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것이 곧 저항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능력주의, 젠더 차별, 가부장제가 남긴비인간적인 경쟁과 차별, 그리고 배제…
숨막히는 현실을 피해 이불 속으로 피신한모두를 위한 최소한의 저항법
고립청년, 탕핑족(族, 바닥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청년층), 히키코모리・・・ 무엇이전 세계 청년들을 이불 속에 웅크리도록 몰아세우는가. 일본의 떠오르는 신예 작가 다카시마 린은 신자유주의, 능력주의, 가부장제, 의례와 통념 등 보이지 않는권력이 우리 일상의 생활습관과 가치관에 어떻게 교묘히 숨어 있는지 세밀히 밝히면서 ‘당신은 잘못이 없다‘고, 그러니 용기를 내자고 독려한다. 누구라도 사회와 마찰을 느끼며 존재하고 있다면, ‘이불 속에서 자신만의 생각을 정리하는 일이 저항의 단초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생존 자체가 저항이라는 것이다.
‘진흙탕 속에 있는 당신과 손을 잡아보고 싶습니다.
이 책 제목은 이불 속에서 꼼짝하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지었습니다. 괴로움에 휩싸여 눅눅한 이불 속에서 몸부림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을 돌아보며 힘 •없이 주먹을 줍니다. 지금 죽어버릴까 문득 생각하며 무의미하게 SNS를 계속 봅니다. 저는 바로 그런 사람과 연대하고 싶습니다. 함께 이불 속에서, 괴상한 존재로서 사회에 들어앉아, 괴로운 신음에서부터 모든 것을 시작합시다. 저는 분통터지는 진흙탕 속에 있는 당신과 손을 잡아보고 싶습니다. --한국의 독자들에게
2023년 기노쿠니야 인문 대상 선정에 대해이 책은 ‘한 번이라도 읽으면, 멈출 수가 없다‘는 주목 속에, 일본의 대표 서점 기노쿠니야 선정 2023년 ‘최고의 인문서 대상을 받았다. 이는 일본 사회에서 하나의 사건이었다. 1995년생의 젊은 작가가 쟁쟁한 철학자와 사상가, 비평가등 역대 수상자의 뒤를 이었기 때문이다.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의 《철학의 기원》, 진보 역사학자 가토 요코의 《왜 전쟁까지 등, 사회의 지평을 넓혀온 역대 수상작에 이어 신예 작기가 전하는 메시지는 강력했다. ‘현실에 괴로워하는 타자가단 한 명이라도 있는 한, 현실의 구성원으로서 그 고통과 싸을 책임이 있다.‘ 이 말에 서늘한 전율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있을까. 기노쿠니야 서점에서는 "올해 가장 기다렸던 저자의 책. 이토록 다정하면서도 긴박한 선동을 달리 알지 못한다" "사는것이 괴롭고 힘든 일이 많은 세상에서 좌절 직전까지 가더라도 자신의 언어를 갈고닦아 날카롭게 반격의 기회를 노리는, 그야말로 뼈를 깎아‘ 나온 듯한 문장에 전율했다"라고 선정의 변을 밝혔다.
2023년 기노쿠니야 인문 대상 선정의 변올해 가장 기다렸던 저자의 책. 아무리 미약하더라도 삶의 온갖 장면에 끼어드는 권력에 조금이라도 대항하는 모든 행위를 항거의 뜻을 품고 그저 생존하는 것 자체를 저항이라고 부르고 혁명적 행동이라고 단언한다. 이는 타인을 위해 조금이라도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여나가기 위함이다. 이토록 다정하면서도 긴박한 선동을 나는 달리 알지 못한다. 이 책은 이부자리 밖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극한의 상태를 아는 바로그 사람에게 살아 있어달라고 손을 내밀고, 함께 봉기하자고 외친다. 아나키스트나 페미니스트가 아니더라도, 살아가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여하튼 읽어보기 바란다. 올해 최고의 ‘부적‘이다. 건강하고 건전해서 도리어 장벽이 높은 평균적인 ‘평범함‘에서 사실대다수는 벗어나 있지 않은가. 그 사실에 괴로워하는 사람도, 내면의 힘을 믿는 사람도 읽어주기 바란다.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다정한 책은 처음이었다. 사회와 자신 사이의 충돌에 대해 철저하게 고찰하여 쓴 에세이집 저자는 ‘삶의 괴로움‘이라는 말로 정리해버리지 않고, 누구나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하는 자세를 견지한다. 사는 것이 괴롭고 힘든 일이 많은 세상에서 좌절 직전까지 가더라도 자신의 언어를 갈고닦아 날카롭게 반격의 기회를 노리는, 그야말로 ‘뼈를 깎아‘ 나온 듯한 문장에 전율했다.
혁명에서 함께 싸운다는 것은 사상의 공유도, 감정적 결속의 공유도, ‘현장‘의 공유도 아닌 목적의 공유다. 각자의 잠소에서 저마다 투쟁을 계속해나가는 것이야말로 혁명의 올바른 수순이다. 누군가에게는 국회 앞에서 자신의 요구를외치는 것이 투쟁일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직장 동료의 차별 발언을 웃어넘기지 않고 "그거 차별 발언이에요" 라고 말하는 용기가 투쟁일 수도 있으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지금 살아남는 것 자체가 투쟁일 터다.
혁명은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이 뒤바뀌는 극적인 현상이 아니다.
변화는 착실한 행동에 의해 조금씩 찾아온다. 지금 시점에서 우리가 힘을 기울여야 할 일 역시, 혁명적 행동이 초래할 결과를 걱정만 하는 게 아니라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는 것이다. 한순간만 거창하게 들고일어났다가 산산이 흩어지는 저항은 투쟁이 아니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지만, 내가 중시하는 것은 보다 지속 가능한 혁명
마지막으로 이 책에 관해 설명해두겠다. 이 책은 여덟 개의 부로 이루어졌으며, 전부 독립적인 에세이로 구성됐다. 모두 생존을 움켜쥐고 권력에 저항하기 위해 쓴 문장이다. 짧은 글도 있고 긴 글도 있으며, 가벼운 글도 있고 무거운 글도있다. 어디서부터 읽어도 상관없다. 당신의 기분과 컨디션에따라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읽어준다면 그게 가장 좋다. 이 책이 당신의 생존과 저항을 돕고 이 세상의 편파적인 ‘정상을 뒤섞어 부수는 데 일조할 수 있다면, 그보다 큰행복은 없을 것이다. 살아남고, 저항하고, 몇 번이든 만나자. 나는 독자 여러분을 믿고 싶다.
후미코는 나이를 물으면 "몇 살이든 간에 내가 지금 나자신의 생활을 해나가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라고 대답했고, 직업을 물으면 "현재 존재하는 것을 때려 부수는 게 저의 직업입니다"라고 응수했다. 나의 동년배가 이런 말을 관청에서 내뱉을 수 있다니! 동시에 "우주의 창조자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스스로의 행동을강하게 긍정하는 후미코의 말에서는, 뜨끔할 정도로 긴장감을 느꼈다고 표현하는 것조차 가볍게 여겨질 만큼 격렬한 억압의 경험이 내비쳤다. 대체 이 사람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했던 것일까? 나는 후미코의 옥중 수기 《나는 나>를 비롯해 조서, 시집, 서간집, 평전 등 입수할 수 있는 후미코에 관한 책을 모조리모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러자 후미코의 궤적이 점점 보이기 시작했다. 출생신고를 하지 않은 무적자無籍者로 태어나
리베카 솔닛은 저서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언가에 진짜 이름을 붙이는 것은, 어떤 만행과 부패가 있는지―혹은 무엇이 중요하고 가능한지―를 드러내는 일이다. 스토리와 이름을 바꾸고, 새로운 이름과 언어와 문구를 고안해 보급하는 일은 세상을 바꾸는 작업의 열쇠가 된다. 인생의 의미 탐구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지만, 동시에 그것을 어떻게 언어로 표현할지, 또 자신 외에 무엇이 곁에 존재하는지에도 달려 있다. 이 책에 수록한 어느 에세이에서 나는 이렇게 썼다. "그것을 진짜 이름으로 부름으로써우리는 비로소 우선해야 할 것과 가치에 대해 참된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만행에 저항하는 혁명은 만행을 숨기는 언어에 저항하는 혁명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착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나.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일단 대전제로서 약한 자에게 휘두르는 폭력을 절대로 용인하지 않는다. 저항하지 못하는 상대에게 부조리하게 휘두르는 폭력, 양자의 입장이 대등하지 않은 상태로 전개되는 폭력은 물리적이든 그렇지 않든간에 허용해서는 안 된다. 한편 사회운동에 관여하는 축에 끼는 사람으로서 폭력을 용인하는지, 용인하지 않는지 질문을 받는다면 "폭력과비폭력 양자택일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되받아칠 것이다. 그런 질문을 할 여유 따위는 없을 만큼 절박한 사태가 세상에는 존재하며, 애초에 국가와의 대립 속에서는 무엇이 폭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스스로를 사랑하자. 당신의 말이 당신의 마음에, 같은 고민을 껴안고 있는 그 사람에게 닿기를당신만의 주문을 발견할 수 있는 장소가 되기를!!
〈거울아 거울아〉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재정의하는 에세이를 무보수 또는 아주 적은 금액의 기프트카드로 모집하고(무보수나 저보수로 자신을 드러내는 문장을 쓰게 만드는 무방비한 체제도 큰 문제다), 그 재정의에 의해 스스로를 사랑하기‘와 ‘같은 고민을 껴안고 있는 그 사람과 고민 공유하기‘를 주요목적으로 삼고 있는 듯하다. 즉 ‘공감‘을 불러일으켜 스스로를 긍정함으로써 ‘콤플렉스‘에 대한 자신의 의식을 변혁하자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거울아 거울아>에서 ‘콤플렉스를 ‘콤플렉스‘로 만든다고 상정하는 요소는 타인의 평가이며, 그것을 버리고 자신의 평가를 기준으로 삼으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이 역시 엄청나게 폐쇄적이다. 이제까지 거듭 주장했듯이, ‘콤플렉스‘를 ‘콤플렉스‘로 만드는 것은 ‘타인‘의 눈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휘말려 있는 사회 자체의 상황일 터다. 스스로를 사랑하기‘나 ‘같은 고민을 껴안고 있는 그 사람‘과의 공감이 자신 향해 드
근근이 이어가는 생존을 긍정한다
〈델마와 루이스>를 본 뒤 행복이란 ‘참된 자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생을 움켜쥐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뭐가 어찌됐든 간에, 세상 사람들이 과시하는 혼인이나 가정의 형성 같은 건행복의 동의어가 아니다. 이런 말은 할 필요도 없지만!). 누구나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또 델마와 루이스가 닥쳐오는죽음에 의해 역설적으로 생을 움켜쥐었듯이, 행복이 반드시생의 곁에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참된 자신‘이라고 부를수 있는 생만이 ‘생‘이라면, 그저 살아가는 것은 ‘생‘이 아니라고조차 말할 수 있게 된다. 마침 20세기 초반의 아나키스트가네코 후미코가 이에 대해 쓴 글이 남아 있다.
요컨대 ‘생을 부정한다‘라는 것은 철학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생만이 모든 현상의 근본이며, 생의 긍정을 통해서만모든 것이 의의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처럼 생을 부정했을때 모든 것은 무의미해진다. 부정에서 부정은 태어나지 않는다. 보다 강한 긍정에서만 보다 강한 부정이 태어난다. 즉 보다 강하게 생을 긍정해야만 거기서 보다 강한 생의 부정과 반역이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말한다. 나는 생을 긍정한다. 보다 강하게 긍정한다. 나는 생을 긍정하기 때문에 생을 위협하는 모든 힘에 대해
분연히 반역한다. 그러므로 나의 행동은 옳다. (..) 나는 대답한다. 살아가는 것은 그저 움직이기만 하는 게 아니다. 나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이다. (・・) 그리고 그저 살기만 하는 것이 아닌 행위가 있어야 비로소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나의 의지로 움직였을 때, 그것이 설령 육체를 파멸로 이끈다 해도 그것은 생의 부정이 아니다. 긍정이다. 후미코는 사형을 언도받기 직전, ‘생의 부정‘에서 ‘생의 긍정‘으로 의견을 바꾼다. 그러나 그 내용은 생존의 긍정이 아니다. 앞에서 인용한 대로 생을 ‘그저 움직이기만 하는 것‘이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델마와 루이스가 ‘참된 자신‘에 이르렀듯이!으로 규정하고, 그 결과 죽음이 찾아와도 그것은 생의 긍정이라고 말한다.
내 의견은 후미코와 다르다. 나는 이 책에서 몇 번이나 거듭 이야기했듯이 생존은 저항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생존이란 결코 후미코가 생각하는 죽음 속으로 뛰어들면서까지 발휘되는 ‘생‘이 아니라, 소박하게 그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이다. 델마와 루이스, 그리고 가네코 후미코를 소개한다음에 나오는 생존이라는 말은 마치 의미 없는 생명을 질금지금 낭비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길 수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혼란기를 살아간 사람들에게 통속 도덕은 분발의 기폭제이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노력하면 보상받는다‘라는 발상은, 뒤집어 말하면 ‘보상받지 않는 사람은 노력하지 않았다‘라는 뜻도 품게 됩니다. 가정의 불화는 효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돈이 없는것은 절약을 안 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원래부터 여러 가지 조건에 얽매여 자기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일을 전부 자신의 노력 부족으로 설명하게 되었습니다. 요컨대 통속 도덕의수용은 자기 책임론의 수용이었던 것이지요. ● 제가 통속 도덕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요? 뭐, 거기서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는 듯하네요. 당신은 실제로 ‘노력‘의 성과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노력하고 있다고 여길 수 없는 거니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사실상 거기서 빠져나오기란 어려운 일이에요. 애초에 지금 이 시대가 통속 도덕에서 이어진 자기책임론으로 규정되어 있고, 제가 지금을 살아가고 있다는사실은 바꿀 수 없으니까요. 또 실제로 ‘노력‘이 무언가를해결하는 건 어느 정도 현실적인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주위를 둘러보면 노력으로 무언가를 성취한 사람이 차고 넘칩니다. 인터넷으로 타인의 ‘실적‘을 간단히 볼 수 있게 된지금은, 어쩌면 야스마루 요시오가 주제로 삼은 시대보다훨씬 더 ‘성공 예시‘가 가까워졌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기생충>은 가족 이야기다.
반지하에 사는 찢어지게 가난한 김씨 일가는 실직 중인 아버지 기택, 투포환 선수 출신인 어머니 충숙, 재수생인 오빠 기우, 미대를 지망했지만 대입에 실패한 여동생 기정으로 이루어진 4인 가족이다. 영화는 어느 날 기우에게 굴러들어 온 짭짤한 아르바이트 이야기로 시작된다. 기우는 유학을 떠나는 친구 민혁으로부터 학력을 사칭해 부잣집인 박씨 집안의 과외 선생님 자리를 이어받아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기우는 감쪽같이 명문대학생으로 가장해 박씨 가족의 신뢰를 얻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김씨 가족은 차례차례 신분을 위장해 기정은 미술 선생님, 충숙은 가정부, 기택은 운전기사로 박씨 집안에 침입하여 ‘기생‘을 시작한다.
내가 기우나 기정이라면, 아마도 몇 개월 동안 박씨 집에서 일하며 돈을 모은 뒤 조금 무리해서라도 혼자 집을 나올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둘 다 본가에 머무른다. 또 아무도 기택을 탓하지 않는 것도 그것대로 무서웠다. 일을 찾으라거나, 무책임하다거나, 생색만 낸다거나, 그런 불만이 나오지않는다. 다들 ‘평범하게 사이가 좋은 것이다. 그런 일이 가능한가? 마음에 걸려서 영화관에서 나온 후 리뷰를 검색해보니 나와 같은 감상을 두 건 발견할 수 있었다! 한 건은 셰익스피어 연구자 기타무라 사에, 다른 한 건은 사회학자 한동현의 글이었는데 양쪽 다 너무나 강고한 가족의 유대를 지적
널기모노를 ‘일본인의 미의식과 정신성, 가치관의 상징‘으로 보는 것에 대한 그로테스크함은, 새삼 비판하자면 끝이없다. 거듭 말하지만 지금 기모노로 상징되는 스타일은 일본의 의복 역사를 대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전의 수도였던 교토시가 스스로를 기모노 문화의 발신자이자 옹호자로 자부하는 상황 자체가 자문화 중심주의라고 해도 좋다. 또 현재 일본 국적을 가진 사람 가운데는 당연히 기모노와연관된 문화권 외부에 뿌리를 가진 이들이 셀 수 없이 많다. ‘기모노라는 애매한 단어로 표시된 카테고리 내부의 변화와요동, 다양성을 무시하면서 ‘문화‘의 수호자인 양 행동하는
누군가와 사별하는 장면에서, 임의의 형태로 상상을 하며<레몬>을 들었던 것이다. <레몬>은 온갖 이야기를 대입할 수있는 감정 장치였다. 아마도 전부 전략적인 설계일 것이다. <레몬>뿐만 아니라 ‘시장‘ 전체가 추상적인 방향으로 흐르고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지금은 복잡한 합의 형성을 광범위하게 이루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어떤 것에대해 무엇을 느끼는지를 치밀하게 언어화하는 작업, 자신의우주를 개별적이고도 구체적인 것으로 재인식하는 작업을당연한 일로 여기며 게으름 부리지 말고 해나갈 필요가 있다. 이 종잡을 수 없고 나조차도 설교 같다고 느끼는 문장 또한 ‘개인‘을 지우지 않기 위한 실전의 일부다. 그때그때 가장불안하게 여기는 것에 대해 글로 쓰면 가슴속 응어리가 조금 풀린다. 오늘 밤은 어젯밤보다 조금 낫다.
시위를 한다고 뭐가 달라지냐는 사람도 자주 본다. 확실히 좌파의 역사는 패배의 역사고, 그건 지금도 변함없다. 앞으로 형세가 바뀔 징조초자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성과가없는 것에 대해 뻔뻔하게 굴 생각은 없다. 그럼에도 의사표시가 풍경으로서 일어설 때, 공간의 의미는 확실히 민중에게 점령된다. 시위의 의의는 거기에 있다. 폭력적인 정적으로 지배된 풍경을 휘저어 거기에 숨은 것을 폭로한다.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 모두가 함께 휩쓸려 주는 건 아니라는 사실은 충분히 알면서도, 그 퍼포먼스가 누군가를 공동전선으로 끌고 들어와줄 가능성을 믿는다.
앞에서 시위의 의의라고 말했지만, 그 효능은 결코 시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국회 앞으로 가서 외치는 것만이 사회운동은 아니다. 일상 속의 부조리에 혀를 차며 분위기를 깨부수는 것, 정치적인 입장과 무관한 친구들이 모여 있는SNS에 정치적 메시지를 흘리는 것, ‘불청객‘으로서 그냥 거기에 여봐란듯이 눌러앉는 것, 그리고 저항하는 주체로서 이 지옥에서 살아남는 것. 풍경을 부수는 방법은 무한하며, 사소하더라도 그 가치는 경멸당해서는 안 된다.
넣은 물이 풀장을 터트릴지 모르니, 어떤 컵도깨트릴 필요가 없다.
풍경을 쉽게 받아들이지 마라. 풍경에 잡아먹히지 마라. 풍경이 바뀌는 상상을 멈추지 마라. 풍경 속에 있는 자신을, 풍경을 풍경으로 만드는 자신의 내면을 의식하라. 아무것도못 한다고 느끼는 시간에도 우리는 풍경의 일부다. 그러므로 불의를 미워하고 혁명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은, 이미 저항이다.
꼭 의례 참석 거부가 아니어도 좋다. 거대한 의례 공간으로서의 사회에 저항하려면, 예컨대 갑자기 의미 없는 말을 외치거나 집에 가는 길에 불현듯 신발을 벗는 등 사회 속에서 상정된 행위의 바깥으로 일탈하는 행위가 중요하다고 본다. 결국 대화를 할 때든 이동할 때든, 생활 속에는 ‘일반적으로 이렇게 한다‘라는 명문화되지 않은 규칙이 숨어 있고 그것들이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온갖 것들이 밈처럼 변한 사회란 결국 ‘일반‘밖에 허용하지 않는 사회, ‘이상‘을 배척하는 사회가 아닐까. 살의, 분노, 짜증은 자신의 목을 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연체조에 써야 한다.
아무도 하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 싫은 것이 무엇인지 큰소리로 지적하고, 의례에서 도망가고, 아무런 예고 없이 내달린다. 질서 역시 오래된 아파트의 벽지처럼 매일 가장자리부터 손톱으로 조금씩 뜯어내면, 언젠가 전부 훌렁 벗겨질날이 올 것이다.
누구든지 제안에 대해 발언할 사항이 있다면 그 의견은 주의깊게 검토해야 한다.
· 누구든지 강한 불안을 느끼거나 이의가 있다면 그 불안이나 이의를 감안해 가능한 한 최종 제안에 포함시켜야 한다. ㆍ 누구든지 제안이 집단에서 공유하는 기본 원칙을 침해한다고생각하면, 그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블록block)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 누구든지 동의하지 않는 결정에 따르기를 강요받아서는 안된다.
"합의 형성 과정의 멋진 점은 그것이 다양하고 가변적이라는 것이다." 그레이버는 이렇게 말했다. 앞에서 인용한 것은 어디까지나 원칙이며, 실제로 합의 형성이 더듬더듬 나아가는 길은 몇 갈래나 존재한다(어디서 회의를 개최할지,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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