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데노사우니‘ 민주주의의 또 다른 이름
‘하우데노사우니 Haudenosaunce‘ (정착형 식민주의자들은 이로쿼이 연합Iroquois League 이라고 불렀다)는 공통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위해 함께 모인 북아메리카 지역의 다양한 토착민족 연합이었다. 처음에는 세네카족, 카유가족, 오노다가족, 오나이더족, 모호크족이있었고, 나중에는 투스카로라족도 합류했다. 대평화법률 Great Layof Peace에 따라 살던 하우데노사우니 구성원들은 스스로를 통치할 새로운 방식을 찾던 영국 식민주의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하우데노사우니도 대의제 정부였다. 족장이라 부르는 여러 임원이 각 부족을 대표했으며, 이 대표자는 총 50명이었다. 이들은 의회에서 만나 협동해서 결정을 내렸는데, 결정을 내릴 때는 만장일치가 되어야 했다. 대법률Great Law은 추가조항 117개로 이뤄져 있었고, 그 가운데 많은 조항이 의회의 권력을 제한하며, 보다 중요하거나 시급한 사안은 대비책으로 총투표를 거쳐 결정을 내린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남성 족장들은 여성인 씨족 우두머리들이 선정했으며, 같은 가족 안에서 다음 세대로 역할을 물려줄 수 있었으나, 새로운 족장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는 얼마
든지 간단히 철회할 수 있었다. 전통적으로 보존되었던 기록과 고고학적 조사를 결합해 살펴보면, 하우데노사우니 연합은 아무리 못해도 서기 1150년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이는 현존하는 의회 가운데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것이다(서기 930년부터 시작된 아이슬란드 국회에 뒤이어 두 번째다). 1642년에 새로운 정착지인 뉴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 네덜란드 변호사 아드리안 반 데르 동크에 따르면, 하우데노사우나는 "본질적으로 모두 자유로우며, 그 위에는 어떤 지배 권력도 없다"라고 한다.
하우데노사우니는 실용적이고도 실제로 기능하고 있는 민족 연합의 사례를 미국인들에게 보여주었다. 그전에는 정치철학만 지니고 있던 이들이었다. 영국 철학자 존 로크가 모든 사람에게 태어나면서부터 특정한 권리를 보장하는 자연법이 있고, 또 사람들은 이 권리를 유지하기 위해 정부와 사회적인 계약을 맺는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이것이 실제로 어떤 모습인지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적어두지 않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정부의 사법부, 입법부, 행정부를 분리해 권력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스키외도 마찬가지였다. 유럽의 실천이 참고로 삼을 만큼 현실화된 이론은 없었다. 반역을 일으키며 새롭게 등장한 유럽계 미국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은하우데노사우였다. 그렇지만 이 새로운 체제가 문명적인 것인가가 문제였다.
실질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확실히 실현 가능한 체제라고 여겨졌다. 1751년, 벤저민 프랭클린은 이렇게 적었다. "무지한 야만인 민족 여섯 곳이 그런 연합을 만드는 계획을 세우는 능력이 있다고 하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 그렇지만 이런 연합이 필요한 영국 식민지가 열 개쯤 된다 하더라도, 영국 식민지에다 이런 연합체를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는 어떻게 하면 새로운 정부가 과거에 비해서 발전한 것으로 여겨지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를 남겼다. 프랭클린, 토머스 제퍼슨, 존 애덤스 같은 정착형 식민주의자들이 보기에,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는 당연히 덜 발전된 곳이었다. 정착민들에게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군주제가 발달하기 이전 정부가 어떤 모습이었을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표본이었다. 미국 독립혁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상가 가운데 한 명인 토머스 페인은 이렇게 말했다. "사회의 상태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이해하려면, 인간의 자연스럽고 원초적인 상태를 어느 정도 파악해야 한다. 오늘날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서 볼 수 있는 바로 그 모습 말이다." 토착민들의 정부 체제와 생활 방식은 거부할 수 없이 매력적이었지만, 여기에는 한계도 있었다. 페인은 자신이라든가 동료 정착형 식민주의자 같은 진보한 유럽인들이 "문명화된 상태에서 자연 상태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현대적인 서양의 민주주의가 이 진퇴양난을 해결한 것은 철학적인 타협안을 통해서였다. 모든 사람이 관여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직접 민주주의가 목적에 적합하지 않다면, 자유 민주주의가 그 역할을 대신 맡을 수가 있었다. 미국 헌법 제정자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하우데노사우니의 ‘야만적인‘ 양상이라 여겼던 것들 상당수를 떼어놓을 수 있어 달가워했다.
이들은 여성의 권력과 책임과 연계를 맺고 있던 씨족 기반 시스템을 무시하고 고전적인 모델을 따랐다. 이들이 하우데노사우니에서 취해온 딱 한 가지는 연방제였다. 하나의 국가 안에 있는 독립적인 자치주들이 집합적인 의사결정이 필요할 때면 자신들의 대표들로 중앙정부를 구성하는 방식 말이다. 그렇지만 여기서도 이들은교묘한 속임수를 부린다. 이들이 얘기하는 ‘대표의 기적miracleof representation‘을 이용해서 말이다. 이런 식이다. 국민의 의지가 대표된 것은 국민의 실제 의지와 동일하다. 그리고 이는 합당하다고 느껴진다. 아테네식 모델과 비교해본다면 미국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연방공화국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개별주의 정부는 이를 지배하는 국가 차원의 정부를 동반했다.
국민은 이 두 정치체 가운데 어느 한 쪽에 직접 권력을 행사하지 않고, 임원을 선출해 자신들 대신에 권력을 행사하도록 한다. 미국의 정부 모델은 유권자들이 스스로 권력을 지니는 골칫거리가 없게끔, 즉 유권자들이 스스로 진정한 권력을 지니는 이득을 누릴 수 없게끔, 모든 의사결정을 가로막았다.
영국 민주주의의 발전은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거의 똑같은 결과로 끝이 난다. 영국은 자신들이 혁명을 거쳐 민주주의에
부시와 조지 W. 부시 같은 미국의 아버지와 아들 대통령부터. 케네디가, 루즈벨트가, 트뤼도가 같은 정치적인 왕조들까지 말이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적합한가에 관한 철학적인 우려는 바로 이런 평범한 사람들을 억압하는 데에 유용하게 쓰였으며, 반대하는 사람들을 진압하는 데에도 활용되었다. 특히 몇 세기 내내 인간 이하라고 여겨진 사람들을 상대로 말이다. 미국에서는 이것이 지능과 문맹률 시험이라는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는 사람들, 특히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투표권을 박탈하기 위해 설계한 것이었다. 여성에게도 똑같은 효과를 내기 위해 다양한 주장들을 활용했다. 여성은 오랫동안 선거권을 거부당했다. 선거권을 행사하기에는 사회적으로나 지적으로나 필요한 요소를 제대로 갖추지못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신분증을 제시해야 한다거나, 접근이 어려운 투표소라거나, 제한적인 투표 시간 같은 다른 요소들과 결합함으로써, 19세기 프랑스의 외교관이자 학자였던 알렉시 드 토크빌이 밝혔던, 억압적인 다수결주의가 통치할 수 있다는 우려는 정말로 현실이 되었다.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는 자기 복제를 위해 설계된 것으로만 보일 정도다. 여기에는 기존의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강화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를 존재론적인 질문으로 이끈다. 민주주의는 내재적으로 결함이 있는 것일까?
이른 것이 아니라, 서서히 일어난 일련의 개혁들을 거쳐 이르렀다는 점에서 자신들이 민주주의 역사 속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이야기는 앞에서 살펴보았다. 마그나 카르타에서 시작해, 19세기의 영국 권리장전과 여러 개혁을 거치며, ‘자유로운 사람‘의 정의가 점점 넓어져 여성까지 포함하게 되었고, 그렇게 1928년에 보편적인 투표권에 도달한 것이다.
그 결과, 영국이라는 국가는 일종의 키메라가 되었다. 서로 다른시기에 다양한 방식으로 끼워 맞춘, 서로 다른 우선순위와 이데올로기에 얽혀 있는 법과 개혁이 한데 모여 민주주의라는 형상을 이루는 것이다. 이번에도 역시나 실제로는 민주주의가 아닌 채로 말이다. 설령 영국이 실제로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그리고 왕과 민주주의가 섞이지 않는다는 것은 잘알려진 사실이다. 심지어는 로마인들도 알고 있었다), 영국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아테네식 모델보다는 공화국 모델에 더욱 가깝다.
아테네식 정부 모델은 직접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이는 사람들이 선거를 거쳐서 정부에서 자신들을 대표해줄 정치적 지도자를 임명하는 대의제 민주주의와는 반대된다.
현대 서양에서는, 그리고 보다 광범위하게 본다면 서양식 민주주의에서는, 바로 이런 대의제 민주주의 모델이 장악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직접 모든 결정을 내리지 않고, 크고 중요한 결정을 내려달라며 맡기는 선출된 소수의 손에 권력을 양도하는 것이다.
자유 민주주의에서는 정부의 서로 다른 구성 요소들 사이에 권력
이 분리되어 있어 균형을 유지한다. 이런 구성 요소들이 어떤 것인지는 해당 시대와 민주주의가 어떤 것인가에 달려 있다. 미국에서는 권력이 입법부(법을 만드는 곳), 사법부(법을 집행하고 해석하는 곳), 행정부(대통령) 사이에 나뉘어 있다. 반면, 1688년 명예혁명 이후 영국의 민주주의가 시작할 무렵에는 군주와 의회 사이에 권력이 나뉘어 있었다. 의회는 상원에 있는 귀족과 하원으로 대표되는 나머지 사람들로 이뤄져 있었다. 군주의 힘이 예전과는 확연히 다르다 할지라도, 영국이 국회와 정부를 운영하는 방식을 슬쩍 보기만 해도 고대 아테네 사람들은 못마땅해할 것이다. 사실 권력은 꾸준하게도 그리고 냉혹하게도 훨씬 더 제한된 소수의 사람에게만 양도되어 있음에도, 국민에게 권력이 있는 정부라는 말을 들으면 고대 아테네 사람들은 깜짝 놀랄 것이다. 우리가 하원의원들을 선출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유권자 전반은 정부의 나머지 절반을 이루는 상원에 임명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가 없다. 그리고 의회 안에서만 놓고 보자면, 권력은 여당에게 있으며, 다시 그 안에서 내각과 궁극적으로는 총리에게 권력이 위임된다. 고대 아테네 사람들은 선거를 못 미더워했다. 애초에, 그리고 내재적으로, 분열을 일으킬 수밖에 없으며, 사회적인 엘리트나 이미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했기때문이다. 다시 말해, 서양식 대의제 정부를 놓고 본다면, 고대아테네들은 우리가 겪는 문제가 일어나리라는 사실을 2500년
전에 이미 알고 있었으며, 이런 문제를 피하고자 갖은 노력을 다했다.
민주주의는 없다
고대 아테네 사람들이 선거에 의구심을 품었던 것은 무척 일리가 있어 보인다. 선거에서 당선되어 관청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말이다.
오늘날에는 ‘과두제 집권층oligarch‘이라는 말 앞에 ‘러시아‘가 붙는 일이 가장 일반적이지만, 실상을 살펴보면 이는 러시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지금이든 옛날이든, 제한된 소수가 통치한다는 관념은 보편적이었다. 선거에 이겨서 지배력을 독점한다고 해서, 그 소수의 지배층이 훌륭한 통치를 선보이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능력과 실제로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은 서로 다른 능력이라는 사실이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다. 최근 우파 정당들은 만약에 선거에서 이기는 데에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더욱 극단적인 입장들도 포용할 수 있다는 뜻을 분명하게 밝혔다. 또, 체현된 정치 계급이라는 확실한 증거도 있다. 자신이 받은 교육 덕분이라든가 특정한 직업에서 거둔 성공 덕분에 더 좋은 자리에 올라 성공을 거두는 정치인들 말이다. 서양의 민주주의는 왕조 권력에도 아주 능통하다. 존 애덤스와 존 퀸시 애덤스, 조지 H. W.
부시와 조지 W. 부시 같은 미국의 아버지와 아들 대통령부터, 케네디가, 루즈벨트가, 트뤼도가 같은 정치적인 왕조들까지 말이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적합한가에 관한 철학적인 우려는 바로 이런 평범한 사람들을 억압하는 데에 유용하게 쓰였으며, 반대하는 사람들을 진압하는 데에도 활용되었다. 특히 몇 세기 내내 인간 이하라고 여겨진 사람들을 상대로 말이다. 미국에서는 이것이 지능과 문맹률 시험이라는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는 사람들, 특히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투표권을 박탈하기 위해 설계한 것이었다. 여성에게도 똑같은 효과를 내기 위해 다양한 주장들을 활용했다. 여성은 오랫동안 선거권을 거부당했다. 선거권을 행사하기에는 사회적으로나 지적으로나 필요한 요소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신분증을 제시해야 한다거나, 접근이 어려운 투표소라거나, 제한적인 투표 시간 같은 다른 요소들과 결합함으로써, 19세기 프랑스의 외교관이자 학자였던 알렉시 드 토크빌이 밝혔던, 억압적인 다수결주의가 통치할 수 있다는 우려는 정말로 현실이 되었다.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는 자기 복제를 위해 설계된 것으로만 보일 정도다. 여기에는 기존의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강화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를 존재론적인 질문으로 이끈다. 민주주의는 내재적으로 결함이 있는 것일까?
배치가 되어 있고 서로 간격도 넉넉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오스트레일리아 내륙을 설명하며 로버트 다우슨이라는 영국 정착민은 이렇게 썼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여행객들이 가는 길은보통 숲 사이로 나 있다. 여기서는 나라가 원경으로 보인다. 원시적인 사회와 문명적인 사회가 유쾌하게 뒤섞여 있는 모습이다." 다우슨과 같은 유럽인들은 오스트레일리아의 풍경을 꾸준하게 "공원 park"이라 설명했다. 인클로저 운동이 증가하던 시기에는 오로지 한 가지 의미만 지니는 말이었다. 바로 의도적으로 관리를 하고, 관습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이 소유하는 땅이라는 뜻이었다. 호화롭고 부유한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이 소유한 곳이 아닌데도 공원이 있다는 사실은 유럽인들이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다.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이 편리하기도 했다.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계몽주의의 합리적인 원칙에 따르면 오로지 ‘적극적으로‘ 관리가 되는 곳이어야 땅을 소유한다고할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백인 정착민들이 대륙 전체를 마음대로 할 수가 있었다. 유럽인들의 눈에는땅에 아무런 관리 활동도 이뤄지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또 이들의 눈에는 자신들의 식민지 정착지를 가로막을 진짜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최초의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을 인간 이하로 바라보는 관념은 땅과 사람 모두에게 파괴적인 결과를 낳게 되었고, 이는 지금도 여러모로 이어지고 있다. 다윈에 이어서 고고학자들
과 인류학자들은 최초의 오스트레일리아인들, 특히 태즈매이니아 섬에 살던 사람들은 살아 있는 인간보다는 화석에 더 가깝다고 여겼다. 어떤 사람들은 태즈메이니아 사람들이 진화의 사슬을 이루는 미싱 링크라며, 현생 인류와 과거 조상들을 이어준다고 바라보았다. 그렇게 해서 이들은 서양이 만든 틀 속에 가만히 얼어붙어,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일종의 민속학적 현재가 되었다. 바로 이것이 몇몇 학자들이 얘기하는 인간의 역사화다. 즉, 한 집단을 특정한 시기에 갇혀 있는 것으로 보고, 또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문명화의 척도 중에서 특정한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고유한 시간이 묵살된다는 것
그 뒤로 한 세기 동안 최초의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을 바라보는 서양의 시각은 그 당시에 지배적인 학문적 사상에 따라 달라졌다. 20세기 초에 우생학의 인기가 높아지자, 최초의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은 "하프 카스트 half-caste 문제"의 초점이 되었다. 간단히 얘기하자면,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과 백인 정착민 식민주
블랙풋이 욕구단계설에 끼친 영향
나는 라이언 헤비 헤드의 강연에서 매슬로가 시크시카에서 지
냈던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그는 혼인을 통해 블랙풋국의 일원이 되었고, 방울뱀을 퇴치하며, 레드 크로 칼리지에서 카이나이Kainai학을 가르친다. 그의 전문 지식은 직접 겪은 문화적 경험, 기록 연구(오하이오주의 애크론에 있는 미국 심리학 역사 기록 보관소에 소장된 매슬로의 공책, 편지, 논문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당시 현장을 지켰던 부족 원로와 한 인터뷰의 결합이다. 헤비 헤드는 베네딕트의 제자이자 매슬로의 가이드였던 제인 리처드슨이 사망하기 전, 106세였던 2014년에 직접 만나 인터뷰도 했다. 그러니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양쪽의 이야기를 모두 들려줄 수있는 사람이다. 헤비 헤드의 얘기대로라면, 제인은 매슬로라는 짐이 더해졌다는 사실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매슬로는 제인의 계획과 조언을 모두 무시했으며, 오로지 자기 연구만을 위해 앞만 보고 돌진하며, 자신의 설문지에 대한 답을 블랙풋족 원로들에게 얻어내려 했다. 원로들은 그에게 비협조적이었다. 실제로 원로들은 자기 얘기를 들려주거나, 자신들을 공동체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는 일을 딱 잘라 거절했다. 매슬로가 계속 물어보자, 원로들은 매슬로가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인 것처럼 못 본 척했다. 데이터를 얻기 위해 절박했던 매슬로는 비교적 나이 어린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접근했는데, 그 바람에 원로들은 그만두지 않으면 매슬로를 쫓아내겠다고 협박했다. 결국 매슬로는 심리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제인의 조언에 따라 인류학자
가 되는 편을 택했다. 그는 자신이 관찰한 것이면 무엇이든, 블풋족이 자신에게 공유해 주려 하는 내용이면 무엇이든 기록했다. 사실상 다른 문화가 지닌 복잡한 면모를 당사자의 관점에서 기록하는, 아주 보애스적인 기법을 채택했던 것이다. 제인 리처드슨과 또 이 여정에 함께한 제3의 구성원인 루시엔 행크스가 담배 농사와 연관된 기술, 상징주의, 철학을 주의 깊게 기록하는동안, 매슬로는 공동체 구성원 개개인이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가 관찰한 한 가지는 바로 전달 의례ransfer ceremony였다. 전달 의례는 블랙풋족 달력에서 중요한 시기에 일어나는 의례였는데, 여러 가족이 한 해 동안 축적한 새로운 것들을 펼쳐놓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는 자리였다. 매슬로 입장에서는 설명하기 불가능하다시피 한 의례였다. 만약에 브루클린에 있는 자기 집에서 똑같은 행동을 한다면, 모든 것을 잃고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터였다. 그렇지만 시크시카에 있는 블랙풋족에게는 개인적인 이득은 아무런 문화적인 가치가 없었다. 매슬로가 그 밖에 또 크게 놀랐던 점은, 바로 물질적인 부도 없고 사회적으로 우월한 위치가 아니었음에도 자신이 만난 거의 모든 블랙풋족 사람들은 자아 안도감 수준이 높다는 사실이었다. 매슬로는 자존감이 사회적 우월성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이런 상태를 이룩할 수 있었는지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블랙풋족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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