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는 원래 짐승을 통째로 구워 신전에 바치는 유대교의 제사인 전번제소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제 이런 의미는 사라지고 2차 대전 당시 나치에 의한 유대인의 대학살을 뜻한다. 이런 의미의 홀로코스트를 다룬 글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마텔은홀로코스트를 주제로 한 글들이 사실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한 데 주목하고, 홀로코스트 이야기에 상상력과 창조적인 비유를 더해 『베아트리스와 버질을 써냈다. 따라서 이 소설에서 홀로코스트는 나치의강제수용소에서 희생당한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세계화된 자본주의 현상을홀로코스트적 관점에서 보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베아트리스와 버질』은 분명 홀로코스트를 진하게 떠올리게 한다. 마텔은 홀로코스트에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질 만한 뚜렷한 이유가없다. 그는 유대인도 아니고 동유럽인도 아니다. 독일계도 아니다. 그는 홀로코스트에 관한 한 철저한 아웃사이더지만, 역사가 예술로표현되지 않는다면 인류의 기억에서 사라질 수 있다고 믿는 까닭에, 홀로코스트에 대한 소설을 써야 한다는 작가로서의 의무감을 느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렇게 좁은 의미에서만 읽을 것이아니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 헨리가 ‘모든 것을 홀로코스트적 관점에서 보려고 애썼다‘라고 말하듯이 시야를 넓혀야 한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홀로코스트적 관점에서 보면 어떻게 보일까?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상징적인 의미의 홀로코스트가 자행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저자가 소설의 배경을 특정한 도시로 삼지 않은 이유에서도 밝혀진다.
저자는 "소설의 배경을 특정한 도시로 한정하지 않은 이유는……내가 사는 도시에도 끔찍한 사건에 가담한 사람이 있고, 나는매일 그 사람과 만나면서도, 그 사람이 어떤 짓을 했는지는 모르고살아간다"라고 말한 바 있다. 베아트리스와 버질』에서도 「파이 이야기」처럼 많은 동물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살아 있는 동물이 아니라 박제된 동물이다.
박제. 요즘엔 듣기 힘든 단어다. 박제는 껍데기다. 속은 사라지고 없거나 완전히 감추어진 것이다. 왜 박제된 동물을 등장시켰을까?
왜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두 주인공, 베아트리체(영어식 이름은베아트리스)와 베르길리우스(영어식 이름은 버질)라는 이름을 동물들에게 붙여주었을까? 박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비유일지모른다. 속내를 감추고 겉으로만 반듯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들끓고, 어쩌면 우리 자신도 그런 모습인지 모른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껍데기만 인간을 닮은 존재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 올바른 길을 걷기 위해서는, 올바른 인간성을 찾기 위해서는 신곡에서처럼 베르길리우스와 베아트리체를 안내자로 삼아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여행하는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하면, 홀로코스트와 세상을 정확히 보려면 그런 안내자가우리에게 필요하다. 마텔은 당나귀 베아트리스와 원숭이 버질을 그
런 안내자로 우리에게 소개한다.
그렇다고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두 동물이 나누는 대화, 지독히 상징적인 대화와 소설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우리 스스로 방향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희곡의 인상적인 첫 부분에서 베아트리스와 버질은 배에 대해서긴 대화를 나눈다. 배를 본 적도 없고 먹어본 적도 없는 베아트리스를 위해 버질은 배의 모양과 빛깔과 촉감, 향과 맛과 식감 등 다양한면을 설명하고, 베아트리스가 익히 아는 개념, 사과와 바나나와 아보카도를 끌어들여 비교한다.
흔한 과일인 배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이렇게 어려울진대, 그 주제가 홀로코스트나 인간 삶이라면 어떻겠는가.
베아트리스와 버질이 자신들이 겪은 일을 말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표현과 개념을 고안하고 반짇고리에 기록하듯, 독자 역시스스로의 경험과 말이라는 한정된 도구를 통해 이 소설을, 그리고이 세상을 읽어나가게 될 것이다.
설령 마텔이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하더라도 그 방향은 마텔의 방향일 뿐이다. 우리가 굳이 그 방향을 선택해야 할 이유는 없다.
"내생각에 믿음은 햇살을 받으며 지내는 것과 비슷한 거야. 햇살을 받고 있을 때 그림자를 만들지 않을 수 있어?・・・・・・ 그림자는 의심을 뜻해. 햇살을 받고 있는 한 네가 어디를 가든 그림자는 따라다녀. 그런데 햇살을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라는 버질의 말처럼 세상에는 빛과 어둠, 확신과 의혹이 동시에 존재하지만, 흑과 백 둘 중하나만 선택하는 데 길들여진 우리는 이 둘을 동시에 포용하기가 힘
들어 항상 구체적인 답을 요구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답은 우리를들에 가두기 마련이다. 우리 스스로 구속복을 입는 셈이다. 올바른길을 걷기 위해서는 그러한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마텔은 그 방법의 하나로, 소설의 끝에 구스타브를 위한 게임을 제시했다. 한결같이 고민스러운 질문들이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질문들이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은 빈칸으로 남겼다. 그것은 결국 이 세상은 어떤식으로든 우리 각자가 채워가야 하는몫이라는 뜻이 아닐까? 충주에서 강주헌
「파이 이야기」 이후 9년, 얀 마텔의 신작 장편소설
모든 것이 끝나는 어느 날, 우리가 겪은 일들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겁에 질린 당나귀 베아트리스와 고민 많은 원숭이 버질이 시골길을 걸어간다. 그들은 배가 고프고 몹시 지쳐 있다. 버질은 등이 아프고, 베아트리스는 목이 아픈데다 한쪽 다리를 전다. 저물어가는 빛줄기는 그들이 보는 풍경에 세로줄무늬를 만들어낸다. 그들이 걷고 있는 곳은 ‘셔츠‘라는 나라의 등허리 지역이다.
의문의 희곡 「20세기의 셔츠」를 둘러싼우아하고 잔혹하고 환상적인 소설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채로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생각할 수도, 상상할 수도, 이름을 붙일 수도 없거니와 불처럼 뜨겁고 무시무시하며재앙이자 혼란인 그것에 대해. 하지만 그들은 마치 실어증에 걸린 것처럼, 목소리를 잃어버린 것처럼, 영혼과 혀를 갈가리 찢긴 것처럼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한다. 도대체 그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감춰진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발견한 진실을 잊지 않기 위해, 역사는 이야기로 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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