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크는 이 단계에서 스스로 자신을 제자와 같은 수평적 위치로 내려놓는다. 장자크는 교사들을 향해서 학생이 "여러분과 동등한 사람이 되도록, 그들을 여러분과 동등하게 취급하라"고 주문하며, 
만일
"그들이 아직 여러분의 수준에 오를 수가 없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과감히 그들의 수준으로 내려가라"고 요구한다. 
교사가 "위엄을 꾸미고" "완벽한 인간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것은 오히려 교사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완벽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사람들을 감동시키지도 설득시키지도 못한다"며, 
"학생의 약점을 고쳐주고 싶으면, 그에게 여러분의 약점을 보여주고, "그가 겪고 있는 것과 똑같은 싸움이 여러분의 내면에서도 벌어지고 있음을 알게 하라"고 충고한다.

공화국으로 구체화되는 루소의 시민적 일반의지는 합리적 판단력을 넘어서 정서적 감정이 동반된 어떤 전인격인 도덕심에 토대를 두고 있다.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연대의 감정을 토대로 해서만 시민은 평등에 대한 의지와 그것을 훼손하는 것에 대해 정의감을 발휘하며 사회공동체 전체에 이익이 되는 선을 지향하고 실천하고자 한다는것이다. 일반의지의 전제로서 정의감, 정의감의 전제로서 공감과 연대감에는 청년기의 평등한 인간관계의 경험이 필수적이기에, 장 자크와 에밀의 의사소통은 이제 문답법을 넘어 ‘고백화행‘으로 전환된다. 
 "이제부터 교사와 학생은 솔직하고 대화적인 우정의 관계가 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학생뿐 아니라 교사도 솔직해야 한다는 점이다. "
 고백화행에서 나타나는 교사의 솔직성은 

수업에 참여한 철학과 88학번

그 학기 나는 내 인생 최고의 수업을 받았다. () 진리(인식)의 의사소통적 면모를 이해하는 학기였는데, 나는 거의 나를 위한 강의라고느끼며 학기를 보냈다. () 내가 궁금해하는 것들이 거의 다음 시간에이야기가 되곤 하였다. 그러나 그런 느낌과는 상반되게도, 나의 학업에 있어 그가 개입된 흔적은 거의 없었다. 모든 것은 온전히 내 스스로, 나의 고민과 탐구를 통하여 이루어졌다고 느꼈다. 
당시엔!). 학기가끝나갈 때,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곳으로 가 있었는데, 생각해보면, 그는 그곳을 내 스스로 찾아가게끔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로부터 받는 가장 큰 혜택은 그와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와 이야기하면, 왠지 내가 높아지는 느낌이 든다. 존중과 배려에서 비롯된 아니 그 이상의 뭔가가 있다. 
가끔 그의 말에 용기와 위로를 얻기도 했었는데.
의례적인 말로써가 아니라 언제나 사실과 진실에 의거해서, 그러했다.

나는 거기서 진심으로, 용기를 얻고 위로를 받았다. 그와 이야기를 하고 나면 멈추었던 머리가 마구 돌아가기 시작하고, 질문거리가 폭발하고 찾아볼 것이 수십 가지 늘어나곤 했다.

그리고 강도와 방식은 조금 달라도 장춘익 교수가 교수법에 충분히 익숙해진 2010년 이후의 수강생들로부터도 방금 소개된 한승일의 경험과 유사한 실존적 상호존중의 관계와 자아효능감에 대한 증언은 자주 발견된다. 
나는 앞에서 장춘익 교수의 토론 중심 수업에서 학습자가 스스로 문제와 답을 찾아가는 지적 적극성과 열정을 자극하는 수업 구성의 방식을 자세히 설명했다. 이 지점에서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의 토론 중심 교수 방법에서 학생들을 감동시키고 자발적 지적 열정으로 나가게 하는 동력은 자세히 살펴보면 토론이라는 형식 자체보다, 토론이라는 형식 조건을 상호적 관계 맺기,
더 나아가 진정한 인간적 존중의 정서가 동반되는 상호적 관계 맺기로 전환하는 교수자의 특별한 태도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여성주의철학>과 같이 개인별, 성별, 세대별 정체성 및 자기이해와 결부된 수업 내용에 대해 학습자들이 마음을 열고 상대와 토론하는 것은 결코쉽지 않다. 장춘익 교수의 <여성주의철학> 강의실에서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이곳에서만큼은 나의 의견과 정서, 판단과 자아가 의심이나 불신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즉 신뢰하는 권위자와 진정한 존중의 관계 맺기가 형성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마도 우리는 이것을 장춘익 교수 여성주의 페다고지의 실존 도덕적 특징이라

이제 나는 여성주의적으로 생각한다

설문조사 12번, 13번, 19번 문항은 참여자들에게 각각 ‘수업에 대한 종합적 만족도‘
 ‘수업 이후 성차별, 성평등 문제 인식 전환에 미친영향‘ 
‘수업이 삶 전반에 미친 영향‘에 대해 5점 만점으로 점수를 부여하도록 요구했다. 
또한 14번 문항에서는 수업의 경험과 의미에 대한 평가를 세부적으로 규정하는 문장 4개를 제시하고 동의하는 경우 복수로 긍정 응답하도록 요청했다. 
이 설문조사 객관식 문항들에 대한 긍정적 응답률은 약 50% 정도로 나타났다. 
즉 객관식 문항에 대한 응답 역시 
앞서 워드클라우드와 키워드 네트워크 분석으로 밝혀낸 학습자들의 수업 경험의 내용 및 ‘여성주의적 인식 전환‘이라는실천적 효과를 뒷받침해 준다.
사실 도구적 지식은 합리적인 인지과정을 통해 그 원리와 내용을이해함으로써 자기 지식으로 수용된다. 
하지만 성차별과 젠더 불평등을 생산하는 가부장제 남성 중심주의는 섹슈얼리티와 신체 감각에서 비롯되는 은밀한 개인의 욕망에서부터 미시적인 일상의 관습, 사회문화적 가치와 
삼심질서, 거시적인 정치·경제 질서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이고 다층적으로 조직된 메타 규범이기에, 여성주의적 비판은 개인의 깊은 지하 감정과 문화적 정체성, 또한 사회적 이해관계를 건드린다. 

따라서 여성주의 철학)과 같은 수업의 학습자는 종종 심리적 불쾌감을 방어하기 위해, 적극적이든 수동적이든 수업의 내용적 흐름을 거부하거나 도구적 지식처럼 자신과 분리해서 내상화한다.
하지만 장춘익 교수의 수업에 대해서는 많은 설문 응답자들이 여학

생이든 남학생이든, ‘성차별이나 젠더이분법 같은 문제에 대해 이성의 집단과 이렇게 많이 그리고 솔직하게 
이야기해본 적이 없다거나,
수업이 너무 재미있어서 학과방 틈에서 같이 수강하는 친구들을 만나면 수업 내용을 다시 열게 이야기하곤 했다는 경험을 증언했다.

장춘의 교수는 <여성주의철학> 수업에서 주제가 되는 사안에 대해 그리 여성주의적 해석을 제시하지 않았고, 학생들 스스로 다각도의의견을 제시하고 경합하도록 유도했다. 
어떤 경우는 이 자유로운 토론과 논박 과정 자체를 학생들이 스스로 조직하도록 요구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여남 학습자 집단은 대립하고 반박하는 팽팽한 긴장과 동시에 반박과 재반박의 논증을 거치며, 낯선 상대와 어떤 소통을하었다는 이기지 못한 해방감과 즐거움을 느꼈음을 설문조사 응답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처럼 적지 않은 학생들이 ‘비판적이 해방적인 자기변화를 경험했음을 보고하는 장춘익 교수의 <여성주의 철학)은 블랙페미니즘의 창시자이자 영문학자이며, 대안교육이론가인 벨 훅스가 말하는 
차이를 극복하는 교육, 비판과 재미가 공존하는 참여교육‘과 유사한 면이 있다.

벨 훅스가 말하는 ‘참여교육‘은 일차적으로 수업 과정에 학습자들이 스스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함께 사유하려는 내적 동기를 유발하는 교육이다. 여기서 토론은 매우 중요한 과정인데, 목표가 되는 민식 또는 지식 내용을 교사가 지시사항처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학습자 집단이 권위에 의한 억압 없이 
자유롭게, 그리고 함께 토론하고 사유하면서 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벨 훅스는 "참여교육이야말로

•교실에서 흥을 진정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가르침의 유형이다.
 학생과 교수 모두가 학습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자유롭고 열정적으로 토론하고 사유하는 가운데 학습자들은 관습적으로 수용하던 사회문화적 관념과 규범에서 벗어나 스스로 참의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하게 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배경을 가진 학습자들이 상호 존중심을 가지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사회적 연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벨 훅스는 학습자들이 개방된 태도를 가지고, 생각하는 일에 열정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교사의 책임이라고 말하며 이런 교육 경험을 통해 학습자들은 비판적 사고를 내면화하고 ‘정치적 행동 참여‘로 나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내가 참여교육을 실천하는 것은 정치적 행동주의를 표현하는 것"이며 "참며 교육을 실천하는 일은, 교수가 학생들의 삶의 방향을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은 척하는 것이 아니라기꺼이 책임을 지겠다는 의지를 갖는 일이라고 말한다.

2장에서 지금까지 밝혀낸 <여성주의철학> 수강생 집단의 여성주의적 자기 변화를 이제 구체적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다시 확인해보겠다. 

벨 훅스 참여교육 이론의 3가지 구성요소를 원용해서 첫째, 학습자들이 어떻게 <여성주의철학> ‘교육에 참여‘하는지, 
둘째, 그들이 이런 자발적 지적 참여를 통해 얼마나 가부장제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사고‘에 도달하는지, 
셋째, 비판적 사고를 통해 그들이 어떻게 자신의 실제 현실에서 여성주의적 ‘정치적 행동 참여를

시도하는지 검토하겠다.
우선 수업 자체에 대한 주관적 현상학적 기억을 요구하는 9번 ~12번 문항의 응답들을 중심으로, 가부장제 남성중심주의와 성불평등에 대한 토론과 성찰을 지향하는 (여성주의철학>의 ‘참여교육‘과 자•발적인 ‘비판적 사고‘를 증언하는 목소리를 살펴보았다. 더불어 현재삶의 관점에서 수업을 평가해주기를 요구하는 18번 문항, 즉 사후 관정의 수업 인상과 평가 문항에 대한 회상에서도 간접적이지만 수업중경험한 ‘참여교육‘ 및 ‘비판적 사고‘에 대한 흥미로운 증언들이 발견되어 추가로 제시했다.

특히 대학은 청년들이 현실의 이해관계와 사회적 역할에 들어서기 직전에 자유롭게 학습하고 생활하는 사회화의 마지막 단계이자 개방적인 문화적 공간으로, 바로 이러한 보편 도덕에 근거한 실천적 의사소통 능력을 키우는 최적의 무대가 될 수 있다고 장춘익 교수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철학교수로서 발을 내딛는 1990년대 초반부터 마지막 강의를 진행했던 2020년까지 생활세계 영역으로서의 대학의 역할 및 평등한 의사소통적 교육에 내재된 도덕적 실천적 의미를 일관되게 강조했다.

() 사회철학이 오늘날 할 수 있는 일은 경제의 효율성의 논리의 월권을 막는 문화적 저항에 기여하는 일이다. 사회철학의 이러한 역할 규정은 물론 사회운동이 문화운동으로 축소, 환원되어야 한다는 것은아니다. 이 역할 규정은 노동계를 비롯한 각 사회영역이 자체적 조직능력을 확장해가고 있고, 다른 한편 사회철학적 문제에 대한 논의가

실질적으로 대학을 비롯한 문화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현실에 바탕을 둔 것이다. 만일 비판적 사회철학의 주장들이 이해관계의 대립에서•비교적 자유롭고 토론을 위한 심적, 시간적 여유가 있는 공간에서 설
‘득력을 확보해 내지 못한다면 
그 외의 공간에서는 현실성 없는 주장으로 앞서 가거나 이미 있는 사회운동에 대한 별 필요 없는 응원에 불과할 것이다. 
나는 이기적이고 수평적인 관계의 경험이 보편주의적 도덕의식의 형성을 위한 가장 중요한 기반이라고 생각한다. 비이기적 관계가 규법적 의식을, 수평적 관계가 보편주의적 의식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의 경우 보편주의적 도덕의식을 형성하는 데에는 지난 세기 중후반부터 인구의 상당수가 어린이부터 청년기까지 사회화 과정의 대부분 시간 동안 공교육체계 속에서 또래 집단과 수평적 교류를 경험한 것이 하나의 중요한 실질적 지반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런 수평적 고문의 경험 속에서 하비마스가 말하는 이성적 자유, 즉 ‘모두와 삭자들 상호수관적으로 공유되고 완전히 답중식화된 상호적 관계들의 연관성 속에 강세 없이 외시소통적으로 포함시키고자 하는 자유에 대한 지향성이 형성되고 강화되었을 것이다. 이런 추측이 맞는 것이라면, 경쟁논리와 사회적 지별이 교육체계 깊숙이 파고들이 사회화 과정이 동시에 수팅적 교류를 체득하는 과정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도덕의식의 발전과 관련하여 가장 염려해야 하는 부분이 될 것이다. 

의 표현에 기대어 말하자면, 단지 수평적으로 연결하리는 앞의 두 개의 장에서 장춘익 교수의 <여성주의철학> 수업을 통해 캠퍼스 운동권 여학생들에 국한된 주변부 담론이었던 캠퍼스페미니즘이 어떻게 여남 학생 모두가 참여하는 전공 교육의 중심무대에서 생생한 실천적 의사소통의 과정으로 새롭게 의미화되었는지 확인했다. 그의 수업에서 학습자들은 교수자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자기정당화의 압박에서 벗어나, 보다 쉽게 상호적 의사소통에 들어설 수 있었고, 그 정서적 편안함 속에서 긴장감 가득한 성차별과 성정체성 문제를 평등하게 논의하는 내적 경험으로 재의미화했다.
그리고 그 평등한 의사소통의 관계 속에서 참여자들은 상대의 거울에 나를 비추어 보는 자기성찰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 결과 나의 기존 도덕 감정의 한계를 인식하거나 또는 나와 다른 상대를 마주보고 연결되는 행복감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의 강의실에서 경험하는 평등한 토론과 상호적 성찰, 그리고 발견의 행복한 감정은 많은 학생들로 하여금 여성주의 페다고지가 지향하는 연대의 가치를 내면화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보편주의 도덕에 근거한 이러한 연대의 가치를 내면화한 학생들은 강의실 밖에서•만나는 젠더 억압에 새롭게 주목해 저항하거나, 스스로 연대의 요구를 이어가는 파생 공론장을 만드는 행위로 나아갔다. 이 수업의 적극적 학습자들은 교내외에서 이차적인 공론장, 즉 각종 동아리, 독시회, 토론회, 문화행사 등의 활동을 자발적으로 기획했음이 구체적으

운동권의 남학우들에 의해서도 비일비재하게 소외와 차별을 받는 경험을 했다. 조한진희는 "캠퍼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으면 지나가던 체대생들이 위협적인 눈빛을 보내"거나 "이렇게 대놓고 담배를 피우는 여학생은 처음 봤다며 혀를 내두르는 이들도 자주 만났다‘고 말한다. 그녀에게 캠퍼스 내 익명의 위협보다 더 큰 문제는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철학과 남학생으로부터 여자가 왜 담배를 피우나, 무책임한 모성이 아니냐 등 갖가지 이유로 추궁을 받는 일이있다. 이유진은 "철학과에서 벌어진 성희롱 사건을 공론화하고 문제제기했을 때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녀를 비난하거나 고립시키거나방관하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한다. 운동권 여학생들의 저항적, 도덕적 자존감을 염두에 두면, 이런 위협과 배척은 일반적인 불안 외에 깊은 분노와 긴장을 야기했을 것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저항적, 도덕적 자존감은 사회화 과정에서 소수자나 주변화의 경험에 노출되었을 때, 자아의 자기중심적, 도덕적 힘이 강한 개인에게서 많이 나타난다. 
계급, 인종, 젠더의 차별적 배제 기제가 이런 도덕적이고 혁명적 개인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이 소외와 차별, 억압이 초기 사회화 과정에서부터 각인되면, 즉 가정과 부모가 개인의 세계를 지배하는 유년기와 아동기부터 직접적인 소외와 억압에 노출될 경우, 자아는 충분한 자아효능감 및 대상에 대한 신뢰를 획득하지 못한 채 근본적인 불안을 떠안을 수 있다. 이것은 이후 성인기에 다양한 계기로 전면적인 내적 위기로 소환되는데, 상담학은 바로 이런 자아의 위기에서 어떻게 자

아가 자기효능감과 대상에 대한 신뢰를 되찾도록 도울 수 있는지 탐구한다.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남성중심주의적 권위적 핵가족 모델이 지배하던 1980년대에 아동기를 거쳤을 페미니스트 세대 여성들은 다소간 이런 문제적 사회화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 신드롬은 2000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닌 여성들의 생애사적 우울과 좌절에 대한 우리 사회의 뒤늦은 고발이자 위로인 셈이다. 앞서 보고한 여성주의 운동권 학생으로서 조한진희나 이유진이 캠퍼스 내에서 겪었던 위협과 배척은 그들의 자아에 진지한 위기일 수 있었고, 자아의 도덕적 통합성을 충분히 와해시킬 수 있는경험이었다. 이 위기의 상황에서 (여성주의 철학>이라는 작지만 확실하게 중심에 위치한 교육 공론장, 그리고 문제적 상황마다 적극적인 공감에 바탕한 장춘익 교수의 개입과 지지는 이들의 내면에 힘을 북돋우고 자아의 심리적 자원을 회복해주었을 것이다.
조한진희는 학과 술자리에서 다시 ‘담배 피우는 여자‘로 공격을 받을 때, 
장춘익 교수가 "그러니까 ‘겨우 여성의 담배 문제로 표현해 보여준 반응을 잊지 못한다고 전한다. 
성인의 기호식품에 대해 제삼자가 비난하는 것의 부당함을 그는 "타인의 자유, 책임, 평등의 개념을 가지고 설명과 질문을 이어갔는데, 더 놀란 것은 장춘익 교수가 "당시자나 느낄 법한 분노로 고양되어 있었고, 그 두터운 분노를 숨길 의지가 없는 듯했고, 
동시에 적절한 방식(수업시간의 연장 같은 토론의 태도)으로 표출했다는 사실이었다. 

장춘의 교수는 "페미니즘 문제에 있어서 부당한 현실에 대해, 안전한 곳에서 거리를 둔 채 우아하게


장춘익 교수의 페미니즘 강의실이 운영된 20여 년의 기간을 동시적으로 보면, 
남학생들의 경우 기존의 안정적인 남성적 자기이해가 의문시되는 것에 대한 불안에서부터 ‘가해자 남성‘으로 규정될 수 있다는 두려움과 반발심까지, 내적 불편과 긴장의 정도가 점점 높아지는 양상이 드러난다. 
이 상황에서 남성 페미니스트라는 교수자의 정체성은 남학생들에게는 긴장도를 완화시키는 순기능으로, 
여학생들에게는 같은 성별이라면 기대할 법한 포괄적이고 선제적인 동일시기대를 낮추며 지적 긴장을 유지하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동시에 수업의 주제를 무의식적으로 거부하면서 방어적인 입장을 견지하는경우도, 
남성 교수자라는 정체성은 여남 학습자 모두에게 자아방어를 어렵게 만든다. 페미니즘 이슈를 공감하지 않는 여학생이라면 자신의 전통적인 젠더관계 의식을 확인해 주어야 할 남성 권위자가 오히려 전통적 젠더관계에 비판적인 것이 매우 혼란스러울 수 있다. 
또한 페미니즘을 여성들의 ‘한풀이‘로 사소하게 치부하려는 방어적 남성 학습자의 경우 여성이 아닌 남성 교수가 페미니즘 교육의 주체로 나서는 것은 매우 당황스러운 상황이다. 이러한 복합적인 긴장관계 속에서 학습자들은 자기 감정의 정당성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긴장감에도 불구하고,

성, 정체성, 성역할의 문제들을 둘러싸고 서로 다른 성별 집단 사이에 개방적으로 대화하는 새로운 경험이 시작되는 순간,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집단 설문조사에서 실제로 수강생들은 ‘선생님은 뒤에서 중재해주시고 학생들끼리 열띤 토론을 나누는 "가장 재밌고 신났던 토론 "(83/04 예)이었다고, "수업시간 내내 즐거운 마음으로 () 발표하고 토론"[BBIO7 여)했다고, "긴장과 자기 경협의 토로 (93/17 남)가 있었다고 답변했다. 특히 남학생들의 참여를 강조하는 답변들이 있었다.

{) 교수님의 성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여자 교수님이 여성학 전공자가 수업을 한다는 부분에서 이를 듣는 남학생들이 적극적으로 토론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레포트를 통해서 수업이 끝나고 자기들끼리 하는 대화 속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이나 비난하는 입장을 나누는 것을 보았어요. 그런데 철학과는 수업 분위기가 무척 달랐습니다. 
남학생들의 발언이 굉장히 활발했어요. 
기억에 남은 것은 성매매 관련된 수업이었습니다. 상대와 관련된 내용에서 합법회와 비법화에 대한 자유로운 생각들을 털어놓게 하셨고,
정말 자유로운 남학생들의 의견들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선생님은 어떤 답을 두고 학생들의 의견을 하지는 않으셨어요. 그래서 더 학생들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고요. 또 더한 주제를 골라서 책상을 붙이고 학생들을 토론하게 했던 것이 기억이 남아요. 나머지 학생들이 모든하는 학생들의 내용을 관전할 수

있도록 하는 세월이 흥미로웠습니다. 그 사이 선생님은 사회를 보자면서 양쪽의 입장이 자유롭게 나올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동시에 여성들 간의 입장 차이를 확인하는 당혹스러운 순간에 대한 증언도 있다. 
‘의대 및 간호학과 학생들은 "여성주의 자체에 대한 관심과 동의가 있어 보였지만, "내가 머플러 파트 과학, 퀴어챕터 찾아 발표했을 때, 토론이라 하기는 조금 ()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데, 
여성주의를 지지하는 집단 내에서 확인되는 그 차이가 당시 나에게는큰 물음(93/17 남)이었다고 한 수강생은 회상한다. 
또 여성주의를 통해 차별에 대해 "알게 된 나와 이전의 내가 너무나도 달라 피로감이나 좌절감 등을 느끼기도 하는데, 무지의 욕구‘라는 선생님의 말을 듣는 순간 가벼운 수치심을 느끼며 다시 각성하기도 한다(97/17 예)

(여성주의철학)이 성별 학습자 집단 모두에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지적 긴장과 자기개방, 자기방어와 소통 사이의 변증법적 동력을 경험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 모습은 특히 남성들에 대한 여성주의 교육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흥미로운 대답의 단초를 준다.

페미니즘의 초기 남성성 연구는 남성역할을 억압적 사회화의 결과로, 남성성을 잠재적 폭력성과 등치하는 방식으로 흘러갔다. 이 단순한 남성성 비판은 현재 연구에서는 제한적으로만 인정되지만 큰 흔적을 남겼다. 

비록 로버트 코넬이 ‘지배적 남성성(hegemonic

다. 예를 들어 정치권의 여가부 존폐 논쟁과는 별개로, 현실적인 문제는 여가부 같은 조직은) 리더의 역할에 의해, 그 존재의 의미가 좌우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저는 기본적으로 여가부 ‘개편‘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리더(장관)가 누구인가에 따라서 여가부는 팔요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 전반의 젠더 인식이나 여성주의 지식이 향상될 수 없습니다. 구조적인 뒷받침없이 한 사람의 역량으로 성과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즉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여성학은 교수자의 역량이 절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장춘의 교수의 사례와 실천은 연구 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 30년, 대학의 안과 밖에서 여성학자나 인문학자는 영원히 필요한 영역이지만 양성되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습니다. 사회를 젠더 시각에서 맥락적으로 분석하는 이들이 극소수이다 보니, ‘여혐‘ ‘남혐‘ 같은 엉뚱하고 소모적인 논쟁이 빈발합니다. 이는 사회적 문해력으로 연결됩니다. 그러나 대학이 여성학을 비롯, 인문학자들 배출하리라는 기대는 없습니다. 지금 그 자리를 소위 ‘작가‘들이 메우고 있지요.

1990년대 초반부터 여성학 공부와 여성운동을 했던 이들은 지금 대부분 정부, 지자체, 국회 등에 취업한 상황입니다. 토크니즘(tokenism)에 의해 구색 맞추기로 자리한 경우 공적 기관에 취업하면, 남성 사회와 ‘협상‘이 불가피합니다. 협상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종속되지요. 대학 교원으로 취업하거나 연구를 지속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독립연구자는 더더욱 드릅니다. 게다가 현재 젊은 여성주의자들은 여성주의를 수용하지만 최소 10년 이상 엉덩이를 의자에 묶어두어야하는 공부‘를 자신의 진로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심지어 온라인을 중심으로 페미니즘의 대중화를 주도하는 여성들은*생물학적 여성은 여성학 공부를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저는 현재 한국 사회의 여성주의에서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과제는 여성학자의 양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주의는 다른 그 어느 학문보다. 언어의 경합이기 때문입니다. 
장춘의 선생님의 발자취가 학자로서 모델이자, 그리운 이유입니다.

끝으로 장춘익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저도 주변 사람들에게 늘 하는 이야기가 있어서 반가운 마음에 인용을 하며 장 선생님의 학문적 업적에 대한 저의 ‘마음‘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이는 여성주의자뿐 아니라 모든 ‘주의자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중요한 지침일 것입니다. 

위치성 자체가 지식은 아닙니다. 드러나지 않은 세계를 알고자하는 의지, 다른 이들과의 연대는 여성주의의 전제입니다. 

약자는 언어를 가질 필요가 없고, 단지 소수자라는 정체성만 중요하다는 논리야말로 ‘약자 혐오‘이자 여성학이 학문으로 간주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신자유주의 시대, 실제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무관하게 피해자의식(victim-hood)을 내세웁니다. 
공동체는 건강해질수 없습니다. 이미 여성주의 심리학에서는 이를 ‘약자의 행패 (tyrannyaf minorities)‘라고 경계해 왔지요.

장춘의 선생님은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사회운동의 원리

에 대해서도, 인간 본성에 대해서도 깊은 식견이 있으셨습니다. 장선생님이 어느 학생에게 한 말씀입니다.

"오래가는 항의는 아무튼 짜증 나는 거야. 별로 동의해 주고 싶지않은 이야기 자꾸 하면 정말 짜증이 안 나겠어? (1) 
항의는 내가, 우리가 갖지 못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같은 항의가 오래 반복된다는 것은 그렇게 오랫동안 결핍의 상태에 있다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항의 기간이 길어지면 지쪽은 짜증 나고 이쪽은 초라하고 비참한거야. (…) 

네가 세상에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보다, 새로운 것을 흡수하는 것이 더 많아야 한단다. 
페미니즘이 네 주장의 설득력을 보증해 주는 것이 아니라 
너의 지식이 너의 페미니즘에 설득력을가져다주는 것이어야 해. 
페미니즘 아닌 다른 영역에서도 지적으로 신뢰받을 수 있어야 사람들이 네 페미니즘도 신뢰한다(편자 강조저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는데- 페미니스트가 지적으로 욕망의 대상이 되고 행복하고 건강하면, 그게 바로 여성운동이 아닐까요- 이번 기회에 인용할 만한 좋은 텍스트가 생겨서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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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백래시 속에서도 20년간 이어져온 ‘기적의 강의실‘

장춘익 교수의 <여성주의철학> 교육혁명에서 다음 세대의 페미니즘을 들여다보다

2000년부터 약 20년간 한 대학의 철학과에서 <여성주의철학> 수업이 이어졌다. 
혐오와 대립, 갈등과 대결의 물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학생들과 함께 페미니즘 담론을 나눠온 이 특별한 수업은 지난 2021년, 강의를 이끌었던 장춘익 교수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어 왔다. 

이 책은 보편적 세계관으로서 페미니즘을 지향하고 실제로 그렇게 작동했던 한 교육적 실천,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나의 삶을 바꾼 수업으로 경험되었던 어떤 교육 사례에 대한 기억이자 보고이고, 이야기이자 이론적 해석이며, 또 그에 대한 집단적 대화이자 비평이다.

여성주의는 일종의 세계관이다. 
여성주의는 정체성의 정치이자, 사회정의이자, 다학제 연구의 핵심적 가치관이자 연구 방법론이며, 당파성의 정치학이자 메타 젠더이다. 

한국 사회에서 남녀를 통틀어 여성주의를 이렇게 정의하고 실천하는 학자는 많지 않다. 

장춘익 선생님의 ‘정확한 여성주의 인식은 그가 자신의 성별과 학제를 초월한 훌륭한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정희진 (여성학 박사, 「페미니즘의 도전』 저자)

여성주의는 억압받는 여성의 현실을 비판하며, 대안적인 가족과 젠더 관계를 모색하고, 남성 중심 사회체제에 저항하면서 가부장제의 타파 혹은 변형을 추구한다. 남성 교수가 남성 기득권의 포기를 전제로 하는 여성주의를 강의한다는 것 자체가 실천적인 차원에서 대학에서 이루어진 교육혁명이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CAU 펠로우 교수, 사회 불평등 연구)

장춘익 선생님의 <여성주의철학>은 우리 사회의 사회정의 담론이 노동과 경제 계급 중심의 평등 담른에서 이제는 여성 및 환경 문제로 선회해야 한다는 통찰로부터 비롯되었다. 교수자의 존중과 관심 속에서, 성차별과 권력 불평등의 문제에 대해 평등하고 개방적으로 토론하는 과정에서 학습자들은 비판적 자기인식과 규범의 전환을 이루어 내었다.
일종의 고고학적 역사학적 탐구의 호기심과 인내심으로 이 놀라운 강의실의 존재를 증명해낸 ‘장춘익 교육실천 연구회‘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김은희 (경인교대 윤리교육과 교수, 여성주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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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성명이 적시된 집필자들 외에도 이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손과 마음을 더해주었다. 
무엇보다 심층 인터뷰와집단 설문조사에 성실하게 응해준 수강생들에게 깊은 감사를 전하고싶다. 이들의 회상과 보고 덕분에 페미니즘 교육의 한 역사적 장소, 장춘익 교수의 20년 페미니즘 강의실이 특별한 여성주의 페다고지의 현장으로 객관화될 수 있었다. 

곰출판의 심경보 대표는 그 자신이 이 수업의 수강생으로서 이 책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고 연구회의 출간 제의에 적극 응했다.
무엇보다 이 책의 대상이자 출발점인 장춘익 교수에게 깊이 감사한다.
 그는 제도권에 안착한 남성 전임교수로서 그 어떤 외부적 의무와 필요의 조건도 없이 

20년간 <여성주의철학> 교육을 실천함으로써, 
페미니즘이 성별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과 세계관의 문제라는 것을 분명히 증명해주었다. 

교수자 스스로 학생들과 실존적 존중의 관계에 들어섬으로써, 학생들이 ‘비난받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밝히고 소통할 수 있었던 그의 페미니즘 강의실에서 학생들은 성차에 대한 관습적 편견을 넘어서는 ‘발견‘의 기쁨을 누리고, 스스로 인식의 전환을 이뤄낼 수 있었다. 그의 존중과 발견의 페미니즘 강의실은 하나의교육 혁명이었다.

이제 이 책이 대학의 안과 밖에서 새로운 페미니즘 페다고지, 여성주의 교육실천에 관심이 있는 모든 독자들과 만나기를 우리는 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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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건 페미니스트인 Y에게

장춘익

페미니스트를 보면 짜증 난다는 사람이 많지. 문제는 남자만 그런게 아니라 여자들도 그렇다는 것이 아마 상당히 당혹스러울 거야.
페미니스트는 일종의 적대국의 국민인 것 같아. 어떤 사람이 적대국의 국민으로 분류되면 상대는 그에게서 그 사람의 개인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속성만 확인하면 되지. 그런 사람의 경우엔 이름을 부르지 않아. 집합명사로 표시하고 ‘그런 부류의 또 하나‘로 취급하면 되지. 굳이 이름을 부를 때는 대개 확인 사살이 필요할 때뿐이야. 보통은 성불평등 문제를 제기하는 여자를 보면, ‘또 하나의악악거리는, 짜증 나는 페미니스트로군‘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지.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은, 안타깝지만, 의외일 수는 없어. 장구하게

유지되어 온 권력과 문화에 도전하는데 어찌 개인의 이름이 불리기를 바랄 수 있겠어? 또 창검을 빼 들고 무시무시하게 달려들기보다는 작은 칼로 여기저기를 들쑤시는데, 짜증 나지 않겠어? 그리고 오래 가는 항의는 아무튼 짜증 나는 거야. 내가 잘 돌보고 싶은 아이도 자꾸 울면 짜증 나는데(의학상의 이상증세로 끊임없이 우는 아이를 평소 아이들에 애정이 많은 여성에게 폐쇄된 공간에서 돌보도록 하니까, 3일 정도 지나서 살해 충동을 느끼더라는 결과를 낸 실험도 있었지), 별로 동의해주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자꾸 하면 정말 짜증이 안 나겠어?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그런 반응에 대해 존중심을 가지라는 것은물론 아니야. 사람들의 짜증 내는 반응을 자꾸 접하면,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과도 자주 다투게 되면, 점점 자신이 없어지고 초라하게느껴질 수 있을 텐데, 그때 어쩌겠느냐는 이야기를 하자는 거야.
반복되는 항의가 사람을 초라하게 느끼도록 만든다는 것은 분명한것 같아. 항의는 내가, 우리가, 갖지 못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같은 항의가 오래 반복된다는 것은 그렇게 오랫동안 결핍의 상태에있다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항의 기간이 길어지면 저쪽은 짜증 나고 이쪽은 초라하고 비참한 거야.
이런 느낌은 인지상정이야. 인지상정이라고 하지만, 일단 그 느낌이 들기 시작하면 너무 기분이 좋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싶기 때문에, 어떤 대비를 해야 돼. 설마 네가 "불만은 나의 힘"
이라면서, 대립 자체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야. 역시 역사적소명의식이 너를 뒷받침하는 가장 큰 힘이겠지. 그러나 나는 그 이

야기는 접어두고 싶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좀 더 개인적인 문제야. 감히 조언자 역할을 해도 된다면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하나는 네가 세상에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보다 새로운것을 흡수하는 것이 더 많아야 한다는 것이야. 뿌리에서 흡수하는것보다 많은 수분을 방출하는 식물은 고사한다. 대기의 온도가 높을수록 더 많은 수분을 빨아들여야 하지. 항의할 줄 알아야 하지만,
나중에 자신이 쿨 것도 있어야 한다. 세상에 애정과 호기심을 가지고, 네 지식과 정서의 저장고를 듬뿍 채워두어라. 페미니즘이네주장의 설득력을 보증해주는 것이 아니라, 너의 지식이 너의 페미니즘에 설득력을 가져다주는 것이야. 페미니즘 아닌 다른 영역에서도지적으로 신뢰받을 수 있어야 사람들이 네 페미니즘도 신뢰한단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기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네가 너의 기쁨을 찾는다고 해서 항의의 진실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란다. 오히려 너의 기쁨과 생동성만큼 너의 주장에 전반적인 설득력을 가져다주는 것도 없단다.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내놓거나 혹은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보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에 다른 사람들이 호기심을 갖도록 해라. 그렇게 하려면 너에게 어떤 즐거움이 있어야 한단다. 종교 수행자가 괴로운 표정만 짓고 있으면 사람들이 호기심을가질 수 있겠니? 다 버리고도 잔잔한 미소를 짓는 그런 ‘다름‘에 비로소 사람들이 압도되는 것이지. 페미니스트면서 나름대로 멋지고행복하게 살아라.

P.S. 내가 이 글을 쓸 때가 한여름이다. 네가 해충박멸에 너무 진을빼지 말고 익종보호에 더 힘쓰기를 바란다. 그게 더 현명한 농법이다. 아, 내 이름의 ‘익‘ 자는 다른 ‘익‘ 자이니 나를 보호할 필요는없단다. 
그리고 너를 어쨌건 페미니스트‘라고 부른 것은 네가 페미니스트라는 명칭을 반쯤 불편한 심정으로, 그러나 피하지는 않겠다는 심정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서였다.


장춘익 교수는 2000년대 초반 개인 홈페이지 ‘날개통신‘을 운영했다. 학생들과의 다양한 대회를 위해 운명된 이 개인 홈페이지에 그는 종종 에세이를 연재했고, 많은 학생 독자들이 그 에세이를 읽었다. 이 글은 2003년 게재되어, 당시 여러 한림대 동아리와 커뮤니티에 공유되었다.

평등에 대한 논쟁은 (・・・) 그동안 페미니스트 저작들에서 평등-차이논쟁으로 언급되어 왔으며 (...) 해결하기가 더욱 어렵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것은 여성들이 남성과 똑같아지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가, 아니면 남성들과 차이가 있다고 인정해야 하는가에 관한 논쟁이다. ()

만일 여성들이 남성과 평등하다고 주장한다면, 여성들은 어떤 남성과 평등하다고 주장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떤 문제에 있어서 평등을 주장해야 하는가? 여성들은 기호의 평등을 주장해야 하는가? 
그리고 만일 여성들이 차이를 인정하고자 한다면, 그러면 이런 차이들은 자연적, 생물학적인 차이인가, 아니면 특별한 사회적, 경제적 조건의 결과의 차이인가? 이러한 것들은 평등- 차이 논쟁이 불러일으키는 많은 문제들 가운데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 
그리고 이런 논쟁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요인은 남성과 여성의 차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여성들에 대한 차별과 완전한 사회적, 정치적 시민권에서 여성을 배제하는것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어왔다는 사실이다. (...)

 그렇다면 성차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페미니스트들은 역사적으로 남녀 간의 자연적 차이가 가정되어 온 방식에 초점을 맞추고 이러한 차이가 상이한 사회와 문명 속에서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방식을 분석해왔다. (...)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섹스의 사회적 구성을강조할 필요성 때문에 젠더라는 용어를 거부해 왔다. (...) 예를 들어,
모니크 위티그(Monique Wittigs)는 섹스는 사회적 구성물들일 뿐이며 남성들과 여성들을 분리하는 것은 자연 또는 인간 생물학에 어떠한 근거도 두고 있지 않은 사회적 권력관계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

장한다. (제인 프리드먼, 「페미니즘 29~46쪽)보통 불리한 처지는 차이를 통해 정당화되었다.
차이에 차별을 연결 짓는다.
전략차이는 없다. 혹은 별로 없다 - 최소주의차이는 있다. 심지어 장점이다. 최대주의차이는 있더라도 중요하지 않다.
차이는 정말 있는가?
차이의 성격은 무엇인가?
차이는 자연적 차이(생물학적 차이) 인가, 사회문화적 차이인가?
Sex: male - femaleGender: masculine - feminineGender 개념의 유래, 장점- 남성성/여성성이 사회, 문화적 구성물이라면 달리 될 수도 있다.
Sex/Gender의 이분법의 약점Sex를 생물학적인 것으로 고정, 섹스도 젠더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Sex란 사실 (a,b,c,d, x) (a,b,c,d,...y) 인데 특정한 요소를 집어내어 그것이본질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장춘익 메모, 2011.03.10)프리드먼은 평등과 차이를 둘러싼 복잡한 페미니즘 이론적 논쟁의맥락을 부각하고자 한다. 그에 반해 장춘익의 교안은 문제적 경험,
즉 생물학적 성차에 사회문화적 차별을 결부시키고 차별을 자연적으로 조건화된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원인과 결과를 뒤집는 억압적데올로기 효과가 나타난다는 문제적 경험 상황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 문제적 상황을 해소할 페미니스트의 전략을 두 가지로 상상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평등과 차이를 여성(주의)의 본질적 실존 조건으로 해석해내기보다 역사적,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재생산되는 성차별을 해소하는 전략의 문제, 즉 페미니즘이 가부장사회의 여성차별에 맞서고 그 위계질서를 전복할 수 있는 두 가지 대응 방식으로 제시하는 셈이다. 이론을 인식된 ‘문제‘ 경험과 그것을 해소할 ‘답‘으로재구성하는 이런 방식은, 이론적 지식을 전달해야 할 완결된 정보가아니라 그 지식을 탄생시킨 원래의 경험적 문제 상황에 대해 묻고 답을 찾는 사유의 과정으로 되돌리는, 실천적 맥락으로의 재의미화라고 할 수 있다. 문제적 경험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실천적 맥락으로의 사유의 재의미화‘는 사실 좁은 의미의 덱스트 해석뿐 아니라 젠더화된 세계의 현실을 해석하는 데 필요한 ‘젠더 문해력 (gender literacy)‘
의 획득에 필수적이다. 사회문화적 젠더 상징기제들은 개인의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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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여겨왔기에 별로 가보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의 형님이 6.25전쟁 당시 행방불명이 된 지 55년 동안 아무 소식이 없어 죽은 줄만 알고 지냈더니 재작년 북한에 살아있다고 이산가족 생사의뢰서를 보내왔었다. 그러나하루속히 만날 줄 알았던 이산가족 상봉은 아직까지 만나지 못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형님이 사시는 북한을 방문해서 무슨소식이나 들을까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가보고 싶어 이 행사에 참여한다.
6월 28일장맛비가 내리는 날 김포공항에서 아시아나 항공인줄 알고 탑승하니 북한의고려항공이다. 탑승하자마자 기내에서 ‘반갑습니다‘라는 북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기분이 어쩐지 이상하고 바짝 긴장이 된다.
비행기가 김포공항을 이륙하여 평양공항에 착륙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1시간이다. 지리적으로 너무나 가까운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길이 막혀있었던그동안 마음의 거리는 너무 멀고도 멀었다. 내가 이렇게 쉽고 빠르게 건너가볼 수 있으리라고는 이전까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평양공항에 대한첫 느낌은 과연 이곳이 북한의 수도인 국제공항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적막했다. 비행기도 몇 대뿐이고, 그 날 손님은우리밖에 없는 모양이다.
긴장했던 것보다는 훨씬 간단한 입국 절차를 마치고 마중 나온 버스에 분승하여 숙소인 양각도호텔로 향했다. 양각도호텔은 1995년 완공된 47층의 객실 1001 실의 특급호텔이다. 양각도는 대동강에 있는 섬으로, 섬의 모양이 양의 뿔처럼 생겼다고 양각도라고 불린다고 한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평양

외곽은 모내기가 끝난 농촌의 풍경이었다. 저 멀리 삼삼오오 논에서 일하는사람들과, 도로에는 가끔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보따리 짐을 매고 걸어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시내에 들어오면서 제일 먼저 찾았던 것은 바로 매대다. 우리 식으로 하면 정부의 허가를 받고 영업을 하는 노점상이라고할 수 있다. 매대에서는 음료수와 간단한 간식을 팔고 있는 듯했다. 평양의거리 풍경은 차량 통행이 적고, 신호등이 없으며 자전거를 많이 타고 간혹 오토바이도 보이고 많은 사람들이 걸어 다닌다. 교통수단은 지하철 궤도전차무궤도전차 시내버스 택시인데 택시는 눈에 띄지 않는다.
평양에 제일 먼저 내린 곳이 만수대다. 만수대는 김일성 동상이 있는 곳이다.
뭐 평양에 방문하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주석님(?)께 인사하는 것인가? 북측사람들은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바로 김일성 동상 참배란다. 우리 일행이 갔을 때, 결혼식을 마친 신혼부부가 3쌍이나 주석님께 인사를 드리러 왔다.
양각도호텔에 여장을 풀고 점심식사다. 김포에서 시둘러 나오느라 아침식사를 대충 했더니 늦은 점심이라 몹시 배가 고프다. 그런데 밥공기에 밥이 너무적어서 배가 안 찬다. 북한에서의 첫 식사라서 아마도 북한주민들이 굶느라고 이렇게 적게 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더 달라 소리도 못하고 있는데 접대원이 와서 빈 공기를 보고 밥 더 드릴까요? 한다. 미안해서 반공기만 더 주셔요 했더니 큰 그릇에 한 그릇들고 온다.
공식 일정대로 만경대고향집을 향했다. 김일성주석 생가를 보존한 것으로평양 방문에서 북이 꼭 보여 주는 곳이다. 호텔에 오기 전에 김일성 동상 앞에서 안내자는 설명을 하면서 계속 ‘위대한 수령님‘을 말끝마다 붙인다. 평

양시내의 큰 건물에는 김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대형 사진이나 붉은현수막이나 플래카드가 수없이 많다. 만경대고향집에서 해설하는 사람들은또 얼마나 위대한 수령님을 찾을까! 나는 우리 시각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고 북한의 입장에서 바라봐야 이해할 것 같다. 만경대는 김일성 주석의 생가이며 정치가 베어나 만경대에 오르면 일만 가지 경치를 본다고 만경대라고한다.
평양 시내는 상당히 깨끗해 보였다. 도시 모습도 계획도시답게 잘 정돈되어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길거리의 사람들 모습도 패 활기차 보였다. 버스에서손을 흔들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든다. 엄마의 손을 잡고걸어가던 한 아이는 내가 탄 버스를 보고 손을 흔들면서 웃는다. 차에서 내리저 평양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그렇게 만경대고향집을 둘러보고 우리는 만경대학생소년궁전으로 향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우리에게 잘 알려진 평양 어린이들의 공연을 보이주는 곳이다. 그곳에서 예체능에 재능 있는 어린 학생들을 집중식으로 교육시키는 곳이다. 건물 모양은 어머니가 아이들을 품에 안는 형상으로 만들이겼다고 한다. 그리고 건물 앞에 있는 말은 힘차게 달려오는 어린이들링상화한 것이다. 어린이들이 방과 후 체육 과학 예술 등 다양한 기능을 익히고 숙달된 학생들은 공연장에서 발표를 한다. 우리는 어린이들이 열심히습하는 연습실을 견학했다. 정말 아이들이 열심히 수련하고 있었다. 관광객들의 관람에 익숙해서인지 반 친구들은 우리의 방문에 개의치 않고 자기일에만 열중한다. 사진을 찍든지 말든지, 뭔 말을 하든지 말든지 질문을 하던단답형으로 대답만 할 뿐이다. 고사리 손으로 바둑을 두는 모습이 귀엽다.

2015년 5월 창원에서 만난 문형배 판사.
생각하기 때문이다. 철학도, 문학도, 역사도, 사회도, 심리도, 예술도 다 들어 있다. 채현국 선생의 인터뷰를 보니 남은인생을 어떻게 살까 생각이 많아진다.
이런 왕성한 책읽기를 눈여겨 보던진주문고 여태훈 사장이 2019년 3월7일 그를 초청해 ‘문학 속 재판‘이라는 주제로 강연회를 열었다. 당시 문형배 부산고법 수석부장판사는자신이 책을 많이 읽는 이유에 대해 "무지, 무경험, 무소신 등 3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판사로 살아온 그의 궤적이 그냥머리 좋고 공부 잘한 여느 판사와 달랐던 것은 이처럼 늘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채우려 노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는 앞서 김장하선생이 "내가 배운 게 없으니 책이라도 읽을 수밖에"라고 대답한 것과 상통한다.
그동안 언론은 그가 ‘우리법연구회‘ 회장을 했다는 이유로 ‘진보성향의 판사‘라고 많이 보도했지만, 내가 볼 때 그는 진보·보수를 떠나지극히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김장하 선생의 삶이 그러했듯이 편향적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에겐 상식과 합리마저 진보좌파로 보였던 것이다.
그가 2011년 2월 창원지법 진주지원장으로 부임했을 때의 일이다.
하동 출신으로 진주 대아고등학교를 나온 그가 진주를 비롯한 서부

♡♡♡참 고맙습니다~ 선생님♡♡♡"
이렇게 문형배 판사의 눈물로 시작된 행사는 모든 사람의 행복한 웃음으로마무리됐다.
문재판관은 경남권에서 오랫동안 판사로 재직했고, 나도 기자로서 그를 주목한 기간이 길었다. 앞에서도 잠시 등장했던 그 김훤주기자가 법원 출입을 할 때 그에 대한 기사를 많이 썼고, 나에게도 많은이야기를 해줬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형배에 대한 이야기를 좀 길게쓰는 걸 양해해주길 바란다. 그만큼 오래 봐 왔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그의 이력을 나열하려는 건 아니다. 그가 살아온 이력과 주요 판결은 이미 위키백과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그걸 참고하면 된다.
내가 보기에 문 재판관은 태도나 말투, 자세 등에서 느껴지는 풍모가 김장하 선생과 많이 닮았다. 늘 책을 가까이하고 자신의 부족함을채우려 하는 모습도 같다. 다만 그는 선생과 달리 읽은 책에 대한 짧은 독후감을 블로그(https://favor15.tistory.com)에 올리는데, 2006년부터 지금까지 쓴 독후감이 1330여 편에 이른다. 헌법재판관이 된 후에도매월 4~5권의 책을 읽고 블로그에 올리고 있다. 2015년 5월 그를만나 저녁식사를 한 후 『풍운아 채현국』을 선물했는데, 며칠 후 이 책독후감도 올라왔다. 그의 독후감은 개괄발췌 -소감으로 구성되는데,
다음은 마지막 소감 부분이다.
개인적으로 자서전, 전기를 좋아한다. 그 속에 모든 장르가 다 들어 있다고

스른 그가 말을 이었다.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 사회에 갚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이 사회에 조금이라도 기여한 것이 있다면... (다시 청중 박수 있다면, 그 말씀을잊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어 강동욱 경남문화예술회관 관장이 나왔다. "선생님은 진주오광대 복원과 진주탈춤한마당, 진주민예총 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셨고, 극단현장에도전세금 3000만 원을 선뜻 내주셔서 지금의 현상아트홀이 있게 됐습니다."
문판사와 강관장이 말한 ‘선생님‘은 김장하(75) 남성문화재단 이사장이다.
진주 남성당한약방 대표 한약업사이기도 하다.
16일 오후 7시 경남과학기술대 백주년기념관 아트홀에는 김장하 이사장게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받았거나 평소 그를 흠모해오던 사람들 120여 명이알음알음으로 모였다. 사전에 전혀 공개되지 않은 모임이었다. 이날은 김장하이사장의 생일이었다.
행사를 준비해온 홍창신 전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은 "되돌아보면 우리는 한 번도 그분에게 제대로 고마움을 표한 적이 없다. 더 늦기 전에 그이와따뜻한 시간을 갖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어 이자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워낙 그 어른이 낯을 드러내거나 공치사를 싫어하시는 분이라 미리 알게 되면 못하게 할 게 뻔해서 비밀리에 자리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실제 이날 참석자들은 모두 개별적으로 은밀히연락을 받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 시각 김장하 이사장은 전혀 이 행사를 모른 채 가족과 저녁을 먹고 있었다. 식사 후 사전에 주최측과 말을 맞춘 아들이 "좋은 공연이 있다"며 행사장

으로 아버지를 이끌었다.
오후 8시 20분 김 이사장이 가족과 함께 행사장에 들어서자 큰 박수가 쏟아졌다. 무대 앞 벽에는 ‘김장하 선생님 고맙습니다‘라고 적힌 펼침막이 내리왔다. 이어 생일축하 케이크가 나왔고, 참석자들은 국가를 합창했다.
영상으로 ‘선생님이 살아온 길‘을 관람한 참석자들은 노래패 맥박과 큰들의축하공연과 전지원 양의 판소리 등을 함께 즐겼다.
이어 사회자인 윤성효 오마이뉴스 기자가 김 이사장에게 인사말을 청했다.
그가 무대에 오르자 참석자들은 일제히 "선생님, 고맙습니다"며 허리 숙여인사했다. 무대 옆쪽에 있던 사람들은 큰절을 올렸다.
"아직도 얼떨떨하다"고 말문을 연 김 이사장은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을 많이 했지만 아직도 부끄러운 게 많다"며 "앞으로남은 세월은 정말 부끄럽지 않게 살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참석자들은 놀이패 큰들과 함께 노래 <만남>을 합창하면서 행사를 마무리했다. 큰들 단원들은 노래가 진행되는 동안 스케치북에 쓴 여러 카드를 대목마다 펼쳐 보였다.
"선생님이 걸어오신 그 길, 저희도 따라 걷겠습니다."
"돈은 모아두면 똥이 된다."
"똥이 거름 되어 꽃이 피었습니다."
"여기 진주에 꽃이 피었습니다."
"진주사람 웃음꽃이 피었어요."
"선생님이 계셔 든든합니다."
"선생님 늘 건강하십시오."

경남의 재판을 관할하는 사법기관장으로 돌아왔으니 금의환향還鄕)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부임 후 김장하 선생에게 식사 대접을 하고자 했으나 거절당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도 블로그에 올렸는데, 삶을 바꾼 만남』(정민지음, 문학동네)이라는 책 독후감 마지막 소감 부분에 이렇게 썼다.
나에게도 이런 스승이 있다. 고등학교 1학년때 김장하 선생을 만난 이래 지금까지 한 번도 선생의 가르침을 잊은 적이 없다. 그분은 나에게 대학교까지장학금을 주셨지만 내가 받은 것은 가르침이었다. (・・・중략...) 진주지원장으로 부임했으니 식사 한번 대접하겠다고 하여도 공직자와 식사하는 게 불편하다며 거절하는 분. 내 삶이 헛되지 않다면 그 이유는 선생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즉 김장하 선생은 비록 자신의 장학생이더라도 직접 해당 지역사법권을 관할하는 자리에 있는 동안 사적 만남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문형배 재판관은 결국 진주지원장 임무를 마치고 진주를 떠날 때에야 겨우 밥 한 그릇을 대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선순환이 되면 공동체가 아름다워진다‘라는 블로그 글 아래에추기로 올라와 있다.
2012년 2월 인사발령이 나서 진주를 떠나기 전 식사 한 번 대접하겠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선생님은 또 거절하였습니다. 언제 다시 뵙겠느냐고 식사 한白居

◆헌법재판소재판관후보자 문형배(...전략) 저는 1965년 경남 하동군에서 가난한 농부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태어났습니다. 낡은 교복과 교과서일망정 물려받을 친척이 있어 중학교를졸업할 수 있었고, 고등학교 2학년 때는 독지가인 김장하 선생을 만나 대학교 4학년까지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학업을 무사히 마칠 수있었고 사법시험에도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김장하 선생은 한약업사로서 번 돈으로 명신고등학교를 건립하여 경상남도에 기증하였고 수백 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였으며,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진주오광대복원사업, 경상대학교 남명관 건립 등 좋은 일을 많이 하였습니다.
선생은 제게 자유에 기초하여 부를 쌓고 평등을 추구하여 불합리한 차별을없애며, 박애로 공동체를 튼튼히 연결하는 것이 가능한 곳이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몸소 깨우쳐 주셨습니다.
제가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인사하러 간 자리에서 ‘내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 사회의 것을 너에게 주었으니 갚으려거든 내가 아니라 이 사회에갚아라‘고 하신 신생의 말씀을 서는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법관의 길을 걸어온 지난 27년 동안 저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대한민국헌법의 숭고한 의지가 우리 사회에서 올바로 관철되는 길을 찾는 데 전력을 다하였습니다. 그것만이 선생의 가르침대로 제가 우리 사회에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는 길이라 여기면서 살아왔습니다. 제가 헌법재판관에 임명되더라도 지금까지 간직해 온 저의 조심은 언제나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말씀드린 것이기에, 널리 해량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디 우리 명신과 인연을 맺은 모든 분들의 앞날에 더 많은 성공과 결실이 있기를 기원드리면서 이만 떠나는 인사말을 마칠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1991년 8월 17일학교법인 남성학숙 이사장 김장하

퇴임 인사말 중 우선 그가 학교를 설립한 이유와 헌납의 이유는 이문장에 압축돼 있다.
내가 배우지 못했던 원인이 오직 가난이었다면, 그 억울함을 다른 나의 후배들이 가져서는 안 되겠다 하는 것이고, 그리고 한약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돈을 번다면 그것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겠기에 그것은 내 자신을 위해 쓰여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요건을 충족시키는 가장 좋은 일이 곧 장학 사업이 되었던것이고, 또 학교의 설립이었습니다. 그런 사정을 전후로 해서 본 명신고등학교는 탄생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유에서 설립된 것이 이 학교이면.
본질적으로 이 학교는 제 개인의 것일 수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본교 설립의 모든 재원이 세상의 아픈 이들에게서 나온 이상, 이것은 당연히 공공의 것이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이 본인의 입장인 것입니다.
그래서 "공공의 것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공립화요, 그

것이 국가 헌납이라는 말이다. 그 다음에 보다 현실적인 국가 기증이유가 나오는데, 개인의 능력은 한계가 있는 것"이고 "제가 계속 이학교를 움켜쥐고, 지원을 나름대로 해 나간다 하더라도 저의 생전이나 또는 사후에 저와 또는 저를 둘러싼 제반 환경이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는 말이다.
즉,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자신의 모든 재산을 쏟아부어 왔지만 세상일이란 알 수 없는 법.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되거나 죽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그런 뜻으로 해석된다.
이와 관련 여태전 (1961~) 전 상주중학교 교장이 2022년 2월 4일김장하 선생에게 세배를 드리고 난 후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 있다. 진주문고 여태훈 대표가 "명신고 이사장으로 계속 계시면서 훌륭한 선생님들 든든한 윤이 되어주셨으면 좋았을텐데, 어찌 그리 쉽게 공립으로 전환해버렸습니까?"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내가 그때만 해도 한약방으로 돈도 많이 벌어 학교에 큰 도움이되었을지 몰라도, 나중에 나이들이 그럴 형편이 못되면 괜히 사사로운 욕심이 생길까 두려웠던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나도 못난 사학 이사장이 되어 선생님들의 일에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려 들 거고, 그렇게 되면 처음 내가 학교를 세우려고 했던 첫마음을 잃게 될까봐 두려웠던 거요. 교육이 사업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어요. 사업을 하려면다른 일로 해야지, 학교를 갖고 사업하는 마음으로 하면 큰일 나는니다. 그래서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그냥 국가가 맡아 달라고 내어놓은 겁니다.*

해둔게 있었다. 길지만 기록차원에서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이글은 북한에 대해 객관적이면서도 때로는 비판적으로, 또는 동포에대한 애정어린 시선으로 4박 5일간 보고 들은 것들을 담담히 담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참 잘 쓴 글이다.

김장하의 북한 방문기

나의 북한 방문은 어렵사리 이루어졌다. 몇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모두 성사되지 않다가 이번에는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에서 평양 참관 행사에 참여하였다.
나는 6.25전쟁을 겪은 세대이고 반공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평소 북한은 전정을 좋아하는 무서운 나라라는 인식이 들어 우리겨레이면서도 무서운 존재

로 여겨왔기에 별로 가보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의 형님이 6.25전쟁 당시 행방불명이 된 지 55년 동안 아무 소식이 없어 죽은 줄만 알고 지냈더니 재작년 북한에 살아있다고 이산가족 생사의뢰서를 보내왔었다. 그러나하루속히 만날 줄 알았던 이산가족 상봉은 아직까지 만나지 못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형님이 사시는 북한을 방문해서 무슨소식이나 들을까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가보고 싶어 이 행사에 참여한다.
6월 28일장맛비가 내리는 날 김포공항에서 아시아나 항공인줄 알고 탑승하니 북한의고려항공이다. 탑승하자마자 기내에서 ‘반갑습니다‘라는 북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기분이 어쩐지 이상하고 바짝 긴장이 된다.
비행기가 김포공항을 이륙하여 평양공항에 착륙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1시간이다. 지리적으로 너무나 가까운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길이 막혀있었던그동안 마음의 거리는 너무 멀고도 멀었다. 내가 이렇게 쉽고 빠르게 건너가볼 수 있으리라고는 이전까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평양공항에 대한첫 느낌은 과연 이곳이 북한의 수도인 국제공항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적막했다. 비행기도 몇 대뿐이고, 그 날 손님은우리밖에 없는 모양이다.
긴장했던 것보다는 훨씬 간단한 입국 절차를 마치고 마중 나온 버스에 분승하여 숙소인 양각도호텔로 향했다. 양각도호텔은 1995년 완공된 47층의 객실 1001실의 특급호텔이다. 양각도는 대동강에 있는 섬으로, 섬의 모양이 양의 뿔처럼 생겼다고 양각도라고 불린다고 한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평양

외곽은 모내기가 끝난 농촌의 풍경이었다. 저 멀리 삼삼오오 논에서 일하는사람들과, 도로에는 가끔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보따리 짐을 매고 걸어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시내에 들어오면서 제일 먼저 찾았던 것은 바로 매대다. 우리 식으로 하면 정부의 허가를 받고 영업을 하는 노점상이라고할 수 있다. 매대에서는 음료수와 간단한 간식을 팔고 있는 듯했다. 평양의거리 풍경은 차량 통행이 적고, 신호등이 없으며 자전거를 많이 타고 간혹 오토바이도 보이고 많은 사람들이 걸어 다닌다. 교통수단은 지하철 궤도전차무궤도전차 시내버스 택시인데 택시는 눈에 띄지 않는다.
평양에 제일 먼저 내린 곳이 만수대다. 만수대는 김일성동상이 있는 곳이다.
뒤 평양에 방문하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주석님(?)께 인사하는 것인가? 북측사람들은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바로 김일성 동상 참배란다. 우리 일행이 갔을 때, 결혼식을 마친 신혼부부가 3쌍이나 주석님께 인사를 드리러 왔다.
양각도호텔에 여장을 풀고 점심식사다. 김포에서 서둘러 나오느라 아침식사를 대충 했더니 늦은 점심이라 몹시 배가 고프다. 그런데 밥공기에 밥이 너무적어서 배가 안 찬다. 북한에서의 첫 식사라서 아마도 북한주민들이 굶느라고 이렇게 적게 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더 달라 소리도 못하고 있는데 접대원이 와시 빈 공기를 보고 밥 더 드릴까요? 한다. 미안해서 반공기만 더 주셔요 했더니 큰 그릇에 한 그릇 들고 온다.
공식 일정대로 만경대고향집을 향했다. 김일성주석 생가를 보존한 것으로평양 방문에서 북이 꼭 보여 주는 곳이다. 호텔에 오기 전에 김일성 동상 앞에서 안내자는 실명을 하면서 계속 ‘위대한 수령님‘을 말끝마다 붙인다. 평

양시내의 큰 건물에는 김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대형 사진이나 붉은현수막이나 플래카드가 수없이 많다. 만경대고향집에서 해설하는 사람들은또 얼마나 ‘위대한 수령님을 찾을까! 나는 우리 시각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고 북한의 입장에서 바라봐야 이해할 것 같다. 만경대는 김일성 주석의 생가이며 정치가 빼어나 만경대에 오르면 일만 가지 경치를 본다고 만경대라고한다.
평양 시내는 상당히 깨끗해 보였다. 도시 모습도 계획도시답게 잘 정돈되어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길거리의 사람들 모습도 돼 활기차 보였다. 버스에서손을 흔들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든다. 엄마의 손을 잡고걸어가던 한 아이는 내가 탄 버스를 보고 손을 흔들면서 웃는다. 차에서 내리저 평양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그렇게 만경대고향집을 둘러보고 우리는 반경대학생소년궁전으로 향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우리에게 잘 알려진 평양 어린이들의 공연을 보여주는 곳이다. 그곳에서 예체능에 재능 있는 어린 학생들을 집중적으로 교육시키는 곳이다. 건물 모양은 어머니가 아이들을 품에 안는 형상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건물 앞에 있는 말은 힘차게 달려오는 어린이들을상화한 것이다. 어린이들이 방과 후 체육 과학 예술 등 다양한 기능을 익히고 숙달된 학생들은 공연장에서 발표를 한다. 우리는 어린이들이 열심히습하는 연습실을 견학했다. 정말 아이들이 열심히 수련하고 있었다. 관광객들의 관람에 익숙해서인지 예쁜 친구들은 우리의 방문에 개의치 않고 자기일에만 열중한다. 사진을 찍든지 말든지 뭔 말을 하든지 말든지 질문을 하던단답형으로 대답만 할 뿐이다. 고사리 손으로 바둑을 두는 모습이 귀엽다

연습실을 관람한 후 공연장으로 향했다. 그날 그곳에는 총린 학생들도 와 있었다. 그 학생들과 우리 일행으로 공연장은 꽉 들어찼다. 그리고 어린 아이들의 공연이 시작됐다. 독창 중창 춤 국악 등 그들의 공연에 감탄을 연발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들은 아이들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단지 기술자일뿐 창의력이 풍부한 예술가가 되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북측의 교육이나 남측의 교육이나 창의력을 키워주는 교육은 아니다. 남과 북이 세계 어떤 민족과 국가보다 교육열이 높다 하지만, 교육 내용을 보면 지금남과 북에서는 창의력이 부족한 기술자들만 양성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평양방문의 첫날 일정도 끝났다. 다음날 백두산 관람 일정을 기대하면서6월 29일아침 7시에 평양공항을 고려항공으로 출발하여 1시간 만인 8시에 양강도 삼지연 비행장에 도착하여 대기한 버스로 백두산으로 향함. 삼지연은 1500고지의 백두고원(개마고원)으로 광활한 평지에 수목이 울창하여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밀림지대를 도로를 뚫어 2시간을 달려도 평지인 밀림이다. 해발2000m 이상 오르니 지리산과 한라산을 볼 때와는 딴판으로 나무가 한 그루도 없는 모래와 자갈로 이루어진 산등성이를 보고 놀랐다. 백두산은 해발고도약 2000m가수목한계선이 되어 이보다 높은 지대는 짧은 여름철에 풀만자라는 산악 툰드라 지대에 속해 주빙하 지대이다. 천지 주변의 그늘진 골짜기에는 가장 더운 달인 7월에도 눈이 남아 있고, 땅속 0.8~1m 깊이 이하에영구동토층이 있어 여름에도 녹지 않는다.
삼지연을 출발한 지 3시간만인 11시에 백두산 향도역에 도착하여 걸어서 상

군봉으로 오르다. 2750m 아~ 백두산! 꿈에도 그리던 백두산 민족의 영산 그러나 안개가 자욱하여 지척이 보이지 않으니 산이 높은지 낮은지 구분이 안된다. 천지의 속살을 쉽게 내보이지도 않는다. 한민족에게 백두산은 민족과국가의 발상지이며, 생명력 있는 산으로서 민족의 성산(山)·신산(山)로 숭앙되어왔다. 고조선 이래 부여·고구려·발해 등이 백두산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백두산 주변의 여진족·만주족 등도 그들 민족의 성산으로 숭앙하여 역사화.전설화 · 신격화했다. 풍수지리에서는 지세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여 이해하기도 하는데 백두산을 ‘기(氣)가 결집된 머리로, 낭림-태백-소백산맥을 백두산의 기가 전달되는 동백산맥으로서 백두대간(白頭로 인식했다. 백두산은 산정이 눈이나 백색의 부석)으로 4계절 희게 보여서 희다는 뜻의 ‘백‘자를 취하여 이름한 것으로 보인다. 백두산의 중앙부에는 천지가 있으며, 그 주변에는 2중 화산의 외륜산에 해당하는 해발고도 2500m 이상의 봉우리 16개가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데 모두 회백색의 부석으로 덮여 있다. 이 가운데 6개 봉우리는 북한에 속하며(최고봉 2750m의 장군봉), 7개는 중국에 속하고(최고봉 2741m의 백암봉), 3개의 봉우리는 국경에 걸쳐 있다. 따라서 천지 수면에서 장군봉 꼭대기까지는 600m의 비고로 핵두산 중앙부는 넓고 파란 호수 주변에 비고 약 500mm의 회백색 산봉우리들이둥그렇게 둘러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안개 걷히기를 무려 40분이나 기다려서야 기다린 보람으로 안개가 걷힌다.
와하는 함성과 함께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가 일시에 짝거린다. 이제야천지가 발 아래 파랗게 보이고 주변의 웅장한 바위산이 보이고 시야가 멀리보이면서 백두산의 높이를 대략이나마 가늠해 보기도 한다. 언제 다시 옮기

약도 못하고 아쉬움을 남긴 채 하산길에 오르다.
내가 알기로는 압록강이나 두만강은 천지에서 풀이 넘쳐흘리 폭포를 이루어강의 기원이 되는 줄 알았더니 산정에서 천지는 500m나 밑에 있어서 물이넘칠 수 없고 천지에서 스며 나오는 물이 거울을 이루고 골짜기로 모이면서압록강이나 두만강의 기원이 된다. 천지에서 물이 흐르는 곳은 만주로 흐르는 송화강을 이루어 흐른다. 예정보다 늦은 오후 7시에 삼지만 비행장을 출발 평양공항에 8시에 도착하다.
6월30일오늘은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 능을 참관한다. 왕능은 평양에서 25km지점에 있으며 고구려는 동명왕을 수호신으로 여겨 수도를 옮길 때마다 (졸본국내성 평양) 옮겨 왔고 장수왕 때 평양으로 이장을 했다고 한 이북은 강성대국의 표본을 고구려에서 찾으려고 동명왕능을 개척하고 숭앙하고 있다. 일제때 도굴되어 유물은 거의 없으며, 무덤 뒤로 신하들의 무덤도 배총으로 남아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왕능 앞 왼쪽에는 성공사寺)가 있으며동명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워졌다 함.
점심은 저 유명한 옥류관에서 냉면을 맛보았다. 한 그릇을 게눈 감추듯 비우접대원 아가씨가 빙그레 웃으며 한 그릇 더 할래요? 해서 한 그릇 더 먹었다. 이름난 냉면이라서 그런지 맛있었다. 한 그릇에 얼마냐고 물었더니 ‘유로라고 한다. 우리 논으로 5500원이니 북한 주민이 사 먹기엔 부담스러울 것같다. 옥류관은 내동강 기슭 옥류교 근처에 자리 잡고 있으며, 3개의 건물로이어져 있으며 좌석 수는 1500석이며 하루에 팔리는 냉면 숫자는 1만 그릇

군봉으로 오르다. 2750m 아~ 백두산! 꿈에도 그리던 백두산 민족의 영산 그러나 안개가 자욱하여 지척이 보이지 않으니 산이 높은지 낮은지 구분이 안된다. 천지의 속살을 쉽게 내보이지도 않는다. 한민족에게 백두산은 민족과국가의 발상지이며, 생명력 있는 산으로서 민족의 성산(聖山)·신산(로 숭앙되어왔다. 고조선 이래 부여·고구려·발해 등이 백두산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백두산 주변의 여진족·만주족 등도 그들 민족의 성산으로 숭앙하여 역사화.전설화. 신격화했다. 풍수지리에서는 지세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여 이해하기도 하는데 백두산을 ‘기(氣)가 결집된 머리로, 낭림-태백-소백산맥을 백두산의 기가 전달되는 등산맥으로서 백두대간(白頭大幹)으로 인식했다. 백두산은 산정이 눈이나 백색의 부석(石)으로 4계절 희게 보여서 희다는 뜻의 ‘백(白)자를 취하여 이름한 것으로 보인다. 백두산의 중앙부에는 천지가 있으며, 그 주변에는 2중 화산의 외륜산에 해당하는 해발고도 2500m 이상의 봉우리 16개가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데 모두 회백색의 부석으로 덮여 있다. 이 가운데 6개 봉우리는 북한에 속하며 (최고봉 2750m의 장군봉), 7개는 중국에 속하고(최고봉 2741m의 백암봉), 3개의 봉우리는 국경에 걸쳐 있다. 따라서 천지 수면에서 장군봉 꼭대기까지는 600m의 비고로, 백두산 중앙부는 넓고 파란 호수 주변에 비고 약 500m의 회백색 산봉우리들이둥그렇게 둘러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안개 걷히기를 무려 40분이나 기다려야 기다린 보람으로 안개가 걷힌다.
와하는 함성과 함께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가 일시에 째깍거린다. 이제야천지가 발 아래 파랗게 보이고 주변의 웅장한 바위산이 보이고 시야가 멀리보이면서 백두산의 높이를 대략이나마 가늠해 보기도 한다. 언제 다시 옮기

약도 못하고 아쉬움을 남긴 채 하산길에 오르다.
내가 알기로는 압록강이나 두만강은 천지에서 물이 넘쳐흘러 폭포를 이루어강의 기원이 되는 줄 알았더니 산정에서 천지는 500m나 밑에 있어서 물이넘칠 수 없고 천지에서 스며 나오는 물이 개울을 이루고 골짜기로 모이면서압록강이나 두만강의 기원이 된다. 천지에서 물이 흐르는 곳은 만주로 흐르는 송화강을 이루어 흐른다. 예정보다 늦은 오후 7시에 삼지연 비행장을 출발 평양공항에 8시에 도착하다.
6월 30일오늘은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 능을 참관한다. 왕능은 평양에서 25km지점에 있으며 고구려는 동명왕을 수호신으로 여겨 수도를 옮길 때마다 (졸본 국내성 평양) 옮겨 왔고 장수왕 때 평양으로 이장을 했다고 함. 이북은 강성대국의 표본을 고구려에서 찾으려고 동명왕능을 개축하고 숭앙하고 있다. 일제때 도굴되어 유물은 거의 없으며, 무덤 뒤로 신하들의 무덤도 배총으로 남아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됨. 왕능 앞 왼쪽에는 정릉사陵寺)가 있으며동명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워졌다 함.
점심은 저 유명한 옥류관에서 냉면을 맛보았다. 한 그릇을 게 눈 감추듯 비우니 접대원 아가씨가 빙그레 웃으며 한 그릇 더 할래요? 해서 한 그릇 더 먹었다. 이름난 냉면이라서 그런지 맛있었다. 한 그릇에 얼마냐고 물었더니 4유로라고 한다. 우리 돈으로 5500원이니 북한 주민이 사 먹기엔 부담스러울 것같다. 옥류관은 대동강 기슭 옥류교 근처에 자리 잡고 있으며, 3개의 건물로이어져 있으며 좌석 수는 1500석이며 하루에 팔리는 냉면 숫자는 1만 그릇

이라니 어안이 벙벙하다.
오후에는 대동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대동강을 돌아본다. 양각도 능라도를오르내리며 모란봉 을밀대는 먼눈으로 구경하다. 대동강에 설치한 2개의 거대한 분수는 지상 150m 까지 물줄기를 쏘아 올리고, 강에는 보트 놀이하는사람들이 수없이 나와 여유를 즐기며, 낚시하는 사람들도 많이 나와 한가로운 풍경이다. 일요일도 아닌데...
7월 1일오늘은 평양에서 150km 지점에 있는 묘향산을 관람한다. 묘향산에는 국제친선전람관을 참관하다. 이 전람관은 김 주석과 김 위원장이 외국의 국가원수나 친지들에게서 받은 선물을 한 데 모아 보관 전시하는 곳이다. 산의 지하를 파서 웅장한 대리석 건축물에 약 30만 점에 달하는 국보급 보물들이 보관된 곳으로 전쟁이나 폭격에도 견딜 견고한 전시장이었다. 수많은 전시실을모두 관람하려면 며칠이 걸릴지 모른다. 점심은 향산호텔에서 맛있게 먹고오후는 보현사 관람이다.
묘향산의 주봉인 비로봉은 1909m이며 기묘한 봉우리들과 기암절벽 깊은계곡, 기운차게 떨어지는 폭포수, 봄철의 꽃향기와 여름철의 짙은 녹음 가을의 눈부신 단풍 겨울의 설경 거기에 갖가지 새소리까지 어울려 뛰어난 절경을 이루고 있다. 서산대사께서 전국의 명산을 다 돌아보시고 금강산은 빼어나되 웅장하지 못하고(秀而不壯) 지리산은 웅장하되 빼어나지 못하며而不秀) 묘향산이 금강산의 빼어남과 지리산의 웅장함을 두루 갖췄다(亦秀)라고 하신 명산이라 한번 꼭 와보고 싶은 산이었다. 그러나 시간 관계상상

붕의 등산은 가보지 못하고 보현사를 들러본다. 보현사는 고려 때 창건한 절인데 이북에서 비교적 잘 보존된 사찰이다. 국보도 여러 점 있고 특히 서산대사가 수많은 제자들과 숭병을 이끌고 임진왜란의 국란에 뛰어들어 많은 전공을 세우고 말년에 보현사에서 생을 마치셨다. 제자들이 어찌 불제자로서사람을 죽이는 전쟁에 참여합니까? 라고 묻자 일사다생(一死多生)이면 즉한사람을 죽이고 여러 사람을 살린다면 계율에 어긋나지 않는다며 승병을 모으셨단다.
평양에서 묘향산으로 오고가는 청천강은 참으로 깨끗하고 아름답다. 자연환경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 고맙다. 그 옛날 살수에서 수나라 군사를 무찌르던 을지문덕장군의 함성소리가 들리는 듯. 그러나 낚시하는 주민들의 한가로움이 풍경화를 보는 듯 어울린다.
저녁에는 북측의 민화협에서 환송연회를 베풀다. 연회 후에는 내일은 헤어진다며 평양 체류 중에 3호차에 타고 며칠을 같이 여행하였다고 단합대회를 하자고 한다. 47층 회전식 스카이라운지에서 모였다. 각자 소개를 하는 자리에서내 차례에 진주에서 왔으며, 형님이 북한에 살고 있는 이산가족이라고 말하고평양에 살고 있을 것 같은데 아무 소식도 못 듣고 돌아가게 되어 마음이 무겁다고 말하자, 모두 안타까워하면서 분단의 아픔을 위로하면서 같이 동행했던김원중 가수는 즉석에서 노래를 2곡이나 불러 이별의 아픔을 달래준다.
이번 북한 방문은 그동안 궁금했던 북한의 실상을 접하기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농촌의 실상을 볼 기회가 없었고, 평양 주민들과의 접촉은 거의 불가능이었다. 그들이 보여 주는 것 외에는 볼 수가 없다. 만나는 상대는 안내원, 접대원 해설강사 그리고 호텔 종업원 정도이다. 그래서 북한 방문기를 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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