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는 원래 짐승을 통째로 구워 신전에 바치는 유대교의 제사인 전번제소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제 이런 의미는 사라지고 2차 대전 당시 나치에 의한 유대인의 대학살을 뜻한다. 이런 의미의 홀로코스트를 다룬 글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마텔은홀로코스트를 주제로 한 글들이 사실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한 데 주목하고, 홀로코스트 이야기에 상상력과 창조적인 비유를 더해 『베아트리스와 버질을 써냈다. 따라서 이 소설에서 홀로코스트는 나치의강제수용소에서 희생당한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세계화된 자본주의 현상을홀로코스트적 관점에서 보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베아트리스와 버질』은 분명 홀로코스트를 진하게 떠올리게 한다.
마텔은 홀로코스트에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질 만한 뚜렷한 이유가없다. 그는 유대인도 아니고 동유럽인도 아니다. 독일계도 아니다.
그는 홀로코스트에 관한 한 철저한 아웃사이더지만, 역사가 예술로표현되지 않는다면 인류의 기억에서 사라질 수 있다고 믿는 까닭에,
홀로코스트에 대한 소설을 써야 한다는 작가로서의 의무감을 느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렇게 좁은 의미에서만 읽을 것이아니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 헨리가 ‘모든 것을 홀로코스트적 관점에서 보려고 애썼다‘라고 말하듯이 시야를 넓혀야 한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홀로코스트적 관점에서 보면 어떻게 보일까?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상징적인 의미의 홀로코스트가 자행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저자가 소설의 배경을 특정한 도시로 삼지 않은 이유에서도 밝혀진다. 

저자는 "소설의 배경을 특정한 도시로 한정하지 않은 이유는……내가 사는 도시에도 끔찍한 사건에 가담한 사람이 있고, 나는매일 그 사람과 만나면서도, 그 사람이 어떤 짓을 했는지는 모르고살아간다"라고 말한 바 있다.
베아트리스와 버질』에서도 「파이 이야기」처럼 많은 동물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살아 있는 동물이 아니라 박제된 동물이다.

박제. 요즘엔 듣기 힘든 단어다. 박제는 껍데기다. 속은 사라지고 없거나 완전히 감추어진 것이다. 왜 박제된 동물을 등장시켰을까?

왜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두 주인공, 베아트리체(영어식 이름은베아트리스)와 베르길리우스(영어식 이름은 버질)라는 이름을 동물들에게 붙여주었을까? 박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비유일지모른다. 속내를 감추고 겉으로만 반듯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들끓고, 어쩌면 우리 자신도 그런 모습인지 모른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껍데기만 인간을 닮은 존재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 올바른 길을 걷기 위해서는, 올바른 인간성을 찾기 위해서는 신곡에서처럼 베르길리우스와 베아트리체를 안내자로 삼아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여행하는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하면, 홀로코스트와 세상을 정확히 보려면 그런 안내자가우리에게 필요하다. 마텔은 당나귀 베아트리스와 원숭이 버질을 그

런 안내자로 우리에게 소개한다. 

그렇다고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두 동물이 나누는 대화, 지독히 상징적인 대화와 소설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우리 스스로 방향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희곡의 인상적인 첫 부분에서 베아트리스와 버질은 배에 대해서긴 대화를 나눈다. 배를 본 적도 없고 먹어본 적도 없는 베아트리스를 위해 버질은 배의 모양과 빛깔과 촉감, 향과 맛과 식감 등 다양한면을 설명하고, 베아트리스가 익히 아는 개념, 사과와 바나나와 아보카도를 끌어들여 비교한다. 

흔한 과일인 배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이렇게 어려울진대, 그 주제가 홀로코스트나 인간 삶이라면 어떻겠는가. 

베아트리스와 버질이 자신들이 겪은 일을 말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표현과 개념을 고안하고 반짇고리에 기록하듯, 독자 역시스스로의 경험과 말이라는 한정된 도구를 통해 이 소설을, 그리고이 세상을 읽어나가게 될 것이다.

설령 마텔이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하더라도 그 방향은 마텔의 방향일 뿐이다. 우리가 굳이 그 방향을 선택해야 할 이유는 없다.

 "내생각에 믿음은 햇살을 받으며 지내는 것과 비슷한 거야. 햇살을 받고 있을 때 그림자를 만들지 않을 수 있어?・・・・・・ 그림자는 의심을 뜻해. 햇살을 받고 있는 한 네가 어디를 가든 그림자는 따라다녀. 그런데 햇살을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라는 버질의 말처럼 세상에는 빛과 어둠, 확신과 의혹이 동시에 존재하지만, 흑과 백 둘 중하나만 선택하는 데 길들여진 우리는 이 둘을 동시에 포용하기가 힘

들어 항상 구체적인 답을 요구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답은 우리를들에 가두기 마련이다. 우리 스스로 구속복을 입는 셈이다. 올바른길을 걷기 위해서는 그러한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마텔은 그 방법의 하나로, 소설의 끝에 구스타브를 위한 게임을 제시했다. 한결같이 고민스러운 질문들이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질문들이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은 빈칸으로 남겼다. 그것은 결국 이 세상은 어떤식으로든 우리 각자가 채워가야 하는몫이라는 뜻이 아닐까?
충주에서 강주헌

「파이 이야기」 이후 9년, 얀 마텔의 신작 장편소설

모든 것이 끝나는 어느 날,
우리가 겪은 일들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겁에 질린 당나귀 베아트리스와 고민 많은 원숭이 버질이 시골길을 걸어간다.
그들은 배가 고프고 몹시 지쳐 있다. 버질은 등이 아프고, 베아트리스는 목이 아픈데다 한쪽 다리를 전다.
저물어가는 빛줄기는 그들이 보는 풍경에 세로줄무늬를 만들어낸다.
그들이 걷고 있는 곳은 ‘셔츠‘라는 나라의 등허리 지역이다.

의문의 희곡 「20세기의 셔츠」를 둘러싼우아하고 잔혹하고 환상적인 소설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채로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생각할 수도, 상상할 수도, 이름을 붙일 수도 없거니와 불처럼 뜨겁고 무시무시하며재앙이자 혼란인 그것에 대해. 하지만 그들은 마치 실어증에 걸린 것처럼,
목소리를 잃어버린 것처럼, 영혼과 혀를 갈가리 찢긴 것처럼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한다.
도대체 그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감춰진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발견한 진실을 잊지 않기 위해,
역사는 이야기로 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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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이 관찰한 것이면 무엇이든, 블래풋족이 자신에게 공유해주려 하는 내용이면 무엇이든 기록했다. 사실상 다른 문화가 지닌 복잡한 면모를 당사자의 관점에서기록하는 아주 보애스적인 기법을 채택했던 것이다. 

제인 리처드슨과 또 이 여정에 함께한 제3의 구성원인 루시엔 행크스가 담배 농사와 연관된 기술, 상징주의 철학을 주의 깊게 기록하는동안, 매슬로는 공동체 구성원 개개인이 상호작용하는 방식을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가 관찰한 한 가지는 바로 전달 의례ransfer ceremony였다. 전달 의례는 블랙풋족 달력에서 중요한 시기에 일어나는 의례였는데, 여러 가족이 한 해 동안 축적한 새로운 것들을 펼쳐놓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는 자리였다. 매슬로 입장에서는 설명하기 불가능하다시피 한 의례였다. 만약에 브루클린에있는 자기 집에서 똑같은 행동을 한다면, 모든 것을 잃고 얻는것은 아무것도 없을 터였다. 그렇지만 시크시카에 있는 블랙풋족에게는 개인적인 이득은 아무런 문화적인 가치가 없었다. 매슬로가 그 밖에 또 크게 놀랐던 점은, 바로 물질적인 부도 없고사회적으로 우월한 위치가 아니었음에도 자신이 만난 거의 모든 블랙풋 사람들은 자아 안도감 수준이 높다는 사실이었다.
매슬로는 자존감이 사회적 우월성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이런 상태를 이룩할 수 있었는지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블랙풋족이 아

이를 양육하는 방식에서 설명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서양인들과 달리, 블랙풋족은 아이들을 업신여기거나 이용하지 않고 아이들을 존중해주었다. 아이들은 이르면 열 살부터 블랙풋족의 의례에 동참했으며, 귀중한 물건들을 맡았고, 공동체에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다.

매슬로가 관찰한 또 다른 내용은 바로 블랙풋족이 킴마피이피트시니 kimmapilyipitsini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매슬로는 이를 블랙풋식 이타주의라고 옮겼다. 물론 헤비 헤드는 블랙풋족의 언어에는 이타주의에 해당하는 직접적인 번역어가 없다는 사실을 짚어주고 있지만 말이다. 

이 단어는 이타주의라기보다는 서로를 향해 습관적인 동정심과 친절함을 베푸는 행동을 가리킨다.
이를 아주 잘 보여주는 사례는 테디 옐로 플라이라는 남성이었다. 그는 이 부족의 카리스마 있는 젊은 지도자로, 오타와에 있는 캐나다 정부와 협상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테디 옐로 플라이는 시크시카에서 자동차를 소유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이 차를 공동체 전체와 공유했다. 어딘가 가야 할 일이 생기면,
옐로 플라이가 직접 태워다 주거나 아니면 자동차 열쇠를 넘겨주었다. 그러다 옐로 플라이가 공개 행사 자리에서 바로 다음 주에 자신의 소를 거세하고 낙인을 찍을 예정이라고 알리자, 젊은 남성들 무리가 도우러 나서서는 일이 마무리가 될 때까지 아무런 돈을 받지 않고 일했다. 이것이 킴마피이피트시니였다. 

테디옐로우 플라이는 도움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관대해질 수가 있었으며, 이런 도움은 그의 관대함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었다. 시크시카의 공동체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사회적 지위를 높이고 다른 사람을 깎아내려 일부 사람들을 높이 추앙하는 것보다는 집합적인 선을 더 중시한다는 점을 바탕으로 단결했다.

매슬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시크시카를 떠났다. 그해 9월, 그는 브루클린 칼리지에서 인간의 규범적인 행동이라는 새로운 강의를 연다. 꽤나 놀랍게도 여기서 말하는 규범은 매슬로가 블랙풋족과 함께 지내며 보았던 전통, 실천, 신념들이었다. 
또 그는 10년에 걸쳐 집필한 ‘좋은 인간의 노트 God Human BeingNotebooks‘를 쓰기 시작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학문 공동체에매슬로가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과학적인 방법과 실증적인 접근법으로 인간의 심리학을 탐구하던 시기는 끝났다는 메시지였다. 대신 그는 오로지 블랙풋족을 그렇게나 자신감 넘치고 친절한 사람들로 만들어준 이유를 밝히겠다는 목표를 품고보다 직관적인 기법으로 옮겨간다. 그리고 매슬로의 연구는 이제는 너무나 유명해진 욕구단계로 귀결된다.
왜곡으로 태어난 자아개념블랙풋국의 천막은 옆에서 보면 피라미드 형태에 가로 줄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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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글

오전에는 물리학을, 오후에는 문학 창작을 가르치는 저자가 쓴 글이라니! 이 책에서 제일 먼저 시선을 끌었던 부분은저자의 독특한 이력이었다. 예외 없는 법칙이 지배하는 우주를 연구하는 물리학, 이성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불합리한 인간사를 다루는 문학, 이 둘의 접목은 마치 둥그런 네모와 검은 백조처럼 모순된 조합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사실 창조는모순돼 보이는 것들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함께 뒤섞일 때나오는 법이다. 문학적 감수성은 과학 분야에서 무척 중요하다. 위대한 과학적 개념이 세상에 등장할 때마다 그 전개와 검

증은 냉정한 논리를 통해 이루어졌을지 모르나 개념의 출발점에는 어김없이 한순간의 통찰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통찰은 문학적 감수성을 통해 얻어진다.
뉴턴에게 문학적 감수성이 없었다면 과연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며 만유인력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을까? 문학적 감수성이란 서로 관련이 있어 보이지 않는 다른분야에서 그 ‘다름‘을 관통하는 ‘같음‘의 패턴을 찾아내는 능력을 일컬으며, 우리는 바로 그 통찰의 순간에 경이로움을 느낀다. 이 책에서는 누구보다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한 과학자앨런 라이트먼이 현대물리학의 이모저모를 바라보며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준다. 물리학의 이야기를 문학에서 느끼는 가슴 뭉클한 감동과 함께 전달하는 것이다. 이 책이 과학 서적이면서도 한 편의 수필집에 더 가깝게 느껴지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2016년 초인류 대표 바둑기사 이세돌을 꺾은 알파고AlphaGo를 보며 어느새 인간의 지력을 넘보는 인공지능을 기대와 우려가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래도 이 직관적통찰만큼은 아직 인공지능이 넘볼 수 없는 인간만의 영역이아닐까 생각한다. 기계가 신문기사도 쓰는 세상이지만 아직

은 인공지능이 쓴 소설을 읽고 싶은 생각이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옮긴이의 글을 쓰고 바로 그다음 날 인공지능이 쓴 소설이 있다는 기사를 접하고 소설을 읽었다. 과연 인간의 개입 없이 어디까지가 순수하게 인공지능의 창작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요즘 들어 인공지능에게 자꾸만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다.)앨런 라이트먼은 이 책에서 7가지의 우주를 소개한다. 이우주들을 통해 그는 최근 물리학과 우주론에서 이루어진 발견들이 인류가 오랫동안 품어 왔던 질문에 어떻게 답하고 있는지 탐구한다. 이 우주에는 우리만 살고 있는가? 과학은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까? 종교적 경험을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을까? 우리는 왜 영원을 갈구하는가? 앨런 라이트먼은 과학자이자 소설가로서의 재주를 살려 물리학을 씨실 삼고, 인문학을 날실 삼아 이런 질문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짜나간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개념 중 아무래도 가장 흥미로운 것은 1장 「우연의 우주에 나오는 다중우주다. 이것이 요즘 SF소설이나 영화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것을 보면 다중우주라는 개념 자체에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요소가 들어있는 듯하다. 사실 이 개념은 철학적으로 무척 중요하다. 이론

물리학자들은 오랫동안 우주의 모든 존재가 소수의 법칙과매개변수에 의해 유도되는 ‘필연적인 우주‘를 꿈꿨다. 하지만다중우주의 개념은 우리 우주, 그리고 그 안에 사는 우리라는 존재가 우연에 의해 나왔다는 주장에 설득력을 더한다. 심란한 것은 그런 주장이 맞는지 틀리는지조차 증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오늘날 인간이 파악하는 우주는 태양계를 벗어나지 못하던 초보적인 수준에서 우리 은하, 다른 은하계, 가시우주를 넘어 다중우주에 이르기까지 어마어마한 속도로 넓어지고 있다. 우주의 실제 팽창속도가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인간이 파악하는 우주의 팽창 속도에 비하면 새발의 피일 것이다. 하지만 7장 「분리된 우주」에서 앨런 라이트먼은 기술의빠른 발달로 세상이 그 어느 때보다 넓어지고 있다는 환상을갖게 되었지만 오히려 우리가 진정으로 접촉하는 세상은 좁아지고 있다고 말한다.
앨런 라이트먼은 이 책을 통해 과학자이자 작가로서의경력, 그리고 남편이자 아버지로서의 경험을 살려 세상의 다양한 모순을 살펴보고 있다. 우리는 왜 유한한 삶을 살면서도영원을 꿈꿀까? 왜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자녀를 보며기뻐하면서도 다 큰 자식을 보면서 어린 시절의 모습을 그리

워할까? 그는 자신은 분명 무신론자이고, 물리적 우주의 모든 속성과 사건들이 법칙의 지배를 받으며 그 법칙들이 시간과 공간에 상관없이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과학의 핵심 교리를 100퍼센트 믿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신의 존재를 애써 부정하려 드는 과학자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과학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질서‘가 존재하는 공간을 인정한다. 그는 이 작지만 작지 않은 책을 통해 과학과 종교, 영성, 예술, 문학의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
이 책은 ‘과학의 결‘과 ‘인문학의 결‘을 어긋남 없이 살갑게어울렀다. 이것이 바로 물리학과 인문학을 아우르고 있는 저자의 힘이 아닌가 싶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서 이런 인문학적 소양이 아쉽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우리는 학생 시절부터분명한 답이 존재하는, 그것도 단 하나의 답만 존재하는 문제를 푸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인지 물고기가 물이 없는 세상에는 생명체가 살 수 없으며 모든 세상은 반드시 물로 채워져야 한다고 우기는 것처럼, 모두 자신의 우주가 이 세상의 유일한 우주라 주장하고 우긴다. 하지만 ‘다름‘을 관통하는 ‘같음‘을 바라볼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우리는 서로의 차이를존중하고 화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독자 여러분도 이 책에 소개

된 일곱의 우주 옆에 자기만의 우주를 하나씩 마련해서 서로를 초대해보면 어떨까. 나와 다른 우주를 바라보며 삶을 관통하는 ‘같음‘을 통찰해보자.
2016년 4월김성훈

아름답고 정제된 언어로경이로움의 불꽃을 일으키는 귀중한 과학 저자다산북스에서 출간하는 앨런 라이트먼의 책

초월하는 뇌

인간의 뇌는 어떻게 영성, 기쁨, 경이로움을 발명하는가앨런 라이트먼 지음 김성훈 옮김앨런 라이트먼이 뇌과학, 철학, 심리학을 넘나들며 파헤친 인간의 의식과 영혼의 비밀. 지금껏 한 번도 속 시원하게 해결된 적 없는 까다로운 질문, "물질적인 뇌가 어떻게 자아, 영혼 같은 비물질적이고 초월적인 경험을 가능케 하는가"에 대해 응답한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데카르트, 아인슈타인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의식과 경험에 관한 인류최고 지성의 사유와, 과학의 최전선에서 최신 이론을 만들어내는 동시대 과학자들과의 대화를 바탕으로 과학적 세계관과 인간의 초월적경험 사이에 이 둘이 양립할 수 있는 새로운 자리를 개척한다.

과학이 세상을 바꾼 순간

인류의 삶을 바꾼 22가지 과학 혁명의 순간들앨런 라이트먼 지음 박미용 옮김 이성렬, 김경순, 김창규 논문 옮김앨런 라이트먼이 집대성한 20세기 과학사. 과학사에서 가장 위대한발견을 이끌어낸 천재 과학자들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그들을 가장잘 보여주는 기록인 원전 논문을 다룬다. 막스 플랑크의 양자 발견부터 프랭클린 • 왓슨. 크릭의 DNA 구조 발견을 거쳐 폴 버그의 인공 생명체까지. 현대 과학 최고의 발견과 그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한 권의책으로 소개한다. 현대 과학의 제반을 설명하고, 그 발견을 이룬 천재들이 어떻게 사고했는지 탐색하는 이 책은 창의성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지극히 거대한 공간 속 작은 존재로서
우리는 우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MIT 천재 물리학자이자 인문학 교수,
앨런 라이트먼이 들려주는 인간 존재와 우주의 신비


"이 세상에는 분명 우주에 관한 서로 다른 수많은 관점이 존재한다. 이책은 그중 7가지 관점을 탐험할 것이다. 이 탐험을 통해 우리는 과학과 종교 사이의 대화, 영원을 갈구하는 인간의 욕망과 자연의 덧없는 본질 사이에서 빚어지는 충돌, 인간의 존재가 그저 하나의 우연에 불과할 가능성, 현대 기술이 우리가 세상을 직접 경험하지 못하도록 단절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나아가 거대한 공간 속에 서 있는 작은 존재로서, 우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_시작하는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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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데노사우니‘ 민주주의의 또 다른 이름

‘하우데노사우니 Haudenosaunce‘ (정착형 식민주의자들은 이로쿼이 연합Iroquois League 이라고 불렀다)는 공통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위해 함께 모인 북아메리카 지역의 다양한 토착민족 연합이었다. 처음에는 세네카족, 카유가족, 오노다가족, 오나이더족, 모호크족이있었고, 나중에는 투스카로라족도 합류했다. 대평화법률 Great Layof Peace에 따라 살던 하우데노사우니 구성원들은 스스로를 통치할 새로운 방식을 찾던 영국 식민주의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하우데노사우니도 대의제 정부였다. 족장이라 부르는 여러 임원이 각 부족을 대표했으며, 이 대표자는 총 50명이었다. 이들은 의회에서 만나 협동해서 결정을 내렸는데, 결정을 내릴 때는 만장일치가 되어야 했다. 
대법률Great Law은 추가조항 117개로 이뤄져 있었고, 그 가운데 많은 조항이 의회의 권력을 제한하며, 보다 중요하거나 시급한 사안은 대비책으로 총투표를 거쳐 결정을 내린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남성 족장들은 여성인 씨족 우두머리들이 선정했으며, 같은 가족 안에서 다음 세대로 역할을 물려줄 수 있었으나, 새로운 족장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는 얼마

든지 간단히 철회할 수 있었다. 전통적으로 보존되었던 기록과 고고학적 조사를 결합해 살펴보면, 하우데노사우니 연합은 아무리 못해도 서기 1150년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이는 현존하는 의회 가운데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것이다(서기 930년부터 시작된 아이슬란드 국회에 뒤이어 두 번째다). 
1642년에 새로운 정착지인 뉴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 네덜란드 변호사 아드리안 반 데르 동크에 따르면, 하우데노사우나는 "본질적으로 모두 자유로우며, 그 위에는 어떤 지배 권력도 없다"라고 한다.

하우데노사우니는 실용적이고도 실제로 기능하고 있는 민족 연합의 사례를 미국인들에게 보여주었다. 그전에는 정치철학만 지니고 있던 이들이었다. 영국 철학자 존 로크가 모든 사람에게 태어나면서부터 특정한 권리를 보장하는 자연법이 있고,
또 사람들은 이 권리를 유지하기 위해 정부와 사회적인 계약을 맺는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이것이 실제로 어떤 모습인지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적어두지 않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정부의 사법부, 입법부, 행정부를 분리해 권력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스키외도 마찬가지였다. 유럽의 실천이 참고로 삼을 만큼 현실화된 이론은 없었다. 반역을 일으키며 새롭게 등장한 유럽계 미국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은하우데노사우였다.
그렇지만 이 새로운 체제가 문명적인 것인가가 문제였다.

실질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확실히 실현 가능한 체제라고 여겨졌다. 
1751년, 벤저민 프랭클린은 이렇게 적었다. "무지한 야만인 민족 여섯 곳이 그런 연합을 만드는 계획을 세우는 능력이 있다고 하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 그렇지만 이런 연합이 필요한 영국 식민지가 열 개쯤 된다 하더라도, 영국 식민지에다 이런 연합체를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는 어떻게 하면 새로운 정부가 과거에 비해서 발전한 것으로 여겨지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를 남겼다. 프랭클린, 토머스 제퍼슨, 존 애덤스 같은 정착형 식민주의자들이 보기에,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는 당연히 덜 발전된 곳이었다. 정착민들에게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군주제가 발달하기 이전 정부가 어떤 모습이었을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표본이었다. 미국 독립혁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상가 가운데 한 명인 토머스 페인은 이렇게 말했다.
"사회의 상태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이해하려면, 인간의 자연스럽고 원초적인 상태를 어느 정도 파악해야 한다. 오늘날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서 볼 수 있는 바로 그 모습 말이다." 토착민들의 정부 체제와 생활 방식은 거부할 수 없이 매력적이었지만, 여기에는 한계도 있었다. 페인은 자신이라든가 동료 정착형 식민주의자 같은 진보한 유럽인들이 "문명화된 상태에서 자연 상태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현대적인 서양의 민주주의가 이 진퇴양난을 해결한 것은 철학적인 타협안을 통해서였다. 모든 사람이 관여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직접 민주주의가 목적에 적합하지 않다면, 자유 민주주의가 그 역할을 대신 맡을 수가 있었다. 미국 헌법 제정자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하우데노사우니의 ‘야만적인‘ 양상이라 여겼던 것들 상당수를 떼어놓을 수 있어 달가워했다. 

이들은 여성의 권력과 책임과 연계를 맺고 있던 씨족 기반 시스템을 무시하고 고전적인 모델을 따랐다. 이들이 하우데노사우니에서 취해온 딱 한 가지는 연방제였다. 하나의 국가 안에 있는 독립적인 자치주들이 집합적인 의사결정이 필요할 때면 자신들의 대표들로 중앙정부를 구성하는 방식 말이다. 그렇지만 여기서도 이들은교묘한 속임수를 부린다. 이들이 얘기하는 ‘대표의 기적miracleof representation‘을 이용해서 말이다. 이런 식이다. 국민의 의지가 대표된 것은 국민의 실제 의지와 동일하다. 그리고 이는 합당하다고 느껴진다. 아테네식 모델과 비교해본다면 미국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연방공화국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개별주의 정부는 이를 지배하는 국가 차원의 정부를 동반했다. 

국민은 이 두 정치체 가운데 어느 한 쪽에 직접 권력을 행사하지 않고, 임원을 선출해 자신들 대신에 권력을 행사하도록 한다. 
미국의 정부 모델은 유권자들이 스스로 권력을 지니는 골칫거리가 없게끔, 즉 유권자들이 스스로 진정한 권력을 지니는 이득을 누릴 수 없게끔, 모든 의사결정을 가로막았다.

영국 민주주의의 발전은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거의 똑같은 결과로 끝이 난다. 영국은 자신들이 혁명을 거쳐 민주주의에

부시와 조지 W. 부시 같은 미국의 아버지와 아들 대통령부터.
케네디가, 루즈벨트가, 트뤼도가 같은 정치적인 왕조들까지 말이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적합한가에 관한 철학적인 우려는 바로 이런 평범한 사람들을 억압하는 데에 유용하게 쓰였으며, 반대하는 사람들을 진압하는 데에도 활용되었다. 특히 몇 세기 내내 인간 이하라고 여겨진 사람들을 상대로 말이다. 미국에서는 이것이 지능과 문맹률 시험이라는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는 사람들, 특히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투표권을 박탈하기 위해 설계한 것이었다. 여성에게도 똑같은 효과를 내기 위해 다양한 주장들을 활용했다. 여성은 오랫동안 선거권을 거부당했다. 선거권을 행사하기에는 사회적으로나 지적으로나 필요한 요소를 제대로 갖추지못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신분증을 제시해야 한다거나, 접근이 어려운 투표소라거나, 제한적인 투표 시간 같은 다른 요소들과 결합함으로써, 19세기 프랑스의 외교관이자 학자였던 알렉시 드 토크빌이 밝혔던, 억압적인 다수결주의가 통치할 수 있다는 우려는 정말로 현실이 되었다.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는 자기 복제를 위해 설계된 것으로만 보일 정도다. 여기에는 기존의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강화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를 존재론적인 질문으로 이끈다. 민주주의는 내재적으로 결함이 있는 것일까?

이른 것이 아니라, 서서히 일어난 일련의 개혁들을 거쳐 이르렀다는 점에서 자신들이 민주주의 역사 속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이야기는 앞에서 살펴보았다. 마그나 카르타에서 시작해, 19세기의 영국 권리장전과 여러 개혁을 거치며, ‘자유로운 사람‘의 정의가 점점 넓어져 여성까지 포함하게 되었고, 그렇게 1928년에 보편적인 투표권에 도달한 것이다.

그 결과, 영국이라는 국가는 일종의 키메라가 되었다. 서로 다른시기에 다양한 방식으로 끼워 맞춘, 서로 다른 우선순위와 이데올로기에 얽혀 있는 법과 개혁이 한데 모여 민주주의라는 형상을 이루는 것이다. 이번에도 역시나 실제로는 민주주의가 아닌 채로 말이다. 설령 영국이 실제로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그리고 왕과 민주주의가 섞이지 않는다는 것은 잘알려진 사실이다. 심지어는 로마인들도 알고 있었다), 영국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아테네식 모델보다는 공화국 모델에 더욱 가깝다.

아테네식 정부 모델은 직접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이는 사람들이 선거를 거쳐서 정부에서 자신들을 대표해줄 정치적 지도자를 임명하는 대의제 민주주의와는 반대된다. 

현대 서양에서는, 그리고 보다 광범위하게 본다면 서양식 민주주의에서는, 바로 이런 대의제 민주주의 모델이 장악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직접 모든 결정을 내리지 않고, 크고 중요한 결정을 내려달라며 맡기는 선출된 소수의 손에 권력을 양도하는 것이다. 

자유 민주주의에서는 정부의 서로 다른 구성 요소들 사이에 권력

이 분리되어 있어 균형을 유지한다. 이런 구성 요소들이 어떤 것인지는 해당 시대와 민주주의가 어떤 것인가에 달려 있다. 미국에서는 권력이 입법부(법을 만드는 곳), 사법부(법을 집행하고 해석하는 곳), 행정부(대통령) 사이에 나뉘어 있다. 반면, 1688년 명예혁명 이후 영국의 민주주의가 시작할 무렵에는 군주와 의회 사이에 권력이 나뉘어 있었다. 의회는 상원에 있는 귀족과 하원으로 대표되는 나머지 사람들로 이뤄져 있었다.
군주의 힘이 예전과는 확연히 다르다 할지라도, 영국이 국회와 정부를 운영하는 방식을 슬쩍 보기만 해도 고대 아테네 사람들은 못마땅해할 것이다. 사실 권력은 꾸준하게도 그리고 냉혹하게도 훨씬 더 제한된 소수의 사람에게만 양도되어 있음에도, 국민에게 권력이 있는 정부라는 말을 들으면 고대 아테네 사람들은 깜짝 놀랄 것이다. 우리가 하원의원들을 선출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유권자 전반은 정부의 나머지 절반을 이루는 상원에 임명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가 없다. 그리고 의회 안에서만 놓고 보자면, 권력은 여당에게 있으며, 다시 그 안에서 내각과 궁극적으로는 총리에게 권력이 위임된다. 고대 아테네 사람들은 선거를 못 미더워했다. 애초에,
그리고 내재적으로, 분열을 일으킬 수밖에 없으며, 사회적인 엘리트나 이미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했기때문이다. 다시 말해, 서양식 대의제 정부를 놓고 본다면, 고대아테네들은 우리가 겪는 문제가 일어나리라는 사실을 2500년

전에 이미 알고 있었으며, 이런 문제를 피하고자 갖은 노력을 다했다.


민주주의는 없다

고대 아테네 사람들이 선거에 의구심을 품었던 것은 무척 일리가 있어 보인다. 선거에서 당선되어 관청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말이다. 

오늘날에는 ‘과두제 집권층oligarch‘이라는 말 앞에 ‘러시아‘가 붙는 일이 가장 일반적이지만, 실상을 살펴보면 이는 러시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지금이든 옛날이든, 제한된 소수가 통치한다는 관념은 보편적이었다. 선거에 이겨서 지배력을 독점한다고 해서, 그 소수의 지배층이 훌륭한 통치를 선보이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능력과 실제로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은 서로 다른 능력이라는 사실이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다. 
최근 우파 정당들은 만약에 선거에서 이기는 데에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더욱 극단적인 입장들도 포용할 수 있다는 뜻을 분명하게 밝혔다. 또, 체현된 정치 계급이라는 확실한 증거도 있다. 자신이 받은 교육 덕분이라든가 특정한 직업에서 거둔 성공 덕분에 더 좋은 자리에 올라 성공을 거두는 정치인들 말이다. 서양의 민주주의는 왕조 권력에도 아주 능통하다. 존 애덤스와 존 퀸시 애덤스, 조지 H. W.

부시와 조지 W. 부시 같은 미국의 아버지와 아들 대통령부터,
케네디가, 루즈벨트가, 트뤼도가 같은 정치적인 왕조들까지 말이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적합한가에 관한 철학적인 우려는 바로 이런 평범한 사람들을 억압하는 데에 유용하게 쓰였으며, 반대하는 사람들을 진압하는 데에도 활용되었다. 
특히 몇 세기 내내 인간 이하라고 여겨진 사람들을 상대로 말이다. 미국에서는 이것이 지능과 문맹률 시험이라는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는 사람들, 특히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투표권을 박탈하기 위해 설계한 것이었다. 여성에게도 똑같은 효과를 내기 위해 다양한 주장들을 활용했다. 여성은 오랫동안 선거권을 거부당했다. 선거권을 행사하기에는 사회적으로나 지적으로나 필요한 요소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신분증을 제시해야 한다거나, 접근이 어려운 투표소라거나, 제한적인 투표 시간 같은 다른 요소들과 결합함으로써, 19세기 프랑스의 외교관이자 학자였던 알렉시 드 토크빌이 밝혔던, 억압적인 다수결주의가 통치할 수 있다는 우려는 정말로 현실이 되었다.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는 자기 복제를 위해 설계된 것으로만 보일 정도다. 여기에는 기존의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강화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를 존재론적인 질문으로 이끈다. 민주주의는 내재적으로 결함이 있는 것일까?

배치가 되어 있고 서로 간격도 넉넉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오스트레일리아 내륙을 설명하며 로버트 다우슨이라는 영국 정착민은 이렇게 썼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여행객들이 가는 길은보통 숲 사이로 나 있다. 여기서는 나라가 원경으로 보인다. 원시적인 사회와 문명적인 사회가 유쾌하게 뒤섞여 있는 모습이다." 
다우슨과 같은 유럽인들은 오스트레일리아의 풍경을 꾸준하게 "공원 park"이라 설명했다. 인클로저 운동이 증가하던 시기에는 오로지 한 가지 의미만 지니는 말이었다. 바로 의도적으로 관리를 하고, 관습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이 소유하는 땅이라는 뜻이었다. 호화롭고 부유한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이 소유한 곳이 아닌데도 공원이 있다는 사실은 유럽인들이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다.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이 편리하기도 했다.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계몽주의의 합리적인 원칙에 따르면 오로지 ‘적극적으로‘ 관리가 되는 곳이어야 땅을 소유한다고할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백인 정착민들이 대륙 전체를 마음대로 할 수가 있었다. 유럽인들의 눈에는땅에 아무런 관리 활동도 이뤄지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또 이들의 눈에는 자신들의 식민지 정착지를 가로막을 진짜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최초의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을 인간 이하로 바라보는 관념은 땅과 사람 모두에게 파괴적인 결과를 낳게 되었고, 이는 지금도 여러모로 이어지고 있다. 다윈에 이어서 고고학자들

과 인류학자들은 최초의 오스트레일리아인들, 특히 태즈매이니아 섬에 살던 사람들은 살아 있는 인간보다는 화석에 더 가깝다고 여겼다. 어떤 사람들은 태즈메이니아 사람들이 진화의 사슬을 이루는 미싱 링크라며, 현생 인류와 과거 조상들을 이어준다고 바라보았다. 그렇게 해서 이들은 서양이 만든 틀 속에 가만히 얼어붙어,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일종의 민속학적 현재가 되었다. 바로 이것이 몇몇 학자들이 얘기하는 인간의 역사화다.
즉, 한 집단을 특정한 시기에 갇혀 있는 것으로 보고, 또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문명화의 척도 중에서 특정한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고유한 시간이 묵살된다는 것

그 뒤로 한 세기 동안 최초의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을 바라보는 서양의 시각은 그 당시에 지배적인 학문적 사상에 따라 달라졌다. 
20세기 초에 우생학의 인기가 높아지자, 최초의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은 "하프 카스트 half-caste 문제"의 초점이 되었다. 간단히 얘기하자면,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과 백인 정착민 식민주

블랙풋이 욕구단계설에 끼친 영향

나는 라이언 헤비 헤드의 강연에서 매슬로가 시크시카에서 지

냈던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그는 혼인을 통해 블랙풋국의 일원이 되었고, 방울뱀을 퇴치하며, 레드 크로 칼리지에서 카이나이Kainai학을 가르친다. 그의 전문 지식은 직접 겪은 문화적 경험,
기록 연구(오하이오주의 애크론에 있는 미국 심리학 역사 기록 보관소에 소장된 매슬로의 공책, 편지, 논문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당시 현장을 지켰던 부족 원로와 한 인터뷰의 결합이다. 
헤비 헤드는 베네딕트의 제자이자 매슬로의 가이드였던 제인 리처드슨이 사망하기 전, 106세였던 2014년에 직접 만나 인터뷰도 했다. 그러니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양쪽의 이야기를 모두 들려줄 수있는 사람이다.
헤비 헤드의 얘기대로라면, 제인은 매슬로라는 짐이 더해졌다는 사실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매슬로는 제인의 계획과 조언을 모두 무시했으며, 오로지 자기 연구만을 위해 앞만 보고 돌진하며, 자신의 설문지에 대한 답을 블랙풋족 원로들에게 얻어내려 했다. 원로들은 그에게 비협조적이었다. 실제로 원로들은 자기 얘기를 들려주거나, 자신들을 공동체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는 일을 딱 잘라 거절했다. 매슬로가 계속 물어보자, 원로들은 매슬로가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인 것처럼 못 본 척했다.
데이터를 얻기 위해 절박했던 매슬로는 비교적 나이 어린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접근했는데, 그 바람에 원로들은 그만두지 않으면 매슬로를 쫓아내겠다고 협박했다. 결국 매슬로는 심리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제인의 조언에 따라 인류학자

가 되는 편을 택했다. 그는 자신이 관찰한 것이면 무엇이든, 블풋족이 자신에게 공유해 주려 하는 내용이면 무엇이든 기록했다. 
사실상 다른 문화가 지닌 복잡한 면모를 당사자의 관점에서 기록하는, 아주 보애스적인 기법을 채택했던 것이다. 제인 리처드슨과 또 이 여정에 함께한 제3의 구성원인 루시엔 행크스가 담배 농사와 연관된 기술, 상징주의, 철학을 주의 깊게 기록하는동안, 매슬로는 공동체 구성원 개개인이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가 관찰한 한 가지는 바로 전달 의례ransfer ceremony였다. 전달 의례는 블랙풋족 달력에서 중요한 시기에 일어나는 의례였는데, 여러 가족이 한 해 동안 축적한 새로운 것들을 펼쳐놓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는 자리였다. 매슬로 입장에서는 설명하기 불가능하다시피 한 의례였다. 만약에 브루클린에 있는 자기 집에서 똑같은 행동을 한다면, 모든 것을 잃고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터였다. 
그렇지만 시크시카에 있는 블랙풋족에게는 개인적인 이득은 아무런 문화적인 가치가 없었다. 매슬로가 그 밖에 또 크게 놀랐던 점은, 바로 물질적인 부도 없고 사회적으로 우월한 위치가 아니었음에도 자신이 만난 거의 모든 블랙풋족 사람들은 자아 안도감 수준이 높다는 사실이었다.
매슬로는 자존감이 사회적 우월성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이런 상태를 이룩할 수 있었는지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블랙풋족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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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발전과 또 후쿠야마의 주장을 고려해본다면, 민주주의라는 이상 속에는 민주주의가 서양 문명의 자연스러운 종착지라는 생각이 담겨 있다. 

J. G. 프레이저가 미신에서 종교로 그리고 마침내 합리성으로 변화하는 것이라 상정하거나, 영국의 고고학자 존 러벅이 이른바 진보란 수렵채집 경제에서 농경으로, 그리고 국가의 발달로 이어지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처럼, 
절대적인 군주제, 과두 정치, 또는 신권 정치라는 야만적인 상태는 최종적인 종착지를 향해 가는 길에 반드시 거치는 단계였던 것이다. 바로 문명화된 민주주의라는 종착지 말이다.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문명적인 사회의 핵심 축으로 그려진다. 다른 모든 문명적인 이상들의 바퀴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붙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자유 시장 경제, 사회적 이동의 자유가 있는 능력주의 사회,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법이 통치하는 법치주의를 말이다. 
사회 복지, 보편적인 교육과 정치 참여를 보장하고, 예술 문화 활동 공간을 제공하는 정부 체제다. 
민주주의를 실시하지 않는다면, 문명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다는 것이 여전히 공통적인 의견으로 남아 있다. 
그렇기에 고등학교 토론 대회에서 민주주의는 이길 수 있는 선택이었다.
앞선 장들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서양 문명을 한데 묶어

주는 진정한 이상은 바로 사회적 위계라는 관념이다. 그리고 위계질서는 진정한 민주주의와 정반대되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본다면, 민주주의는 평등과 자유가 교차하는 지점이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본다면 민주주의는 이런 사상들이 끊임없이 패배를 겪은 지점이었다. 
인종과 계급이라는 사회적 불평등과 더불어, 젠더와 장애 여부를 바탕으로 하는 불평등이 서양 사회에는 너무나 깊이 새겨져 있어, 실제로는 자유도 평등도 전혀 가능하지 않은 수준이다. 
그렇다면, 그 연장선상에서 본다면, 서양에서는 민주주의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이 합당하다. 

그렇다면 수많은 질문이 생겨난다. 민주주의는 어떻게 해서 계속 이렇게 강력한 브랜드로 유지되고 있는 것일까? 
어째서 그렇게나 많은 사람이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는 사상을 계속해서 믿고 있는 것일까? 

서양 민주주의라는 브랜드가 지닌 힘은 과연실제로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또, 정말로 서양의 통치 체계를구성하고 있는 사상들은 무엇일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테네 사람들도 시민들의 정치적인 대표자를 선출하기는했지만, 오늘날 대표자를 대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대우했다. 그 사람들에게는 호화로운 집도, 전용차나 전용기도 없었다. 아테네의 대표들은 추첨, 또는 복권을 이용해 정해졌다.

장차 대표가 될 후보자들은 스스로 입후보를 했고, 선별 기계가 이들의 청동 토큰을 뽑으면 일을 맡게 되는 것이었다. 임명된 사람들이 일을 수행하지 못하거나, 부패하거나, 심지어는 전반적으로 별로 쓸모가 없다고 판단되면 추방이라는 벌을 받았다. 도시국가 전역에서 10년 동안 추방되는 것이었다. 통치자들 역시도 잘못된 행동이나 나쁜 결정을 내리면 배심원단에게 재판을 받을 수도 있었으며, 유죄라고 확정될 경우 사형을 선고받을 수도 있었다. 

아테네 민주주의는 확실히 200년을 이어져온, 대단히 참여적이고 효과적인 정부 체제였다. 이 방식이 멈춘 것은 아테네라는 도시가 이웃 도시인 스파르타의 제국주의적 열망에희생되었을 때였다.


민주주의의 ‘승리‘는 결코 따놓은 당상이었던 적이 없었다.
‘민중‘과 ‘권력‘을 뜻하는 그리스어를 결합한 이 말은, 이 관념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가장 먼저 사용했다. 

역사 속에서 민주주의의 적들은 줄곧 단 한 가지 비판을 제기하고 또 제기했다. 
자신들이 보기에 민주주의의 치명적인 결함이라 생각하는 것에 매달리면서 말이다. 
이들의 논지는 간단히 얘기하자면 정치에 참여하여 스스로를 통치하려는 사람들이 최악이라

는 점이었다. 
플라톤의 『국가>에 나온 소크라테스는 
평균적인 고대 그리스 시민에게 그 어떤 신뢰도 품고 있지 않았다.

그 자는 때로 플루트 소리를 들으며 거하게 술을 마신다. 또 어떨 때는 물만 마시며 식단을 조절한다. 어떨 때는 몸을 단련하러 간다. 또 어떤 때는 게으르게 지내며 모든 것들을 무시한다. 그리고 때로는 자신이 철학이라 생각하는 것에 골몰한다.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가 미화된 중우정치와 다를 바 없다고 바라보았다. 

집합적이고,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가난한 시민들이 부유하고 잘 교육받은 소수를 통치할 힘을 지닌다는 것은 세상이 거꾸로 뒤집힌 꼴이고, 야만인이 문명화된 사람들을 통치하는 것과 같았다.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던 고대 그리스인들, 그러니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부유하고 교육을 많이 받은 유한계급 엘리트들은 어떻게 가난한 다수가 부유한 소수를 통치할 수가 있냐며 괴로워했다. 

이들의 의문은 이것이었다. 대체 왜 민중이 통치하는 정부를 원한단 말인가? 

그보다 몇백 년이 흐른 뒤 헤겔은 민주주의야말로 가장 합리적인 형태 정부라고 이야기했지만, 민주주의의 역사 전반에서 주된 걱정거리는 민중이 합리적일 것이라고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는 점이 만회되지는 않았다. 

‘하우데노사우니‘ 민주주의의 또 다른 이름

‘하우데노사우니 Haudenosaunce‘ (정착형 식민주의자들은 이로쿼이 연합Iroquois League 이라고 불렀다)는 공통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위해 함께 모인 북아메리카 지역의 다양한 토착민족 연합이었다. 
처음에는 세네카족, 카유가족, 오다가족, 오나이더족, 모호크족이 있었고, 나중에는 투스카로라족도 합류했다. 대평화법률 Great Lawof Peace에 따라 살던 하우데노사우니 구성원들은 스스로를 통치할 새로운 방식을 찾던 영국 식민주의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하우데노사우니도 대의제 정부였다. 족장이라 부르는 여러 임원이 각 부족을 대표했으며, 이 대표자는 총 50명이었다. 
이들은 의회에서 만나 협동해서 결정을 내렸는데, 
결정을 내릴 때는 만장일치가 되어야 했다.

 대법률Great Law은 추가조항 117개로 이뤄져 있었고, 그 가운데 많은 조항이 의회의 권력을 제한하며, 보다 중요하거나 시급한 사안은 대비책으로 총투표를 거쳐 결정을 내린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남성 족장들은 여성인 씨족 우두머리들이 선정했으며, 같은 가족 안에서 다음 세대로 역할을 물려줄 수 있었으나, 새로운 족장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는 얼마

든지 간단히 철회할 수 있었다. 
전통적으로 보존되었던 기록과 고고학적 조사를 결합해 살펴보면, 
하우데노사우니 연합은 아무리 못해도 서기 1150년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이는 현존하는 의회 가운데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것이다(서기 930년부터 시작된 아이슬란드 국회에 뒤이어 두 번째다). 
1642년에 새로운 정착지인 뉴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 네덜란드 변호사 아드리안 반 데르 동크에 따르면, 
하우데노사우나는 "본질적으로 모두 자유로우며, 그 위에는 어떤 지배 권력도없다"라고 한다.
하우데노사우니는 실용적이고도 실제로 기능하고 있는 민족 연합의 사례를 미국인들에게 보여주었다. 그전에는 정치철학만 지니고 있던 이들이었다. 
영국 철학자 존 로크가 모든 사람에게 태어나면서부터 특정한 권리를 보장하는 자연법이 있고,
또 사람들은 이 권리를 유지하기 위해 정부와 사회적인 계약을 맺는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이것이 실제로 어떤 모습인지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적어두지 않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정부의 사법부, 입법부, 행정부를 분리해 권력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스키외도 마찬가지였다. 유럽의 실천이 참고로 삼을 만큼 현실화된 이론은 없었다. 
반역을 일으키며 새롭게 등장한 유럽계 미국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은하우데노사우니였다.
그렇지만 이 새로운 체제가 문명적인 것인가가 문제였다.

실질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확실히 실현 가능한 체제라고 여겨졌다. 
1751년, 벤저민 프랭클린은 이렇게 적었다. "무지한 야만인 민족 여섯 곳이 그런 연합을 만드는 계획을 세우는 능력이 있다고 하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 그렇지만 이런 연합이 필요한 영국 식민지가 열 개쯤 된다 하더라도, 영국 식민지에다 이런 연합체를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는 어떻게 하면 새로운 정부가 과거에 비해서 발전한 것으로 여겨지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를 남겼다. 

프랭클린, 토머스 제퍼슨, 존 애덤스 같은 정착형 식민주의자들이 보기에,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는 당연히 덜 발전된 곳이었다. 정착민들에게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군주제가 발달하기 이전 정부가 어떤 모습이었을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표본이었다. 

미국 독립혁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상가 가운데 한 명인 토머스 페인은 이렇게 말했다.
"사회의 상태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이해하려면, 인간의 자연스럽고 원초적인 상태를 어느 정도 파악해야 한다. 오늘날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서 볼 수 있는 바로 그 모습 말이다." 토착민들의 정부 체제와 생활 방식은 거부할 수 없이 매력적이었지만, 여기에는 한계도 있었다. 페인은 자신이라든가 동료 정착형 식민주의자 같은 진보한 유럽인들이 "문명화된 상태에서 자연 상태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현대적인 서양의 민주주의가 이 진퇴양난을 해결한 것은 철학적인 타협안을 통해서였다. 모든 사람이 관여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직접 민주주의가 목적에 적합하지 않다면, 자유 민주주의가 그 역할을 대신 맡을 수가 있었다. 
미국 헌법 제정자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하우데노사우니의 ‘야만적인‘ 양상이라 여겼던 것들 상당수를 떼어놓을 수 있어 달가워했다. 이들은 여성의 권력과 책임과 연계를 맺고 있던 씨족 기반 시스템을 무시하고 고전적인 모델을 따랐다. 이들이 하우데노사우니에서 취해온 딱 한 가지는 연방제였다. 하나의 국가 안에 있는 독립적인 자치주들이 집합적인 의사결정이 필요할 때면 자신들의 대표들로 중앙정부를 구성하는 방식 말이다. 그렇지만 여기서도 이들은 교묘한 속임수를 부린다. 이들이 얘기하는 ‘대표의 기적miracleal representation‘을 이용해서 말이다. 이런 식이다. 국민의 의지가 대표된 것은 국민의 실제 의지와 동일하다. 그리고 이는 합당하다고 느껴진다. 
아테네식 모델과 비교해본다면 미국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연방공화국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개별 주의 정부는 이를 지배하는 국가 차원의 정부를 동반했다. 국민은 이 두 정치체 가운데 어느 한 쪽에 직접 권력을 행사하지 않고, 임원을 선출해 자신들 대신에 권력을 행사하도록 한다. 미국의 정부 모델은 유권자들이 스스로 권력을 지니는 골칫거리가 없게끔, 즉 유권자들이 스스로 진정한 권력을 지니는 이득을 누릴 수 없게끔, 모든 의사결정을 가로막았다.
영국 민주주의의 발전은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거의 똑같은 결과로 끝이 난다. 영국은 자신들이 혁명을 거쳐 민주주의에

이른 것이 아니라, 서서히 일어난 일련의 개혁들을 거쳐 이르렀다는 점에서 자신들이 민주주의 역사 속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이야기는 앞에서 살펴보았다. 
마그나 카르타에서 시작해, 19세기의 영국 권리장전과 여러 개혁을 거치며, ‘자유로운 사람‘의 정의가 점점 넓어져 여성까지 포함하게 되었고, 그렇게 1928년에 보편적인 투표권에 도달한 것이다.
그 결과, 영국이라는 국가는 일종의 키메라가 되었다. 서로 다른 시기에 다양한 방식으로 끼워 맞춘, 서로 다른 우선순위와 이데올로기에 얽혀 있는 법과 개혁이 한데 모여 민주주의라는 형상을 이루는 것이다. 이번에도 역시나 실제로는 민주주의가 아닌 채로 말이다. 설령 영국이 실제로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그리고 왕과 민주주의가 섞이지 않는다는 것은 잘알려진 사실이다. 심지어는 로마인들도 알고 있었다), 영국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아테네식 모델보다는 공화국 모델에 더욱 가깝다.

아테네식 정부 모델은 직접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이는 사람들이 선거를 거쳐서 정부에서 자신들을 대표해줄 정치적 지도자를 임명하는 대의제 민주주의와는 반대된다. 

현대서양에서는, 그리고 보다 광범위하게 본다면 서양식 민주주의에서는, 바로 이런 대의제 민주주의 모델이 장악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직접 모든 결정을 내리지 않고, 
크고 중요한 결정을 내려달라며 맡기는 
선출된 소수의 손에 권력을 양도하는 것이다. 자유 민주주의에서는 정부의 서로 다른 구성 요소들 사이에 권력

이 분리되어 있어 균형을 유지한다. 이런 구성 요소들이 어떤 것인지는 해당 시대와 민주주의가 어떤 것인가에 달려 있다. 
미국에서는 권력이 입법부(법을 만드는 곳), 사법부(법을 집행하고 해석하는 곳), 행정부(대통령) 사이에 나뉘어 있다. 반면, 1688년 명예혁명 이후 영국의 민주주의가 시작할 무렵에는 군주와 의회 사이에 권력이 나뉘어 있었다. 의회는 상원에 있는 귀족과 하원으로 대표되는 나머지 사람들로 이뤄져 있었다.
군주의 힘이 예전과는 확연히 다르다 할지라도, 영국이 국회와 정부를 운영하는 방식을 슬쩍 보기만 해도 고대 아테네 사람들은 못마땅해할 것이다. 

사실 권력은 꾸준하게도 그리고 냉혹하게도 훨씬 더 제한된 소수의 사람에게만 양도되어 있음에도, 국민에게 권력이 있는 정부라는 말을 들으면 고대 아테네 사람들은 깜짝 놀랄 것이다. 우리가 하원의원들을 선출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유권자 전반은 정부의 나머지 절반을 이루는 상원에 임명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가없다. 
그리고 의회 안에서만 놓고 보자면, 권력은 여당에게 있으며, 다시 그 안에서 내각과 궁극적으로는 총리에게 권력이 위임된다. 고대 아테네 사람들은 선거를 못 미더워했다. 애초에,
그리고 내재적으로, 분열을 일으킬 수밖에 없으며, 사회적인 엘리트나 이미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했기때문이다. 
다시 말해, 서양식 대의제 정부를 놓고 본다면, 고대아테네들은 우리가 겪는 문제가 일어나리라는 사실을 2500년

전에 이미 알고 있었으며, 이런 문제를 피하고자 갖은 노력을 다했다.


민주주의는 없다

고대 아테네 사람들이 선거에 의구심을 품었던 것은 무척 일리가 있어 보인다. 
선거에서 당선되어 관청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말이다. 오늘날에는 ‘과두제 집권층oligarch‘이라는 말 앞에 ‘러시아‘가 붙는 일이 가장 일반적이지만, 실상을 살펴보면 이는 러시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지금이든 옛날이든, 제한된 소수가 통치한다는 관념은 보편적이었다. 선거에 이겨서 지배력을 독점한다고 해서, 그 소수의 지배층이 훌륭한 통치를 선보이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능력과 실제로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은 서로 다른 능력이라는 사실이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다. 최근 우파 정당들은 만약에 선거에서 이기는 데에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더욱 극단적인 입장들도 포용할 수 있다는 뜻을 분명하게 밝혔다. 
또, 체현된 정치 계급이라는 확실한 증거도 있다. 자신이 받은 교육 덕분이라든가 특정한 직업에서 거둔 성공 덕분에 더 좋은 자리에 올라 성공을 거두는 정치인들 말이다. 

서양의 민주주의는 왕조 권력에도 아주 능통하다. 존 애덤스와 존 퀸시 애덤스, 조지 H. W.

부시와 조지 W. 부시 같은 미국의 아버지와 아들 대통령부터.
케네디가, 루즈벨트가, 트뤼도가 같은 정치적인 왕조들까지 말이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적합한가에 관한 철학적인 우려는 바로 이런 평범한 사람들을 억압하는 데에 유용하게 쓰였으며, 반대하는 사람들을 진압하는 데에도 활용되었다. 

특히 몇 세기 내내 인간 이하라고 여겨진 사람들을 상대로 말이다. 

미국에서는 이것이 지능과 문맹률 시험이라는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는 사람들, 특히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투표권을 박탈하기 위해 설계한 것이었다. 여성에게도 똑같은 효과를 내기 위해 다양한 주장들을 활용했다. 여성은 오랫동안 선거권을 거부당했다. 선거권을 행사하기에는 사회적으로나 지적으로나 필요한 요소를 제대로 갖추지못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신분증을 제시해야 한다거나, 접근이 어려운 투표소라거나, 제한적인 투표 시간 같은 다른 요소들과 결합함으로써, 19세기 프랑스의 외교관이자 학자였던 알렉시 드 토크빌이 밝혔던, 억압적인 다수결주의가 통치할 수 있다는 우려는 정말로 현실이 되었다.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는 자기 복제를 위해 설계된 것으로만 보일 정도다. 여기에는 기존의불평등을 재생산하고 강화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를 존재론적인 질문으로 이끈다. 민주주의는 내재적으로 결함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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