에는 두툼한 체인이 달리 있고, 수갑 찬 손으로 그 체인을 붙잡고 있다. 
모리스는 이것이 아직 충격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이미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예술이 무릇 신선한 도발적 제스처의 연속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이들에게는 충격을 주는 것이 예술의 유일한 미덕이다. 
그러나 이 포스터는 정확히 반대의 효과를 낸다. 

그러한 맥락에서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다는 것은 곧 사람들을 그 충격에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한데, 나치 자료가 팝아트의 아이러니적 논평에 사용될 수있는 대중적 도상 체계의 방대한 레퍼토리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치즘은 팝아트적 감성으로 해석된 다른 도상 체계(마오찌둥에서 마릴린 먼로에 이르기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을 매혹한다. 물론 파시즘에 대한 관심이 전반적으로 늘어난 것은 어느정도 호기심의 산물로 볼 수 있다. 1940년대 초반 이후에 태어나공산주의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왁자지껄한 주장에 평생을 시달린 이들에게, 부모 세대의 훌륭한 대화 주제였던 파시즘은 이국적인 미지의 것을 상징한다. 또한 젊은이들은 대체로 공포와 비이성적인 것에 매혹된다. 요즘 대학 캠퍼스에서 파시즘의 역사를 다루는 강의는 (뱀파이어리즘을 비롯한) 오컬트 강의와 더불어 큰 인기를끌고 있다. 이에 더해 「SS 제복」이 뻔뻔할 만큼 적나라하게 증명하는 단연코 성적인 파시즘의 매력은 아이러니나 지나친 친숙함때문에 위축되는 일이 없는 듯 보인다.
전 세계, 그중에서도 특히 미국과 영국, 프랑스, 일본, 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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