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칠 때마다 근육이 아깝다, 당장 돈 버는 일보다 더중요한 게 있지 않냐 같은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냥 제가 마음에 안 들어서 싫은 소리 하시는 건 줄만 알았는데…. 노미야가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마도 기대를 하고 계셨던 모양이야. 표현 방법이 거칠어서 잘 전해지지 않았지만 말이야. 몰랐던 게 당연하지. 나도 그랬는걸."
시바는 다정한 말투로 "사람의 속마음은 원래 알기가 어렵잖아" 하고 말했다.

"표정이나 말투만으로 판단하면 큰 착각을 하게 되지. 그럼 대체 뭘로 판단하나 싶겠지만, 

내 생각에는 행동 아닐까싶어. 

우라타 씨는 정말로 우리 가게에 오는 게 즐거우셨을거야. 그도 그럴게, 매일 제일 먼저 오셨잖아, 노미야한테 이런저런 뾰족한 말을 했던 것도 분명 우라타 씨 나름의 응원이었을 거야."
노미야가 묘하게 얼굴을 찡그렸다.

"아,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생각인데, 우라타 씨 생명에도지장 없고, 회복하면 곧 말씀도 하실 수 있을 것 같거든, 직접 만나서 대화를 한번 해 봐도 좋지 않을까?"

어때? 
시바가 미소를 머금은 채 
테이블 위에 놓인 노미야의 깍지 낀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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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몰아쳐 배가 요동치는데 나침반이 한 곳만 향한다면 그것은고장난 것이다. 나는 좌우 합작의 노선을 일관되게 고수하기 위해 쉴새 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이 있어야 한국 사람이 있고 한국 사람이 있고야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또 무슨 단체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나의 단일한 염원은 삼천만 동포와 손을 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의 달성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뿐입니다. … 내 나이 73,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안위를 위해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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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장]

선생의 성은 조 씨이고, 이름은 광조이며, 자는 효직이고 스스로 정암이라 이름하였다.
조 씨는 한양의 이름난 성인데, 7대 조인 양기가 고려에서 벼슬을 지내 총관이 되었다. 원 세조 때 부수로서 단 군대를 쳐부수고 포로를 바치니, 황제가 도포와 띠를 주어 격려하였다. 고조의이름은 온_인데, 본조의 개국공신이 되어 한천 부원군으로 책봉되었고, 시호는 양이었다. 한천이 영뒤에 이조 참판으로 추증되었고, 참판이 성균관사예손을 낳으니, 뒤에 예조판서로 추증되었다. 판서가 원장을 낳으니, 벼슬은 사헌부 감찰에 이르렀고, 뒤에 이조 참판으로 추증되었다. 이 자가 선생의 아버지이고, 어머니는 여흥 민씨스로 현감 민의 딸인데, 성화 임인년1482 성종 13 8월 10일에 선생을 낳았다.
선생이 좋은 자질을 타고나, 어렸을 때도 장난치며 놀지 않아 이미어른의 풍채와 태도가 있었고, 조금이라도 남의 잘못을 보면 즉시 지적해서 말하였다. 성장하여 글을 읽고 학문을 닦을 줄 알면서부터는의연하게 큰 뜻이 있으나 과거 보는 글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오로지 성현의 위풍을 사모하여 넓게 배우고 애써 행하여서 이룩함이 있

기를 기약하였다.
열아홉 살에 아버지를 여의자, 어머니를 모시고 집에 있으면서 지성으로 안색을 살펴 봉양하여 효성스럽다는 칭찬이 나라에 드러났다. 정덕正德 경오년 1510. 중종 5 진사시에서 장원을 차지하였다. 신미년 1511 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을해년1515 여름에 조정의 신하가 효렴으로 천거하여 조지서 사지에 제수되었다. 이 해 가을에 중종이 실시한 알성별시에 응시하여을과에 수석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얼마 뒤 사헌부감찰·예조좌랑·사간원정언으로 옮겼다. 장경왕후의 상에 담양 부사박상과 순창 군수 김정이 함께 상소하여 신 씨의 왕후의 위를 회복시킬 것을 청하였다. 조정의 의론은 이들이 말할 사안이 아니라고 여겨 체포해서 국문하기를 청하였다. 일이 장차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되자, 선생만이 극력 간쟁하기를, "신 씨는 실로 복위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상소의 내용에서 논한 것 또한 일리가 있으니, 죄를 주어서 언로를 막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다. 두 공은 이로 말미암아죄를 면하였다.
홍문관에 뽑혀 들어가서 수찬, 교리, 응교, 전한을 지냈다. 정축년1517 5월에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에 올랐다. 모두 "옥당호의 장이 되어 임금의 덕을 기르는 데는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라고 하여 겨울에 옥당으로 돌아와서 부제학이 되었다.
주상께서 평소 유학을 숭상하고, 문치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당우삼대처럼 번성하기를 바랐으므로, 더욱 선생을 의지하고 중하게 여겼다. 선생은 이에 세상에 보기 드문 대우에 감격하여서 임금을 존경

받게 만들고 백성에게 혜택을 주고 유학을 번성하게 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이에 "임금의 마음은 다스리는 근본이 되므로, 그근본이 바르지 않으면 정체가 의지하여 서지를 못 하고, 교화가이로 인해 행해지지를 못한다"라고 하여 입대할 때마다 반드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엄숙히 하여 신명을 대하는 것과 같이해서, 아는 것은 다 말하였고, 말할 때는 충직하게 하였다.
주상께 경계할 것을 진언한 말에, "사람의 마음은 본래 천지와 같이 크고 춘하추동과 더불어 운행합니다. 그런데 그 이가 욕심에 가려져서 큰 것이 작아지고, 기가 사욕에 얽혀서 운행하는 길이 막힙니다. 보통 사람에게도 그 피해를 이루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임금은 지위가 높아 교만하고 방탕하기가 쉬워서 아름다운 소리와 여색 유혹이 보통 사람보다 만 배나 더한 데야 더 말할 게 있겠습니까. 마음이 한 번 바르지 못하고 기운이 한 번 순하지 못하면 재앙의 징조가 어두운 중에서 상응하고 재앙의 싹이 밝은 곳에서 일어나서 인륜은 막히고 만물이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대개 이러하니, 주상께서 하늘을 섬기는 데 마음을 두어서 마땅히 중화의 지극한 공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였다.
정의와 사리, 왕도와 패도의 구별과 고금의 성쇠하는 징조와 군자·소인의 거취와 성패에 관한 경계에 이르기까지 그 마음속에 품은것을 상세히 논의하고 극진히 말하였다. 어떤 때는 해가 기울어질 때까지 하였다. 임금이 겸허한 마음으로 모두 귀를 기울여 들었고, 날마다 더욱 장려하였다.
무인년1518 봄에 조정에서 현량과를 설치하여 인재를 얻고자 하

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주상께서 다스리고자 하는 뜻이 있으나 오랫동안 성과를 보지 못한 것은 인재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만약에 이 법을 행하면 인재를 얻지 못할 것을 근심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하였다.
양사에서 옥당과 함께 소격서를 혁파할 것을 청하였는데도 임금이 여러 달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선생이 정원에 나아가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오늘 허락을 얻지 못하면 물러갈 수 없다" 하였다. 저녁이 되어 대간은 다 물러갔는데도 옥당은 그대로 머물러서 논계하여 허락을 얻은 후에야 나왔다.
전에 회령부 성 주변에 살던 야인 속내가 몰래 깊은산중에 있는 야인과 공모하여 갑산부의 경계에 들어와 사람과 가축많이 약탈하였다. 이렇게 되자 남도 병사가 올린 비밀 장계에 따라 먼저 밀지를 보내 함경도에 유시하고, 이지방을 파견하여 틈을 엿보아 덮쳐서 법에 따라 처치하려고 하였다.
임금이 선정전에 거둥하여 파견하려던 때 장수와 재상과 모든 신하가 둘러 모시고 있었다. 선생이 밖에서 들어와 임금을 면대하기를청하여 아뢰기를, "이 일은 도적이 교활하게 속이는 꾀와 똑같으니,
왕으로서 오랑캐를 방어하는 도리가 아니고, 또 당당한 큰 나라로서한 조그마한 오랑캐를 사로잡는데 도적의 꾀를 행하는 것은 나라를욕되게 하고 위신을 훼손하는 것이니, 신은 내심 부끄럽습니다"라고했다.
임금이 즉시 다시 의논하도록 명했다. 좌우의 사람들이 다투어 말하기를, "병가에는 모략과 정도가 있고, 오랑캐를 방어하는 데에는

경도와 권도가 있습니다. 중의가 이미 같은데, 한 사람의 말때문에 갑자기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병조판서 유담년이
"밭 가는 것은 마땅히 남종에게 묻고, 베 짜는 것은 마땅히 여종에게묻습니다. 신은 젊을 때부터 북방을 출입하여 저 오랑캐의 정상을 실로 다 압니다. 신의 말을 들으소서"라고 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오히려 중의를 물리치고 파견하는 일을 중지하게 하였다.
임금이 선생을 대우한 것과 선생이 임금의 마음에 든 것이 다 지극하다고 할 수 있다. 당시에 선류로서 같이 선발되어 임금의 우대를 받은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서로 함께 협력하여 사업을 일으켜, 오래된 폐해를 없애고 교화를 닦고 밝혀서 옛날 현철한 왕의 법도를 차례로 거행하였다. 《소학》을 인재를 기르는 근본으로 삼고, 향약을 풍속을 교화하는 법도로 삼으니, 모든 관리가 자각하여 힘쓰고,
모든 사람이 분발하였다.
그러나 여러 공이 너무 조급하게 효과를 보고자 하는 잘못을 범하여, 모든 건의하고 시설하는 데 있어 날카로움이 너무 드러났는가 하면 장황하고 과격하였다. 또한, 젊고 일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유리한 기회를 노려 시세에 영합하는 분란을 부추기는 자들이그 사이에 많이 끼어 있었다. 옛 신하 중에는 시대의 의론에 용납되지 못해 이로 인해 공격을 받게 되자 원한이 골수에 사무쳤다.
선생이 일찍부터 이미 그렇게 될 조짐을 보고 도가 행해지기 어려울 것을 알아서 오래전부터 직위를 사퇴하고자 하였다. 이 해 겨울에임금이 특명으로 선생을 가선대부로 올리고, 사헌부 대사헌 겸 세자좌빈객 동지성균관사에 제수하였다. 선생은 관직이 너무 빨리 오르

는 것을 크게 두려워하여 극렬 간절하게 사양했다. 그러나 임금의 신임은 갈수록 융숭해져서 더욱 허락하지 않았다.
어떤 이가 선생이 끝내 사양을 허락받지 못하고 물러나면서 얼굴가득 근심스러운 빛을 띠고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고 운운하였다. 기묘년 1519 봄에 김우증이란 자가 사람을 거짓으로 꾸며모함하는 일이 있었다. 일이 발생하자 조정에서 심문하는데, 선생이사헌부의 장으로 그 일에 참여하였다. 양사에서 선생이 김우증을 끝까지 다스리려고 하지 않는다고 논박하여 파직시켰으나, 곧 정부가아뢰어서 다시 유임되었다.
그 후에 조정의 의논이 정국공신 중에 공이 없는 자에게 함부로주었던 녹권공을 기록한 문서을 추탈하게 되었는데, 선생이 또한 그의논에 동참하였다. 이때 선생이 이미 물러갈 수도 없게 되었는데,
기강을 세워 탐욕한 자를 물리치고 깨끗한 이를 드러내며 명령하면시행되고 금지하면 그치게 하는 것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건대, 시세를 돌아볼 때 그때는 크게 근심될 만한 일이있는 형편이었으므로, 일에 임하여는 조금 조화하려는 뜻을 가지지않을 수 없었다.
그 외에 신상이자, 권벌의 의견이 다 그러하였으니, 이것은 곧 시대를 따르는 의리로써 중도가 아님이 없었다. 그런데도 저과격하고 경솔한 무리는 도리어 선생이 정도에 어긋난 것을 따라 임시방편으로 일을 처리하여 그 자취가 간사한 무리와 같다고 하여 여러 번 배척하고 탄핵하였다. 선생은 전날 원망하던 모든 사람이 곁에서 이를 갈고 입술을 깨물며 날마다 틈을 노리는 것을 알지 못하였

다. 큰 화가 갑자기 신무문을 여는 변으로까지 되었으니, 슬프다, 어찌 이루 다 말하겠는가, 어찌 이루 다 말하겠는가.
그날의 일은 당연히 국가 문서에 기록되었을 것이나, 영의정이면서 임금의 옷깃에 매달려 간해서 그 정성이 하늘에 감동되어 다행히 벼락같은 위엄을 조금 그치게 하였다. 그러나 유도들이 궐문을 지키고 울부짖으면서 다투어 의금부에 갇히고자 한 것은, 참소하는 자들에게 더욱 구실을 주었을 뿐이다. 이것은 소식이 자기를 구제하려는 장방평張의 소를 보고 놀라서 탄식한 것과 같다.
선생은 10월 어느 날 능성으로 귀양 갔고, 후명後 최후에 죽음을 내리는 명이 이른 것은 12월 20일이었다. 선생이 곧 목욕하고서 옷을 갈아입고, 조용히 도사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신에게 죽음을 내리시니마땅히 죄명이 있을 것이다. 청하건대, 죄명을 공손히 듣고 죽겠노라" 하니, 도사의 대답이 없었다.
선생이 또 말하기를, "임금 사랑하기를 아비와 같이 하였으니, 하늘의 해가 나의 속마음을 비출 것이다" 하고 드디어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38세이었다. 이듬해 모월 어느 날에 용인현 어느 동리 선인의 묘소에 장사지냈다.
선생은 타고난 자품이 특이하여 동류 중에서 뛰어나니, 마치 화려한 난새가 머무르고 고상한 고니가 우뚝 선 것과 같고, 옥같이 윤택하며 금같이 순수하고, 또 무성한 난초가 향기를 풍기고 밝은 달이빛나는 것과 같았다. 17, 8세에 분연히 도학을 공부할 뜻을 가졌다.
그때 참판공아버지이 어천 찰방이 되었는데, 때마침 한 김 선생김굉필이 희천에 귀양 가 있었다.

선생이 본래 한훤의 학문이 근원이 있음을 들었으므로, 그곳으로가서 부친을 모시고 있으면서 한훤에게 찾아가 종유하며 학문하는큰 방법을 들었다. 대개 우리 동국의 선현 중에 도학에는 비록 문왕같은 성군을 기다리지 않고도 창시한 자가 있었다. 그러나 결국에는절의·장구·문사를 닦는 데 그쳤다. 진실로 실천하는 것으로서 학문의 근본으로 삼은 이는 오직 한훤이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선생은 어지러운 세상을 당하여 능히 험난함을 무릅쓰고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비록 그 당시 강론하고 주고받은 뜻은 직접듣지 못했다. 그러나 선생이 그 후에 그처럼 도학을 공부하는 정성과업적이 탁월한 것을 보면 그 발단이 진실로 여기에 있었다. 우선 볼수 있는 실정만으로 말하면, 학문하는 데 있어 《소학》을 독실하게 믿고 《근사록》을 존중하여 모든 경전에 적용하였다.
평상시에 거처할 때에는 밤낮으로 몸가짐을 살피고 삼가서 의젓하고 엄숙하여 의복과 태도가 조금도 법도에 어그러지지 않았다. 말씀하실 때나 행동을 하실 때는 반드시 옛 훈계에 따랐으니 아마도지경하는 방법이었으리라. 언젠가 천마산에 들어갔고, 또 용문산에 들어갔는데, 공부하는 여가에 꼿꼿이 앉아서 마음을 가라앉혀 상제를 대하는 것과 같이해서 본심을 함양하기를 힘쓰는 것이 남이 미칠 수 없었다. 아마도 꿋꿋하게 애써 정을 주로 하는 학문을 하였기때문이리라.
효도하고 우애하는 행실은 천성에서 나온 것이어서,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거나 날마다 가묘에 절하고, 어버이를 봉양하고 뜻을 어김없이 받드는데 모두 곡진하였다. 집을 바르게 다스려서 안과 밖의 분

별이 엄하였고 사랑과 훈계를 같이 베풀었다.
깨끗한 절조로 자신을 갈고닦고 몸가짐을 빈한한 선비와 같이하였다. 언젠가 부인에게 말하기를, "나는 나랏일을 전심하여 집안일은 생각할 여지가 없다" 하고는 가정 살림에 신경 쓰지 못했으며, 청탁이 통하지 않았고, 거마비를 받지 않았다. 자신을 살피고 사욕을이겨내는 데에는 항상 남이 따르지 못할 점이 있었다. 젊은 날 우연히 여색을 가까이할 기회가 있었으나 곧 물리쳐 피하였고, 더욱 술이성품을 해친다는 경계를 지켜서, 친구가 술을 마시고 체통을 잃는 것을 보면 준절하게 책망하였다.
상중에는 지극히 슬퍼하고 제사에는 정성껏 공경을 다 하였으며,
후생은 각각 그 재질을 따라 장려하여 이끌고, 이단을 물리칠 것을 논하되, 먼저 근본을 바르게 하고자 하였다. 평소의 행동이 널리알려진 데다 재주가 세상을 영도하기에 충분하였고, 영특한 기품이밖에 드러나니, 풍모가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였다.
일찍이 하련대에 임금이 앉았을 적에, 선생이 대사헌으로 시종하다가 일이 생겨서 몸을 빼 나가기도 하고 빠른 걸음으로 몸을구부리고 앞으로 지나기도 하였는데, 그 몸가짐을 바라보고 백관이다 주목하였다. 교문橋에 둘러섰던 자가 감탄하며 말로 표현할 바를 몰랐으니, 한 시대의 존경을 받음이 이와 같았다.
스스로 무거운 책임을 지워 우리 임금을 요순처럼 만들고, 우리 백성을 어질고 편하게 사는 지경에 오르게 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 충성은 금석을 뚫고, 그 용맹은분육 전국시대의 장사보다 뛰어났다.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오직 왕의 일만을 생각하는 신하로서

착한 임금의 성대한 시대를 만나, 조정에 나아가서는 날마다 세 번씩알현하고, 물러나서는 사람들이 다투어 손을 올려서 존경하였다. 이는 상하가 서로 기뻐하여 천년에 한 번 있을 수 있는 좋은 때라고 할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서 하늘이 그 사이에 마가 들게 하여 위로는 그뜻이 크게 행하여지지 못하고, 아래로는 그 혜택이 넓게 미치지 못하게 하였는가. 이것은 시대의 운수와 나라의 액운과도 관계되니 천지에 유감된 일이며, 귀신이 농간을 부린 것이니, 선생인들 어찌하리오, 더욱이 선생은 언젠가 상사 허백기와 함께 "철없는 젊은이들이 세속을 놀라게 한다"라고 말하였다. 또 수재 성수침을 만나서는 향약의 실행하기 어려운 점을 근심하였으니, 자신의 맡은 일은비록 중대하였지만, 고집해서 반드시 하려는 뜻은 없었다.
그가 사헌부의 대사헌 자리를 힘껏 사양하다가 허락받지 못했을때 그처럼 깊이 근심하였고, 기준이 언젠가 산림에 홀로 갔으면 하는탄식을 하니 자주 칭찬하며 마음에 들어 하신 것을 보면, 물러서기어려울 때 용감하게 물러서는 것은 평소 선생의 뜻이었다.
그러나 근세에는 사대부를 대우함이 예전 의리를 따르지 않아서물러가기를 구하여 허락을 얻은 예가 없고, 신하가 벼슬에서 물러가는 길이 끊겨, 한 번 조정에 서면 병으로 폐하거나 죄로 물러나는 것외에는 국사를 떠날 방도가 없었다. 그러니 비록 선생이 화합하지 못하여 물러가기를 도모하고, 기미를 보아 일어나고자 했으나, 어찌 자기 뜻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이미 선생이 물러나려는 뜻을 이루지못했으니, 또 어찌 화가 오는 것을 지혜와 피로써 면할 수 있었겠는

가. 이것이 선생의 더욱 어려웠던 점이다.
그러나 일월의 빛은 전처럼 가렸던 구름이 사라지면 밝아지고, 의리의 감정은 오래될수록 더욱 시비의 판단이 명백해지기 마련이다.
중종이 말년에 하늘의 뜻을 통찰하고 여론도 선생의 누명을 벗겨주고자 하여, 실로 이미 은택을 내릴 뜻이 있었고, 인종이 즉위하자 묘당의 거듭된 논의와 유생의 호소로 말미암아 마침내 중종의 뜻을 따라서 선생의 관작을 예전처럼 회복하도록 명하였다.
아아, 천도는 본래 바르고 인심은 진실로 속이기 어려운 것이니,
요 임금이 뜻했던 바를 순 임금이 이어받아 실행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선비의 학문은 방향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의 다스림은 이로인해 거듭 밝아질 수 있었다. 도학은 이에 힘입어 타락하지 않을 수있었다. 나라의 기맥도 이에 힘입어 무궁해질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로 본다면, 당대의 사람의 화는 비록 슬프다 하겠으나, 선생이 도를 높이고 학문을 창도한 업적은 후세에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겠다.
또 한 가지의 말이 있으니, 주나라가 쇠망한 이래로 성현의 도가그 당대에는 행해지지 못했으나, 만세에는 행해질 수 있게 되었다는것이다. 대개 공자맹자·정자·주자의 덕과 재주는 그것을 써서 왕도를 일으키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쉬울 것인데도 결국에 성취된 것은 교훈을 세워서 후세에 남기는 데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하늘에 있는 것은 본래 알 수 없지만, 사람에게 있는 것도 역시 일괄적으로 논할 수는 없다. 그러면 선생이 추구한 도를 이미 공자·맹자·정자· 주자의 도라고 하였으니, 선생이 세

상에서 큰일을 못 한 것은 괴이할 것이 없다. 다만 벼슬길에서 물러나 그 도의 실상을 크게 천명하여 우리 동방의 후세 사람들에게 복이 되게 하지 못한 것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또 대개 하늘이 큰 임무를 사람에게 내리려 할 때에 어찌 젊을 때한 번 이룬 것만으로 대번에 만족하게 여기겠는가. 필시 중년과 말년에 풍족하게 공을 쌓은 후라야 자격이 크게 갖추어진다. 가령, 선생이 애초 성세포에 갑자기 등용되지 않고 집에서 한가히 지내며 궁벽한 마을에 숨어 살며 더욱이 학문에 힘을 다하여 오랜 세월에 걸쳐 깊이 연구했더라면, 연마한 것이 관철되어 더욱 고명해지고, 수양한 것이 높고 깊어 더욱 넓고 해박해져서 환하게 낙건 정자와 주자의 근원을 찾고, 수사 중국 산동성의 강 이름, 즉 공자를 말함의 영향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대개 이처럼 되었더라면 당대에 임금으로부터발탁을 받아도 좋고 못 받아도 괜찮았을 것이다.
믿는 것은 이 도와 이 사람의 처지가 교훈을 세워 후세에 전하는한 가지 일이 있을 뿐이었다. 이제 선생은 그렇지 못하였으니, 첫째불행은 등용되어 발탁된 것이 너무도 갑작스러웠다는 것이고, 둘째불행은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는것이고, 셋째 불행은 귀양 가서 일생을 마친 것이어서 앞에 말한 중년 말년에 풍족하게 공부할 만한 겨를이 없었다.
교훈을 세워 후세에 전하는 일은 더더군다나 이룰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하늘이 이 사람에게 큰 책임을 내린 뜻은 결국 무엇이었던가.
이 때문에 오늘날 선생이 남긴 것을 찾아 사람들의 마음을 맑게 하고 바른 학문을 열어 주는 방법으로 삼으려 하여도, 의거할 만한 단

서가 거의 없었다. 헐뜯는 무리의 끝없는 담론이 화복과 성패의 결과만으로 판단하는 데서 벗어나지 못하여 세도가 더욱 투박해졌다.
그리하여 마침내 멋대로 지목하여 서로 헐뜯자, 몸조심하는 이들은 말하기를 꺼리고, 자식을 가르치는 자는 이를 경계로 삼았다. 선량한 이를 원수로 여기는 것이 여기에서 비롯하게 되어서 더욱 우리도에 병폐가 되었다. 아아, 이것이 어찌 실로 요 임금의 유지를 순 임금이 계승하여 이 도학을 보호하고 나라의 기백을 길이 이어가게 하는 장한 뜻이겠는가. 이것은 또 뒤에 오는 어진 임금과 현명한 재상및 무릇 세상을 다스릴 책임을 진 자가 마땅히 깊이 근심하고 영구히 거울삼아서 힘써 구제할 점이다.
그러므로 몇 년 전부터 태도를 바꾸어서 새롭게 혁신하고 좋아하고 미워함을 분명하게 보인 자가 한두 사람이 아니다. 세상의 선비된 자가 여전히 왕도를 높이고 패술을 천하게 여길 줄 알며, 바른학문을 숭상하고 이단을 배척하며, 정치하는 도리를 반드시 몸을 닦는 데에 근본을 두어서, 모시고 심부름하는 것으로부터 이치와 성性을 연구하는 데 이르게 되어서 점차로 분발해 일어나서 하고자 하는것이 있게 되었다. 이것이 누구의 공이며, 누가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는가.
하늘의 뜻을 여기에서 볼 수 있겠고, 성조의 교화가 여기에서무궁하게 될 것이다. 선생의 아내는 첨사 이윤형의 따님이다. 두 아들을 낳았으니, 이는 정인데 일찍 죽었고, 막내는 용인데 지금전주의 판관이다. 선생이 돌아가실 때 두 아들이 다 어렸고, 또 세상을 두려워하여 피해야 할 형편이었으므로, 선생의 뜻과 행적을 기술

하는 일을 오랫동안 부탁한 일이 없어서, 사람의 이목에 남을 사적이점차로 인멸되기에 이르렀다.
행장 하나를가중간에 상사숨 생원진사시에 급제한 사람 홍인우지었는데, 지난해에 판관 아들이 그 종질인 충남 보내와서 홍을상사가 지은 행장을 나에게 주며 말하기를, "비석은 이미 마련되었으니, 명문을 지어 묘 앞에 표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내가 문장을 못한다고 사양하고 또 말하기를, "비문을 짓고자 하면 마땅히먼저 행장을 구하여야 할 것인데, 홍상사가 지은행장을 보니 너무간략합니다. 반드시 다시 널리 방문하여 많은 사적을 찾아내고 당대의 훌륭한 문장가를 구하여 행장을 보완한 후에 천천히 비문을 만들어도 늦지 않습니다" 하였다.
근래에 판관이 또 사람을 보내어 편지를 전하고, 아울러 《음애일록》등 두 가지 서적을 보이면서 말하기를, "사적을 더 찾을 수가 없고, 사방으로 돌아보아도 저의 선인을 위하여 기꺼이 붓을 잡을 자가 없으므로 감히 두 번 세 번 번거롭게 청합니다" 하였는데 사정이 매우 애처로웠다. 내가 혼자, ‘비록 선생의 문하에서 직접 배우지는 못하였으나 선생에게 받은 영향은 많은데, 이미 비명을 사양한 데다 또 행장을 짓지 않는다면, 어찌 정이 지극하면 일이 따른다고 하겠으며, 또홍 상사는 학문에 뜻을 둔 선비요, 또 선생과 한 동리 사람이니, 그행장이 비록 간략하더라도 필시 증거가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가 적은 것을 바탕으로 하고 나중에 얻은 서적을 참작해서 가감하여 이 글을 지었다. 이는 우선 조금이라도 판관의 효성에보답하고자 해서요, 또 이어서 듣고 본 것이 있으면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행장을 완성하는 자료로 삼고자 해서이다. 만약 이것이 뒷날 사필 잡는 자의 참고가 될지라도, 선생의 학문과 사업, 언론과 풍을모가 사책史에 실려 있고, 추모하는 노래에 스며 있는 것이 더욱 많을 것이니, 어찌 이 행장에만 국한되겠는가.

가정 43년 갑자1564 0월 0일진성 이황이 삼가 적다출처: 한국고전종합DB 퇴계 선생문집 제48권 ‘정암 조선생 행장‘

ⓒ 한국고전번역원권오돈 권태익 김용국 김익현 남만성 성낙훈안병주 이동환 이식 이재호 이지형 하성재(공역)

조광조 가계도

1세(시조) 조지수(趙之壽): 한성부 출신으로 고려 조순대부 첨의중서사를 지냄.
2세 휘(㎜): 원에서 쌍성군총관을 제수함.
3세 양기(): 고려 총관 벼슬을 지냈고, 김방경을 수행해 일본군을 정벌하고 무사히 귀환했고, 합단병 토벌에 나서서 공을 세움.
돈) 홍건적 격파로 일등공신에 올랐고, 예의판서로 검교 밀직부사였고, 용성군에 봉해짐.
5세 인벽:보리공신으로 용원부원군에 봉해졌고, 고려 공민왕 때 사망했지만 조선 건국에 공이 있는 아들 온으로 인해 좌명공신 우정승 한산백에 봉해짐.
6세 온 : 조광조의 고조로 조선 개국공신으로 한천부원군에 봉해짐.
7세 육(): 조광조의 증조로 의영고사를 지냄

8세 충손(): 조광조의 할아버지로 성균관사예를 지냄.
9세 원강: 조광조의 아버지로 감찰을 지냄.
10세 광조(祖)

[조광조 연보]

1482년(성종 13년 8월 10일한성부 향교동 동지제지금의 서울 종로구 경운동 18번지에서 아버지 조원강과 어머니 여흥 민씨 사이의 3남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남.
● 1486년(성종 17년)놀고 장난함이 성인의 거동과 도량이 있었으며, 예 익히기를 좋아하고, 어김있는 자를 보면 어른일지라도 풍자하여 멈추게 함.
● 1498년(연산군 4년)열일곱 살 나이에 어천찰방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갑자사화로 희천에서 유배 중인 한훤당 김굉필 문하에서 사사.
ㅇ 1499년(연산군 5년)열여덟 살 때 한산이씨 이윤형 딸과 혼인.
1500년(연산군 6년)부친상을 당하여 주자가례에 따라 삼년상을 치름.
1502년(연산군 8년)부친 삼년상 마치고 용인 선영 아래 서너 칸짜리 집 짓고, 소학, 근사록, 사서,
동감강목 등을 읽으며 공부에 전념.
1504년(연산군 10년)배소를 순천으로 옮긴 스승 김굉필 사ㅇ 1506년(중종 1년)중종반정으로 연산군 폐위되고 이복동생 진성대군이 중종에 즉위.
1510년(중종 5년)봄: 진사시 합격하고, 5월에 천마산 성거산 두산에 가서 소요함.
여름: 송도 개성의 여러 산 다니며 글공부.

0 511년(중종 6년)모친 민 부인 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치름.
1514년(중종 9년)경원 임지로 떠나는 삼촌 조원기에게 시와 서 증정하자 삼촌은 조광조에게학문에 힘쓰기를 권장하는 글을 줌.
ㅇ 1515년(중종 10년)아들 정 출생.
봄: 양평 용문사에서 글공부,
여름: 성균관 추천으로 이조 선무랑에 준하는 주부직 제수,
가을: 안성시에서 을과 장원전체 차석 급제, 성균관전적 제수.
11월 : 사간원 좌정원 제수됐으나 박상과 김정의 상소에 대해 죄 주는 것이 언로를 막는 행위라고 주장하며 사간원 관료들 파직 상소.
1516년(중종11년)봄: 이조정랑, 홍문관 부수찬 겸 경연 검토관, 춘추관 기사관 제수겨울: 계심잠 지어 올림.
1517년(중종 12년)지방에서 도학 정치 확대 위해 교리로 경연 시독관, 춘추관 기주관을 겸임.
향촌의 상호 부조를 위해 여씨향약을 8도에 실시하도록 함. 향약을 보급하는방법으로 기존 훈구세력들이 장악한 지방에 향음주례나 향사례의 실천을 중시하고, 소학을 실천할 것을 주장함.
2월 홍문관 교리 겸 경연 시독관 춘추관 주서 등 5품관으로 승진.
7월: 응교정4품관 승진.
8월: 정몽주 · 김굉필에게 벼슬과 시호 및 문묘 종사 청함.
1518년(중종 13년)정원: 통정대부정3품 당상관 홍문관 부제학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승진 병으로 사직하고자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음.
말에서 떨어져 다치자 임금이 의원을 보내 문병하고 치료함.
3월 : 조정에서 현량과 설치 건의 및 실시.
5월: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수찬관으로 이동.
7월 소격서 철폐 건의 상소

11월 가선대부 정2품관 동지성균관사 제수, 사헌부 대사헌 겸 원자 보양관으로 이동.
1519년(중종 14년)아들 용 태어남6월: 장인 이윤형 상을 당하여 임금에게 허락을 얻고 장례 치름.
7월 : 병으로 사임 요청하였으나 불허됨.
11월 : 정국공신 공훈 삭제 단행, 기묘사화로 귀양.
12월 : 사사1520년(중종 15년)봄에 용인 심곡리 선영으로 이장하여 장례식.
○ 1545년(인종 원년)복직.
ㅇ 1557년(명종 12년)같은 산 서쪽으로 옮겨 이 해에 사망한 부인과 합장.
ㅇ 1568년(선조 원년)O3월: 태학생 홍인헌 문묘 종사 청원4월: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영사관상도감 추증.
ㅇ 1569년(선조 2년)시호를 문정공으로 내림.
1570년(선조 3년)능주에 죽수서원 설립하여 조광조 배향.
ㅇ 1573년(선조 6년)양주에 도봉서원 설립.
1581년(선조 14년)이이이황과 더불어 문묘 종사 청원.
ㅇ 1605년(선조 38년)심곡서원 설립하여 조광조 배향.
ㅇ 1610년(광해 2년)문묘 종사

"대도가 행해지는 세계에서는 천하가 공평무사하게 된다. 어진자를 등용하고 재주 있는 자가 정치에 참여해 신의를 가르치고 화목함을 이루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부모만을 친하지 않고 자기 아들만을 귀여워하지 않는다. 나이 든 사람들이 그 삶을 편안히 마치고,
젊은이들은 쓰이는 바가 있으며, 어린이들은 안전하게 자라날 수 있고, 
홀아비 · 과부 · 고아, 자식 없는 노인, 병든 자들이 모두 부양되며, 남자는 모두 일정한 직분이 있고, 
여자는 모두 시집갈 곳이 있도록한다. 
땅바닥에 떨어진 남의 재물을 반드시 자기가 가지려고 하지는않는다. 
사회적으로 책임져야 할 일들은 자기가 하려 하지만, 반드시 자기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때문에 간사한 모의가 끊어져 일어나지 않고 도둑이나 폭력배들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문을 열어놓고 닫지 않으니 이를 대동이라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어떤가. 정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목표로 두고 싶은 사회가 아닐까 싶다. 조광조 역시 정치적 목표를 여기에 두고 있음은 예외가 아니다. 그러니 책문은 미리 알고 있는 물음처럼 친숙했다. 물론 그 답을 찾는 것은 별개의 일이겠지만, 
조광조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문제보다는 궁구하던 화두이기에 접근이 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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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생각을 들려줘

생활속 제국주의는 가스라이팅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가스라이팅이란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를 말한다. 흔히 서양의 강대국을 먼저 발전한 나라라는 뜻에서 선진국, 그 밖의 나라들을 후진국이라고 표현한다.

나라마다 고유의 문화와 강점이 있을 텐데 이런 표현은 서양의강대국처럼 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뒤처진 것처럼 생각하게 한다. 새로운 제국주의는 문화적으로 가스라이팅을 하고 있고, 이건 과거의 제국주의보다 더 교묘하고 무섭게 느껴진다. 타인이 자신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모른 채 문제가 스스로에게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저항하기가 더 어렵기 때문이다.
아이돌 문화에서도 제국주의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아이돌이 미국에 진출해 미국 음원차트에서 1위를 하면 국내 음원차트 1위를 한 것보다 언론의 주목을 더 많이 받는다. 이는 미국에서 인정받는 것이 더 값진 일처럼 느끼게 한다. 그리고 국내에서인기를 얻은 아이돌도 해외 진출을 하면 꼭 영어 이름을 짓고 영어로 노래를 부른다. K-pop이 정말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라면아이돌이 해외 진출을 하더라도 우리말로 된 이름과 노랫말을 유지하고 그것을 전파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영어권 문화가 글로벌 문화라는 이름으로일상 속에 많이 스며들어 있는 것 같다. 최근 우리 반 친구들은졸업 사진을 어떤 콘셉트로 찍을지 고민이 많다. 단연 하이틴, 해리포터, 디즈니 공주가 대세다. 여기서 하이틴은 미국 10대들의패션이고, 해리포터는 영국 영화이며, 디즈니는 미국 애니메이션 회사다. 우리는 모두 이것을 예쁘다고 좋아하며 따라하려고한다. 또 10대들은 아이폰을 쓰지 않으면 촌스럽고 뒤처진다고여긴다. 실제로 10~20대가 애플사의 기기를 사용하는 비율이높다는 뉴스를 보았다. 이처럼 미국과 서양의 문화를 동경하는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느껴지도록 만들어진건 아닐까?

한국 사회가 외국인을 대하는 방식에서 제국주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등 약소국 출신의 노동자들을 ‘이주노동자‘라고 부르면서 차별하고 혐오하는 경우가 많다.
똑같이 외국에서 온 노동자인 백인 영어 강사는 이주노동자라고부르지 않으면서 말이다. 또 외국인이 도움을 요청할 때 그 사람이 당연히 영어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내가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도 제국주의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너의 생각을 들려줘

조선을 서양처럼 만들고 싶었던 엘리트와 점점 악화하는 현실을 바꾸고 싶었던 민중이 추구하는 세상은 비슷했다. 하지만그 세상을 만들어 가는 방법과 가치관이 달랐기 때문에 대립할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런 대립이 있어야 우리 사회가 발전할수 있다고 본다. 정당이 하나밖에 없으면 독재국가인 것처럼민중과 엘리트도 항상 협력하기보다는 서로에 대한 견제가 필요하다.
민중과 엘리트는 협력적인 관계가 되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고,
될 수도 없었다. 엘리트는 소수인 데다 경제적으로 유복해서 민중의 삶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민중을 멋대로 추측하여 판단한다. 오늘날에도 사회 지도층은 완전히 다른 세대인 M세대와 Z세대를 자신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MZ세대라고 이름 붙여 부른다. 계급사회의 문제는 상위 계층과 하위 계층사이에 솔직한 대화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 솔직하고 심도 있는대화를 나누었다면 민중들이 까닭도 모르고 반대했을까? 가장중요한 건 소통할 수 있는 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훌륭한 엘리트라면 민중의 지지를 얻어 내야 한다. 급진개화파는 특권과 차별이 없는 사회를 추구했다지만 민중을 교육 대상으로 보았다. 정말 평등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민중과 엘리트가 협력할 수 있도록 동등한 관계가 전제되어야 한다. 민중을무식하다고 무시하지 않고, 민중의 의견이라고 색안경 끼고 보지 않으며, 민중의 의견이 합리적이면 정책에 반영될 수 있도록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엘리트들이 민중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면 자신들이 바라는 사회를 맞이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든다.

너의 생각을 들려줘

왜 의병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기억해야 할 것 같다. 민중이 무기를 들기 전에 국가의 위기를 누가 막을 수 있었는지,
어떻게 예방할 수 있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당시 권력을잡고 있던 사회 지도층이 일본과 맞서 싸울 의사를 보였더라면심각성을 느낀 민중이 그들과 협력하며 일제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했을 것 같다. 나라가 식민지가 되기 직전에도 그저 개인의 지위와 재산을 보전하는 데에만 급급했던 태도는 비판받아마땅하다. 이러한 사회 지도층의 이기적인 행동이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의병의 교훈이다.

의병의 교훈은 의병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나라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지배층이 비겁한 모습을 보였기에 의병들은 더욱 빛난다. 하지만 이런점만 기억한다면 현대사회에서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자신보다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일이 어느 순간 당연시되어 바꿀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지배층이 자신들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점을 의병의 교훈으로 받아들이면 좋겠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말이 있다. 사회 지도층은 큰 힘을 누리고 있는 만큼 위기에도 솔선수범의 자세를 가지고 민중이 편안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오늘날에도 사회 지도층이 권력과 돈을 이용해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고이익을 좇는 행태가 심심치 않게 보도되고 있다. 그런 모습들을지난 역사와 관련지어 비판적으로 배우는 것이 역사 교육에서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너의 생각을 들려줘

학교는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는 규칙적인 생활을 반복하고 정해진 교칙을 어기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것들이 우리 생활을 통제한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통제가 없다면 몇백 명이함께하는 학교생활이 가능할까? 그리고 학교가 없다면 우리가가치관을 형성하고 자신의 성장을 위해 노력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학교의 일과는 습관의 힘을 길러 준다. 시간표에 맞춰 생활하는 것은 시간표가 나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시간에맞춰서 생활하는 연습을 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통제력을 키우는 과정이다.

학교가 성적을 이용해 학생들을 통제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학교는 학생을 성적으로 평가한다. 성적이 좋은 아이는 선생님과친구들에게 좋은 학생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성적이 우수한 학생만이 성장한 학생일까? 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도 자신의 시간을 알차게 보내어 나름대로 성장했을 수 있다. 그런데 그 과정은무시한 채 결과만을 중시한다면 학생들은 좌절할 수밖에 없다.
정체성을 형성할 성장기에 친구들과 성적을 비교하며 스스로를깎아내리는 것은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학교에서 높은 시험 점수를 받으려고 노력한다. 학교가성적이 곧 성공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 개인의 소질이 계발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해마다 희망하는 직업을 써내야 한다. 20대 때 다양한 사회 경험을 바탕으로 선택하면 안 되는 것일까? 또 우리는 교칙으로 통제받는다. 사복을 금지하는 이유가 학생 간에 차별이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학교에서 성적으로 학생을 차별하는 것은괜찮은 걸까? 학생들이 사회의 흐름을 강제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꿔 나갈 수 있도록‘ 학교가 달라졌으면 좋겠다.

너의 생각을 들려줘

나는 유관순이 3·1운동을 대표한다는 말에 동의한다. 그는 어른이 아닌 어린 여학생으로서 만세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그 당시 잔인무도한 일본에 대항해 싸우는 것은 큰 용기가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남녀차별이 지금보다 심하던 시절에 여학생이 독립운동을 이끈 것은 대표적으로 기억할 만한 일이다. 3·1운동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당시 억눌렸던 민중이 스스로 독립 의지를 표현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소외되어 있던 많은 이가 동참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어느 시대나 소외되어 관심받지 못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그들 스스로 주체가 되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힘은 우리의 의지와 긍지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 민중들의 숨어 있는 힘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촛불집회와 같은 불꽃을 밝힌 게 아닐까? 유관순은 이런 소외된 민중의 대표 자격이 있다.

유관순이 학생이었음에도 3·1운동을 앞장서 이끌고 일제의 잔혹한 고문에도 굽히지 않은 것은 무척 훌륭하다. 하지만 한 인물이 3·1운동 자체를 대표한다고 보는 것은 맞지 않다. 3·1운동을 대표하는 것은 독립운동에 힘을 보태고 일제의 탄압에 대해
‘목소리를 낸 조선인 모두라고 생각한다. 일제에 저항하면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임에도 많은 사람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위험을 무릅쓰고 만세 운동을 했다. 그분들이 원했던 자유, 그리고 그 자유를 위해 행동으로 나선 것을 오래도록 기억해야 한다.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3·1운동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역사적 인물인 것은 맞지만 3·1운동을 대표한다고는 볼 수없다. 3·1운동은 우리 민족 모두가 힘을 합쳐 이뤄 낸 것인데,
유관순만 기억한다면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은 보이지 않게되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건을 어떤 인물과 동일하게 여기는 것은 시험 때 외우기 쉬운 것 외에 다른 좋은 점은 없는 것 같다.
유관순 열사도 3·1운동에 대한 기억이 축소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나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수많은 사람이 독립을 위해 힘썼다는 사실이다.

너의 생각을 들려줘

독립유공자 후손 예우에 관한 법을 바꿔야 한다. 정부에서는 지금도 독립운동가를 발굴해 훈장을 준다는 뉴스를 봤다. 당연한일이지만 일찍 인정된 독립유공자에 비해 경제적 혜택을 덜 받는 셈이니 형평성이 부족한 것 같다. 독립군 후손들이 증거가 부족해서 뒤늦게 인정받는다면 손자 이후의 후손이라고 해도 지나간 시간을 고려하여 보상금, 생활 지원, 교육 지원 등 혜택을 모두 주는 것이 독립군에게 늦게라도 감사의 의미를 표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10대들 사이에는 조선족 비하가 심각하다. 조선족이라는단어를 비속어로 사용하는 친구도 많다. 사실 나도 왜 그들이 중국에 살고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들은 광복 후 귀국한 줄 알았는데 중국에 남아 고향으로 돌아오지못하는 처지가 되었다는 게 안타까웠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이생계가 어렵다는 기사가 나오면 사람들은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만 조선족이라면 무조건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건 모순인 것 같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대한민국은 식민지에서 선진국이 된 자랑스러운 나라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부족한 것 같다. 우리나라 경제력이 세계 10위라고 하는데, 그 정도면 국가를 위해 힘쓴 분들의 후손에 대해 예우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자식에게만, 그것도 남녀를 따져서 혜택을 주었다는 게 너무나 황당하다. 재정적 지원이 힘들다면 그분들이 자랑스러울 수 있도록 훈장이라도 드려야 하며독립군이 기억될 수 있도록 후손들을 만나 증언을 듣고 기록해책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독립군이 자신들의 희생과헌신에 보람을 느끼지 않을까? 지금의 우리 또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긍심을 갖게 될 것이다.

너의 생각을 들려줘

일제강점기는 권력이 사람을 점령한 시대 같다. 학교 칠판에 낙서를 했다는 이유로 경찰이 체포한 것을 보면 권력에 조금이라도 반발하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탄압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일본인 중에도 사회적 약자들은 조선에 취업하러 오기도 했고 조선인 중 권력에 가까운 사람은 부를 쌓고 백화점, 스키장 같은 문화생활을 누리며 지냈다.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가중요한 것이 아니라 권력과 가까운지 아닌지가 중요했던 것 같다. 권력이 사람을 지배해선 안 되며 사람이 권력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일제강점기의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일제강점기는 정의가 흔들린 시대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일본에 넘긴 사람 중에는 조선인도 많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만큼 식민 지배 협력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힘없는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데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 없었다는걸 보여 준다. 그리고 조코 요네타로는 일본인인데도 조선을 도왔다는 이유로 감옥에 갔다. 이런 걸 보면 일제강점기는 일본인을 위한 시대도 아니었던 것 같다. 우리가 일제강점기에서 배울수 있는 교훈은 일본에 대한 적대심을 키우는 게 아니라 정의를흔드는 위험한 가치관에 대한 적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 같다.

일제강점기는 모순의 시대라고 생각한다. 흔히 일제강점기를일본인이 한국인을 점령한 시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출세를 위해 일제를 도와권력을 누리며 살아간 사람도 있고, 일본인인데도 불구하고 식민지 조선인을 도왔던 사람도 있다. 또 일본군 ‘위안부‘처럼 조선인을 성의 도구처럼 생각한 사람도 있다. 상반되는 일들이 많아서 모순적으로 느껴진다. 이를 통해 일본인을 무조건 나쁘게만봐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 같다. 나쁜 것은 일본이라는 국적이 아니라 시대를 이용해서 이익을 보려고 했던 사람들의 이기심인 것 같다.

너의 생각을 들려줘

당시 사람들에게 8월 15일은 빛을 되찾았다는 의미가 컸을 것같다. 물론 남과 북이 서로 다른 정부를 세우는 일은 상상하지못했던 데다 완전한 회복도 아니다. 그래도 35년이라는 기나긴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간의 독립운동이 결실을맺은 것이기에 암흑 속에서 빛이 보이는 정도로는 회복이 된 것같다.

또 다른 어둠의 시작이라 생각된다. 미국과 소련의 개입으로 한반도가 분단 위기에 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들이바랐던 독립 후의 세상은 이렇게 분단된 나라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는 더 큰 비극이었는지도 모른다. 38도선을기준으로 분단되면서 이산가족이 생겨나고 한국전쟁으로 동족간에 총을 겨둬야 하는 날이 왔으니 이보다 더 참혹한 일은 없는것 같다.

너의 생각을 돌려줘

당시 사람들에게 8월 15일은 빛을 되찾았다는 의미가 컸을 것같다. 물론 남과 북이 서로 다른 정부를 세우는 일은 상상하지못했던 데다 완전한 회복도 아니다. 그래도 35년이라는 기나긴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간의 독립운동이 결실을맺은 것이기에 암흑 속에서 빛이 보이는 정도로는 회복이 된 것같다.

또 다른 어둠의 시작이라 생각된다. 미국과 소련의 개입으로 한반도가 분단 위기에 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들이바랐던 독립 후의 세상은 이렇게 분단된 나라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는 더 큰 비극이었는지도 모른다. 38도선을기준으로 분단되면서 이산가족이 생겨나고 한국전쟁으로 동족간에 총을 겨둬야 하는 날이 왔으니 이보다 더 참혹한 일은 없는것 같다.

다른 빛을 기다리는 또 다른 어둠이 아니었을까? 일제로부터독립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그 당시 사람들에게도, 오늘날 우리에게도 희소식이었다. 하지만 그 뒤로 독립운동가들이 서로대립하고 강대국이 한반도를 통치하겠다고 하는 일이 일어나지금까지도 남과 북은 분단된 상태다. 광복은 긍정적 사건이기보다는 연속된 갈등의 시작처럼 보인다. 그래서 또 다른 어둠의 시작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해 뜨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다는 말이 있다. 지금 대한민국은 광복 무렵보다 더 발전한 것처럼 통일이라는 또 다른 빛을 회복하는 길로 가고 있는 건 아닐까?

너의 생각을 들려줘

우리가 한국전쟁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전쟁의 참혹함이다. 강자(지도자들)에 의해서 전쟁이 일어나면 많은 약자(민간인들이 이유 없는 폭행과 학살 등을 당하게 된다. 하지만 피해를 받는 민간인들은 정작 자신들이 결정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강자들의 결정으로 약자의 머리에 총이 겨누어지는 어이없는 현실과참혹함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약자들의 입장을 고려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을 지도자를 선택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있다.

한국전쟁은 두 정부의 정치적 자존심 싸움이었다. 고위층의 자존심이 민간인과 군인에게 어떤 피해를 주었는지 기억해야 한다. 전쟁을 일으킬 생각도, 누군가에게 해를 끼칠 생각도 전혀 없는 사람들이 마른하늘에 날벼락으로 피란길에 오르고 가족들과생이별을 해야 했으며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민간인이라는 사실과 모두에게 고통과 피해를 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전쟁과 민간인 학살의 비극을 보며 폭력을 선택한 과거 지도자들의 어리석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남한과 북한 모두의목적이었던 통일을 더 평화로운 방법으로 이뤄 낼 수는 없었을까? 예를 들어, 모둠활동 때 의견이 달라 충돌하는 상황을 떠올려 보자. 모둠원은 ‘좋은 성과를 낸다‘라는 목적은 같다. 모둠활동 중에 과거 지도자들이 전쟁과 폭력을 택해 피해만 남겼던 것을 기억한다면, 서로에 대한 공격은 성과보다는 피해를 발생시킨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대화와 협의를 통해 평화롭고 지혜로운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너의 생각을 들려줘

민주공화국다운 나라는 시민들에게 권력이 분배되어 독재가불가능한 구조가 확실하게 갖춰지고, 시민들이 권력자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나라다. 독재자가 등장해 집단체조 같은비민주적인 행사를 진행할 때, 비판의식이 없다면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니 시민은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시민들의의견이 반영될 수 있는 창구다. 시민이 단체를 구성하거나 의견을 낼 수 있는 장이 충분하고 그 안에서 개개인이 자유롭게 생각을 표현할 수 있다면, 또한 그것을 정부가 귀 기울여 듣고 수용하는 제도가 마련된다면 민주공화국다운 나라가 될 것 같다.

민주공화국다운 나라는 국민을 정치에서 소외시키지 않는 나라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으로 주권은 국민에게 있음에도불구하고 이승만처럼 국가 권력을 이용해 반대 세력을 폭력으로억압하고 선거를 조작한다면 민주공화국은 무너지고 만다. 따라서 주권자인 국민은 정치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실천해야 한다. 그리고 국민의 지지로 권력을 갖게 된 지도자는돈과 명예보다는 책임감을 갖고 일해야 한다.

민주공화국다운 나라는 모든 국민이 같은 무게의 ‘돌‘을 쥐고있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민주공화국 국민의 주권이 바로 ‘돌‘이다. 주권을 ‘돌‘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이것이 단지 권리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주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책임감, 의무감, 정치에대한 관심 등이 필요하다. 나는 아직 정치적인 결정을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기에 정치는 어른들이 알아서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 장을 읽으며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 하겠지‘라는 생각을 가진다면 이승만과 같은 독재자를 도와주는 꼴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투표는 주권을 행사하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방법이다. 모두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자신의한 표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았으면 한다.

너의 생각을 들려줘

가난하든 부유하든 내가 하는 일에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게
‘잘 사는‘ 일인 것 같다. 그런데 내 일에 만족하려면 일에 대한 정당한 대가와 더불어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할 환경이 보장되어야한다. 하지만 1960~1970년대 노동자 대다수는 잔혹한 노동 현실 때문에 힘겨워했다. 기적이라 불릴 정도로 엄청난 경제발전을 이룩했지만 노동자들의 삶은 참혹했다. 그런 점에서 진정한발전을 이뤘다고 볼 수는 없는 것 같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박정희가 아닌 그 시대의 노동자들이 이뤄 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잘살아 보세‘는 빛 좋은 개살구였다. 당시 경제 규모 변화를 그래프나 표로 본다면 한국이 잘살게 된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그 수치를 만들어 내기 위해 국민의 워라밸은 무너졌고 평균적인 삶의 질 또한 훨씬 떨어졌다. 박정희 정부는 경제성장이라는 명목하에 노동자의 육체와 정신을 일방적으로 희생시켰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경제성장의 영광과 혜택에서 배제되었다. 지금도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가 일하다 죽거나 다치는 일이 발생해도 기업의 책임자에 대한 처벌이 약하다. 이런 사회가 ‘발전‘했다고 할 수 있을까?

너의 생각을 들려줘

가난하든 부유하든 내가 하는 일에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게
‘잘 사는‘ 일인 것 같다. 그런데 내 일에 만족하려면 일에 대한 정당한 대가와 더불어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할 환경이 보장되어야한다. 하지만 1960~1970년대 노동자 대다수는 잔혹한 노동 현실 때문에 힘겨워했다. 기적이라 불릴 정도로 엄청난 경제발전을 이룩했지만 노동자들의 삶은 참혹했다. 그런 점에서 진정한발전을 이뤘다고 볼 수는 없는 것 같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박정희가 아닌 그 시대의 노동자들이 이뤄 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잘살아 보세‘는 빛 좋은 개살구였다. 당시 경제 규모 변화를 그래프나 표로 본다면 한국이 잘살게 된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그 수치를 만들어 내기 위해 국민의 워라밸은 무너졌고 평균적인 삶의 질 또한 훨씬 떨어졌다. 박정희 정부는 경제성장이라는 명목하에 노동자의 육체와 정신을 일방적으로 희생시켰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경제성장의 영광과 혜택에서 배제되었다. 지금도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가 일하다 죽거나 다치는 일이 발생해도 기업의 책임자에 대한 처벌이 약하다. 이런 사회가 ‘발전‘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박정희 정부의 경제 정책은 애초에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박정희 정부는 다음 선거에서 또 당선되기 위해 경제개발을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경제발전의 수치만 신경 쓰고 국민의 행복은 안중에도 없었다. 국가의 최고 지도자는 국민의 삶의 질을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경제발전의 목적도 국민이 풍족하지는 않더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만드는 것이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경제개발 정책 아래에서 노동자의 삶은 크게 바뀐 것이 없다. 하루하루 겨우 살아갈 정도의 낮은 임금을받으며 열악한 환경에서 장시간 일을 해야 했다. 국민의 행복을이뤄 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경제 규모는 커졌으나 발전했다고보기는 힘든 것 같다.

너의 생각을 들려줘

채식주의자와 성소수자가 배제되고 차별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나라는 채식주의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 굳이채식주의자 앞에서 고기 이야기를 꺼내거나 비건 음식을 조롱하는 일이 빈번하다. 또 동성애를 정신병이라고 생각하거나 심지어 더럽다고 혐오하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 채식주의자는 고기를 먹지 않아 시장경제에 도움이 안 되고 성소수자, 특히 동성애자는 아이를 낳지 않아 국가에 도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봤다. 이런 것을 보면 그들은 ‘효율‘과 ‘정상성‘이라는 이름아래 차별받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사회복무요원이 떠올랐다. 사회복무요원 제도는 군인으로복무하기에 어려움이 있는 사람을 관공서 등에서 대신 복무하게하는 제도다. 우리 학교에도 사회복무요원 선생님이 계셔서 궁금한 마음에 검색해 본 적이 있는데, 국제노동기구에서 사회복무요원을 강제 노동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 역시 국민을 국가에 동원하는 ‘신속‘과 ‘효율‘의 유산인 것 같다. 사회복무요원이 된 사람들은 신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힘든 부분이 있는것인데, 이제 선진국 대열에 든 우리나라가 그런 사람들까지 강제로 일을 시키는 것은 지금 시대와 맞지 않는 것 같다.

‘장애 이해 교육‘ 시간에 한국의 지체장애인이 버스를 타고 외출하는 영상을 보았다. 버스정류장까지 가는 길이 휠체어가 다니기 힘들 만큼 좁아 사고가 날 뻔했고, 정류장에 도착한 후에는휠체어가 탈 수 있는 버스가 없어 두 시간 동안 버스를 기다려야했다. 영상을 보며 내가 왜 그동안 길에서, 버스에서 휠체어를 탄사람을 많이 보지 못했는지 알 수 있었다.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하는 일은 장애인에게 너무 힘들고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일이었던 것이다. 또 장애인의 탑승으로 출발이 지연된다며 장애인에게 눈치를 주거나 따가운 시선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장애인이 차별받으며 무관심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모르지 않을 텐데 왜 사회는 바뀌지 않을까? 장애인 차별에대한 인식 개선뿐 아니라 사회적 약자에게 포용의 손길을 건넬실질적인 방법도 함께 고민해 보면 좋겠다.

너의 생각을 들려줘

학교에서 토론할 기회가 많아야 할 것 같다. 학교에서 민주주의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는 학기마다 있는 선거인데, 사실 선거가끝나면 전교 회장이나 학급 회장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학생들 대다수도 물론 관심이 없다. 이번 장을 읽으면서국민이 관심을 갖지 않으면 대통령은 자기 권력을 유지하는 데에만 힘쓴다는 사실을 배웠다. 학교에서부터 전교 회장, 학급 회장이 일을 잘하고 있는지 공약은 지키는지 점검하고 토론할 기회가 있다면 어떨까? 임원들은 더 잘하려고 노력할 것이고 일반학생들은 그들의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 일상 속 민주주의가 자리 잡아야 하는 곳은 학교다. 학교는 그저 지식을 배우는 곳이 아니라 작은 사회다. 청소년들은 학교에서 받은 교육을 토대로 사회에 진출해 살아간다. 따라서 학교에 민주주의가 잘 자리 잡는다면 그것이 점차 사회로 확장되어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학생 개개인의 권리를 중요시하고 학생이 교칙을 직접 만들 수 있게 하는 등 학생이 학교의 주인으로 행동할 기회가 많아져야 한다. 또한 학생들이 직접 교육감이나 교육부 장관을 뽑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교육 정책에 학생의 의사가 잘 반영될 수 있고, 교육감과 교육부 장관도 학생과 교육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고 정책을결정할 것 같다.
240 역사를 질문하는 역사 2

진정한 민주화를 위해서는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마련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모두가 평등한권리를 갖는다는 데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말로는누구나 평등하다고 하지만 실제 우리 사회는 불평등한 부분이여전히 많고, 또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다. 예를 들어,
우리 학교는 현관에서부터 실내화를 신어야 한다. 미세먼지 방지와 학생들의 안전을 위한 것이라고 학교 다니는 내내 듣게 된다. 그런데 선생님들은 신발을 신고 들어가 교무실에서 실내화로 갈아 신는다. 누구도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만약 학생이 이걸 지적한다면 버릇없는 학생이 될 것이다. 교사와 학생사이의 불평등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문제를제기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닌 분위기를 만든다면 변화가 시작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불평등을 연하게 여기지 않고 용기내 나서는 사람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 또한 영향을 받아 더욱 민주적인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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