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에 대한 오해

서양에서 생겨난 ‘개인주의(individualism)‘라는 말이 이 땅에 들어온 지 한참의 세월이 흘렀지만 오늘날에도 그 의미를 명확히 아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여전히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 동급으로 취급받는 경우가 많으며, ‘개인주의자‘라고 하면 차갑고 냉정한, 자기밖에 모르는, 피도 눈물도 없는 계산적인 사람, 공동체와는 무관하게 개인의 권리와 이득만을 중시하는 사람을 지칭한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는 듯하다. 앞선 사례에서 ‘요즘 아이들이 개인주의가 강해서 그렇다‘는 지적만 봐도 그러하다. 그러나, 다시한번 말하지만 개인주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개인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이러하다. 개인의 존재와 가치가국가나 사회 등의 집단보다 우선이라 생각하며, 개인을 중심에*두고 모든 것을 규정하고 판단하는 사상, 사고방식, 가치관, 신념, 태도, 기질을 말한다. 간단히 말해 개인주의는 전체주의나집단주의와 대립되는 사상이다. 개인의 자기결정권을 중시하며,
개인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그 무엇보다 존중하는 태도이다.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 비슷하기는커녕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기주의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이라면, 

개인주의는 다른 사람들 역시 자신과 동등한 존재, 똑같은 욕구를 지니고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는 한 명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받아들인다. 

그러한 까닭으로 개인주의자는 많은 이들의 오해와는 다르게 오히려 공동체를 소중히 여긴다. 공동체를 개인의 대립항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오롯이 개인인 상태로 머물게 하는 일종의 보호막으로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는 집단과는 다르며, 개인주의자는 연대의 중요성을 안다. 
집단의 규칙이기에 억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한 명의 개인으로서다른 개인과 연대한다. 타인도 자신처럼 소중한 존재로 인식하고, 타인의 욕구와 감정 또한 자신의 것만큼 중요시 여긴다. 자신의 권리가 소중하기에 그만큼 타인의 권리도 존중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자주 혼동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주의자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개인주의자가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표명하기 때문에? 단체의 규칙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획일화와 집단주의를 거부하기때문에?

 나는 개인주의에 대한 사회 일반의 경계와 거부감은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가 얼마나 집단주의에 물들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징표라고 생각한다. 

사회 전반적으로 단체와 집단주의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개인을 개인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스스로를 개인주의자라 표방하는 사람들 또한

개인주의의 개념을 정확히 아는 경우가 드물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개인주의가 이기주의와 자주 혼용되는 지금의 상황인 것이다.


집단주의가 낳은 인류의 비극

몇 년 전 페이스북의 한 셀럽이 모 대학 익명 게시판에 올라온 게시물을 퍼 와 해당 대학의 교표와 함께 자신의 담벼락에 게재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것 좀 보십시오 여러분 어떻게 대학생들이이런 저급한 발언을 한단 말입니까. 졸업생이나 선배들은 대체무엇을 하고 있단 말입니까. 후배가 이런 발언을 한다면 뺨이라도 때리고 호통이라도 지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단 말입니까. 이 학생들을 혼내주기 위해서라도 많은 공유 바랍니다." 

해당게시물은 수천 건의 ‘좋아요‘와 수백 건의 공유를 기록했다.
당시 우연히 그 광경을 보게 된 나는 그대로 지나치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 

익명 게시판에 올라온 글 하나로 해당 학교 학생들 모두에게 책임을 묻는 게 맞느냐고. 편견과 선입견에 누구보다 저항하는 목소리를 내며, 차별에 반대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라고, 

•프롤로그_우리는 모두 개인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포함과 배제를 넘어 
개인으로서기분홍색이 좋을 수도 있잖아
여대는 ‘그러라고‘ 있는 곳이 아니다
정치하는 여성들
너 몇살이야?
검열하는 삶
티 내지 말라는 말
칭찬의 기술
명예남성을 위한 변명
그럼에도 여성에 대해 더 많이 말해야 한다
출산율을 높이고 싶으신가요?
김지영은 모든 여성의 대변인이 아니다
신문에 칼럼을 쓰는 저는 주부입니다
삶의 온도 차
버닝썬에 간 그녀는 위험한 일탈을 꿈꿨을까
‘괴물‘은 없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성교육이 필요하다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피해자
먹고사니즘의 이중잣대
낙태의 ‘남용‘이 가능해?
남성적인 작가, 여성적인 작가
누가 ‘책 읽는 여성‘에게 돌을 던지나
농담과 권력

혼자인 채로 함께 사는 법
어느 ‘악질‘ 택배기사와의 추억
헤밍웨이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플랫폼, 시스템, 그리고 개인
외면할 수 없는 지금 여기의 막장
삶이 지옥이 될 때
노키즈존을 말하기 전에 생각해야 할 것
학교에 가고 싶은 아이들
살아남은 아이들을 지켜주세요
방치된 아이들은 어머니 한 명만의 잘못인가어떤 위로는 더 큰 상처가 된다
그때도 틀렸고 지금도 틀렸다
아주 작은 배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개인주의 연습
그들은 왜 사이비 종교에 빠졌나
열정은 어떻게 착취의 원료가 되는가
우리는 왜 자꾸 흑백논리에 끌리는가
불행 배틀을 넘어서
그러니 위선자라‘도‘ 되어야 한다
가짜 뉴스 전성시대
내 안의 하이드
혐오의 자화상
•감사의 글_


일하는 여성으로서 힘든 세월을 겪어낸 이가 후배 여성들에게 육아휴직을 내지 못하도록 닦달을 하거나, 고된 시집살이를 겪었던 이가 훗날 더 혹독한 시집살이를 시키는 것은 모두 같은 사고방에서 출발한다. 기성 권력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그 안의 논리를 자신도 모르게 체화한 것이다.

‘성공하려면 포기해야 하는 것이 많은 거야.‘
‘여자가 성공하려면 남자보다 두 배는 노력해야 해.‘
‘아이도, 일도 포기 못하면서 성공하겠다고? 왜 그렇게 욕심이 많아?
‘시집살이가 힘들다고? 며느리로서 해야 할 ‘도리‘를 모르는구만!‘
‘여자의 삶은 불공평한 거야. 우리도 다 그렇게 살았어.‘
‘난 했는데 왜 넌 못해?‘

고통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마음이 이룬 변화

물론 언제나 그렇듯이 이해할 수 있다고 하여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힘들게 고생하고 참았다고 굳이 남들까지 그 힘든 길을 걸어가야 할 필요성은 아무리 고민해도 찾기 어렵다. 내가 아이를 키우면서 외로움과 불편을 겪었다고 하여, 남들까지 그런 경험을 해야 할 필요는 전혀 없다. 아이랑 집 안에 갇혀 지내다시피 하던 날들이 괴로웠으면, 그것을 남들에게도 똑같이 강요할것이 아니라 그를 타개할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더 우선이다. 여성 문제에 있어서도 해법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 때문인지, 요즘 들어서는 ‘고통의 대물림‘이 아닌
‘고통의 단절‘에 집중하는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리고살다 보면 가끔이지만 그런 사람들을 본다. 자신이 겪은 고통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잘못된 전통은 과감히 끊어낼 수 있는 사람들을 말이다.

이쯤에서 나의 시어머니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불편한 고부관계로 고민하는 이들이 많아 다소 면구스럽기는 하지만 나는 결혼한 지 10년 가까이 되도록 이렇다 할 시집살이 혹은 불편한 경험을 한 적이 거의 없다. 시부모님은 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다정하고 편안하게 대해주신다. 평소에는 물론이고 명절에도 나는 이렇다 할 음식을 하거나 전을 부치느라 힘들었던 적이 없다.

최근 한국이 세계 최저의 출산율을 기록한 것을 두고 여기저기서 말이 많다. 심지어 몇 해 전 한 국회의원은 인사청문회 자리에선 여성 후보자에게 "아직 결혼 안 했냐"고 물으면서 "본인의 출세도 좋지만 국가 발전에 기여하길 바란다"는 이야기를 던지기도했다. 

이런 사람들은 임신과 출산이 여성의 인생에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갖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싶다. 
어떤 사람들은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아이를 낳으면 돈을 많이 주자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물론 출산율에 경제적인 문제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할 수는 없으나 이 역시 본질과는 거리가 있는 이야기다.

임신과 출산은 경제적인 문제보다 아이를 낳은 이후 두 사람의 삶에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나는지와 관계가 깊다. 

대한민국에서 임신과 출산을 겪은 뒤 여성의 삶은 그 전과 완전하게 달라진다. 

남성 역시 변화를 겪지만 여성만큼은 아니다. 
양육의 부담은 여전히 여성이 더 많이 짊어지고 있고 경력을 구축해 나가는것 또한 쉽지 않다. 

물론 출산 이후 성공적으로 경력을 이어가는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의 영혼을 갈아 넣으면서 혹은 본인 스스로를 갈아 넣어 그 자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낳은 두 아이를 아주 사랑한다. 결혼 후 지금까지의 선택에 후회가 없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남편이 적극적으로 육아와 가사를 분담하고, 내 입장을 배려해준 덕분이다. 지원해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여러모로 어려웠을 것이다. 

언젠가 남성 지인이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페미니즘과관련하여 이런저런 말들이 많지만 본인은 하나도 공감이 가질 않는다고. 여성의 권익 신장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요즘은 ‘안전‘ 문제 빼고는 대부분 동등해지지 않았냐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페미니즘 이슈에 동의하기 어렵다고. 

하지만 ‘안전‘ 문제가 때로는 모든 것일 수도 있다. 
활동 시간과 지역에 ‘안전‘을 고려해야 하는 것, ‘안전‘ 때문에 행동에 늘 제약이 생긴다는 것, 하다못해 택시를 탈 때조차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 공중화장실조차 마음대로 이용하지 못하는 것.
노래방 화장실에서 한 사람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모르는남성의 손에 죽은 것이 그리 오래 전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 이후에도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하루 걸러 하루 꼴로, 아니 요즘같아선 거의 매일 벌어지고 있다. 얼마 전에는 스토커 남성에 의해 세 모녀가 무참하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렇게 온갖 사건 사고를 접하다 보면 여성으로서 오늘날까지 죽거나 다치지 않고 멀쩡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운이 좋았기때문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성비를 맞춘다는 함정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여성의 안전 문제를 어디까지나 부차

는 여성의 욕망만을 금기시한다. 욕망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여성은 극단적인 위험까지도 감수한 것으로 간주한다. 
무슨 일을 당해도 자업자득이라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섹스상대를 찾고 싶다는 것이 강간 당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원나잇을 하고 싶다는 것이 의식을 잃고, 강간을 당하고 사진이 찍혀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결국 버닝썬 사건은 초반에만 조금 이슈가 되다가 유야무야 묻히고 말았다. 
클럽을 운영하던 연예인은 군에 입대했고, 클럽은 이름을 바꿔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이 사건을 잊어버렸다.

지난해 봄, 코로나의 시작과 함께 수없이 공유되던 N번방 사건 관련기사를 읽는 동안 자연스럽게 버닝썬 사건이 겹쳐졌다.
처음에 사건의 피해자를 동정하던 이들, 가해자들을 극형에 처하라고 목소리를 높이던 이들은 피해자 대부분이 트위터에서 ‘일탈계‘로 통칭되는 계정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고 돌연 태도를 바꾼 경우가 많았다. 
참고로 ‘일탈계‘는 다소 노출 수위가 높은 사진(가슴골, 다리 등)을 올리며 성적 관심을 표현하는 계정을 뜻한다.

사람들은 이야기했다. 애초에 왜 표적이 될 만한 행동을 하느냐고, 피해자들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그러나 버닝썬 피해자들이 클럽에 갔다고 해서 강간을 당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었던 것처럼, 일탈계를 사용하던 N번방 사건의 피해자들 또한 그러한 일을당해도 좋다는 의미는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일탈계를 통해 표적이 된 피해자들의 최초의 동기는 알

지 못한다. 그 동기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계정 이름처럼 ‘일탈‘
그 자체가 목적이었을 수도 있고, 
낯선 것에 대한 관심, 금기된 것에 대한 욕망, 타인에 대한 갈망, 정서적·육체적 친밀함에 대한욕구 등이 뒤섞여 있었을 수도 있다. 

성욕, 호기심, 일탈과 모험과 도전에의 충동. 어쩌면 ‘욕망 당하고 싶은 욕망‘ 그 자체.

문제는 여성에게 있어 이와 같은 ‘일탈‘의 대가가 지나치게 크다는 것이다. 

똑같은 ‘일탈‘을 남성이 행했을 때와 결과가 달라지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는 것이다. ‘박사‘를 비롯한 N번방 운영자대부분은 일탈계 사용자들에게 피싱 링크를 보내 개인 정보를 빼냈고, 그것으로 그들을 협박하여 ‘성 노예‘로 만들었다고 한다.
시키는 대로 말을 듣지 않으면 개인 정보를 모두 유출시켜 버리겠다고. 가족들에게, 지인들에게, 친구들에게, 네가 트위터에서이런 사진 올리고 다녔다는 것, 남자들과 야한 이야기 나눈 것 모두 공개해버리겠다고. 

여성의 욕망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 피해자들 대부분은 욕망을 품었다는 사실이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너무도 무력하게 덫에 걸려들었을 것이다.

나 역시 클럽에 가본 경험이 있고, 중학생 때 피시통신에 접속하여 낯선 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즐거워했던 경험이 있다. 만약중학생 때의 내가 거기에서 아주 조금만 더 호기심을 느껴서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을 실제로 만났다면, 혹은 사진이라도 찍어올렸다면, 나의 신상정보를 노출하는 일이 생겼다면, 그때 나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클럽에 갔을 때 운이 나빠 약물이 든

술잔을 받아 마시는 일이 생겼더라면 어땠을까. 어쩌면 나 역시 이름은 달랐겠지만 N번방의 피해자, 혹은 버닝썬의 희생자가 될수 있었다. 

내가 원했던 것은 그저 작은 일탈, 낯선 이의 친절과관심, 그리고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뿐이었는데.

‘괴물‘은 없다

지난해 수면 위로 드러난 N번방 사건을 두고 자녀가 있는 많은이들이 말했다. 이런 세상에서 딸 키우기 무섭다고.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딸 키우는 것은 별로 무섭지 않다고.
딸들은 지금의 젊은 여성들처럼 키우면 된다. 좋은 것은 좋다고, 싫은 것은 싫다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여성이라는 이름에 따라오는 부당한 압력에 순응하지 않도록, 욕망을 드러내는 것을두려워하지 않도록. 설사 성폭력을 겪더라도 그것을 자신의 잘못이라 여기며 수치스러워하지 않도록. 누군가 밀쳐서 넘어지면 울지만 말고 일어나서 싸우도록.

딸과 아들 모두를 키우고 있는 내가 정작 무서워하고 있는 것은 아들을 어떻게 길러야 할지에 대한 부분이다. 
가끔 아이들을 데리고 아파트 놀이터에 가보면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 되는 남자아이들이 한두 명씩 있다. 
올해 아홉 살로 한창 또래 친구를 찾는 아들은 형아들이랑 놀 수 있게 해달라고 매번 조르는데 솔직히 말해 별로 탐탁스럽지 않다. 

큰 아이들이랑 어울릴 때마다 아들이 이상한 것을 배워 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때로 욕설일 때도 있고, 가끔은 이상한 ‘장난‘일 때도 있다.
일전에 아들보다 서너 살 많은 남자아이가 아들에게 바지를 벗고 성기를 보여주는 ‘장난‘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집에 온 아들이 갑자기 그런 모습을 보여 대체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놀이터에서 만난 형아가 알려주었다고 답해 깜짝 놀랐다. 아이에게서 아이에게로 전수되는 또래 문화의 무서움을 그때 알았다.

그날 바로 아들에게 그래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한참 동안해주었지만 밤에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정작 아들에게 그 ‘장난‘
을 알려준 그애에게는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해줄 것인지, 살면서 아들은 그런 ‘형아들‘을 얼마나 많이 만나게 될 것인지, 그 아이들은 자라서 어떤 어른이 될 것인지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과연 부모의 개입으로 아이들의 문화를 바꾸는 것이 기능은 할까. 부모가 알았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늦어버린 시점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두렵기까지 하다.

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는 일이다. "내자식이어도 성범죄는 용서 없다!" "내 자식은 N번방 같은 것과는 전혀 거리가 믿어요!"라는 지금의 단호한 마음이 정작 내가 아는사람이 실제 성범죄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다짐이란 그런 것이다. 분노란 그런 것이다. 마음과말은 그만큼 나약한 것이다. 인간이란 그런 것이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좋은 점

가해자가 ‘괴물‘이라고 생각할 때 솟아오르던 분노가 정작 가해자가 ‘괴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오히려 피해자를 향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성범죄가 밝혀진 후 "남자애들 다 그렇지 뭐" 혹은 "우리도 다 그러고 자랐어" 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역시 그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한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성폭력은 뿔 달린 괴물만이 아니라 아무나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성폭력은 ‘괴물‘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 착한 내 아이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누구나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때에야 더욱 강력한 책임이 따라오도록 만들 수 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의 소중한 아이들이 ‘실수‘한 위험을 조금이라도 더

줄일 수 있다.

우리는 음주운전을 하다 사람을 다치게 하면 어떤 일이 닥칠지 안다. 물론 강력한 규제가 있어도 잘못된 판단으로, 호기심으로, 혹은 한순간의 충동을 억누르지 못해 음주운전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런 경우 법에 의해 감옥에 가고,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고 손해 배상을 해야 하고, 직장을 잃거나 인생이 망가질 위험에 처하는 등 강한 책임을 지게 된다. 음주운전을 ‘실수‘라고 하여 받아주는 경우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설사 음주운전을 할수 있는 기회가 있거나 그럴 만한 충동이 들더라도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자제하면서 산다.

성폭력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누구나 저지를 수 있다는, 우리 모두와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한 후 거기 따르는 강력한 책임을 지도록 만들어야 한다. 

행동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설사 그럴 만한 ‘기회‘가 오더라도 한순간의 호기심이나 충동으로 ‘실수‘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이 가해자가 되지 않도록 보호해야만 한다.

지난해 화제가 된 한 칼럼만 봐도 그렇다. 김민식 전 문화방송피디는 <한겨레>에 
‘지식인의 책무‘란 글을 게재하면서 부모님의일화를 가져다 썼다. 어릴 적 어머니를 때렸던 아버지의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 그는 책을 전혀 안 읽는 사람과 너무 많이 읽는 사람이 같이 살면 너무 많이 읽는 사람이 더 불행하다며, 아마도 책 너무 많이 읽은 어머니가 사사건건 문제 제기를 하다 보니 그것이 아버지의 열등감을 건드렸고, 그로 인해 둘의 사이가 더욱 나빠졌을 것이라 추측했다. 

그러면서 지식인은 지적 우월감을 느끼며 상대를 계도의 대상으로 보는 대신 존중하는 것이 먼저라고 마무리했다.

이 칼럼은 결국 가정폭력을 옹호한다는 가열찬 비판 끝에 본문이 삭제되고 필자와 편집부의 사과문이 게재되는 유례없는 결말을 맞이했다. 칼럼이 삭제된 이후에도 비판은 쉬이 사그러들지 않았는데, 어떤 이들은 이러한 상황을 두고 지나친 처사라고 비록 가정폭력이라는 잘못된 예시를 끌어오긴 했으나 본문의 주제는 ‘지식인에 대한 비판‘이라며, 가정폭력을 소재로 들었다는 이유로 비판을 지속하는 것은 달이 아닌 손가락을 보는 행위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나 역시 작성자가 어떤 악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칼럼을 썼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는 말 그대로 무의식적으로 그런 사례를 가져다 썼을 것이다. 진짜로 말하고자 했던 바는 지식인이 가져야 마땅한 겸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해당 칼럼을 옹

 그것은 오히려 나의 정체성을 연약하게 만들고 입지를 점점 더 좁히는 행동일 뿐이었다. 

재미없는 농담에 대응하는 방법은 오로지 웃지 않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함부로 웃지 않는다. 

모욕적인 말, 재미없는 농담, 천박하고 저열하며 약자를 공격하는 모든 농담에 정색한다.
재미없다고 대꾸한다. 이런 나를 두고 사람들은 농담도 이해 못하는 꽉 막힌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남을 공격하는 유머는옳지도 않을뿐더러 결정적으로 웃기지도 않다. 그 뒤로 웃을 일은 줄어들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이 훨씬 재미있어졌다. 나는 더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세상은 내가 자유로워지는 것만으로 달라지진 않았다.

몇 해 전에는 페이스북 친구였던 한 남성이 밸런타인데이라며
"초코렛 안 주시나요?" 하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처음에는 실수인 줄 알았다. 비록 ‘페친‘이기는 했지만 이름과 프로필 사진을제외하고선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초콜릿을 달라니. 평소에 별다른 교류도 없었고, 신상정보도모르고, 내가 어떠한 호감이나 친근감을 표현한 기억도 없는 사람인데, 대체 왜? 제가 왜 초콜릿을 드려야 하냐고 되묻자 그는대답했다. "친구니까요." 우리는 페이스북 친구일 뿐 ‘정식‘ 친구가 아니며, 이런 메시지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고 답하자 그는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저 오늘이 초코렛 날이라 농담 한번 해 다정한

봤어요."
이런 이야기를 하자 주변에서는 뭐 그런 경우가 다 있냐고, 세상에는 참 이상한 사람도 많다고 놀랐지만, 

사실 SNS를 하는 여성에게는 그다지 드물지 않은 일이다. 친근함을 빙자한 불쾌한 접근과 아무 말 대잔치, 어김없이 따라붙는 농담이었다는 변명까지. 온갖 황당한 사례를 듣다 보면 이게 과연 ‘일부‘의 특수한 경우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래전 주기적으로 메시지를 보내던 남성은 노동운동과 진보적 가치에 목소리를 높이던 이였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다는 말이다. 
아이가 자꾸 엄마를 때려서 고민이라며, 댁의 아이는 어떠십니까로 시작된 메시지는 어느 틈에 정말 미인이시라는 둥,
선생님은 보기만 해도 즐겁다는 둥의 이야기로 넘어갔다. 이때는 불쾌함을 표현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내가 너무 과민한가? 나한테 왜 이러지? 상대는 아무런 의도가 없는데 나 혼자 오버하는 것이면 어쩌지? 나를 공주병으로 여기는 건 아닐까? 

결국 그런일이 몇 번 반복된 후에야 고민 끝에 의사표현을 했고,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불편하셨다니 죄송합니다만 농담이었어요." 이쯤되면 일종의 패턴이다.

설령 정말로 ‘농담‘이었다고 할지라도, 이 일방적이기 짝이 없는 대화는 일종의 권력 지형도를 보여준다. 
군대의 고참이나 직장상사에게 아무렇지 않게 농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들은 조심스럽고 어려운 상대이다. 우스갯소리 하나를 하더라

도 상대의 기분과 취향을 면밀히 고려해야만 한다. 
반면 SNS를 떠도는 이 수많은 ‘농담‘들은 어떠한가. 
왜 말하는 사람은 아무렇지 않은데 
듣는 이는 불편함을 표현하는 것조차 어려워하는가.

눈치는 약자의 언어라고 한다. 
본인들도 인지하지 못했겠지만, 그토록 무신경하면서 무례하기 짝이 없는 용감한 시도를 할수 있는 이유는 그렇게 해도 되기 때문이다. 
줄곧 그렇게 지내왔기 때문에 그렇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그러나 듣는 입장에서는 자신이 너무 예민한 것은 아닌가 하는 검열에 시달리며 제대로 된 대응을 하는 것조차 힘들다. 

또한 불편함을 표현하는 순간마저 침착함과 상냥함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상대가 어떤 해코지를 할지 몰라 두려우니까.

나 역시 위에서 언급한 메시지를 받고 불쾌함과 황당함 이전에 가장 먼저 느꼈던 감정은 공포였다. 
내가 무언가 ‘여지‘를 준것은 아닐까? 상대방을 오해하도록 만든 것은 아닐까? 너무 친절했던 것은 아닌가? 뭔가 실수를 한 것 아닐까?

당연한 말이지만 농담에도 권력의 힘이 작동한다. 부장님의 개그에 직원들이 뒤집어지게 웃는다고 그게 재미있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약자는 농담을 던질 때에도, 그에 대응할 때에도 스스로를 검열할 수밖에 없다. 

불균형한 힘 앞에 "왜 더 강하게 거부하지 않았어?", "당신이 그렇게 싫어하는 줄 몰랐어", "농담이었어"와 같은 말은 공허하다.

위악보다는 위선이 낫다

나 역시 위선자의 진실이 밝혀졌을 때 분노한 경험이 있기에 이러한 반응에 심정적으로는 공감한다.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동의할 수 없다. 
위선에 더욱 분노하게 되는 자연스러운 심경과는 별개로, 
위악보다 위선에 ‘더‘ 분노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여긴다. 
그럴 경우 향후 위선자로 판명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선을 추구하려는 이들은 줄어들 수밖에 없는데, 결과만을 놓고 따지자면 위악보다는 위선이 훨씬 더 공동체에 좋은 영향을 미치기때문이다. 

위악을 추구하는 사람보다 위선을 추구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가 훨씬 더 건강하고 살기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위선은 그 속내가 거짓일지언정 적어도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기준은 공유하고 있다. 

약자와 소수자를 보호해야 하고, 부의 균등한 분배를 추구하고,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는, 인간뿐만 아니라이 세상 모든 생명체가 소중하다는, 설령 진심이 아닌 허울뿐인 ‘말‘들일망정, 무엇이 공동체를 위해 더 나은가에 대해 고민한다. 인간의 본성에 악한 면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지언정, 그것을 완벽히 다스리는 것이 불가능할망정, 적어도 그를 위한 노력을 촉구한다. 본성을 억누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한다.

반면 위악은 그렇지 않다. 위악은 인간의 본성, 내재해 있는 이기심과 폭력성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기고 적극적으로 추구한다. 
애초 출발 단계에서부터 ‘선‘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다. 결

우리는 모두개인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혼자인 채로 함께더 나은 세상으로 가기 위해 필요한 삶의 태도
"나는 한승혜 작가의 글에서 늘 어떤 안정감을 느끼는데, 그것은 내가 그의 글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그와 존중과 배려가 깃든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기인한다. 
그의 글이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도 그 때문이리라. 책을읽고 보니 그러한 안정감이 그의 다정한 개인주의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겠다."
(김겨울, <책의 말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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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온갖 일을 하도록유도하는 표적 광고 설계를 전문으로 했다.
로라는 코로나19 펜데믹 때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녀는감정의 대량 환기와 정부의 행동 통제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SPI-B 고문들은 로라가 쓴 공포 국가&State of Fear How the UKGovernmeer Heaposted Faat During the Crowd-19 android에서 심리학을 무기로 묘사하면서 사람들의 두려움을 이용한 것은 전체주의적인행동이었다고 고백했다.
우리는 사람들을 넛지 하려는 하향식 시도가 대규모로 꾸준히 진행되는 모습을 관찰했다. 에드워드 버네이스Eoard Bermaye는 프로파간다nge라는 전시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대중의 조직화된 습관과 의견을 의식적이고 지능적으로 조작하는건 민주주의 사회의 중요한 요소다. 이런 보이지 않는 사회 메커니즘을 조작하는 자들이 우리나라의 진정한 지배 세력인 보이지 않는 정부를 구성한다. 

우리는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사람들에 의해지배받고, 정신과 취향이 형성되고 아이디어 제안을 받는다. 대중의 마음을 통제하는 줄을 당기는 건 바로 그들이다."

이 보이지 않는 정부는 지금도 존재하니 
우리 마음의 줄을계속 잡아당기고 있다. 

이론 형성자들이 누구든, 그들은 사회공학적 의제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끊임없이 추진하고 있다.

오케스트라에서는 관악기를 연주하기 위해 구멍 뚫린 안면마스크를 착용했다. 사람들은 죽어가는 친척을 만나거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게 금지되었고, 부모는 장애가 있는 자녀에게 필요한치료를 받게 하지 못했으며, 많은 사람이 고립되어 우울증을앓다가 자살했다.

 상황이 진정된 지금, 대부분의 사람은 그게합리적인 행동이 아니었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감염과 죽음에대한 자연스러운 공포도 어느 정도 이유가 될 수는 있겠지만,
실은 인지편향을 이용해 대중을 설득하려는 다크 넛지였다.

우리는 누구나 넛지와 조작에 취약하다. 모든 것에 주의를기울이면서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마술사의무대를 지켜보는 동안 다른 곳에서 트릭이 발생한다.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홀로코스트 공포를 야기한 건 독일과 그 주변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성격에는 별로 특별한 부분이 없었다. 그들에게 일어난 그 일은 여러분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알렉산더 솔제니친 Alexander Solzhenitsyn의 말처럼, 선과 악을 나누는 선은 국가나 부족을 통과하는 게 아니라 "모든 인간의 마음을 관통한다."

자신은 똑똑해서 결코 세뇌당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자신처럼 요령 있는 사람은 속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ㅓ 여러분이야말로 가장 취약한 사람이다. 세뇌를 피하려면 자신이 세뇌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해야 한다. 카를 융의 말처럼 "자신의 성격이 거대한 악에 오염될 위험성을

확신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그런 악을 피할 수 없다. 8심리학, 정신의학, 사회과학의 통찰을 이용해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은 너무나 매력적이다.
그래서 조작자들이 우리를 상대로 꾸준히 작업을 벌이지 않을거라고 여기는 건 말도 안 되게 순진한 생각이다. 심리학은 이제 우리를 진단하거나 고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사회공학적으로 해킹하여 우리의 생각을 형성한다. 여러분이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통제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의 통제를 받게될 것이다.
독자 여러분이 이 책을 통해 자신을 보호하고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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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장] 우리 뇌는 전쟁터다
[2장] 당신의 입장을 고수하라
[3장] 면역력을 얻자
[4장]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자
[5장] 나의 감각을 의식하자
[6장] 소셜 미디어와 거리두기
[7장] 트위터가 없는 상태에서의죽음과 눈물[8장] 텔레비전을 끄자
(9장) 서면으로 받아두자
(10장) 일시적인 상황 변화를 조심하자
[11장] 빅브라더에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자

(12장) 선택권을 고려하자
[13장] 상징의 언어를 배우자
[14장] 트랜스젠더 서브레딧의 브레인웜과 애정 공세
[15장] 남들보다 먼저 말하라
[16장] 섹스의 노예가 되지 말자
[17장] 자신의 환상을 선택하자
[18장] 숲에서 내 그림자와 마주하다
[19장] 자신을 괴롭히지 말자
[20장] 확실하게 지지하는 게 없으면
속아넘어가게 된다
[결론][감사의 말](미주)·✓

(서문)
우리는 아침에 집을 나서려고 신발을 신기도 전에 이미 수십번 조종당한다. 휴대폰, 시리얼 상자, 연인 등 그 모두가 우리를 자극하고, 넛지 mudge(‘팔꿈치로 슬쩍 찌르다‘란 뜻으로 사람들의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을 말한다) 하고, 밀어붙여서 뭔가를 따르게 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

민주주의 역사보다 오래된 설득과 선전은 시인, 정치인,
성직자들이 터득한 기술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저서『수사학 Rhetoric』에서 
시대를 초월한 설득의 기술인 에토스(ethos,
로고스 logos, 파토스pathos를 설명했다. 

2000여 년 전 아리스토텔레스는 청중이 누구인지 고려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고
신뢰할 수 있거나 적어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여야 하며, 
이성뿐만 아니라 감정에도 호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설득과 선전은 인간의 본질이기 때문에 민주주의보다 더 오래된 건 당연하다.

우리는 항상 서로를 설득하려고 애쓴다.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다 보면 이웃에게 인사를 하거나, 자녀를 교육하거나,
사업 제안서를 작성하거나, 범죄자를 처벌하는 등 모든 부분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조작이 개입하지 않는 영향력이 존재한다는 건 망상일 뿐이니 떨쳐내야 한다.
우리는 모두 미니 선전가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대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자신의 편집된 버전을 제작해서 온라인으로 홍보한다. 사진을 편집하고 더 돋보이게 해주는 필터를 적용한다. 팔로우들의 참여를 유도하거나 설득하기위해 밈meme을 만든다. 현대 기술은 진실보다 예술적인 안무를 장려한다.

솔직히 말하는데, 우리도 여러분에게 영향을 미치고 싶다.
우리는 이 책이 서점의 먼지 쌓인 구석에서 잊히는 걸 원하지않는다. 어떤 작가가 책을 쓰면서 많은 독자에게 영향을 미치기를 진심으로 바라지 않겠는가? 다른 사람들과 우리의 차별점은 의도다. 우리는 여러분이 영향력에 저항할 수 있도록 영향을 미치고 싶다.
왜 영향력에 저항해야 할까? 우선 모든 영향력이 문제가되는 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겠다. 영향력이 없다면 읽는법을 배울 수 없다. 몇몇 공중보건 관련 메시지는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좋은 책을 읽으면 필연적으로 그 책의 영향을받게 될 것이다. 친구에게 좋은 하루를 보내라는 인사를 받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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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조사업의 목적, 의의를 명확히 한다공명정대하고 대의명분이 있는 높은 목적을 세운다
제2조구체적인 목표를 세운다-세운 목표는 항상 사원들과 공유한다
제3조강렬한 열망을 가슴에 품는다--잠재의식에 투영될 정도로 강하고 지속적인 열망을 갖는다
제4조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노력을 한다-사소한 일도 한 걸음 한 걸음 충실하게 끊임없이 노력한다
제5조매출을 최대한 늘리고 비용은 최소한으로 억제한다들어오는 것을 늘리고, 나가는 것을 억제한다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익이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한다
제6조가격 결정이 곧 경영이다--가격 결정은 경영자의 일,
고객도 기쁘고 자신도 수익을 내는 포인트를 찾으라

제7조 경영은 강한 의지에 좌우된다-경영에는 바위조차도 뚫을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제8조 불타는 투혼으로 승부한다-경영에는 어떤 격투기에도 뒤지지 않는 격렬한 투쟁심이 필요하다.

제9조 용기를 가지고 일에 임한다•비겁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제10조 항상 창조적으로 일한다
-오늘보다는 내일, 내일보다는 모레를 위해,
끊임없이 개선하고 개량한다 
창의성을 발휘한다.

제11조 배려의 마음으로 성실하게 모두를 대한다
-장사에는 상대가 있다.
상대방을 포함해 모두를 행복하고 기쁘게 한다.

제12조 항상 밝고 긍정적인 생각과 자세를 갖는다-꿈과 희망을 갖고 솔직한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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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가에는 1년 내내 사과가 떨어지는 법이 없다. 본가의 냉장고에 언제나 사과가 존재하는 이유는 아버지 때문이다. 아버지는 사과를 정말 유난할 정도로 사랑하시는데, 아버지의 사과 사랑은 아버지가 지닌 성실함을 잘 보여주는 증거다. 매사에 쉽게 싫증내고 게으름을 피우는 나와 달리, 아버지는 무엇이든 시작하면 중간에 그만두는 법이 별로 없고, 정해진 일들을매일같이 규칙적으로 하는 습관이 몸에 밴 분이다. 매일사과 한 알을 먹으면 의사가 망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아버지가 들으신 것이 언제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 기억의 시작점에서부터 지금까지 단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에 사과 한 알을 드시고 하루를 시작하셨는데, 그 때문이겠지만 나와 여동생에게 사과란지긋지긋한 과일이 되어버렸다. 언제나 손만 뻗으면 닿는 가까운 곳에 있어 특별하지도, 간절하지도 않은 과일.
가장 가까이 있지만 또 그래서 멀어지게 되는 가족처럼말이다.
가족이란 대체 뭘까? 잘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영영이해할 수 없고, 서로를 가장 견딜 수 없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가장 친밀한 공동체인 가족 가족이 무엇인지에 대

내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것은 줌파 라히리의 소설들 덕분이다. 그중에서도 하나를 꼽자면 그녀의 두 번째소설집인 『그저 좋은 사람』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줌파라히리의 소설들은 대부분 그녀처럼 미국으로 이민 온인도인의 삶을 다룬다. 그저 좋은 사람』에 실린 소설 속주인공들도 모두 인도계 미국인이다. 그리고 이 인물들은 종종 가족들 간의 문제를 안고 있다. 표제작인 「그저좋은 사람」의 주인공 수드하는 동생에 대해 잘 알고 있고그에게 일어나는 문제들을 해결해줄 수 있을 거라고 믿지만, 사실은 동생이 어째서 알코올중독자가 되어버렸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소설집 맨 앞에 실린 「길들지 않은땅」의 주인공인 루마는 어머니가 죽은 이후 홀로 남은 아버지가 자신과 같이 살기를 원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아버지는 새로운 사랑과 삶을 꿈꾸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줌파 라히리 소설의 경우 주인공들이 모두 이민자이기 때문에 1세대와 2세대 간의 갈등이 더욱 두드러지긴 하지만, 그들이 겪는 문제들은 사실 모든 가족이 겪는일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인물들이 느끼는 고독에 공감하며 소설을 읽어나가다 보면 우리가 겪는 일상 속의

가장 가까워 보이는 관계 속에서조차 존재하는사람과 사람 사이의 몰이해 때문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결국 가족이란 이 같은 진실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인간관계의 축소판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소설 속의 인물들이 상처를 주고받고 후회를 거듭하는데도 책을 덮고 나면 마음이 마냥 어둡지만은 않다. 
그것은 가족이기 때문에 무조건 이해하고 있고, 이해할 수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사랑에 한 걸음 더 다가갈수 있음을, 주인공들의 실패를 통해서 배울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또 다른 딸인 린다를 더 편애하며 진정한 딸로 여기고 셜리를 골칫덩어리로만 생각하는 걸 엿볼 수 있는 대목들. 하지만 이제 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이런 대목들이다. 어쩌면 셜리가 우연히라도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자신이 자주 찾는 공원에 왔을지도 모른다며 엄마가 조심스럽게 추측하는 대목같은 것 말이다. 그러니까, 엄마와 딸이 주저하면서도 서로 이해하려고 애쓰는 마음을 보여주는 문장들.
어렸을 때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일이라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세상에 당연한것은 없다는 걸 안다. 어떤 관계가 잘 유지된다면 그것은각자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어느 주말, 직장에 다니느라 피곤했을 엄마가 믹스를 사다가 만들어주던 도넛처럼 달콤하고 아련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어떤 기억들은 겨우내 잠들었다 계절이 돌아오면 움트는 장미 꽃봉오리를 닮아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피었다 지기를 되풀이한다. 그때로부터 나는 얼마나 멀리 와 있는 걸까?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청신한 바람을 타고 자꾸만 날아오는 꽃향기 속을 걸으며아득한 거리를 가늠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 『좁은 문을 다시 읽었을때 내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알리사의 신앙심보다는 소설도처에서 언급되는 불안이었다. 두 주인공이 불안에 떠는 이유는 사랑하는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사랑을 받아달라고 상대에게 강요하는 제롬이나 문제를 회피하기만 하는 알리사는 서로 다른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상대의 의중을 알 수 없다는 공포를 견디지 못하고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만사랑을 완성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같은 인물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은 결국 비극적인 방식으로 끝난다.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열정이나 도취를 쉽게 떠올리지만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청춘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한 게 아닐까 가만히생각해본다. 넘치는 건 젊음뿐, 상대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헤아릴 여유는 조금도 갖지 못해 서로를 오독하는시기를 지나야 우리는 사랑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해볼수 있는지도 모른다고도. 공고한 ‘나‘의 성을 허물고 타인에게 자리를 내어줄 때, 마침내 사랑은 그 눈부신 폐허에서 시작할 테니까.

사랑이란 뜻의 한자[]를 중국인 관광객에게 배운다. 그러고 난 후 어머니의 편지 위에 사랑이란 한자를 무수히 덧쓰는 잭.

흔히들 사랑은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종이 동물원」을 읽으며 어쩌면 켄 리우는 표현하는 행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랑에 가닿을수 있다면 그것은 알맞은 때에,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있는 방식의 표현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임을 보여주고있는 거라고. 이토록이나 슬프고도 아름다운 방식으로말이다.

그렇게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일상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어질 때, 갓 구운 호밀빵 샌드위치를 싸들고 숲으로 소풍을 가는 기분을 내기 위해 꺼내보는 책이 있다. 나무수업이 바로 그것이다.
『나무수업』을 지은 사람은 독일인 산림 전문가 페터볼레벤이다. 평생 숲속에서 나무들과 함께 살아온 저자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생명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번번이 놀라곤 한다. 너도밤나무들이 서로 우정을 나눌 줄 알뿐만 아니라 심지어 허약한 구성원에게는 영양분도 분배해주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얼마나 있을까? 같은 숲에 심어진 너도밤나무라도 뿌리를 내린 곳의 일조량이나 토양의 비옥한 정도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환경이 다르다면 그에 따라 성장 속도나 목질, 그리고 나무가만들어내는 당분의 양이 달라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일 같다.
하지만 『나무수업에 따르면 너도밤나무들의 경우,

그들이 생산하는 당의 양은 거의 비슷하다. 같은 숲의 너도밤나무들끼리 뿌리를 통해 영양소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나무들은 서로가 비슷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많이 가진 나무가 허약한 나무에 양분을 공급해준다. 

허약한 구성원을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 결국 모두에게 이롭다는삶의 지혜를 너도밤나무는 알고 있는 것이다. 만일 경쟁에 뒤처진 너도밤나무가 죽어버린다면 숲에는 빈자리가 생겨버릴 것이고, 숲의 기후나 일조량, 습도는 엉망이 되어버릴 거라는 진실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더 크고 우람한 너도밤나무를 키우기 위해 볼품없는 나무들을 베어버리고 간격을 벌려준다고 한다. 그렇게 인간이 ‘경쟁자‘
를 제거해준 숲에 홀로 남은 너도밤나무가 다른 나무들보다 건강하고 더욱 잘 자라는 듯 보이지만 결국 오래 살아남지 못하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좋은 책의 기준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읽고 난후 세상을 보는 시선을 바꿔주는 책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무수업』은 나에게 좋은 책이다. 이책을 읽은 이후 두 번 다시 나무를 그 전과 같은 눈으로볼 수 없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길을 걷다가 만나는 가로수, 창밖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뒷산의 나무를 보면 그들

내가 좋아하는 그림책 중에는 ‘난민이 뭐예요?』라는작품이 있다. 이 책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후안, 로사, 페드로 등 서로 사촌인 아이들은 어느 날 할머니의 집에 모여 즐겁게 대화를 나눈다. 그러던 중 길에서 본 난민들이자연스럽게 화제에 오르고 아이들은 ‘난민‘이 누구인지,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깨우쳐간다. 비교적 간결한 이 이야기에는 작은 반전이 숨어 있다. 아이들은 몰랐지만 할머니 역시 난민 출신이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할머니가 준비해준 스페인식 바게트 샌드위치를나눠 먹으며 할머니가 살아온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사람은 누구나 난민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할머니와 아이들이 밤에 찾아올지 모르는 누군가를 위해 이불을 준비하는 마지막 장면이 아름다운 것은 그 때문이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행동임을 느낄 수있기 때문에.
난민들을 둘러싸고 현재 빚는 갈등은 우리 사회가얼마나 이런 문제에 준비되어 있지 않은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의 갈등은 우리가 난민 문제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게 되리라는 것을 분명히 예고하고도 있다. 나는 ‘난민이 뭐예요?』를 쓰고 그린

이들이 각기 다른 국가 출신의 유럽인들인 것이 우연일리만은 없다고 생각한다. 글을 쓴 호세 캄파나리는 이민자의 자식으로 난민 문제에 관심을 가져온 스페인 사람이고, 그림을 그린 에블린 다비디는 아프리카 난민들이 유럽에 들어가는 관문인 이탈리아 출신이다. 이 두 사람이 함께 만든 그림책이, 국가나 인종 혹은 종교처럼 서로를 배척하게 만드는 견고한 장벽을 넘어설 때 우리가 아름다운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될수는 없을까?
일상을 살아가는 연약한 개인들은 불안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우리의 마음속에 타인을 위해 이불 한채를 더 마련할 만큼의 온기가 존재한다고 믿고 싶다. 당장은 두렵더라도, 배척하는 것만이 이 두려움을 해소해줄 유일한 방법은 아닐 거라고 믿는 나와 당신이 있다고.
비틀거리더라도, 뒷걸음질을 치더라도, 우리는 결국 연대의 가치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밤이 온다. 길고 긴 겨울밤의 시작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작은희망을 촛불처럼, 위안처럼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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