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삶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을 대본을 쓴 이남규, 김수진 작가에게 허락을 받아 이곳에 옮겨 놓습니다. 내레이션 녹음을 위해 수십 번 읽고,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을 위해서도 여러 번 반복해 읽었지만 다시 읽어도 좋은 글입니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의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박완서 선생의 단편소설에 어떤 나들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알코올 중독자인 여자가 나옵니다. 남편이 출근하면 여자가 찬장안 간장병, 참기름병 뒤에 감춰 둔 소주병을 꺼내서 마십니다. 남편만 나가면 술 먹을 생각에 신이 나서 청소를 합니다. 그다음에 의식을 치르듯 소주를 꺼내 마시고 외출을 하는데, 버스에 앉아 내려다보면 지나가는 차들이 다 자기를 호위하는 것처럼 느끼는 장면 묘사가 탁월합니다. 「전원일기」에도 내가 남편 김회장이 마시다 남은 소주를 찬장에 숨겨 놨다가 혼자 곳간에 들어가서 마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시골 촌부라 해도 똑같이 인생의 허무를 느낍니다. 배운 게 없어도 생각이 없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것은 배움이 많고 적음을 막론하고 누구나 있습니다. 공부 많이 안 했다고 인생에 대해 모를 리 없고, 하버드대학 나왔다고 더 알 리도 없습니다. 혼자 곳간에 들어가서 쌀가마니 같은 데 기대 앉아서 술을 마실 때의 표정이 나의 허무와 섞여 있습니다. 김정수 작가는 나를 깊이 이해했기 때문에 내가 역을 맡은 엄마의 공간을 잘 만들어 주었습니다.
모든 감정을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공감 가는 대본을 써 주었는지 참으로 행복하고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작가들이 자주 교체되면서 나중에는 맨날 "이제 오니? 밥 먹었니?" 하는 대사나 하고, 아버지는 날마다 숫돌에낫이나 갈고 있었습니다. 나는 드라마 속 여자를 10년 넘게 살고 있는데 그 여자가 할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를 하고, 그 여자가 할 행동이 아닌 행동을 하게 되는 대본을 받았습니다. 그러다 점점 대사도 줄어들고・・・・・…. 그때는 정말 번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드라마 하차라는 어려운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시집 간 막내딸이 잘 못 살아서 엄마가 뭐만 생기면 막내딸네챙기러 가곤 했는데, 가는 길에 교통사고 나서 죽는 걸로 해 달라고 제안했습니다. 엄마 역은 거기까지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전원일기」 출연료로 생활하는배우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드라마와 관계된 많은 사람들의생계가 달려 있었습니다. 그걸 알고는, 그냥 계속하겠다고 했습니다. 내 생각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김수미 배우도 고두심 배우도 다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어떻게 우리 생각만 할 수 있겠느냐고. 그래서 자존심 하나로 버티며 계속해 나갔습니다. 그렇게 22년을 했습니다.
나에게 언제나 얌전한 역만 시켰는데, 그런 역을 하라니까 너무 좋았습니다. 흥행 실패 때문에 잠시 기가 죽긴 했지만, 그것은 머리에서 지워 버렸습니다. 내가 흥행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나는 아주 깍쟁이입니다. 내가 그것을 왜 신경 써서 스스로를 기죽여야 하는가? 이것은 어쩔 수 없어, 하고 생각했습니다. 내가조금 더 예쁜 배우였으면 반응이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만 간단히 했습니다. 나는 그 영화 촬영하면서 즐거웠고, 가슴이 뛰었고, 좋았습니다. ‘그럼 된 거야.‘ 하고 생각했습니다. 언제나그렇듯이, 내일 일은 신의 몫입니다. 김수용 감독이 특별히 칭찬해 준 것이 있습니다. 내가 몇 걸음 걸어가다가 남자 주인공을 뒤돌아보는 장면이 있는데, 몇 번을 다시 해도 매번 정확하게 똑같이 하더라고 했습니다. 감독은 ‘저 여자가 저것을 계산하고 하는구나‘ 하고 느꼈다고 했습니다. 나는 계산은 할 줄 모르고 그 순간의 느낌에 따라 속으로 ‘저 남자 쳐다보지 마 쳐다보지 마, 쳐다보지 마. 이제 쳐다봐‘ 하면서 남자를 뒤돌아보았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똑같이 하느냐고 감독은 말했지만, 나는 미리 계산한 것이 아니고 마음속에서 ‘저 남자 쳐다보지 마. 저 남자와는 끝이야. 아냐, 돌아서!‘ 하고 부르짖으면서 하니까 똑같아진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가정적으로 완벽해 보이는 변호사 남편 김진현(박근형)의 외도에 분노하고 좌절하는 아내 현주가 내가 맡은역입니다. 남편이 젊고 예쁜 여자와 바람난 것을 확인하고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늙고 주름진 자신의 모습이 서글픈 그녀가 거울 보며 이를 닦다 말고 달려가 남편에게 퍼붓는 대사가 있습니다.
"그래, 난 이렇게 너한테 다 주고 늙어가는데, 넌 나가면 충분한 보수, 인정받는 실력, 몰두할 수 있는 일, 그리고 집에 들어오면 건강한 자식, 수족처럼 시중 잘 들어주는 아내, 그리고그것도 부족해 정부까지 가졌는데, 난 내가 가진 게 뭐야? 난가진게 뭐냐고? 결혼하면 자기 여자기만 하면 된다고 딴 남자 눈길받는 거 싫다고, 더듬이도 날개도 잘라 가둬 놓고, 20년 화대 안 주는잠자리 상대, 월급 안 주는 가정부, 게다가 유모, 그렇게 샅샅이 알뜰하게 파먹고 뜯어먹고 써먹더니, 이제 와서 뭐? 난 이제 뭘 붙들고 살아야 돼? 김진현 말해봐 우리가 처음만났을 때부터 내가 이렇게 늙고 초라했었니? 나도 스무 살도있었고 서른 살도 있었어, 당신은 스무 살 적 그대론 줄 알아? 나 늙었으면 당신도 늙었어. 나만 늙었어? 난 이제 뭘 붙잡고 살아야 해? 난 그렇게 성실했는데 내 성실은 하늘도 부정할 수
남편을 용서하지 못한 현주는 결국 이혼을 하고 자신의 길을 갑니다. 남자는 아내에게 버림받고 자식들에게도 외면당하는 결말입니다. 김수현 작가는 그렇게 끝까지 밀고 가서, 적당히 타협하지 않고 비틀어 버립니다. 맨 마지막 장면에서 여자가 가죽 타이트 스커트 입고 가죽 부츠 신고 냉정하게 운전하고 떠납니다. 운전하고 가다가 백미러를 한번 봅니다. 그렇게 가는데 차 뒤로는 낙엽이 휘날립니다. 그것이 끝입니다. 그런 것도 나는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모래성」이 그토록 유명한 드라마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제목도 얼마나 잘 붙였는지, 드라마 내용 자체가 모래성입니다. 공들여 쌓아올린 것이 한순간에 전부 허물어집니다. 김수현 작가만이 쓸 수 있는 작품입니다.
윤여정 배우는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명대사로 모래성」에서 내가 하는 대사를 꼽았다고 합니다.
"누구도 누굴 함부로 할 순 없어. 그럴 권리는 아무도 없는거란다. 그건 죄야!"
나에게 연기는 직업이 아니라 삶이며 모든 것입니다. 배우는 ‘이만큼 하면 됐다‘거나 ‘이 정도면 성공했다.‘라고 멈춰서는 안됩니다. 그 지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삶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걸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품고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연기자로 살아가다 보니까 일반 가정주부처럼 해 주지못했습니다. 앞에 앉아서 예쁘게 웃어 주지도 않았고, 음식을 앞에 놓아 주면서 "이거 먹어 봐요. 내가 만들었어요." 하는 말을 평생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내가 만들어서 준 게 없으니까 다 일하는 아주머니가 만들었으니까 보통의 부인들이 날마다 남편에게 할 수 있는 말을 나는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어떨 때는 너무 미안해서 예쁘고 젊은 여자랑 연애하라고 얘기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면 남편은 "사람, 참." 하며 웃을 뿐이었습니다. 가끔 남편이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하고 전화해서 물으면나는 대개 "없어요." 하고 말했는데, 어떤 때는 "순대가 먹고 싶어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 당시 북창동(조선시대 각 지방에서 공물로 걷은 쌀, 천, 돈을 관리하던 선혜청의 북쪽 창고가 있던 곳이라서붙은 이름으로, 서울 중구에 위치한 동네) 올라가는 길에 좋은 순대집이 많았습니다. 남편은 그곳까지 가서 나를 위해 순대를 사가지고 왔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곳 순대가 맛이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너무 고급 순대였습니다. 나는 남편에게 투정을 부렸습니다. "아니, 이런 순대 말고
남편이 떠나고 나는 조금 이상해졌습니다. 남편과 연관된 사람만 만나도 갑자기 눈물이 났습니다. 그 사람과 남편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닌데도 그랬습니다. "저 사람하고 우리 남편이 아는 사람이지저 사람도 우리 남편하고 대화를 했겠지. 이런 생각이 들면 밑도 끝도 없이 눈물부터 흘렸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가끔 사람들로부터 ‘저렇게까지 세상물정을 모를 수 있나?‘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들 임현식이 나를 따뜻하게 감싸 주었습니다. 그런 일들로 내가 속상해하고 있을 때 아들이 뒤에 와서 나를 가만히 안아주며 말했습니다. "엄마가 얼마나 순진한지는 아빠랑 나만 아는데... 아빠는저세상으로 떠나고, 우리 엄마 어떡하나......" 정말 그랬습니다. 어떤 한 분야에서 인정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뒤에서 희생한 다른 이들이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반드시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산도 좋고 물도 좋고 정자까지 좋은곳은 없습니다. 내가 남편에게도 잘했고, 아이들에게도 너무나좋은 엄마였고, 그리고 연기도 빼어나게 잘했다? 그런 건 있을수 없습니다. 나는 배우로서 살아온 것 말고는 모든 부분에서부족한 여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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