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도 되는 청춘은 없으니까 모두 아프지 않기를그리고 이처럼 아팠음을 모두 기억하고 바꿔나갈 수 있기를

명문이 아닌 지방의 학교 위기가 아닌 때 없던 인문학 전공,
학생도 교수도 아닌 시간강사라는 캠퍼스의 경계-꿈을 이루기 위해 발버둥 치는 한 청춘이 제대로 살아온 삶인지 고민하며 신자유주의가 바꾼 대학 풍경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의 모습을 내밀히 보여준다
‘각자도생‘의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


"지방시는 작가 자신의 경험을 말한 것이지만, 이는 내가 9년간 경험한 대학에서의 생활 그리고9년간 겪고 있는 시간강사로서의 고민을 옮겨놓은 것이기도 하다. ‘돈 안되는 공부하겠다.
는 "돈 없는 대학원생들의 삶은 비루하다. 
어찌저찌 강의를 하게 되더라도 미래가 있는 고난의 길을 헤쳐나가야 한다. 이 흥분할 만한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이 책은 흥분하지 않은 어조로 차근차근 세상에 드러낸다. 
게다가 저자는 이 암울한 공간에서도 학생들과 소통하기 위한 노력한다.
이 자체가 인문학의 힘‘ 아니겠는가.
오찬호(사회학 연구자 (진격의대학교 기업의 노예가 된 한국 대학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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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 말

김민섭 작가의 글과 작업은 늘 흥미롭다. 그가 작가로서, 기획자로서 내놓은 결과물들을 볼 때면 영어 단어가 2개 떠오르는데 하나는
‘스트리트와이즈(streetwise. 세상 물정에 밝은)‘, 또 하나는 그냥 ‘와이즈‘(wise)다. 이번에 알았는데 영어 단어 ‘wise‘에는 ‘진로를 제시하다,
방향을 바꾸다‘는 뜻도 있다고 한다.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거리의 사정에 밝고, 그곳을 지배하는 배후의 힘을 날카롭게 꿰뚫어 보며, 가끔은 그 힘을 이용해 재미있는 이벤트를 벌이기도 한다. 그렇게 야무지게 현장에 바탕을 둔 사유가, 배려심과 균형 감각을 갖춘 통찰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면 감탄이 나온다.
참 현명한 사람이구나, 하는《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에서 ‘나‘를, 《대리사회에서 ‘사회‘를 말했던 그가 이번에는 ‘시대‘를 다루겠다는 더 큰 야심을 품었다. 찾아간현장은 학교와 회사와 아파트 단지. 시로 겹치지 않을 것 같은 세 공간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훈‘이다. 김민섭 작가는 우리 시대 ‘‘들의기괴함을 폭로하면서 우리 자신의 ‘‘을 새로 쓰자고 제안한다.
그가 다음으로 눈길 두는 곳은 어디일지, 벌써 궁금해진다.
장강명_《당선, 합격, 게급》, 《한국이 싫어서> 저자

사회 이후의 단어로 ‘국가‘, ‘세계‘, ‘인류‘, 이런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세 번째 책은 <아무튼, 망원동》이라는나의 고향인 망원동/성산동이라는 동네에 대한 소소한 에세이집이되었다. (아무튼‘이라는 수식이 붙은 것은 ‘아무튼 문고‘라는 기획서로 제착되었기 때문이다.) 망원동에서 글을 쓰는 동안 ‘이 동네는 과연 괜찮은걸까‘ 하는 물음표가 생겼고, 그에 답하고 싶어졌다. 젠트리피케이션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린 그 작은 동네에서, 사람은 건물이 변하는속도보다 몇 배나 더 빠르게 밀려나고 사라져갔다. 잠시 쉬어 간다는기분이 되기도 했지만 어쩌면 《대리사회>보다 더 나와 내 주변의 실존에 대한 고민과 기록이 되었다.

그러나 고백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고백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그것은 맞는 명제이면서도 동시에 모두에게 성립되지는 않는다. 

고백에 이른 한 사람은 이전과는 다른, 돌이킬 수 없는 발걸음을 막 떼어놓은 것이다. 새로운 물음표에 답하며 그간 경험해 본 일이 없는 보폭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 힘은 무척이나 세서, 그가 곧 세상을 변화시킬 것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착실하게 그 과정을 밟아간다는 전제하에서만 그렇다. 어느 순간 멈춰버리면 그 힘은 거짓말처럼 소멸된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글을 쓴 사람이 당신이 아니었다면 더 좋았겠다."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요약하면, 고백 이후의 서사를 제대로 책임지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특히 자신들의 삶이 조금은 달라질 것으로 믿었던 대학의 젊은 연구자들의 실망이 컸다. 선언만 반복하는 개인은 그 어떤 변화를 추동할 수 없음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고백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고 선언으로 나아가는 길 역시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 이후의 단계로 가는 길은 잘 보이지 않는다. 《대리사회> 이후의 나는 한동안 동어반복을 하며 스스로를 소진시켜 갔던것 같다. 나에게 호의를 가지고 응원하며 지켜보던 이들도 지쳐버렸는지 모른다.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가 아닌 것 같아서,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몇 년의 기간 동안 내가 내린 결론은, 자신을 고백한 개인은 자연스럽게 그에 따른 선언에 이르고, 물음표를 확장시켜 나간 극히 일부는 필연적으로 ‘제안‘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한 개인은 고백의 힘을 그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사용할수 있다. 

나는 《훈의 시대>라는 이 책이 그 역할을 해줄 수 있기를 바란다. ‘훈‘이라는 개념은 본문에서 자세히 서술하겠지만 요약하자면
‘규정된 언어‘다. 변화를 원하는 한 개인을 가로막는 것은 그를 공고

하게 둘러싼 언어들이다. 

어린 시절부터 외우고 노래해 온 익숙한 훈들, 그러니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든가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든가 하는 수사들은 개인을 시대에 영속시키는 동시에 끊임없이 지워내 왔다. 

특히 사유의 범위를 그합의의 테두리에 가두고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규정된 그 언어들은 한 시대와 개인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 이후의 시대로 넘어가더라도 그 잔재는 여전히 동시하면서 위력을 가진다. 그래서 한 시대의 종언을 고한다는 것은 한 시대를 지배해 온 언어가 종말했음을 알리는 것이기도 하다.

당신에게 물음표를 보낸다.
이 책에서는 내가 거리에서 삶에서 마주치고 수집한 훈을 제시할것이다. 여전히 우리와 동시하고 있는 그 언어가 어떻게 시내의 욕망안에 개인은 가이었는지 드러내고자 한다. 그것들을 인식하고 폐기하고자 할 때 비로소 낡은 시내를 마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제안이 당신에게 가서 닿을 수 있기를 바라며 쓴다. ‘나‘와 ‘사회‘를 거치며커진 음표는 이제 평범한 개인이 가지고 있기에는 너무 큰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여기에 당신은 무어라고 응답할지 궁금하다.
《대리사회>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다소 민망한 선언을 했다.

"나는 계속 거리의 언어를 몸에 새겨나가려고 한다. <대리사회는내가 써나갈 글의 서론과도 같다. 제도권과 거리의 경계에서, 언제까지나 경계인으로만 존재하며 그 균열을 탐색하고 싶다."

<훈의 시대는 부족하게나마 그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쓴 것이다. 제대로 된 제안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나라는 한 개인이사회에 내어놓는 첫 본문으로는 알맞은 온도가 될 것이다.

내가 어렵게 제안이라는 영역에 도달하게 된 것은, 다시 한 번 거리에서였다. 단순히 대리운전을 하며 걷는 노동의 시공간만을 말하는것은 아니다. 이제는 몇 년 전처럼 생업으로 삼아 매일같이 대리운전일을 나가지도 않는다. 책상 앞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점점 늘어난다.

그러나 이전에는 별 문제 없다고 여겼던 인상의 언어들이 조금은 다른 눈높이로 다가오는 것이다. 
아내에게 듣게 된 출신 여고의 교훈이 대리운전을 하다가 우연히 보게 된 회사의 사훈이, 친구와 불광천을걷다가 마주한 빌라의 이름이, 그 일상의 평범한 훈들이 나의 물음표를 계속 크게 만들어주었다.

(대리사회가 우리 사회의 몸의 기록이었다면 이 책은 그 언어의기록이다. 당신에게 《훈의 시대>를 한 시대를 포위하고 있는 언어의기록을 보낸다.

고3 선배들을 응원하겠다고 힘차게 교가를 부르기 시작한 1학년들은 처음 기세와는 달리 후렴에서 모두 목이 막혀버렸다. 지금도 수능 때마다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때는 학생회와 동아리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모두 응원을 나가서 교가를 불렀다. 지성의 시험장인 수능 고사장에서 의리와 친애를 유감없이 드러내는 퍼포먼스를 선보인 셈이니, 교훈을 충실히 이행한 학생들이었다고 해도 좋겠다.

그러고 보면 교가만큼 자주 부른 노래도 아마 없을 것이다. 월요일마다 열린 ‘애국조회‘ 때면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교가를 불렀고,
각종 운동회나 행사 때도 그랬고, 음악 시간에 그것으로 수행평가를보기도 했다. 

하나의 노래를 이처럼 오랜 기간 동안 반복해서 부르는경우는 아마도 ‘애국가‘와 ‘교가‘가 유일할 것이다. 

어떤 유행가도 이처럼 타율로서 강권되지는 않는다. 마치 후크송처럼 반복되는 단어들은 그에 노출된 이들에게 의미를 사유할 여유를 주지 않고 그대로 각인되어 버린다. 훈은 이처럼 기계적이고 폭력적으로 개인에게 가서닿는다.


나는 아내가 졸업한 학교의 훈 세 가지가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자고등학교든 남자고등학교든 굳이 그 교훈에 ‘○○한 딸/아들‘ 하고 성별을 내세울 필요는 없는 것이다. ‘

착한‘이라는 형용사는 권장될만한 것이지만 여성을 수식하면 그 뜻이 묘하게 변질되어 버린다. 
‘든든한‘이라는 형용사가 남성과 어울려 ‘든든한 아들‘이 되었다고 상상해 보면 한 단어의 훼손이나 오염을 더욱 쉽게 인식할 수 있다. "우리딸은 착해요", "우리 아들은 든든하죠"와 같은 익숙한 결합은 단순히 국어사전에 명시된 의미를 넘어서, 훈을 건네는 주체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사회적 욕망이기도 하고 가문(가정)이라는소집단의 욕망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 사회는 착한 딸들에게 많은 순종과 희생을 강요해 왔다. 
착함을 강요받은 딸들은 교육의 기회를 균등하게 부여받지 못했고 돌봄의 우선순위에서도 밀려났다. 그들은 참된 일꾼이 되어 어린 나이에 공장으로 가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거나 형제의 학비를 보탰다. 
1970년대의 어린 여공들은, 자라서 어진 어머니로서 착한 딸과 든든한 아들을 키워내는 역할까지 도맡았다. <별들의 고향>(1973)이나 <영자의 전성시대>(1973)의 서사이고, 최근에는 <우리들의 누이>(2018)라는 소설에서도 이 시기의 여성들을 다루었다. 
그런 젊은 날의 서사를 가진 여성들이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많

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이 사회는 그들에게 그만한 빚을 지고서도 여전청 염치없이 그 훈을 다음 세대에게까지 전한다.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나의 자녀가 (특히 딸이) 3년 동안 ‘참된 일꾼‘, ‘착한 딸‘, ‘어진어머니‘라는 훈을 보며 등교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것이 새겨진 큰바위를 보는 일도, 그것이 명시된 교가를 부르는 일도 없으면 한다.

물론 나는 그가 착하게 자라기를 바라고, 나와는 달리 어진 부모가 되기를 바라고, 사회를 이롭게 하는 참된 노동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가 나에게 순종하거나 다른 형제를 위해 희생하지 않기를 더욱 바라고, 결혼과 출산을 온전히 자신이 선택하기를 더욱 바라고, 스스로 즐거운 일을 찾을 수 있기를 더욱 바란다. 

그러니까, 사회적 개인이 아닌 온전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행복을 위한 삶의 방식을 스스로선택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는 몇몇 공립여자고등학교의 교훈과 교가를 직접 찾아보았다. 그러면서 내 아내가 졸업한 학교의 사례가 특별한 것이기를 바랐다.



미안해졌다. 이미 생명을 다한 줄 알았던 언어들이 학교에 모두 모여있었다.

나는 한국의 공립여자고등학교와 공립남자고등학교의 훈을 모두찾아보기로 했다. 어떠한 훈들이 한국 여성/남성들의 젊은 날을 규정해 왔을까. 각 학교의 설립 시기와 지역 등에 따라 그 훈들은 어떠한차이를 보일까. 우리는 얼마나 낡은 언어들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을까, 나는 궁금해졌다. 

그 비교를 통해 우리 사회의 공적 욕망은 (과거에) 무엇이었고 또 (현재에도 여전히) 무엇인지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고의 교훈과 교가는 남성이면서 여성 자녀가 없는 나로서는평생 볼 일이 없었을 단어들이다. 이런 작업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우리 사회가 여성들의 삶과 존재를 어떠한 언어로 규정해 왔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나를 닮은 남성들뿐 아니라 여성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성별이 다른 이들을 수백 명씩 한 공간에 3년 동안 수용해 두고 각각에게 무엇을 권하는지, 그 반대편에 있는 절반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것은 상대편의 훈을 살펴보는앞으로 없을 기회도 될 것이다.

에 새겨져 있는 듯하다. 그러나 군 복무가 그러한 당위성을 부여하느나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그러한 욕망이 학교에서부터 이처럼 구체화되고 있는 데는 문제가 있다.

공부하는 여성들에게 ‘여자‘라는 명칭을 굳이 부여하는 지금의 제도는 분명히 그들을 그 공간의 주변부로 내몰게 된다. 

사실 담백하고명료하게 자신을 표현하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은 곧 권력이다. 

주변부로 밀려날수록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수식을 덧붙여야만 한다.
ㅇㅇㅇㅇ여고에 각각 입학하면서부터 남학생은 중심부로, 여학생은 주변부로, 자신의 자리가 정해졌음을 알게 된다.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할 학교에서부터 여성은 따로 구획되고 이것은 한 존재를 외롭고 위축된 몸으로 만들어낸다. 여기에 익숙해지고 나면, 사유의 크기도 그에 따라 줄어들어 버리고 만다. 자신을 소중히 여길 수 없게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그렇다고 해서 남학생들이 그 수혜자가 된다는 의미도 아니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를 둘러싼 언어들은 마치 크레인처럼 그들을잡아 들고 특정한 구역에 내려놓는다. 자존감의 과잉도 결여도 모두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 양측 모두가 언어의 피해자가 되는 셈이다.

앞으로 설립되는 학교들에는 ‘남/녀‘라는 단어가 그 명칭에 포함되

고와 남고 모두 ‘성실‘이 압도적으로 많고, 그다음으로는 ‘슬기‘와 ‘협동‘으로 서로 갈린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두 개의 결과가보인다. 
1) 서로에게는 전혀 없는 훈들이 높은 빈도로 권장된다는 것이고, 
2) 훈을 받아들일 주체들을 규정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는것이다.

1) 우선 높은 빈도로 권장된 훈을 살펴보면 여고는 ‘순결‘, ‘정숙‘,
‘예절‘, ‘배려‘, ‘사랑‘, ‘겸손‘ 등이고,
반면 남고는 ‘단결‘, ‘용기‘, ‘개척‘,
‘책임‘, ‘명예‘, ‘열정‘ 등이다. 

모두 상대편에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단어들이다. 

여고의 것이 정적이고 과거 지향적이라면, 
남고의 것은 역동적이고 미래 지향적이다. 
여성의 정적인 몸과 남성의 역동적인 몸은 학창 시절부터 이러한 훈으로 형성되어 간다. 

‘정숙‘ 등 단어만으로 나타내는 방식이 더 많지만, ‘성실한 사람이 되자‘라든가 ‘정숙한 여성‘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사람이나 여성으로서그 대상을 호칭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고와 남고의 교훈이 각각의 구성원을 호칭하고 있는 방식 역시 현저히 다르다.

여고 
사람(14회), 여성(10회), 어머니(3회), 겨레의 밭(3회), 딸(2회)

남고 사람(8회), 인간(2회)

여고에서는 사람을 중심으로 여성, 어머니, 딸 등 몇 가지 단어가더 나타나는 반면 
남고에서는 사람과 인간뿐이다.‘ 

놀랍게도, 남고에서는 단 한 번도 남성이라든가 아버지라든가 아들이라든가 하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는다. 

남성들이 요구받는 것은 단 하나 ㅇㅇ한 사람/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여성들은 ‘○○한 어머니/여성‘
이 되기를 계속 요구받는다. 

남성이 공부하는 한 개인으로서, 말하자면 사람(인간)으로서 학교라는 공간에 존재하는 반면, 여성은 온전한개인이 아닌 어머니, 여성, 딸 등 성별에 따른 역할을 수행함으로써존재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셈이다. 이처럼 여성은 학교에서부터 공부하는 한 개인이 아닌 여성으로서의 이상향을 성취하기를 부단히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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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짓을 해 버렸단 말인가? 그녀 존재의 핵심에 있던(그게 무엇이었을하기 무언가를 앗아가 버렸단 말인가? 하지만 나 자신도 그렇게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 그녀가 버텨나가길 기대한단 말인가? 내 마음태로 꾸며낸 그녀의 용기로 끝까지 살아나가기를 온몸으로 실천하기름, 어떻게 그녀에게 바란단 말인가?
모이라가 나처럼 되는 건 싫다. 굴복하고, 순응하고, 근근이 제목숨이나 연명하게 되는 건 싫다. 결국은 그게 문제다. 나는 모이라에게서 용감무쌍함을 기대한다. 허세를 부리고, 영웅적인 행동을 하고,
홀홀단신 적진에 뛰어들어 전투를 벌이기를 기대한다.

내 걱정은 마." 그녀가 말한다. 내가 하는 생각을 대강 알아차린모양이다. ‘나 아직 제정신이야. 나야. 보면 알잖아. 어쨌든 이렇게생각해 봐. 이건 별로 나쁘지 않은걸. 주위에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동성애자의 천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란 말야."
모이라는 이제 나를 놀리고 있다. 자신의 원기를 과시하고 있다.

그러자 기분이 좀 나아진다.
‘그래도 그냥 너를 내버려둬?"
내버려두냐고? 오히려 나서서 권장한다. 야, 자기네들끼리 여기를 뭐라고 부르는 줄 알아? ‘이세벨의 집‘이래. 아주머니들이 보기에우리는 어차피 저주받은 존재니까 아예 포기하고 우리가 무슨 죄악을 저지르건 상관도 안 해, 사령관들도 우리가 여가 시간에 하는 일에 대해서는 신경 안 쓰고, 오히려 여자들이 여자들을 깔고 누운 풍경은 자극적이라고 한다니까."
"다른 여자들도 다 그래?"

이런 연설이 끝난 뒤에 예외바른 박수갈채가 이어지고 잔디밭에서 홍차와 쿠키를 대접하지 않는다는 게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다.
서론이 대충 끝났군. 나는 생각한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지.

리디아 아주머니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꾸깃꾸깃한 종이를 한장 꺼낸다. 그녀는 종이를 펼쳐 살펴보면서 지나치게 뜸을 들인다.
그렇게 해서 우리를 길들이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확실히 알게하려는 거다. 말없이 종이의 글을 읽는 자기 모습을 우리가 지켜보게 함으로써 자신의 특권을 과시하려는 거다.

 천박해, 나는 생각한다. 제발 빨리 해치워 버려.
"과거에는 실제의 ‘구제‘에 앞서 죄수들이 기소된 범죄의 자세한내역을 설명하는 절차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공공연한 설명을 하면, 특히 TV로 방영할 경우에 예외 없이 모방범죄가폭발적으로 증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이러한 절차를 생략하는 것이 모두를 위해 최선의 일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더 이상 복잡한 절차 없이 ‘제‘를 진행하겠습니다."

모두들 한꺼번에 웅성웅성 소리를 낸다. 다른 사람들의 범죄는우리들끼리의 은밀한 언어였다. 그 내역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것을 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건 대중이 호응할 발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박수갈채를 만끽하고 있는 듯 눈을 깜박거리며 미소를 짓고 있는 리디아 아주머니의 얼굴만 봐서는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전부 머리로 다 상상해 내야 한다. 각자 알아서 추정해야만 한다. 첫 번째 여자, 그들이 지금 의자

에서 일으켜 세우고 있는 여자, 검은 장갑을 낀 손들에 위 팔뚝을 붙들린 여자, 그녀는 책을 읽었을까? 
아냐, 그건 3급 범죄로 겨우 한쪽 손을 자를 뿐이다. 부정(不貞), 아니면 사령관의 목숨을 노렸던 건가? 
아니, 그보다는 사령관의 아내를 죽이려고 했다는 게 더 그럴싸하다. 
우리는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아내의 경우에는 ‘구제‘당할 만한 범죄가 대체로 단 하나밖에 없다. 그들은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해도 문책받지 않지만, 단 하나 우리를 죽이는 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뜨개질 바늘이나 정원 가위나, 주방에서 훔친 칼들로 우리를 살해해서는 안 된다. 특히 우리가 아기를 가지고 있을 때에는더더욱 그렇다. 물론, 간통 죄일 수도 있다. 그럴 가능성은 상존하는 법.
아니면 탈출을 기도했거나.
"오브찰스"
리디아 아주머니가 이름을 부른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그런이름이 없다. 여자가 앞으로 끌려나온다. 그녀는 온 신경을 걷는 데만 집중하는 사람처럼 한 발, 그다음에 다른 발, 힘겹게 옮긴다. 약에 취한 게 틀림없다. 입가에는 술 취한 듯 몽롱한 미소가 떠올라 있다.
그녀는 한쪽 얼굴을 찡그리면서, 카메라를 향해 어울리지 않는 윙크를 던진다. 물론, 방송에는 절대 나가지 않을 것이다. 이건 생중계가아니다. 
‘구제자‘ 두 사람이 그녀의 손을 등 뒤로 돌려 묶는다.
내 뒤에서 구역질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래서 우리가 아침 식사를 하지 않는 거다.
"아마 틀림없이 재닌일 거야."

아니면 정말 해코지를 해 버린다면? 그들의 만행은 상상조차 하고싶지 않다. 아니면 루크를, 그들이 루크를 붙잡고 있다면? 아니면 우리 엄마나 모이라나 그 외 누구라도 아, 하느님, 제발 선택을 강요하지 말아 주세요. 
난 견뎌내지 못할 거예요. 나는 잘 알고 있어요. 모이라는 나를 제대로 알고 있었던 거야. 나는 그들이 원하는 말은 뭐든지 털어놓을 사람이다. 누구든 고발해 버릴 거다. 사실이다. 

첫 비명소리가 터져 나오는 대로, 아니 흐느껴 우는 소리 하나에도, 나는젤리처럼 흐물흐물해져 버리고 말 거다. 무슨 죄목이든 닥치는 대로 자백하고, ‘장벽‘의 갈고리에 매달린 신세가 되고 말 거다. 고개를 숙이고 똑바로 봐 하고 스스로에게 타이르곤 했다. 이젠 다 소용없다.

나는 집으로 오는 길 내내 마음속으로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
모퉁이에서 우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서로를 보고 인사한다.
"그분의 눈 아래."
방심할 수 없는 새로운 오브글렌이 말한다.
"그분의 눈 아래."
나는 열띤 어조로 말하려고 애쓴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그런연기가 도움이 된다는 듯이.
그러자 그녀는 이상한 짓을 한다. 그녀는 몸을 앞으로 숙이고, 우리 머리에 쓴 하얗고 딱딱한 눈 가리개가 거의 닿을 정도로 가까이다가왔다. 창백한 다갈색 눈과, 거미줄 같이 미세한 뺨의 잔주름이똑똑히 보였다. 그녀는 마른 낙엽처럼 서걱거리는 목소리로, 재빨리말했다.
"그 여자는 목매달아 자살했어요. ‘구제‘가 있은 다음에 체포하러

영미 페미니즘 문학의 거장 마거릿 애트우드의 대표작!
전체주의 사회 속에 갇혀버린 한 여성의 독백을 통해성과 권력의 어두운 관계를 파헤친 섬뜩한 디스토피아 소설

‘총독문학상‘, ‘아서 C. 클라크 상‘ 수상
‘부커 상‘, ‘네뷸러상‘ 

노미네이트21세기 중반, 전 지구적 전쟁과 환경오염으로 출생률이 급격히 감소하면서 미국은 극심한 혼란 상태에 빠진다. 이때를 틈타 가부장제와 성경을 근본으로 한 전체주의 국가 ‘길리아드‘가 일어나 국민들을 폭력으로 억압하는데,

특히 여성들을 여러 계급으로 분류하여 
교묘하게 통제하고 착취하기 시작한다.
평화롭게 살던 주인공은 
어느 날 갑자기 이름과 가족을 뺏긴 채 
사령관의 ‘시녀‘가 되어,
삼엄한 감시 속에 그의 아이를 수태하도록 강요받는다.

성과 권력의 어두운 관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소조지 오웰의 『1984』만큼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워싱턴 포스트>최고의 스릴러 소설이며, 소설의 기본 요소가 재미에 있음을 일깨워 주는 작품-<뉴욕 타임스>

휘파람을 불면서, 까마득하게 멀어 보인다.
하느님, 당신이 원하신다면 난 못할 일이 없어요. 나는 기도한다.
이제 주님이 내 주인이 되셨으니, 정말로 원하시기만 한다면 나자신을 하얗게 지워 버리겠어요. 진정 내 모든 것을 비우고, 참된 성배가 되겠어요. 닉을 포기하겠어요. 다른 사람들도 까맣게 잊겠어요.
불평도 그만두겠어요. 내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겠어요. 희생하겠어요. 참회하겠어요. 모든 권리를 포기하겠어요. 모든 인연을 끊겠어요.
옳지 못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어쨌든 그런 생각을 한다. 그들이 레드 센터에서 가르친 모든 것들, 내가 이제까지 저항했던 모든것들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 한꺼번에 나를 덮친다. 
고통은 싫다. 머리는 얼굴 없는 계란형의 천주머니가 되고, 두 발은 허공에 매달린댄서가 되고 싶지는 않다. ‘장벽‘에 걸린 인형이 되고 싶지는 않다.
날개 없는 천사가 되고 싶지는 않다. 어떤 식으로든, 계속 살아가고싶다. 내 몸은 다른 사람들 마음대로 쓰라고 맡기겠다. 그들이 내 몸을 가지고 무슨 짓을 해도 좋다. 나는 비굴하다.
처음으로, 나는 그들의 진정한 힘을 실감한다.
나는 꽃밭을 넘어 버드나무를 지나쳐 뒷문을 향해 걷는다. 저 안에 들어가면 안전할 것이다. 방 안에서 무릎을 털썩 꿇고, 감사한 마음으로 가구 광택제 냄새가 실린 묵은 공기를 허파 가득 들이마실터이다.
세레나 조이가 정문으로 나와 계단 위에 서 있다. 그녀가 나를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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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 이야기 (리커버 일반판, 무선) 시녀 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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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전의 이런 절망과 풍자가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이 슬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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